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이란 지역에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an dy-nasty)를 세운 페르시아인들이 지배한 고대의 대제국(기원전 550~330).
페르시아의 역사, 종교, 문명은 메대(Media) 왕국의 분파로 시작되었다. 메대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은 흔히 서양인들이라고 일컫는 인도-유럽인들 중의 한 분파로, 예로부터 스스로 아리아인(Aryan)이라고 불렀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이란 남부에 자리잡은 페르시아인과 이란 북서부에 자리잡은 메대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메대인들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기원전 575년을 전후로 하여 중근동에서 지정학적으로 대변동이 일어났다. 기원전550년까지 중동에는 바빌로니아, 이집트, 메대, 리디아등 여러 왕국들이 이 지역을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이 많은 나라들은 조그만 부족 국가인 페르시아에 정복되어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페르시아는 워낙 세력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고레스(기원전 559~529)가 엄청난 속도로 국력을 확장하기 전까지의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아케메네스 왕조의 초기 세 황제 치하에서 페르시아 군대가 지배하는 영토는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였다.
〔제국의 설립과 조직 정비〕 제국 이전의 페르시아 왕국 : 페르시아인들은 이란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기원전 1000년경 중앙 아시아에서 직접 넘어왔거나 카프카스(Kavkaz)와 자그로스(Zagros) 산맥을 넘어 파르스(Fars)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이 지역을 후에 '페르시아' 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곳이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가 되었다. 페르시아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4?~430/420?)가 이들을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과 농경 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설명하였지만 근거는 없다. 페르시아인들이 정착한 이 지역은 본래 엘람(Elam) 왕국의 왕들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페르시아 왕국은 제일 먼저 엘람 왕국의 수도인 수사(Susa)와 신(新)엘람 왕국을 정복하면서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과 엘람인들 사이의 접촉은 전쟁 기간에 국한하여 일어났던것은 아니다. 당시 파르스 지방에는 이미 엘람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지역에 정착한 페르시아인들은 이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국가를 조직하고 제도와 법령을 제정할 때 엘람인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고레스의 정복 : 고레스가 첫 번째로 정복한 곳은 아스티아게스(기원전 585~550) 왕이 통치하던 메대 왕국과 그 수도인 엑바타나(Ecbata-na, 현 Hamadan)였다. 고전 자료로 전승되는 국가를 세운 시조에 대한 설화' 를 보면, 페르시아 왕국은 본래 엑바타나에 충성을 맹세한 가신(家臣) 국가였다. 고레스가 메대 왕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스티아게스 왕이 일부 귀족들과 마찰을 일으켜 왕권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엑바타나를 점령한 고레스는 자신을 메대왕의 후계자로 선포하였고, 아스티아게스 왕이 소유한 금, 은, 보화를 획득하여 이를 페르시아로 옮겼다. 이로써 그의 영토는 할리스 강(Halys river, 현 Kizil river)까지 확장되어 크로이소스(기원전 560?~546)가 통치하고 있던 리디아 왕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이에 크로이소스는 신(新)바빌로니아 왕국의 나보니두스(기원전 556~539) 왕과 동맹 관계를 맺고 페르시아에 방어적인 태세를 취하였으나 결국 가빠도기아의 프테리아(Pteria)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패하였다. 다음해 겨울(기원전 546) 고레스가 사르디스(Sardis)를 점령하였지만 크로이소스에게 충성을 약속하였던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고레스의 힘을 과소평가하여 항복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메대 왕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온 밀레도스만은 고레스에게 항복하였다. 고레스는 동부 전선으로 군대를 돌려 여전히 반항하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공격하게 하였고, 치열한 전투 끝에 이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밀레도스만이 페르시아와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고레스가 군대를 동부 전선으로 갑자기 돌린 이유를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바빌론은 사카이(Sakai, 박트리아(Bactria)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과 함께 페르시아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을 조성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는 것이 이러한 적들을 향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란 고원으로 원정대를 보낸 후, 고레스는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는 가장 큰 적대 세력인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그 왕인 나보니두스에게 대항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기원전 539년 고레스가 바빌론을 함락한 것에 대하여 헤로도토스와 크세노폰(Xenophon, 기원전431~350)은 당시의 여러 정치적 요인이나 환경이 고레스에게 유리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고레스가 바빌론을 점령한 후 페르시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원통 비문과 당시에 작성된 바빌론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레스의 승리는 바빌론 자체의 분열 때문이었다. 