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舊約聖書
〔라〕Vetus Testamentum · 〔영〕Old Testament
글자 크기
2권

1 / 7
쿰란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두루마리.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후서 3장에서 그리스도에 의한 '새 계약' (6절)에 대칭되는 '옛 계약' 과 이를 읽음(14절) 에 대하여 말한다. 이로써 그는 시나이 산에서 이루어진 야훼 하느님 뜻의 계시를 지칭하는 개념을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전례 때 봉독하는 그들의 성서에 전의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옛' 은 새 계약에 대립되는 것으 로서 부정적 의미( '낡은' )를 지니고 있다. 아마도 이 이유 때문에 위의 명칭이 곧바로 유대인들의 성서를 지칭하는 전문 용어로 쓰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2세기 사르디스 의 멜리토를 거쳐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이후 에 와서야 '옛 계약' 과 '새 계약' 이 전문 용어로 정착되 었으니, 곧 한자식으로 옮겨진 구약과 신약이 그것이다. 계약이라는 신학적 용어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경전 들을 지칭하는 형식적 명칭이 된 데에는 -물론 애초부 터 부적절한 용도라는 이의가 있기는 했지만(오리제네스) -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과 이들 의 경전인 구약성서의 바탕을 이루는 시나이 계약에 대 한 신학적 사고가 없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고린토 후서 3장의 '계약' 에 상응하는 그리스어는 '디 아세케' (διαθηκη)이다. 테르툴리아노는 이것을 '테스타 멘툼' (testamentum)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라틴어는 '유 언' , 죽은 이의 '의사 표시' , 자손들에 대한 그의 '지시 / 분부' 등을 뜻한다. 칠십인역이 계약, 곧 히브리어 '베 리트' (בְּרִית)를 디아세케로 옮김은 죽는 이의 유언(테스 타멘툼)이나 두 당사자 사이의 합의(계약)보다는 한 쪽, 곧 야훼의 뜻의 계시 또는 그의 규정 · 명령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현대 서양 말들은 테스타멘툼을 계속 쓰고 있 고, 한자를 차용하는 우리 나라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약 속(約束)의 준말인 '약' (約)을 사용하고 있다. '테스타 멘툼' 은 히브리 또는 그리스어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또한 계약, 특히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계약이라는 성 서적 개념에 약속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구 약 · 신약의 '약' 을 약속으로 이해함도 옳지 않다. 구약과 신약은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유대교에는 오직 구약에 해당하는 '(성)서' (영어식으 로는 Bible)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위의 명칭들은 중 대한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곧, 시나이의 계약과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경전을 '옛' 것으로, 그리고 예 수 그리스도의 계약과 이를 중심으로 한 경전을 '새' 것 으로 이해하고, 동시에 구약과 신약을 한 성서의 두 부분 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약 · 신약과 함께 또는 독립적으로 쓰이는 '성서' 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산 파피루스를 주로 수입했던 고대 페니키아의 비블로스라는 항구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비블로스/비블리아' 와 '쓰 다' 를 뜻하는 동사인 '그라포'에서 파생한 '그라페/그 람마타' 이다. 비블리아는 본디 서면(書面) 또는 두루마 리 책을 뜻하며,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경 전을 지칭할 때 사용하였던 비블로스(2마카 8, 23 ; 다니 9, 2)의 축소형 -그러나 축소의 의미가 희석된 -비블리 온의 복수형이다(1마카 12, 9). 이의 음역인 비블리아가 고대 라틴어에서는 복수로 쓰이다가 후대에 와서 단수의 뜻을 지니게 되고, 이것이 현대 서양 말들의 어원이 된 다. '문서 · 저서' 를 뜻하는 그라페 또는 그람마타도 비 블로스/비블리아처럼 이미 유대교에서 '거룩하다' 라는 형용사와 함께 -신약성서에서는 로마 1, 2와 2디모 3, 15에서만, 그 밖에는 항상 형용사 없이 -경전을 가리키 는 명칭으로 쓰인다. 이 두 쌍의 명칭들은 구약의 경전만 을 지칭하다가 기원후 2세기 중엽부터는 신약의 경전들 도 함께 가리키게 된다. 이 이름들이 유대인들의 경전에 속하는 여러 문서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복수로 쓰이다가 단수로 자리 잡은 사실은 수많은 저자들과 여러 책들로 구성된 구약 이 결국 같은 주제를 다루는 한 책임을 시사한다. 