팔도구 본당 八道溝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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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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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최문식 신부가 설립할 당시의 팔도구 성당.
중국 길림성 연길현 팔도구(현 길림성 용정시 팔도향) 소재 본당. 1910년에 설립되었다가 중국의 공산화로 1947년 폐쇄되었다. 폐쇄 당시 연길교구 소속이었으나, 1990년대 중국 길림 교구 소속 본당으로 재설정되었다. 주보는 성모 성심(1946년 이전) [교 세] 1921년 4,000 명, 1936년 2,284명. 1903년경 용정(龍井)에 살던 신자 10여 호가 조양하 (朝陽河, 후에 '팔도구' 로 개칭)에 옮겨와 정착하면서 팔도 구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당시 김계일(金桂 一) 등이 조양하 수남촌(水南村)에 공소집을 마련하자, 함경도 원산 본당의 브레(L.E.A. Bret, 白類斯) 신부가 이 곳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 뒤 1910년에 간 도를 사목 방문한 조선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조양하를 방문하여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시켰다. 이로써 조양하 본당은 1909년에 설립된 삼원봉 본당(1931년에 '대립자 본당' 으로 개칭), 용정 본당(1932년 에 '용정 하시 본당' 으로 개칭)에 이어 간도에 설립된 세 번째 본당이 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는 1917년 기존의 공소 터전에 새로운 성당을 건립하였고, 교육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 1918년 1월에 4년제 조양학 교(朝陽學校, 후에 '해성학교' 로 개칭)를 설립하였다. 그러 나 1919년 7월에 최 신부와 신자 10여 명이 마적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황해도 사리원 본당의 백남 희(白南熙, 베드로) 신부가 이듬해 2월 최 신부가 풀려 날 때까지 팔도구 본당을 돌보기도 하였다. 1920년 8월 5일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베네딕도 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에서 함경남북도의 선교를 맡게 되었다. 연길 지역은 당시 북만주 교구에 속해 있었는데, 1921년 3월 19일 원산 대목구에 편입되면서 본당에도 베네딕도회의 퀴겔겐(K. Kügelgen, 具傑根)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퀴겔겐 신부는 교육 사업에 뜻을 두어 여러 곳에 조양학교의 분교를 설립하였다. 1923년 4월에는 3대 주임으로 슈미트(C. Schmid, 金時練) 신부 가 부임하였다가 11월에 원산 본당으로 떠났고, 에크하 르트(A. Eckhardt, 玉樂安)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 였다. 에크하르트 신부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중국인 학교(해성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교원 양성을 위해 조양학교에 사범과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4년에는 이 지역 최초의 성체 거동 행렬이 있었다. 1925년에 5대 주임으로 부임한 차일라이스(V. Zeileis, 徐相烈) 신부는 1926년에 대령동 본당(1935년에 '다조구 본당' 으로 개칭)을 분리하였고, 1933년에는 트라 볼트(A. Trabold, 張) 신부가 6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936년 11월에는 조양학교의 교사를 신축하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1937년에는 올리베타노 성 베 네딕도 수녀회가 본당에 진출하여 전교 · 교육 · 의료(진 료소 설치)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팔도구 본당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끝나고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를 점령하면서 고초를 겪게 되었다. 당시 본당은 트라볼트 신부에 이어 에그너 (R. Egner, 王) 신부가 맡고 있었는데, 1945년 9월 성당 에 난입한 소련군에 의해 철러(E. Zellner) 수사가 피살되 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소련군으로부터 만주의 통 치권을 넘겨받은 중국 공산 정권은 1946년 5월에 연길 수도원을 접수하고,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주교 등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팔도구 본당은 피해를 면하였지만, 1947년 7월 공산당들이 들이닥쳐 에그너 신부를 비롯하여 수도자들을 체포하였고, 사제관을 유치장으로 개조한 후 이들을 수용하였다. 이후 연 길 지역에서 활동하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팔도구 본당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가 1952년 8월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중국 정부는 1970년대 후반 개방 정책과 현대화 운동을 추진하면서 종교 자유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에 따라 1979년에는 '중국 천주교 애국회' 가 활성화되 었으며, 각지의 성당들도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 결과 팔 도구 지역에도 공소가 설립되었고, 1992년 7월 19일에 는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지원으로 성당을 완공한 후 총 아빠스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001년 5월 4일 팔도구 공소는 길림 교구 소속의 본당으로 승격되었 으며, 2003년 8월 5일에는 '팔도구 교우촌 건설 100주 년' 기념 축제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2003년 현재 신자 800여 명, 공소 7곳을 관할하고 있다. (→ 연길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향잡지》/ 《가톨릭조선》(1936. 10)/ 《가톨릭연구》(1936. 9)/ <가톨릭신문> 1992년 8월 16일자/ 선 지훈, <아 팔도구, 그 장구한 신앙의 이름>, 《들숨날숨》 54호(2003. 9),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평화신문> 2003년 8월 3일자/ 《은 혜의 60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1995 〔梁仁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