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신학교 - 神學校 [프]Collège Général de Pen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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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낭 신학교(왼쪽). 조선인 신학생들과 우도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가 1808년 말라카(Malacca) 해협 북 부에 있는 페낭 섬의 풀라우티쿠스(Pulau Tikus)에 세운 신학교. 설립 이래 아시아 지역 사제 양성의 중심지 역할 을 하였다. 1665년 시암(Siam, 현 태국)에 세워진 신학교의 후신 으로, 박해로 지역 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중국과 조선 등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신학 교육을 받은 곳이다. 1970년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현지 교구 로 운영권이 이관되었으며, 1984년에는 풀라우티쿠스에 서 현재의 위치인 마리오필(Mariophile)로 이전하였다. 〔설립과 변화] 1658년에 설립된 파리 외방전교회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주된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코친 차이나(Cochinchina) 대목 랑베르 드 라 모트(P. Lambert de la Motte, 1624~1679) 주교와 통킹(Tongking) 대목 팔 뤼(F. Pallu, 1626~1684) 주교는 1665년 시암의 수도 아 유티아(Ayuthia)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현지인 사제 양성 에 착수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시암을 비롯하여 중국· 코친차이나 · 인도 · 일본 등 여러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공부를 하였고, 학교 이름도 '천사들의 신학교' (The Seminary of the Holy Angels)에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종합 학교 (College General)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교황청에 등재된 이 학교의 공식 명칭은 '성 요셉 가톨릭 대신학 교 (St. Joseph's Catholic Major Seminary)였다. 신학교가 설립된 지 100년이 되던 1765년, 버마(현 미얀마)인들이 시암 왕국을 침공하였다. 이 전쟁은 1767 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아유티아를 점령한 버마인들은 성 당을 공격하고 선교사와 신자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1767년 아르토(J.-B. Artaud, ?~1769) 신부는 신학생들을 이끌고 캄보디아 국경에서 가까운 시암의 항구 도시 찬 타부리(Chanthaburi)로 피신하였다가 몇 달 후 다시 캄보 디아의 혼다트(Hondat)로 옮겼다. 하지만 그곳 역시 안 전하지 못하였다. 아르토 신부는 1767년 말경 이곳을 지나던 시암 왕자를 숨겨 주었다는 의혹 때문에 이듬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769년에는 중국과 캄보디아 의 해적들이 여러 차례 학교를 약탈하고 학생들을 살해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결국 신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좀 더 안전한 장소로 피신해야 하였고, 1770년 말라카 를 거쳐 인도 남동부 해안에 있는 퐁디셰리(Pondicherry) 로 학교를 이전하였다. 풍디세리는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신학생들을 파견하는 중국 · 인도차이나 등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 기후도 학생들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그 래서 선교사들은 시암이나 인도차이나의 다른 지역으로 학교를 옮기고자 하였고, 결국 1782년에 적당한 장소가 구해질 때까지 신학교를 일시 폐교하기로 하였다. 신학교의 재건 필요성은 1790년대에 대두되었다. 그 러나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파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마카오(Macao)의 경리 책임자였던 르통달 (C.-F. Letondal, 1753~1813) 신부가 그 책임을 맡게 되었 다. 그는 재원 마련을 위해 필리핀과 멕시코 등지를 순방 하였으며, 1803년 마카오로 돌아온 후에는 스페인의 영 향하에 있던 마닐라(Manila)에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하 였다. 그러나 스페인 측에서 협력에 대한 대가를 요구함 에 따라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1804년에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페낭에 신학교가 세워질 수 있었다. 1807년 12월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롤리비 에(M. Lolivier, 1764~1833) 신부가 페낭에 도착하면서 이 듬해에 조지 타운(George Town) 내의 풀라우티쿠스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개교 당시 20명의 학생으로 시작 된 페낭 신학교는 점차 학생수가 증가하여 1855년에는 128명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1848년 이후 수학 · 지 리 · 교회사 · 측량 · 물리 · 한문 등이 추가되면서 교육 내용도 풍부해졌다. 교육 과정도 체계가 잡혀 1856년 페낭 신학교에는 라틴어 · 수사학 · 철학 · 신학 과정이 개설되어 있었고, 각 과정은 학생들의 학습 능력과 진도 에 따라 다시 몇 개의 반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점차 각 교구에 신학교들이 설립되면서 페낭 신학교의 학생수는 감소하게 되었고, 1892년에는 67명으로 줄어 들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때에는 전쟁으 로 인해 신학교가 폐쇄된 지역의 학생들이 입학하면서 일시 증가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때에는 사정이 달 랐다. 1941년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점령하자, 신학생과 교수들은 신학교 별장이 있는 마리오필로 피신하였고, 1945년 2월에는 일본 해군이 마리오필에 주둔함에 따라 이곳에서도 떠나야만 하였다. 종전과 함께 다시 개교하 였지만, 1950~1960년대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 미얀 마, 태국 등지에 신학교가 생기고, 또 공산화된 지역에서 의 박해 때문에 학생수는 계속 줄었다. 그 와중에 페낭 신학교는 1965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와 제휴를 맺어, 시험에 통과된 학생들은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페낭 신 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영어가 공식 언어 로 사용되었고, 로마에서 공부한 말레이시아와 태국인 교수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는 최초로 아시아인 교장이 탄생하면서 학교의 운영권도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현지 교구로 이관되었다. 