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샤를 Péguy, Charles(1873~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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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페기.


프랑스의 가톨릭 작가. 〔생애와 작품] 페기는 1873년 1월 7일에 프랑스 오를 레앙(Orléans)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 때 얻은 병으로 그 가 태어난 해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성 당용 의자에 짚을 갈아 넣는 일을 하여 생계를 이어 갔 다. 페기는 초등 교육 수료 시험에 합격하였지만, 가정 환경 때문에 11세에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소질을 알아본 담임 교사의 도움으로 장학금 시 험에 합격함으로써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매년 우수상을 탔다. 1894년에 페기는 파리로 상경하여 고등 사범학교(Ecole Normale Supérieure)에 입학하였다. 정의 를 갈망하며 모든 나라의 국민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세계를 꿈꾸던 그는, 1895년 교원의 길을 포기하 고 사회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었다. 그리 고 1897년에 《잔 다르크》(Jeanne d'Arc)라는 희곡을 쓰 면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결혼도 하였다. 또한 그때부터 '드레퓌스(A. Dreyfus, 1859~1935) 사건' 에 뛰 어들어 기사도 쓰고, 우파 세력으로부터 위협받는 정치 가나 교수들을 몸으로 보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을 통해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고 정치적인 타협으로 순수한 뜻이 왜곡되는 것에 깊이 실망하였다. 그는 당시에 만연하던 사상, 즉 실증주의와 과학 만능 주의에 강하게 반발하며 몇몇 친구들과 함께 모든 인간 적인 가치, 특히 진실을 옹호하기 위해 잡지 《반월(半月) 수첩》(Les Cahiers de la Quinzaine)을 독립적으로 만들기 로 결정하였고, 이후 이 잡지를 발행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 잡지의 주된 내용은 시국에 관한 평론, 젊은 작가들의 작품 소개,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논고 등으로, 페기는 특 히 논평자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잡지 출판을 계 속하면서 많은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독자들의 무 심한 반응에 굴복하지 않고 양심에 충실한 글을 썼다. 1904~1907년에 그는 서서히 어린 시절의 신앙을 되찾 게 되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무신론자였던 그의 아내는 남편의 심경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녀에 대한 종 교 교육도 거부하였다. 그로 인해 페기와 교회의 관계 회 복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상의한 신부들 또한 매우 보수적이어서, 자녀들이 세례를 받지 않는 한 페기도 영성체를 할 수 없다고 하였 다. 그는 1912년에 출판된 《클리오》(Cho)라는 작품에서 "필자는 몇 년 전부터, 33세가 넘었을 때부터 ··· 있는 그 대로 자신의 존재를 되찾아, 평범한 부류의 착한 프랑스 인이자 하느님께 대하여 보통의 죄인이며 신자인 그러한 존재를 되찾았다" 라고 쓰고 있다. 그동안 페기는 잡지 일을 도와 주는 친구의 여동생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사 로잡혔지만,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서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포기할 수 있도록 2년 동안 기도하면서 자신과 싸웠다. 이런 상황에서 집필은 그에게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게 해 주는 힘이 되었다. 이때 완성된 작품들 중 그의 사후, 1973년에 출판된 《그다지도 고동쳤던 마음의 발라드》 (Ballade du coeur qui a tant battu)라는 시집에는 당시 그의 심정이 담겨 있다. 그는 1910년에 희곡 《잔 다르크의 사 랑의 신비》(Le Mystère de la Charité de Jeanne d'Arc) , 1911년에 시집 《제2 미덕의 신비로 가는 길》(Le Porche du Mystère de la deuxième Vertu), 1912년에 시집 《성(聖) 무죄한 어린이들의 신비》(Le Mystère des Saints Innocents) 를, 1913년에는 《이브》(Eve)를 썼다. 이렇게 종교적이며 서정적인 체험이 깔려 있는 작품을 쓰면서도, 계속 당 시의 시국을 분석하여 《새로운 신학자 페르낭 로데 씨》 (Un nouveau théologien : M. Fernand Laudet, 1911)와 《돈》 (L'Argent, 1913) 등의 작품을 통해 집단 이기주의와 배 금주의, 지식인들의 편협함과 지배욕을 예리하게 고발하 였다. 1914년 8월 3일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선전 포고 를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였고, 육군 중위로 참전한 페기는 1914년 9월 5일 빌루아(Villeroy) 근처에서 벌어진 제1차 마른(Mame)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사 상] 페기의 사상은 인간적인 체험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늘 현실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현실 문제 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 라도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 · 정의 · 진실 등의 가치를 옹 호해야만 하며, 신앙에 있어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곧 인간적인 현실에 충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처음부터 지니 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페기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참으로 인간다운 정치적 제도는 어떤 것 인가?' 등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숙고하였고, 당시까지 순수하게 받아들였던 현실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 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교육의 혜택을 받 을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었다. 