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늘롱, 프랑수아 드 살리낙 드 라 모트 Fénelon, Frangois de Salignac de la Mothe(1651~1715)

글자 크기
11

프랑스의 신비가. 대주교. 신학자. 교육자. 〔생애와 활동] 페늘롱은 1651년 8월 6일 프랑스 남서 부의 가스코뉴(Gascogne) 페리고르(Périgord) 지방의 페 늘롱 성(Château de Fénelon)에서 귀족이었지만 부유하지 는 않은 집안의 열세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12세 가 될 때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의 지성과 어 머니의 부드러움은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카오르(Cahors) 대학에서 인문주의 교육과 고전 문학을 공부한 뒤(1663~1665), 삼촌에 의해 1666년 파리로 보내진 그는, 르 플레시(Le Plessis) 대학 에서 공부한 후, 1672년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 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생 쉴피스회의 설립자인 올리 에(J.J. Olier, 1608~1675)의 영향을 받았다. 1675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생 쉴피스 본당에서 사목을 하였다(1675 ~1678). 그는 그리스 선교를 원하였지만 가족과 장상들 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27세의 젊은 나이에 '누벨 카톨리크' (Nouvelles Catholiques)의 책임자 로 임명되었는데, 이 공동체는 프로테스탄트에서 가톨릭 으로 개종한 젊은 여성들을 교육시키는 봉사 단체였다. 페늘롱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정열을 바쳐 10년 동안 재 임하였는데, 이곳에서의 경험으로 청소년들의 심리를 이 해하게 되었다. 그는 교육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젊 은이를 대할 때에는 단순하고 명확하며 설득력 있는 태 도를 취하고, 나이와 지적 수준에 걸맞게 그들을 지도하 였다. 동시에 여성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부드러움과 섬 세함을 기울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쓰여진 저서가 《여성 교육에 대한 논문》(Traité sur l'éducation des filles, 1687)으로, 이 책은 교육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교 육 이념의 원천은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지혜였다. 특히 이 책에서는 아동 심리에 대한 섬세함을 보여 주고 아동 교육에 있어 부드러움을 강조하면서 자유와 권위를 잘 조화시킨 교육을 권하였다. 이 책은 또한 교육학에 새로 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아동 심리 발전에 따른 교육 이론을 펼치면서, 아동의 여러 행동들과 개인의 인격을 중요시하고 있다. 또한 여성 교육의 중요성도 주장하여 그리스도교의 원칙에 따라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강조 함으로써 당시 남성 위주의 모든 관습에 대항하였다. 1685년 루이 14세(1643-1715)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 자, 페늘롱은 저명한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가톨릭 신앙 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정열을 바쳤다. 국왕을 잘 알고 있 던 모(Meaux)의 주교이자 신학자인 보쉬에(J.B. Bossuet, 1627~1704)의 제안에 따라, 그는 위그노(프랑스 칼뱅주의 자)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푸아투(Poitou)와 생통크(Saintonque)의 설교자로 파견되었다. 그는 파견 지역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위그노들을 짓누르는 두려움을 완화시킨다는 조건으로 그 임무를 받아들였다. 그렇 게 함으로써 가톨릭 선교사들의 말이나 봉사 활동들을 위그노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사려 깊고 설득력이 강한 그의 설교에 개종자들은 감동하여 강연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1689년 푸아투에서 돌 아온 그는 방대한 지식과 귀족적인 행동, 그리고 깊은 영 성으로 파리 귀족들의 호감을 얻고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는 1689년에 루이 14세의 손자이며 후계자인 부르고 뉴(Bourgogne)의 일곱 살 된 공작의 개인 교사로 임명되 었다. 이 임무는 169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는 교육 을 위해 《우화집》(Fables), 《죽음에 관한 대화》(Dialogues des morts), 《텔레마크의 모험》(Les Aventures de Télémaque, 1699) 등을 저술하였다. 