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비스트, 페르디난트 Verbiest, Ferdinand(1623~1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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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 중국명은 남회인(南懷仁), 자(子)는 돈백(敦伯). 17세기 중반 특히 청(淸)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시대 중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살 폰 벨(J.A. Schall von Bell, 湯若望)에 이어 흠천감 감정(欽天監監正)이 됨으로써 중국의 역법(曆法) 및 과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생애와 활동〕 1623년 10월 9일 벨기에에서 태어난 페르비스트는 1641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벨기에, 스페인, 로마 등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1657년 중국 선교를 지원하여 1659년 마르티니(M. Martini, 衛匡國)와 함께 중국에 입국한 후 서안(西安)에서 전교하였고, 1660년에는 흠천감 감정직에 있던 살 폰 벨의 부름을 받아 북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1664년 8월부터 1665년 4월까지 양광선(楊光先)의 반(反)천주교 사건인 '역국 대옥' 曆曆局大獄)이 벌어져 그는 살 폰 벨, 부글리오(L. Buglio, 利類思), 마갈엣스(G. de Magalhanes, 安文思) 및 신자인 흠천감 관리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때 페르비스트는 병으로 몸이 마비되어 심문에 답변할 수 없었던 살 폰 벨을 대신하여 법정에서 서양 신법과 천주교의 정당성을 변론하였다. 재판 결과 살 폰 벨을 위시한 흠천감 관리들은 능지처사의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선고 다음날 북경 일원에 지진이 발생하여 살 폰 벨의 사형은 감면되었다.
역국 대옥 후 서양 신법이 폐지되고 양광선이 흠천감 감정이 되었으나 역법 측정에 많은 오류가 발생하였다. 이때 페르비스트가 일련의 중대한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자, 강희제는 1669년 3월 페르비스트를 흠천감 감부(欽天監監副)로 임명하고 1670년부터는 역법 추산에 그의 방법을 따를 것을 명하였다. 그 사이 페르비스트는 마갈엥스, 부글리오와 함께 역국 대옥의 재심과 관련 인물들의 복권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 살 폰 벨은 1669년 8월 11일, 처형당한 5명의 흠천감 감원들은 8월 25일에 복권되었다.
페르비스트는 흠천감 감원들에게 천문학과 수학을 가르쳤고, 강희제에게도 이 분야를 개인 교습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천문 의기를 제작하라는 강희제의 명에 따라 1673년 천체의(天體儀) 황도경위의(黃道經儀), 적도경위의(赤道經緯儀), 홍한의(紅限儀), 상한의(象限儀), 지평의(地平儀) 등 유럽식 의기를 완성하였으며, 1674년에는 새로운 의기의 구조, 필요한 산법(算法), 성표(星表) 등에 관한 설명서인 <신제영대의상지>(新製靈臺儀象志) 16권을 지었다. 이 공로로 태상시소경 (太常寺少卿)을 수여받은 그는, 같은 해 흠천감 감정이 되었다. 또 1678년에는 1,000년 후까지의 역법 추산이 가능한 《강희영년역법》(康熙永年曆法) 32권을 저술하였고, 그 공로로 통정사사통정사(通政使司通政使)의 관작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페르비스트는 천문 역법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 기술방면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1674년 북경에서 제작한 세계 지도인 <곤여전도>(坤輿全圖)는 리치(M.Ricci, 利瑪竇) 신부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와 더불어 중국인에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대시켰다. 즉 <곤여전도>는 평사방위도법(平射方位圖法)에 의한 동반구도(東半球圖)와 서반구도(西半球圖)로 되어있는데, 이러한 양반구도(兩半球圖)는 지구가 둥글다는 개념을 경도와 위도의 조직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영향은 조선에도 미쳐 최한기(崔漢綺)의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와 같이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세계 지리의 지식을 보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페르비스트는 청 왕조를 위해 대포도 주조하여 1674년 삼번(三藩)의 난(亂) 때 강희제의 명을 받아 대포 · 소포 120문(門)을 만들었고, 1680년에는 다시 전포(戰砲) 320위(位)를 주조하였으며, 1682년에는 이러한 경험을 《신위도설》(神威圖說)로 지어 강희제에게 진정하였다. 그리고 삼번의 난 진압에 세운 공로로 공부우시랑(工部右侍郎)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한편 페르비스트는 1676년부터 예수회 중국성구회장(中國省區會長)이 되어 청 왕조를 위한 외교 통역과 번역 임무도 수행하였다. 즉 1676년 러시아 사절단과 1686년 네덜란드 사절단이 방문하였을 때 통역을 담당하였고, 양측 국왕의 서신을 번역하는 일도 맡았다. 이에앞서 그는 강희제가 파견한 내관에게 만주어문(滿洲語文)을 배웠으며, 강희제의 명으로 리치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만주 문자로 번역하였다.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양 학술과 종교 전파에 대해 매우 관대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누구보다 페르비스트를 신임하였다. 이에 페르비스트는 1682년 2월 황제의 관동(關東) 지방 순행과 1683년 6월 북방 국경 순시까지 수행하였고, 개인적으로는 강희제의 수학, 물리학, 천문학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강희제 치하에서 페르비스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헌신적으로 조정에 봉사하였고, 그 결과 천주교에 대한 공허(公許)의 칙령이 내려졌다. 강희제는 1692년 3월 천주교를 관대하게 대할 것과 천주교가 사교(邪敎)가 아님을 강조하는 두차례의 칙서를 내렸는데, 이 문건은 아편 전쟁(1840) 이전 그리스도교가 중국 조정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승인문서였다.