더 나 아가서 구약에 신약이 합쳐진 후에도 계속 단수로 쓰임 은 신 · 구약이 또한 하나임을 드러낸다. 한자권에서 쓰이는 성서/성경의 '서(書)' 와 '경(經)'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라페/그람마타에 더 가깝지만, 비 블로스/비블리아도 별다른 구분 없이 성서/성경으로 옮 기고 있다. 아울러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구약과 신약 만으로 성서의 두 부분을 지칭함에 반해서 한자권에서는 통상 구약 · 신약에 성서 또는 성경을 붙여 부른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구약 · 신약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경전을 성서(聖書) 라 부르는데, 이 책(들)이 지니고 있는 성성(聖性)은 어 디에서 기인하는가? 거룩함은 하느님의 고유 특성이다 (이사 6장). 성서의 거룩함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유래 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행적을 담고 있다. 이 말 씀과 행적은 한 특정 대상, 곧 그가 뽑은 백성을 향한다. 결국 성서는 전체적으로 하느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 계에 기인한다. 이 관계는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 아래 시 작되고 지속된다. 이 관계를 바탕으로 하느님은 그의 백 성에게 말하고 역사(役事)한다. 하느님은 말씀과 역사 (役事)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곧 창 조적 말씀이다(창세 1장 ; 요한 1장). 그래서 구약성서를 전체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쪽에서 강제할 수 없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하느 님은 그의 창조적 말씀이 기록되는 과정에 무관할 수 없 다. 성문화(成文化)의 과정에서 성서 작가들을, 예컨대 고대 이스라엘의 판관들과 그의 말씀의 사도인 예언자들 에게 당신 성령의 영감(靈感)으로 도움을 준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 은혜의 신비는 한 인간을 다른 인간으로 변 화시키지 않고 그를 진정한 그 자신으로 만드는 데 있다. 영감의 은혜 역시 성서 작가들을 각자 고유의 개별성과 역사성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만든다. 그래 서 성서는 결국 하느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말 이 된다. 인간적 언어로 표현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러 한 성령의 영감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경전화 작 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곧, 영감에 의하여 쓰여진 책들만이 경전에 속하며, 경전은 영감에 그 기초를 둔다 는 것이다. I . 구약의 경전 책으로서의 구약은 외형상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 다. 첫째,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전집(全集)이다. 이스라엘과 이를 계승하는 유대주의에서 천여 년 동안에 이루어진 문서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 그 안에는 한 종류 의 문학만이 들어 있지 않고, 한 민족이 창작해 낼 수 있 는 온갖 유형의 문학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 성서가 유대인들의 '도서관' 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하겠다. 이는 구약의 이해에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구약의 다양성을 어떤 공통 분모 하나로 묶는다거나, 어 떤 해석학적 대표 개념(예를 들면 율법, 역사 또는 예언)으로 총괄할 수는 없다. 구약의 다양한 문학 유형은 그 유형에 걸맞게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민담을 과학적으로, 이 야기를 (현대적 의미의) 역사로 파악한다면 ,예전의 경 험이 말하는 바와 같이, 왜곡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둘째,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집(選集)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창작 또는 기록한 문서들 중에서 선별 하여 모은 전집이다. 그 구체적인 한 예로, 열왕기와 역 대기 저자들이 언급하는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조 실록을 들 수 있다(1열왕 14, 19. 29 ; 15, 7. 31 ; 2역대 27, 7 ; 28, 26 등 ; 참조 : 1역대 29, 29-30 ; 2역대 9, 29). 열왕기 와 역대기를 저작할 때 성서 작가들은 현존하는 왕조 실 록이나 다른 기록들을 경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단 순히 기존의 문서를 답습하려 하지 않고 이와는 다른 관 점과 기준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곧,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 상은 비단 이 부분만이 아니라, 구약 전체에도 해당된다. 