1688년에 페늘롱은 정적주의(quietismus)의 대표적 인 물인 기용(J.-B. Bouvier de La Motte Guyon, 1648~1717) 부 인을 알게 되었다. 페늘롱은 그녀의 정적주의적인 주장 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나 취향은 좋 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페늘롱은 기용 부인의 가르침 을 자진해서 보급하고 옹호하였다. 그는 1693년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는데, 이때 프랑스에는 침묵 기 도와 세상에 대한 '성스러운 무관심' 같은 정적주의의 위 험한 이론이 급속히 퍼져 있었다. 이에 보쉬에는 이 주장 의 위험성을 깨닫고 기용 부인의 활동을 저지하였다. 그 러나 그녀가 말을 듣지 않자 그녀의 주장을 검열하기 위 한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페늘롱은 간접적으로 이 위원회 에 참여하였다. 이 위원회는 1694년 7월부터 1695년 3 월까지 활동하였고, 결국 34개항의 오류가 지적되었다. 1695년 2월 페늘롱은 캉브레(Cambrai)의 주교로 임명되 었다. 1695년 12월 기용 부인이 체포되자, 1697년 2월 에 그는 《내적 생활에 관한 성인들의 격언 해설》(L'Explication des maximes des Saints sur la vie intérieure)을 출판하 여 기용 부인을 옹호하였다. 이 저서는 도미니코회 및 오 라토리오회 회원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보쉬에와 맞서야 하였다. 보쉬에와 페늘롱의 논쟁은 각자의 의견을 표명하는 많은 저서들을 통해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1697년 4월에 페늘롱은 자신의 저서 《내적 생활에 관한 성인들의 격언 해설》을 교황청에 보내어 검열을 요청하였다. 결국 1699년 3월 12일 교황 인노첸시오 12세(1691~ 1700)는 교서 <쿰 알리아스〉(Cum alias)를 통해 페늘롱의 저서에 서 정적주의라 여겨지는 23개의 명제들을 단죄하였다. 이에 페늘롱은 교황의 결정에 무조건 순명하였고, 이 해 4월에는 자신의 저서에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문서 를 작성하였다. 이후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봉사 활동과 아동을 위 한 교리 교육에 전념하고, 신심적이고 교의적인 글을 쓰 면서 캉브레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수많은 글들을 썼는데, 그중 《하느님의 현존과 속성에 대한 논문》(Traité de I'existence et des attributs de Dieu, 1712), 《아카데미에서의 편지》(Lettre à l'Académie, 1714) 등이 유명하다. 또한 보쉬에 주교의 사망 이후 페늘롱은 얀센주의에 대항하여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1715년 1월 7일 캉브레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성과 사상] 페늘롱과 보쉬에 사이의 논쟁은 그리스 도인의 삶에 대한 관점과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의 차이 에서 시작되었다. 보쉬에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 1650)의 '선험성' 을 따르는 신학자로서 금욕적인 삶에 호의를 가졌으며,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신비 체험에 의 해서가 아니라 지성으로 전할 수 있고 선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비 체험은 그리스도인 중 특수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특별한 것이었다. 반면 페늘롱은 관상(觀想)을,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자리에 놓았다. 내적인 삶과 관상을 다루는 《내적 생활 에 관한 성인들의 격언 해설》은 45개의 명제를 다루고 있으며, 묵상의 '조명적 길' 과 관상의 '합일의 길' 에 대 해 서술하고, 관상으로 넘어서는 방법을 설명한다. 이 책 에서 말하는 '순수 사랑' 은 페늘롱 영성의 핵심이다. 순 수 사랑' 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순수 사랑' 은 하 느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구원 이나 지복과는 무관한 것이다. 즉 어떠한 이해 타산이 끼 여들 수 없는 사랑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망 역시 '순수 사랑' 에 위배 된다. 둘째, 가장 완벽한 영혼들의 삶은 '순수 사랑' 에 도달하는 데 있으며, 여기서부터 모든 다른 덕들이 나온 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이 걸었던 내적인 길들의 종착 역은 '순수 사랑' 이다. 