그가 생각한 조 화로운 도시' 는 모든 시민들이 신분 계층의 차별 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육체 노동을 한 후에, '무상 의 노동' 즉 정신적인 노동에 종사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는 진리의 추구 없이는 참 자유가 없기에 모든 사람에 게는 진리를 탐구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를 행사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던 페기는 정치적인 활 동에 참여하면서 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지 만,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정치적인 세계는 그에 게 실망감만을 안겨 주었다. "현대 지식인들, 현대 학파 들은 아주···부질없는 사상이라 하더라도 자기 마음에 드는 형이상학과 철학을 신봉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정 부가···그 엄청난 세력을 동원하여 모든 국민들에게 이 러한 형이상학을 강요할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는 문제로 남는다." 이처럼 권한을 남용하는 정치가들에게 더이상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자 그는 동시대인들의 양심 에 호소하는 글쓰기에 몰두하였다. 한편 대학 시절 그는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 의 강의를 듣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베르그송은 모 든 사물이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유 양식으로 해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던 대부분의 교수들과는 달리, 생명의 창조적인 움직임을 강조하면서 이 생명의 움직임을 파악 하는 방법을 '직관' 이라고 설명하였다. 페기 역시 과학 이 인간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고 생 각하였다.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합리적인 사유를 통 해 자연의 법칙을 찾아내어 이 법칙을 여러 물질적인 문 제에 적용함으로써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다고 믿고 있었 지만, 페기는 사유 양식은 가치 판단에 무용하다고 여겼 다. 그는 '현대 세계' (le monde moderne) , '미개한 세계' (le monde barbare)를 '문화' (la culture) 또는 '신비주의' (la mystique)와 대립시켰다. '현대 세계' 란 시대의 특수성을 간과하고 물질적인 발달만을 찾으며 과학을 절대화 하는 모든 사상적인 조류의 통칭이고, '문화' 나 '신비주 의' 란 물질적인 편리함보다 진리 · 정의 · 자유 등의 가치 를 우선하는 정신이다. 페기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 가 기술적인 측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발달하였다고 하더 라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쇠퇴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페기는 복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 다. 정치적인 활동에 참여하였을 때 그는 기득권자들의 편을 든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 의식을 강렬하게 비판 하였다. 하지만 1908년 이후 인간의 비참함 및 모든 철 학과 정치적인 사상의 한계 체험에서 비롯된 절박한 고 뇌에 이끌려 예수의 삶, 특히 그의 수난을 새롭게 이해하 게 되었다.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 라는 신비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도 체험하였다. 그 후 그의 모든 작품에는 하느님이 예수를 통하여 육화한 신비에 대한 묵상이 담겨 있다. 하 느님이 한 인간으로 육화하셨다는 것, 즉 '영원함' 이 인 간의 '시간성' 안으로 뚫고 들어온 이 유일무이한 행위 는, 실질적인 역사일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 절 대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유이다. 하느님은 과거 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다. 비록 인간이 그분의 일을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이를 가로막 는 것처럼 보이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하느님은 무한한 자비로 이 세상을 감싸 준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 의 모습을 내려다볼 때,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보는 아버 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느 님은 전능한 심판자라기보다는 자녀들의 고뇌와 불안감 과 함께하는 아버지였다. 페기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당시 신학자들은 이러한 모습에 냉소하였지만, 제1 · 2차 세계대전을 겪고 기존의 가치 체계의 와해와 전통적인 교회 체제에 대한 회의가 몰아 치던 서구 사회의 상황 속에서 그의 작품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 가톨릭 문학, 프랑스의) ※ 참고문헌  Charles Péguy, Oeuvres poétiques complètes, Paris, Gallimard, La Pléiade, 19571/ 一, Oeuvres en prose, 1909~1914, Paris, Gallimard, La Pléiade, 1957/ S. Fraisse, Péguy et le monde antique, Paris, Armand Colin, 19731 Jean Bastaire, Prier a Chartres avec Charles Péguy, Paris, Desclée de Brouwer, 1991/ R. Burac, Charles Péguy, Paris, Laffont, 1994/ Michel Leplay, Charles Péguy, Paris, Desclée de Brouwer, 1998/ 황종득, <샤를르 페기와 그리스도 강생 의 신비>, 《효성여대 가톨릭 교육 연구》 4(1989. 12), pp. 31~56/ -, <샤를르 페기와 고전주의 작가>, 《효성여대 어 문학 연구》 3(1990. 12), pp. 117~140/ 一, <샤를르 페기와 희망의 덕>, 《효성 여대 가톨릭 교육 연구》 8(1998. 2), pp. 23~37. [H. Leb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