천여 년 동안에 걸쳐 형성되고, 오랜 구전의 시대를 거쳐 글로 정착된 구약은 단순한 '도서관' 이 아니다. 과거의 것들을 말과 글로 전하고, 이를 저작 · 수집 · 편찬하는 과정에서 성서 작가들 또는 전승가들은 단순히 과거의 민족적 · 종교적 유산들을 전수 · 전달하지 않았다. 과거 의 것들을 각 시대의 '오늘' 이라는 기준에서 미래를 향 한 '오늘' 을 위하여 성서의 형성과 관계되는 그 모든 작 업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선별 작업이 구약성서가 종결되는 시대에 활발히 전개된다. 이는 기존의 문서들 중에서 경전을 선 별 또는 확정하여 다른 책들과 분리시키는 일이다. '경 전' 으로 옮겨진 그리스어는 셈족 언어로부터의 차용어일 가능성이 있는 '카논' (Canon)이다. '갈대' , '곧은 막대' 라는 원 뜻을 지닌 이 낱말은 길이를 재는 데 쓰이는 '자' 를 뜻하게 되고, 이것이 윤리 · 미학 · 철학의 분야에 서 전의되어 '척도 · 표준 · 규범' , '표준/규범적인 것' 을 의미하게 된다(2고린 10, 13. 15. 16 ; 갈라 6, 16). 이 것이 교회 안에서 진리와 신앙의 규준, 그리고 생활과 실 천의 규범이 되는 문서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래서 4 세기 중엽부터 이 용어로써 구 · 신약 문서들의 모음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경전화 작업은 이에 상응하는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에 유대인들에 의하여 이미 기원전 6세기부터 시작하여 기 원후 1세기에 종료되었다. 최종 결정은 '야브네/암니 아 회의' 에서 내려졌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 종교 회합의 존재에 대하여 강한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작업은 이들이 역사적으로 겪어야 했던 '진정 한 이스라엘' 에 대한 정체성의 내외적 위기에 의하여 촉 진되었다. 외적으로는, 기원전 6세기의 유배, 2세기 셀 레우코스 왕조의 지배, 기원후 66~73년의 독립 전쟁 등으로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립 하기 위하여 전통으로 돌아가서 이를 '오늘' 을 위한 규 범의 책으로 내세웠다. 내적 요인으로는 공동체 내부의 여러 종파나 분파에 따라 경전의 범위가 다르다는 사실 이 작용하였다. 예컨대 사두가이파는 모세 오경만을 경 전으로 받아들이고, 쿰란과 같은 묵시 문학적 종파들은 훨씬 포괄적인 경전을 주장하였다. 결국 바리사이파의 일종의 타협안이 관철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안을 대변 하는 요세푸스에 따르면, 모세로부터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의 페르시아 임금 아르탁세록세스 1세까지 이르는 이른바 예언의 시대에(原形樂性) 영감을 받은 저자들이(靈 感性) 저술한 책들만이 경전에 속하고, 이 책들의 숫자와 본문은 확정된 것으로서 이들에게는 성성(聖性)의 속성 이 부여된다. 그래서 경전화 작업은 기존의 문서들에 경 전성을 부여함으로써 이들을 거룩한 책으로 떠받드는 적 극적인 면과, 다른 문서들을 경전의 범주에서 배제시키 는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유대인들은, 각 책의 첫 말마디를 그 책의 이름으로 삼 는 전통과는 달리, 내용을 감안하여 이름 지은 칠십인역 의 책 이름을 따르면 다음과 같은 24개의 문서들을 그들 의 경전으로 결정하였다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 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열왕기, 이사 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12 소예언서, 시편, 욥기, 잠언, 룻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델, 다니엘, 에즈라/느헤 미야, 역대기. 이들은 다시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히브 리어로는 '문서들' 로서 율법과 예언서 외의 '기타 성문서' 라는 뜻을 지녔다. 집회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이의 머리말 참조)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러한 배열 -항상 일정하지는 않 았으나 요세푸스가 전하는 목록에는 룻기가 판관기에 , 애가가 예레미야에 붙어 있으며, 이것이 기원후 4세기까 지 원칙이기도 했다. 이 경우, 경전에 속하는 책은 22권 이 된다-과 구분은 구약 전체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해 를 담고 있다. 이들은 율법, 곧 하느님이 계시와 가르침 의 총괄 개념인 토라를 구약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 식한다. 사실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을 일반적으로 '율법 과 예언자들' (마태 5, 17 : 11, 13 : 루가 16, 16 : 로마 3, 21 등), 때로는 '율법' (요한 10, 34 : 12, 34 : 15, 25)으로 써만 지칭한다. 