왜냐하면 영적이며 내적인 길들 은 좀 더 높은 완덕을 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 사 랑' 은 그리스도인이 도달해야 하는 완덕의 최고 수준이 며, 신앙 순례의 최고 단계는 이 사랑에 습관화되어 숙달 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완덕의 핵심은 인간의 의지와 신적인 의지가 더이상 구별되지 않고 '신비의 나' 와 하 느님이 일치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적 시련을 통한 사랑의 정화가 요구 되며 사랑의 5단계가 필요하다. 즉 세속적으로 이미 주 어진 은혜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단계, 자신의 행복 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단계, 소망과 연결된 사랑의 단계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단계, 순수하게 하느님의 영광 을 위한 사랑이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나타나 는 단계, 하느님만을 위한 순수 사랑의 단계이다. 이러한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은 모든 집착에서 벗 어나야 한다. 오직 신적인 것에 온전히 영혼을 맡긴 상태 에서만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활 동이 제거된 완전 수동적인 관상이 필요하다. 이때의 수 동적 관상이란 모든 활동이 정지되어 정적 상태가 되고 그 안에 이해 타산이 완전히 제거된 순수 관상의 상태이 며 '순수 사랑' 과 동일한 형태이다. 페늘롱에 의하면, 관 상은 그 수준이 높고 고결하더라도 결국은 '순수 사랑' 과 무사무욕에 이르기 위한 훈련일 뿐이다. 즉 신비가들 에 의해 '합일의 길' 혹은 '수동적인 길' 이라고 불리는 높은 완덕의 길은 바로 '순수 사랑' 의 충만성이며, 이 사 랑이 습관화된 상태에 불과하다. 페늘롱의 이론은 '반(半)정적주의' 적인 경향을 보여 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순수 사랑의 단계만이 최 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다른 단계의 사랑은 고립되 며 가치를 부여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완전히 비타산 적이며 순수한 사랑은 '나' 라는 주체와 연결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열망까지도 제외한다. 그래서 신망애의 대 신덕 실천 또는 다른 덕이나 선한 행위의 실천에 대한 의 문을 가져온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인간의 자유와 은총 을 서로 손상시키지 않고 일치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 가 발생한다. 이것은 교회의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 든다. 즉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 의 상태에서 은총의 상태로 된 '의화' (義化, Justificatio) 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큰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 나 페늘롱은 전적으로 기용 부인의 사상을 따르지는 않 았다. 그는 《내적 생활에 관한 성인들의 격언 해설》을 집 필할 때 이미 그녀의 사상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용 부인의 '순수 사랑' 은 영원한 복음이었지만, 페늘롱에게는 신비 체험의 정점이었다. 페늘롱에 의하면, 침묵의 기도와 성스러운 무관심은 정적주의들이 주 장하는 것처럼 인간 의지나 모든 활동의 중지를 의미하 는 것이 아니었다. 페늘롱의 참된 의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도덕적 차원에 국한시켰던 당시의 흐름에 도전하고 '행위' 보다 '존재' 를 중요시함으로써, 당시에 적당한 언어로 명확하게 제 시되지 못하였던 '순수 사랑' 에 대한 변호였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직접 경험과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재정비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사실 이해 타산을 완전 초 월한 '순수 사랑' 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다. 하느님만이 완전한 무상적인 사랑의 능력을 가지지만, 신적 능력에 참여함으로써 인간 역시 이 사랑을 경험하고 살 수 있다. 정화된 영혼이 되기 위해 페늘롱은 십자가의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이 말한 "영혼의 어두운 밤의 여 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십자가의 요한, 제노바의 가타리나(Catharina, +1510),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 1567~1622)의 영성적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평 가] 페늘롱의 영성과 신심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 라 영국 성공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세상을 떠나 기 전인 1698년에 그의 주요 저서들은 영어로 번역되었 고, 훗날 미국의 종교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보쉬에와 페늘롱의 논쟁, 그리고 교황청으로부터의 탄핵은 결과적 으로 17~18세기로 이어지는 신비주의자들에 대한 신뢰 를 상실시켰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 내의 신비주의 자 체에 대한 탄핵이 이루어졌고, 신앙과 문화의 조화를 깨 뜨림으로써 철학과 계시 사이의 괴리를 가져왔다. 