당시 바빌론인들은 국왕인 나보니두스가 불경건하다고 하여 페르시아와의 싸움보다는 자신들의 왕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바빌론의 정복은 단순하지 않았다. 나보니두스와 바빌론의 군대는 침략자를 저지하기 위하여 맹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오피스(Opis)에서 바빌론 군대가 대패한 다음(기원전 539) 바빌론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 고레스의 장군 중 한 사람인 고브리야스(Gobryas)는 즉시 바빌론으로 입성할 수 있었고, 그직후 고레스가 위엄을 갖추고 입성을 하였다. 바빌론을 점령함으로써 고레스는 유프라테스 강 너머의 영토를 정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여러 왕들과 도시 국가들은 즉시 항복하고 고레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고레스는 문화 유화 정책을 폈다. 엘람, 헷족, 아수르, 바빌로니아가 이전에 펼쳤던 정책과는 달리 피정복자의 종교와 문화를 장려하였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바빌론에서 유배 중이던 모든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는 고레스 칙령의 내용이 나온다(에즈 1, 1-4 ; 6, 3-5). 이 칙령은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가라는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폐허가 된 곳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남기를 원하였고, 고향으로 간 사람들은 소수의 무리였다. 에즈라서 6장 8절에 따르면, 고레스는 유대인들의 귀향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해 국고에서 돈을 지원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하깨서나 즈가리야서에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고레스의 재정 지원에 의심을 품기도 하지만, 페르시아의 문화 · 종교 유화 정책이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곳에서 일괄적으로 발견되기에 이는 사실인 것 같다.
이 고레스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은 다시 유대 땅에 정착하여 예루살렘에 신전을 재건축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을 때 전리품으로 약탈해 간 제사용 기구들도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구약성서에는 고레스의 칙령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나온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이사 45, 1-7). 그러나 성서의 내용과는 달리 고레스는 야훼에 대한 어떤 존경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바빌론에 있는 신전에 대하여 조치하였던 것처럼 야훼를 예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같은 조치를 한 것뿐이다. 이러한 결정이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사건이지만, 페르시아의 정책 담당자들에게는 그들이 늘상 하는 평범한 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어쩌면 고레스가 유대인에게 한 이런 조치는 그가 유대 땅 건너편에 있는 이집트에 군대를 보낼 것을 염두에 둔 명령일 수도 있다.
캄비세스와 이집트 정복 : 고레스가 이집트 정벌에 나서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는 마사제타이(Massagetai)와 중앙 아시아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실종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기원전 529~522)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이오니아와 페니키아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캄비세스는 당시 이집트 왕이 된 프삼티크 3세(기원전 526~525)를 크게 물리치고, 기원전 525년 봄에 당시 이집트의 수도인 사이스(Sais)에 입성하였다. 그는 에티오피아에도 군대를 보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36~323)이 등장할 때까지 중앙 아시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는 중근동을 완전 정복하였고, 이전에 있던 메대 왕국, 리디아, 바빌로니아 그리고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일개 주(州)로 전락하였다.
그리스 역사, 특히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역사 기록과는 달리 이집트 사원에 대한 캄비세스의 조치는 바빌론에서 그의 부친인 고레스가 취한 조치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페르시아 군대의 약탈이 행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이집트의 안정과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며, 특히 사이스에 있는 여신 네이스(Neith)의 신전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파라오라는 칭호를 얻기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그는 대부분의 이집트인들에게 새로운 파라오로 비쳐졌다. 하지만 구약성서에는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가 통치하던 기간 중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그에 대해 유일하게 언급하는 구절은 성전 재건이 방해를 받는 부분이다(에즈 4, 4-5. 24).