이들은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열왕 기와 같이 칠십인역에서는 역사서로 분류하는 책들도 예 언서의 일부(전기 예언서)로 간주하였다. 예언은 미래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지금 여기' 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구체적 사람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뜻을 선포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율법의 해설자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적 말씀이 이스라엘의 역 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행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위의 책들도 예언서로 이해한 것이다. 선택된 백성의 삶 의 가장 근본은 선택한 분, 곧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로부터 이스라엘이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바 가 나오는데, 이것이 율법의 형태로 그들에게 주어진다. 예언서들도 결국은 이러한 하느님과의 행동적 관계에 대 한 말씀이며, 성문서 또한 이를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지 시키는 목적을 지녔다고 생각하였다. 이로써 성문서는 물론이고 예언서도 율법의 연속으로서 율법의 범주 안에 서 이해되었다. 이에 반하여, 디아스포라에 살면서 히브리어나 아람어 를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원전 3세기경부터 번역 되기 시작한 칠십인역은 본토의 히브리 경전과는 범위와 구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칠십인역을 경전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과의 논쟁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이 번역 성서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 에 의해서만 전수되어 왔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유대 인들의 '원' (原) 칠십인역까지 거슬러 가기에는 어려움 이 있다. 어쨌든 칠십인역은 구약을 역사서, 교훈서, 예 언서로 나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을 중점 적으로 담은 모세 오경까지도 역사서로 분류함으로써 칠 십인역은 구약 전체에 대하여, 히브리 경전이 내포한 (율법적) 이해와는 다른 (예언적) 이해를 드러내고 있 다. 이 분류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시간의 세 차원이 총괄된다. 역사서는 과거, 교훈서는 현재, 예언서 는 미래와 관련되므로 구약성서가 시간 안의 존재인 하 느님 백성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직 구약의 경전이 종결되지 않은 시대에 칠십인역을 성서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에는 히브리 성 서의 성문서들 중에서 전도서, 아가, 에스델, 에즈라 1 느헤미야가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반면 위경에 속하는 에녹서가 예언으로 인용된다(유다 1, 14) -유대인들과는 달리 자기들의 경전을 긴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외적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히브리 성서의 '축소 된' 경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없지 않다가 결국 칠십인역의 '확장된' 경전이 6~7세기에 와서 확정되 고, 종교 개혁에 따른 논쟁의 결과로서 트리엔트 공의회 에서 재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생성된 그리스도교 구약 의 경전에는 히브리 성서에 집회서, 지혜서, 바룩, 유딧, 토비트, 마카베오 상하, 그리고 각각 에스델과 다니엘의 일부가 덧붙여진다. 그렇다고 이들 전부가 처음부터 그 리스어로 쓰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집회서, 토비트, 유 딧과 에스델의 일부는 본디 히브리어로 저작되었다가 전 승 과정에서 그 원문이 상실되었다. 히브리 경전에 들어 있지 않은 부분을 가톨릭교에서는 제2 경전, 그리고 유 대인들과 이들의 전통을 따르는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외 경이라 부른다. 가톨릭교에서 외경으로 부르는 문서들을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위경이라 칭한다. 이책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책(2디모 3, 16 ; 2베드 1, 21), 곧 인 간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 인간적 방법으로 표현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 성서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개념은 일종의 긴장을 조성하게 되며, 이 는 결국 신앙 안에서만 해결된다.