특히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이 괴리를 부채질하였고, 결과적 으로 신학과 구분된 철학적 이성의 자치권을 선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보쉬에, 자크 베니뉴 ; 쉴피 스회 ; 올리에, 장 자크 ; 정적주의) ※ 참고문헌  H. Brenind, Apologie pour Fénelon, Paris, 1910/ L. Cognet, S.V., 《DSAM》 5, pp. 151~170/ 一, Crépuscule des mystiques, Toulouse, 1958/ A. Delplanque, La pensée de Fénelon d'après ses oeuvres morales et spirituelles, Paris, 1930/ G. Joppin, Fénelon ou la mystique du pur amour, Paris, 1938/ J. Orcibal, Le procès des Maximes des Saints devant le Saint-Ofice, Archivio Italiano per la Storia della Piet V, Roma, 1968, pp. 412~536/ J.L. Goré, L'itinéraire de Fénelon. Humanisme et spiritualité, Grenoble, 1956/ B. Dupriez, Fénelon et la Bible. Les origines du mysticisme」 fénelonien, Paris, 1961/ L.A. Fayard, Fénelon, ce méconnu, Paris, 1961/ R. Spaemann, Reflexion und Spontaneität. Studien ber Fénelon, Stuttgart, 1963/ A. Dru, Fénelon in History, Downside Review, 1968, pp. 1~12/ P. Zovatto, Fénelon e quietismo, Del Bianco Editore, Udine, 1968/ 一, Intorno ad alcuni recenti studi sul quietismo francese, La scuola cattolica 1, 1969, Suppl., pp. 37~671 C. Terzi, Fénelon. la personalit e l'attività del pensiero educativo, Ed. Ciranna, Roma, 1971/ J. Weismayer, S.V., 《WMy》, pp. 157~160/ H. Gouhier, Fénelon philosophe, Paris, 19771 -, Fénelon et le Cartesianisme, Revue des Sciences Philos. et Theolo. 61, 1977, pp. 59~68/ F. Ferrier, Fénelon Le pur amour OU I'angoise surmontée, Revue des Sciences Philos. et Theolo. 61, 1977, pp. 87~961 V. Kapp, Télémaque de Fénelon. La signification d'une oeuvre littéraire a la fin du siecle classique, Tuibingen · Paris, 1982/ R. Leuenberger, Gott in der Hölle lieben, Bedeutungswandel einer Metapher im Streit Fénelons mit Bossuet um den Begriff des pur amour, 82, 1985, pp. 153~1721 Y. Poutet, La Querelle du Quiétisme. A propos de la Corresponndance de Fénelon, Divus Thomas 90, 1987, pp. 372~3821 I. Noye, Fénelon maitre spirituel, La Vie Spirituelle 142, 1988, pp. 407~418/ R. Sansen, Fénelon, un penseur toujours actuel, Mélanges de Science Religieuse 52, 1995, pp. 235~2621 Fénelon, L'amore disarmato-Antologia delle Lettere, introd., scelta dei testi e note di B. Papasogli, Paoline, Milano, 1996/ E. Bini, Echi in Toscana della controversia tra Bossuet e Fénelon, Divinitas 40, 1997, pp. 24~61/ P. Sequeri, Estetica della verità, etica del discorso. I'onest intellettuale della teologia e la forma discorsiva dell' affectus fidei : attualit di Fénelon, Teologia 22, 1997, pp. 48~80. [李再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