반란과 다리우스 1세의 치적 :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을 하는 동안 페르시아에서는 내란이 발생하였고,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 사망하였다(기원전 522). 이에 따라 왕실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났는데, 그 과정은 헤로도토스의 기록뿐만 아니라 다리우스 1세(기원전522~486)가 왕좌에 오른 후 베히스툰(Behistun, 현 Bīsitūn) 절벽에 새긴 비문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비문에 적힌 내용들은 역사가들에 의하여 그 진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다리우스 1세는 에즈라서 4-6장에 언급되고 있다. 그가 등극할 당시는, 고레스 칙령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진행하다가 캄비세스의 반대로 중단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면서 성전 건축에 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입장이 호의적으로 바뀌어 성전을 재건할수 있게 되었다. 다리우스 1세가 타민족의 종교를 인정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아케메네스 왕조 출신이 아니라 파르티아(Parthia)의 방백(方伯, Satrapic)인 히스타스페스(Hystaopps)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마즈다' (Ahura-Mazda)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베히스툰의 높이69m 절벽 면에 가로 7m, 세로 18m의 비문과 가로 3m, 세로 5.5m의 부조를 새겨 놓았던 것이다.
다리우스의 집권 이후 왕실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는 많은 반란 가운데 이집트의 반란만 비문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실은 많은 지역 그것도 제국의 핵심 지역(페르시아, 엘람, 바빌로니아, 메대)과 이란 고원에서 커다란 반란들이 계속 일어났다. 다리우스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522년 12월 바빌로니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엘람의 반군들을 진압하였으며, 아라코시아(Ara-chosia)와 아시리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엘람은 기원전520년에야 다시 충성을 맹세하였고, 이집트에서 질서를 회복한 것은 기원전 518년의 일이었다. 이러한 반란들은 페르시아 왕조가 지닌 성격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들은 자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된 왕조의 혈통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땅을 지배하는 페르시아를 단기간에 축출한 후 과거의 질서로 회귀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은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어 페르시아에 맞서 싸울 많은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반란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나라의 사람들도 독립의 가능성을 꿈꾸었다. 이런 사정들이 구약의 하깨서와 즈가리야서에 언급되는데, 여기에 보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에 대한 희망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고레스와 캄비세스가 이룩한 제국의 안정과 내실을 다졌다. 그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함으로써 왕권과 제국의 힘을 급속도로 확충하였고, 국내 반란 세력을 평정한 후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중앙 아시아와 인도로 진격하여 인더스(Indus) 계곡을 제국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또한 트라케(Thrake)를 평정하였고,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결국 그의 시대에 페르시아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520년 이후 제국 내의 사람들을 새로 조직된 주 단위의 행정 구역으로 재편성하였고, 각 주는 매년마다 경작 가능한 지역을 감안하여 할당된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랍, 에티오피아는 본래의 나라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본래의 페르시아 영토는 모든 공물 헌납에서 면제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행정 구역을 20개로 나누었는데,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 행정 구역 중 하나인 강 건너편' (아바르-나하라)에 속하였다. 모든 방백들에는 페르시아의 고위 귀족들이 임명되었고, 그들은 행정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관할 구역을 통치하였다. 그들은 국경 수비대와 점령지를 관할하는 군대를 소환할수 있는 권한을 가진 대신 매년 페르시아 왕에게 공물을 바쳐야 하였는데, 왕은 이를 거두어 창고와 보물을 쌓아놓는 큰 건물에 보관하였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망한 후 발견된 귀금속을 쌓아 놓은 건물의 크기를 보면, 당시 제국의 조직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확실하게 운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방백들을 효율적으로 장악하기 위하여 본토 페르시아 사람들을 상당수 각 주에 파견하였고, 이들에게는 방백의 요청에 따라 기마병을 이끌고 출동할 책임이 주어졌다. 행정 조직으로 편성된 주에 사는 사람들과 왕족들 그리고 인정받은 공동체들은 어느 수준까지는 자치권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지방의 책임자는 왕실 군대에 보낸 그 지역 출신의 파견대를 지휘할 임무가 주어졌다. 이러한 정책때문에 페르시아에 점령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피점령국이지만 그들 내부 조직의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20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왕은 신(神)에 대한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신들의 지상 대리자로 자처하였다.