II . 구약과 신약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경전을 구약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들의 신약을 구약의 뒷부분 또는 후반부로 이해한 배경에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아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예수와 그 제자들 자신이 유대인들이었 고, 예수께서 세운 교회가 팔레스티나 안과 밖에 살고 있 는 유대인들의 회당들을 중심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일차적으로는 보통 유대인들처럼 구약을 어떠 한 선입관 없이 자기들에게도 주어진 경전으로 받아들였 다. 그러나 이미 예수에게서 시작한 신약과 자신들과의 관계에 대한 반성과 숙고를 거치고 나서도 계속 유대인 들의 경전을 수용한 데에는 자기들이야말로 새로운 이스 라엘,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자 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구 약에 대하여 어떤 단일한 공통 분모 위에 모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양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예를 다음과 같이 들 수 있겠다. 가장 중요한 계명에 대한 물음에 예수는 곧바로 율법 의 두 구절을 인용한다(마르 12, 28-31).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인 신명기 6장 4-5절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인 레위기 19장 18절이 그것이다.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두 계명을 한데 묶어서 첫째가는 '사랑의 이중 계명' 으로 내세우는 그분의 독창성이 돋보이지만, 동시 에 율법과 구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자세가 확인 된다(마르 10, 17-19). 예수께서 "···하고 (옛 사람들에 게)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식으로 구약의 율법에 대하여 반대 명제를 제 시할 때에도 율법 그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그것을 심화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마태 5, 21-48). 사실 율법에 관한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의 권위나 효력이 아니다. 율법의 올바른 이해, 율법의 원천으로 돌아감, 곧 율법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했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쓰여 진 글자에 얽매이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 안에 있는 영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성문화한 법전이라는 이해 의 굴레로부터 성서를 해방시킨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자유로운' 자세는 그의 추종자들의 구약에 대한 자세에 기본 바탕이 된다. 예수의 부활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일차적으로 율법이 명하는 바에 따라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서의 생활을 계속한다(마태 5, 23-24 : 17, 24-27 ; 사도 3, 1 등).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율법, 곧 구약을 완 성하러 온 분이며, 구약은 '한 자 한 획' 도 빠짐없이 계 속 효력을 지니고 있다(마태 5, 17-20). 그러나 이들은 이 제 보통 유대인들과는 다른 믿음을 고백한다. 곧, 죽었다 가 부활한 예수께 대한 신앙이다. 이 믿음이 그들의 최고 유일의 기초이다(1고린 3, 11).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 라는 믿음은 이제 이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원칙이 되고, 이 원칙은 동시에 그리스도인들 의 구약에 대한 자세를 결정짓기도 한다. 이 결정이 촉구 되는 계기가 바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이다. 이방인들 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 유대인들과 똑같이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인 문제가 제기되었다(사도 15장). 특히 바리사이파 출신 이면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활약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구원과 율법 또는 믿음' , 그리고 '구원과 율법의 행업 또는 하느님의 도우심' 의 상관 관 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갈라 2, 16)과 그에 의하여 베풀어지는 하느님 의 은혜(로마 3, 24)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결론을 내린 다. 이로써 율법과의 결별이 이루어진다(로마 10, 4). 그 러나 구약의 파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잘못된 법 지상주의적 바리사이파적 구약 이해에 대한 논박, 결국 법으로 이해된 구약성서의 파기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구약은 법이라는 등식을 깨뜨리고, 법이라는 굴레로부터 구약성서를 해방시킨 것이다. 율법 또는 율법으로 이해 된 구약과의 결별은, 그리스도적 이해를 받아들이지 않 는 유대주의 또는 유대교 회당과 갈라섬을 동반한다(사 도 13, 46). 