아울러 1975년 이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출신의 학 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1983년 싱가포르에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페낭 신학교는 이제 말레이 반도에 있는 세 교구만의 신학교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수에 비해 풀라우티쿠스에 있는 건물이 너무 크고 낡았기 때문에, 1984년 1월에는 장소도 현재의 위치인 마리오필로 이전하였다. [페낭 신학교와 한국 교회] 페낭 신학교가 한국 교회 의 성직자 양성과 관련을 맺은 것은 1855년 6월 이만돌 (바울리노) 김 요한, 임 빈천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이 페 낭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1854년 3월 조선을 출발, 5월 19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홍콩 경리부에 도 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1년 정도 머문 후 이듬해 6 월 12일 페낭 신학교에 도착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만돌은 1년 만인 1856년 10월에 페낭을 떠나 홍콩으로 갔다가 1861년 4월 조선으로 귀 국하였고, 나머지 2명은 신학교의 전 과정을 마치고 1862년 2월에 페낭을 떠나 1863년 6월에 귀국하였다.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도 페낭 신학교와 관계가 있다. 즉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L.-J.-M. Imbert, 范世亨) 주교는 1821년 3월 페낭에 도 착한 후 신학교에서 몇 달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 고, 샤스탕(J.H. Chastan, 鄭牙各伯) 신부는 1828년부터 4년 동안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후에 초 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주 교는 1829년 주교로 축성된 뒤 페낭 섬에서 1831년까 지 사목을 하였다. 페낭 신학교에 다시 조선 학생들이 파견된 것은 1882 년의 일이었다. 즉 1876년 일본과의 수호 조약이 체결 되고 점차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G.-M.-J. Blanc, 白圭三) 주교는 신학생 파견을 재개하기로 하고, 강성삼 (姜聖參, 라우렌시오) ·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 등 7명을 페낭 신학교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1881년에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보내져 예비 신학 교육을 받았 으며, 이어 홍콩으로 보내졌다가 싱가포르를 거쳐 1882 년 페낭에 도착하였다. 이후 조선 신학생의 페낭 유학은 1884년까지 지속되어 1882~1884년에 페낭으로 보내 진 유학생은 총 22명이었다. 그러나 기후가 달랐기 때문에 신학생들은 풍토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였다. 이에 1884년부터 학생들이 귀국하 기 시작하였고, 1892년에는 뮈텔(G.-C.-M. Mutel, 閔德 孝) 주교의 소환령에 따라 모든 유학생들이 조선으로 돌 아왔다. 물론 신학생들이 귀국하게 된 이유에는 한국에 신학교가 설립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신학생들은 1885년 여주 부엉골에 세워졌다가 1887년 이전한 예수 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한 것이다. 그리고 페낭 유 학생 중 강성삼,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정규하(鄭圭 夏, 아우구스티노) ,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김성학(金 聖學, 알렉시오), 이내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 노), 홍병철(洪秉喆, 루가),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김 문옥(金紋玉, 요셉), 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등 11명이 1896~1900년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 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편 개항 이후에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 중 빌렘(N. Wilhelm, 洪錫九) 신부는 1883~1888 년까지 페낭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고, 우도(P. Oudot, 吳保祿) 신부는 1888~1890년까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뮈텔 주교는 1890년 말 제8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오던 중 며칠 동안 페 낭 신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따라서 빌렘 신부와 우도 신부는 페낭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직접 가르쳤고, 뮈텔 주교도 그곳에서 유학 중이던 조선 신학생들을 만나 보 았을 것이다. 그리고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 폴리(J. Polly) · 조제(J. Jaugey, 楊秀春) 신부는 1907년에 페낭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이다. 현재 페낭 신학교에는 조선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 ·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 · 샤스탕 신 부 ·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으며, 신학교 교정에는 페낭 신학교의 교수를 역임한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 예수 성심신학교 ; 파리 외방전교회) ※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 회사》 上· 中 · 下,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1980/ 《가톨릭 사전》 A. Launay, Histoire Générale de la Société des Missions-Eranneres, Paris, 1894/ Liste Des Elèves de Pinang et Liste Des Elèves du G. Séminaire De Ryong-Sanl 김성학, 〈檳榔留學回顧記〉, 《가톨릭청년》 (1934년 4 · 6월호)/ 아렉수, <檳榔回路의 일허젓던 녯記憶〉, 《가톨 릭연구》(1935년 9~10월 병합호)/ Edmund Woon Yaw Yen, A Brief History of College General, Sinaran College General, PenangCommemorative Issue, College General, 1995/ 최승룡, '눈물의 페낭 신학교', <평화신문> 688~690호(2002. 8)/ 차기진, '페낭 신학교를 가다', <평화신문> 754~757호(2004. 1)/ 장동하, <배론 신학교 교육 과정에 관한 연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개교 150주년 기념 학 술 심 포지엄 발표문(2004. 10. 23). [方相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