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티, 빈센치오 Pallotti, Vincenzio(795~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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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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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함을 들고 있는 성 팔로티(왼쪽)와 성해함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천주교 사도회(Societas Apostolatus Catholici, S.A.C.)의 설립자. 성인. 축일은 1월 22일. 팔로티는 1795년 4월 21일 로마에서 귀족 가문인 노 르치아(Norcia)의 팔로티 가문과 로마의 데 로시(De Rossi) 가문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산 판탈레오 네(San Pantaleone) 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후에는 로마 대 학과 사피엔차(Sapienza)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6세에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1818년 5월 16일 사제 서품 을 받았고, 첫 미사는 프라스카티(Frascati)에 있는 제수 (Gesù) 성당에서 봉헌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에는 신 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10년 동안 사피엔차 대학 에서 신학을 가르친 뒤 영성 지도와 강론에만 전념하였 다. 초기에는 뛰어난 신학자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후에 사목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여 1827년에 로마 대학의 영 성 지도 신부가 되었으며, 여러 국제 신학원에서 신학생 들의 고해 신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보혈회(Society ofthe Precious Blood, C.PP.S.)를 설립한 부팔로(G. del Bufalo, 1786~1837) 신부와 종교 개혁 이후 영국에 상주한 최초의 추기경이 된 와이즈먼(N. Wiseman, 1802~ 1865) 신부와 절친하였다. 그러나 산 스피리토 데이 네아폴리타니(San Spirito dei Neapolitani) 성당의 주임 신부가 된 후, 그의 빠른 승진과 열정을 시기하는 그 본당의 다른 신부들로 부터 10년 넘게 고통을 받았다. 팔로티 신부는 개인적으로 장인 길드(guild)를 부활시 키려는 계획에 관심이 많았으며, 젊은 노동자들과 농촌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1837년 콜레라가 창궐하자 그는 병자들을 구호하는 조 직을 만들어 전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도왔으 며, 꾸준히 고해성사를 주고 강론을 하였다. 아침부터 밤 까지 로마의 거리를 돌면서 병원의 환자뿐 아니라 거리 의 사람들을 도왔으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도움을 주 고 위로하였다. 그리고 감옥을 찾아가 죄수들에게도 강 론을 하였는데, 한번은 죽어가는 젊은이에게 접근하기 위해 나이 든 여자로 변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 젊은이가 처음으로 만나는 사제를 쏘아 죽이려고 베개 밑에 권총 을 감추어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그는 거의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였고, 의자나 맨바닥에 서 잠깐 눈을 붙일 뿐이었다. 로마의 귀족, 주교, 추기경, 심지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와 비오 9세 (1846~1878)도 그를 존경하였으나,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사제가 되기 이전에 도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옷을 벗어 주고 맨발로 집에 돌 아오곤 하였으며, 잠자리조차 내준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러한 일이 사제가 된 후에 더 본격화된 것뿐이다. 개인 적으로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교황 레오 13세(1878 ~1903)는, 팔로티 신부를 성인으로 여긴다고 말할 정도 였다. 그의 영성과 자선 활동에 감동을 받은 로마 사람들 은 그를 제2의 필립보 네리(Filippo Neri, 1515~1595) 성인 으로 추앙하였다. 1835년에 팔로티는 천주교 사도회를 설립하고 가톨릭 사도직 수녀회(Sisters of the Catholic Apostolate)도 설립하였는데, 이 수녀회는 후에 팔로틴 선교 수녀회(Pallottine Missionary Sisters)로 발전하였다. 팔로티는 영국에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 이 일어나자 신부들을 파견하여 영국의 오라토리오회 회 원인 파버(F.W. Faber, 1814~1863)를 도왔다. 팔로티의 생 각이 열매를 맺어, 밀힐 외방전교회(Mill Hill Missionaries, M.H.M.)를 비롯하여 몇 곳에 선교 대학이 설립되었다. 그러한 노력들로 인해 교황 비오 11세(1922~ 1939)는 팔로 티를 가톨릭 액션(Catolic Action)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팔로티는 1836년부터 주님 공현 팔일 축제를 지키는 관 습을 시작하였는데, 그 이후 로마에서는 이 관습이 충실 하게 지켜졌다. 그가 이 축일을 특별히 지내고자 한 것은, 그것이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850년 1월 22일 팔로티 신부는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온다(Onda)의 산 살바토레(San Salvatore) 성당에 안치되었다. 곧 시복을 위한 예비 절차가 시작되었고, 1887년에는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1939~1958)에 의해 1950년 1월 20일 시복되었고, 교황 요한 23세(1958~1963)에 의해 1963년 1월 20일 시성되었다. (→ 밀힐 외방전교회 ; 천주교 사도회) ※ 참고문헌 H.E. Schaak, 《NCE》 10, 2003, pp. 808~809/ A.J. Gittins, CSSp,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ristian Missions, G.H. Anderson ed., Simon & Schuster Macmillan, 1998, pp. 512~513.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