요한 복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구약에 대해 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 나 이 복음의 공동체에 있어서도 '성경은 폐기될 수 없 는 것' (요한 10, 35)으로 존속한다(5, 39 ; 13, 18 ; 17, 12 ; 19, 24. 28. 36. 37 ; 20, 9) 이미 예수에게서 시작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하 여 구약은 새로운 모습, 또는 원래의 다양한 모습으로 그 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온다. 이들은 자신들을 최종적 · 종 말론적 이스라엘, 곧 진정한 이스라엘(갈라 6, 16), 아브 라함의 진정한 후손으로 자각한다(로마 4, 11-25 ; 9, 6-8 ; 갈라 4, 22-28). 진정한 이스라엘이기에 유산에 대한 정 당한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유대인들 의 경전을 자기들에게 속한 새로운 의미의 경전, 곧 구약 성서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약은 신약과의 관계에서 옛 계약이며, 신약 역시 구약과의 관계에서 새 계약이다. 그 분기점은 '주 님이신 예수' (사도 2, 36 ; 로마 10, 9 ; 1고린 12, 3 등)이 다. 그렇다고 구약과 신약이 예수를 기점으로 단순히 전 · 후대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으로 신약으로 흘러 들어가고, 신약은 구약 없이 표현될 수 없다. 구약은 필연적으로 신 약으로 종결되고, 신약은 필연적으로 구약을 전제한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예수 수난사가 구약의 사고 와 표현 방식과 언어에 따라 전개되고 있음이 이를 확인 한다. 사실 그노시스주의, 특히 마르치온(그리고 칸트, 헤 겔, 슐라이어마허, 하르나크와 같은 큰 이름으로 대표되는 새로 운 형태의 마르치온주의)에 의하여 구약이 신약으로부터 단 절되거나 또는 구약 자체가 배척되었을 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像)이 본질적으로 훼손되거나 전혀 다른 상 또는 다른 종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음은, 구약 속에 내포된 역사적 한계(예컨대 율법주의, 종교의 이질성, 국수주 의, 현실주의)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신약과 더불어 한 성 서를 이룬다는 경험적 증거이기도 하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로서 한 성서이다. 이들의 일치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사항이다. 그러면서 도 근본적이요 절대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분 의 복음을 담고 있는 신약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 약성서가 절대적인 규범이다(norma normans, '규범 짓는 규 범' ). 구약은 신약에 의해서 재조명되고 재해석된다. 구 약은 신약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생활의 규범 이 되는 것이다(norma normans, '규범 지어진 규범').
Ⅲ . 구약의 이해 이미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구약은 신약과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긴장 관계 속에 자 리한다. 같은 문서들을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유일한 성 서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에서도 이 성서의 양면성과 다의성(多義性)을 엿볼 수 있다. 유 대인들의 경전으로서 구약은 신약에 대하여 비연속성과 독립성을 지니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약으로의 연속성과 종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구약은 이들에 게 그 시초부터 이해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이미 예수에 게서 시작한 구약의 주요 내용인 율법과 메시아에 대한 이해의 갈등 참조). 물론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문제에 대 하여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하지는 않았다. 다만 예수 그 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따른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신약의 경전이 확립되기 이전에 구약을 유일한 성서로 받아들였 고, 자기들의 믿음에 의거하여 이해하였다. 이들은 자기 들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약속과 이행, 예언과 성취, 예형(豫型, type)과 대형(對型, antitype), 우의법(寓意法, allegory), 또는 구원의 역사라는 해석학적 관점으로 구약 과 신약의 관계를 정립하고, 이러한 관계 아래에서 구약 을 이해하였다. 관점의 다양성은 구약 자체의 다양성에 기인한다. 구약이라는 거대한 복합체가 주님(Kyrios)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이 주님께 대 한 믿음을 통하여 바라보고 이해하는 구약의 관점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바탕인 그리스도만이 절 대적이고, 관점들은 상대적이다. 각 관점은 항상 자기의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한 관점이 다른 관점을 대치할 수 없고, 단일체이면서도 복합체인 구약을 총괄할 수 없다. 