다리우스는 제국을 통치하면서 자신이 새로운 권력자라는 것을 주요 행정 도시에 세운 기념비적인 구조물에 새겨 놓았다. 그는 수사에 제일 처음 기념비적인 구조물을 세웠고, 그 후 바빌론과 고레스가 수도로 정하였던 파사르가데(Pasargadae)에 크고 화려한 왕궁을 신축하였다. 또한 페르세폴리스에 수도를 정하였는데, 파사르가데가 북쪽에 위치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데 효과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페르세폴리스를 제1 수도로 정하고, 제2 수도는 수사(겨울궁), 제3수도는 엑바타나(여름궁)로 정하였다. 그리고 제4 수도는 바빌론이었다는데, 아직까지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영토의 축소와 제국의 쇠퇴〕 지중해에서의 후퇴 : 기원전 499년에 밀레도스의 참주(僭主, tyrannos)인 아리스타고라스가 반란을 일으켜 사르디스를 약탈하고 이오니아를 반란에 가담시켰다. 그러자 페르시아의 육군과 해군은 기원전 497년에 키프로스 왕국을 재점령하고, 이어 북부 지방의 도시 국가들을 항복시켰으며, 그리스 해군을 격파하고 기원전 494년에 밀레도스를 재점령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는 도시를 파괴하고 그곳 주민들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민주 제도의 정권이 들어서도록 하였으며, 도시 국가의 영토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조례를 확정하였다.
기원전 490년에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의 목적은 그리스 영토를 페르시아에 합병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에게 해에 있는 키글라데스 제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군대가 마라톤 평원에서 패하자, 다리우스는 즉시 군대를 그리스로 보내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86년 다리우스가 사망하고 이어 바빌론과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6~465)는 그리스 정벌을 뒤로 미루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는 전 제국의 육상 및 해상 병력을 동원하여 그리스 정벌에 나섰고, 이에 맞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동맹을 맺고 공동 작전을 펼쳤다.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를 점령하였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에 대패함으로써 커다란 손실을 입었고, 이에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거두어 본국으로 퇴각하였다.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거듭 패배하자, 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은 독립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아테네를 주축으로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여기에 많은 아시아의 도시 국가들이 참여하였다. 기원전 476년에 전략적 상황이 크게 변하여 페르시아는 지중해에서 더이상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테네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지만, 몇 년 후 이집트의 반란을 지원하려던 아테네 군대는 페르시아 군대에 거의 완패하였다. 이로써 아테네와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다시 받게되었다. 몇 년 후 키프로스 해전에서 다시 아테네가 승리를 거두자, 구약성서에서 "아르닥사싸" 라고 불리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65~425)는 기원전 448년에 아테네와 칼리아스(Callias)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는 지중해에서 그 지배력의 현저한 퇴조를 감수해야만 하였다. 평화 조약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후계자인 다리우스 2세(기원전 423~404)가 왕위에 오른직후 다시 갱신되었다.
