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랭, 필리프 프랑수아 레오나르 Perrin, Philippe Frangois Léonard(1885~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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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세례명은 필립보. 한국명은 백문필(白文弼). 1885년 6월 17일 프랑스 리니쉬르아루(Rigny-su-Amox)에)에서 태어나 오툉(Autun) 대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군 생활을 마친 후 페랭은 1907년 9월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10년 9월 24일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2개월 뒤 한국 선교사로 선발되어 11월 18일 프랑스를 출발, 이듬해 1월 1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에는 마침 조선 대목구가 서울 및 대구 대목구로 분리된 시기여서 페랭 신부는 서울 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하우현 본당의 르 각(C.J.A. Le Gac, 郭元良) 신부에게서 한국어를 배웠다. 6월부터 양평 능말(현 용문) 본당에 파견되어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4월 르 각 신부의 뒤를 이어 하우현 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부임 2년 만에 제1차 세계대전(1914~ 1918)이 터지자 동원령으로 1914년 8월 프랑스로 돌아갔다. 프랑스로 돌아가 입대한 그는 병원에서 복무하며 의술을 익혔는데, 이러한 경험은 후일 본당 사목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9월 23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페랭 신부는 10월 21일 간도 지방의 삼원봉(이후 대립자) 본당으로 가서 사목 활동을 재개하였다. 1920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이 지역은 베네딕도회에서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그는 1921년 5월까지 계속해서 삼원봉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펼쳤다.
페랭 신부는 1921년 5월 충청도 합덕(현 구합덕) 본당의 7대 주임으로 발령을 받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 본당에서 사제 생활에 헌신하였다. 그는 부임 직후 크렘프(H.J.-M. Krempff, 慶元善) 신부에 의해 1907년 설립된 매괴학교 운영에 주력하였으며(1928년 폐교), 1927년 7월에는 본당 관할의 신리 사적지를 매입하였다. 또한 목조 건물의 성당이 매우 노후하여 양식 성당의 신축을 추진한 결과, 1929년 10월 9일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종탑 2개를 지닌 로마네스크 양식의 현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가졌다. 페랭 신부는 재직중 성실하고 유능한 회장들을 선발하여 공소 신자들의 회합과 교리 교육에 종사하게 하였고, 성영회 사업 · 자선 사업 등을 통해 지역 사회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이 지역의 교세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27년에 예산 본당, 1939년에 당진 본당이 분리 · 설립되었으며, 합덕 본당도 확장 공사를 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합덕 본당에도 북한군이 쳐들어와 페랭 신부를 감시하다가 8월 15일 그를 체포하여 당진 내무서로 끌고 갔다. 1주일 후인 8월 22일 페랭 신부는 당진 본당에서 체포된 코르데스(M. Cor-dess, 孔) 신부와 함께 어디론가 연행된 이후 행방 불명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코르데스 신부와 페랭 신부는 대전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9월 23일에서 26일 사이에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구합덕 본당에는 페랭신부를 기념하는 신자들의 기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 구합덕 본당)
※ 참고문헌  《M.E.P. 선교사 약전》 《뮈텔 주교 일기》 5 · 6,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 2002/ 구합덕 본당100년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구합덕 본당 100년사 자료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洪延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