새로운 여건이 조성되는 시대에 따라 보완되고 보충되어 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예수가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 1-2 절을 봉독하고 "이 성경 (말씀)은 오늘 여러분이 듣는 가 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말하였다(루가 4, 21). 이 '오늘' 을 성서 이해의 대원칙이라 할 수 있다. 성서의 말 씀을 경청하거나 봉독하는 이는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오 늘에서 출발하여 다시 자신이 생활하는 오늘로 되돌아온 다. 이는 성서 형성의 '오늘' 과도 상통한다. 성서의 작가 들 또는 전승가들은 각자 내일을 향한 '오늘' 을 위하여, 그래서 동시에 후손들의 '오늘' 을 위하여 작업한 것이 다. "야훼께서 그 계약을 우리 선조들과 맺으신 줄 아느 냐? 아니다. 우리와 맺으신 것이다.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하나하나와 맺으신 것이다"(신명 5, 3). "오는 세대 를 위하여 이것이 쓰여져, 다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 양하리라"(시편 102, 18 ; 22, 31 ; 78, 6).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책' (Buch der Gegenwärtsbewältigungen)으로서 구약의 형성에 참여한 저자 문서들은 야 훼계, 신명기계, 제관계, 역대기계이다. 이에 대해서 그 동안 성서 이해를 위해 비평적 방법론이 사용되어 왔다. 이 방법론은 근 · 현대적 인간이 개발해 낸 역사의 인식 능력과 함께 과거의 성서를 고찰한다. 이러한 인식 방법 은 유대인들의 경전으로서 구약성서의 생성 · 발전사 등 을 위시하여 그 안팎에 관하여 방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과거의 문서로서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 나 구약을 역사적으로만 파악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구약 의 이질성을 드러내고서는 구약과 현재를 제대로 잇지 못하여(G. v. Rad, pp. 437~440 참조) '현재를 위한 책' 으로 서의 구약의 이해를 다른 분야 또는 독자들에게 일임해 버리는 경향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스 도인들이 유대인들의 경전을 성서의 전반부로 받아들임 은 이 구약이 그들의 '오늘' 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서 는 본질적으로 '내일을 향한 오늘' 을 위한 책이기를 원한 다. 역사 비평적 방법론의 이러한 제한성 때문에 근래에 와서 다른 방법론들이 시도되고 있다. 그렇다고 기존의 방법론이 폐기되어서는 안되고 이를 바탕으로 해야 한 다. 방법론은 실체를 보고 이해하기 위한 한 도구일 따름 이다. 실체, 곧 성서만이 규범적이다. 그래서 어떠한 방 법론도 배타적으로 유일할 수는 없다. 다양한 방법론들 이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 이는 여러 면으로 시도되고 있 는 구약의 신학에도 해당된다. 결국 어떠한 신학도 구약 또는 그 종교를 사후적(事後的) 체계 속으로 강제할 수 는 없다. 그래서 구약의 신학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성서로서 자기들의 '오늘' 을 위하여 경청하고 봉독할 수 있는 근거는 최종적으로 하 느님께 있다. 구약은 고대 이스라엘의 '그때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관계에서 생성 되었다. 이 구약은 또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경청 되고 봉독된다. 그래서 하느님과 과거 그들의 관계, 그리 고 하느님과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사이에는 필연적 인 유사성이 있다. 이 유사성은 하느님의 동일성에 바탕 을 둔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며, 그는 다시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이다. 결국 하느 님은 옛날의 그들을 통하여 오늘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 -여기에서는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한 다-은 모두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 를 가르치고 논박하고 바로잡고 그리고 의로움을 위해 교육하는 데 유익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람이 유능 하고 온갖 선한 일을 위한 완전한 채비를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2디모 3, 16-17 ; 참조 : 로마 15, 4 ; 1고린 9, 10 ; 10, 11 ; 1베드 1, 12). (→ 성서 ; 정경) ※ 참고문헌 G. v. Rad,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Band 2, Miinchen : Chr. Kaiser Verlag, 6thed., 1975, pp. 389~447(허혁 역,《구약성 서 신학》 2, 분도출판사, 1977, pp. 323~420)/ A.H.J. Gunneweg, Vom Verstehen des Alten Testaments. Eine Hermeneutik(Grundrisse zum Alten Testament, ATD Ergänzungsreihe 5,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7)/ G. Wanke . E. Plümacher . W. Schneemelcher, Bible Ⅰ~Ⅲ,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Band 6, pp. 1~48/ 문희석, 《한국 교회 구약성 서 해석사 1900~1977》,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任承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