그러나 공허 조치에 앞서 페르비스트는 1687년 11월 병석에 눕게 되었고, 1688년 1월 28일 향년 65세로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강희제는 여러 차례 어의를 보내어 그를 진료하게 하였고, 사망 후에는 대신(大臣) 2명을 보내어 황제의 친필 조문을 낭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장례비와 '근민' (勤敏)의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는데, 중국 선교사 중 사후 황제로부터 시호를 받은 사람은 페르비스트가 유일하다.
〔저 서〕 페르비스트의 대표적 종교서로는 천주교 입문 교리서인 《교요서론》(敎要序論, 북경, 1670)이 있다. 내용은 장 · 절 구분 없이 62편(篇)으로 구성되어 천주의 존재, 천지 창조, 영혼 불멸, 천당, 지옥 등 천주교 교리를 열세 가지로 요약 설명하고, 십계(十誡), 신경(信經), 주의 기도, 성모송, 성호경 등 주요 기도문과 성세성사의 예식 등이 설명되어 있다.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논리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여러 차례 판본을 거듭하였으며, 건륭제(乾隆帝, 1735~1796) 때에는 《사고전서》(四庫全書)에도 수록되었다. 이 책은 페르비스트 본인의 만주어 번역본이 있으며, 1864년에는 한글로도 번역되었다. 이 외의 종교서로는 《선악보략설》(善惡報略說, 북경, 1670), 《성체답의》(聖體答疑), 《도학가전》(道學家傳, 북경, 1686), 《고해원의》(告解原義, 북경, 1730 초 간) 등이 있다.
다음으로 과학과 관련된 저술로는 세계 지도인 <곤여전도>를 비롯하여, 《곤여도설》(坤輿圖說, 북경, 1672), 《의상지》(儀象志) 14권, 《의상도》(儀象圖, 북경, 1673) 2권, 《신제영대의상지》 16권, 《강희영년역법》 32권, 《신위도설》 이론 26권과 도해 44권, 《회조정안》(熙朝定案, 북경) 3권 등 다수가 있다.
〔의의 및 평가〕 페르비스트는 중국 천주교회사상 리치와 살 폰 벨의 훌륭한 승계인이었다. 중국어문 및 만주어문에 정통하여 종교와 과학 한문 서학서를 많이 저술하였고, 천문 역법, 제포(製砲), 활차(滑車) 제조 등 과학기술 방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살폰 벨에 이어 흠천감 감정이 된 그는, '역국 대옥' 후 위기에 직면한 중국 교회를 재기 · 재도약시켜 결국 강희제의 천주교 공인을 가능하게 한 주역이었다. (⇦ 남회인 ;→ 살 폰 벨, 요한 아담 ; 중국)
※ 참고문헌  L.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sur les Jésuites de l'ancienne Mission de Chine 1553~1773, Chang-Hai, 1932/ 方豪, 《中國天主教史人物傳》 卷2, 南懷仁 條, 香港, 1970/ 南懷仁, <熙朝定案>, 《天主教東傳文獻》, 臺灣 學生書局, 1982/ 黃伯祿, 《正教褒》 上 · 下, 上海 慈母堂, 1884/ 徐宗澤 編, 《明清間耶蘇會士譯著提要》, 臺灣, 1949/ 최소자, 《동서 문화 교류사 연구》, 삼영사, 1987/ 이찬, 《한국의 고지도》, 범우사, 1991. 〔張貞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