제국의 변화 : 크세르크세스 1세는 유대인 고아 처녀인 에스델을 자신의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 왕(에스 1, 1 : 2, 16-17 ; 4, 6)으로, "아하스에로스"의 그리스어 표기가 크세르크세스이다. 에스델서에서 언급하는 크세르크세스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초대 번역본들, 특히 칠십인역과 요세푸스(F. Josephus, 37/38?~100?)의 《유대 고 대사》(Antiquitates Iudaicae), 유대교의 미드라쉬, 고대 시리아어역 성서인 페쉬타는 에스델서의 아하스에로스 왕을 크세르크세스가 아니라 그의 아들 아르닥사싸(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하스에로스 왕은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틀림없다. 크세르크세스는 에즈라서 4장 6절에서도 언급된다. "아하스에로스의 통치 때에는, 그의 통치가 시작되자마자 그들(그땅의 사람들)이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 여기서 아하스에로스가 통치하기 시작한 해는 기원전 486년이다. 또 다니엘서 11장 2절에서도 페르시아왕들이 언급된다. "페르시아에는 앞으로 세 임금이 더 일어나리라. 그리고 넷째는 앞의 어느 임금보다도 큰 재물을 모을 터인데, 그렇게 재물을 모아 강력해지면 그는 그리스 왕국을 치려고 온 나라를 일으켜 세우리라." 앞으로 일어날 세 임금을 고레스, 캄비세스, 다리우스 1세로 본다면, 넷째는 크세르크세스라고 간접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가 지중해에서 후퇴한 시점부터 페르시아 왕조는 서서히 쇠락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해 줄 만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쓴 여러 책에서 발견되지만, 그리스인들의 편향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페르시아 입장에서 본다면 불행하게도 남겨진 기록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모든 정황들을 살펴보건대, 페르시아가 지중해에서 후퇴한 사건으로 제국에 속한 많은 나라들을 다스리는 데 치명적인 위협을 받지는 않았을것이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출토된 비문에 의하면, 지중해에서 후퇴한 다음 제국 내에서 이루어진 건설 사업은 크세르크세스 치하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등극 초에 이루어진 것보다 훨씬 더 왕성하였다. 당시 왕들의 활동은 왕실 비문으로 확인된다. 이 기록은 크세르크세스왕이 반란 지역의 질서를 회복한 사실을 맨 먼저 열거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 일어난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예방해 주지는 못하였다. 당시에는 왕이 자기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후 후계자들은 왕위에 오를 때까지 힘들고 거친 소용돌이를 거쳐야만하였다.
구약성서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관련된 예언자는 에즈라와 느헤미야이다. 전통적으로 에즈라는 "아르닥사싸" 라고 성서에서 불리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재위 7년인 기원전 458년(에즈 7, 7)에, 느헤미야는 같은 왕 재위 20년인 기원전 445년(느헤 2, 1)에 등장한것으로 여겨진다.
느헤미야는 아르닥사싸 1세 때 술 시중 담당으로 발탁되었다(느헤 2, 1).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성서 이외의 자료로 이집트의 엘레판탄(Elephantine)에서 발견된 아람어 파피루스(기원전 407)가 있는데, 여기에는 느헤미야를 질시하였던 사마리아의 지방 장관 산발랏(Sanballat)도 언급되어 있다(느헤 2, 10). 예언자 말라기도 아르닥사싸 1세 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말라기는 에즈라의 종교 개혁의 기틀 마련에 힘썼다. 당시에 쓰여졌다고 생각되는 성서는 이른바 제3 이사야서(이사 56-66장), 요나서, 시편들, 잠언, 코헬렛 등이다.
기원전 425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왕위에 오른 지 몇 주일 만에 암살되었다. 그러자 그의 서출(庶出)인 두 아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고, 결국 치열한 내전 끝에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관습법에 따라 장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기원전 404~359/358)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기원전 404년 왕위에 오를 때 장자 계승을 반대하는 동생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그리스 도시 국가에 대한 페르시아 왕권의 확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그러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이러한 투쟁이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는 없다. 페르시아의 명문 가문들은 그러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위협하거나 넘보지 않았다.
〔재확장과 종말〕 세력 확산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소아시아에서 뚜렷한 왕권의 확립을 이루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전쟁에서 패배한 다음해에 스파르타는 아케메네스 왕조에게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군사 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야심이 많은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기원전 399~360)조차 이 지역에 대한 페르시아의 장악력에 위협이 되지는 못하였다.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에 대항하기 위해 아테네와 코논의 동맹을 적극 후원하였다. 기원전386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아날키다스(Analki-das) 평화 조약을 선포하고, 전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이를 일방적으로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 조약에 의거하여 페르시아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 사이의 분쟁에 중재자로 관여하였다.
이집트 침략과 방백의 반란 : 페르시아는 기원전 404년부터 독립한 이집트를 재탈환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아코리스(기원전 392~380)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던 시기의 이집트는 지중해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막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원전 385~382년과 373년 그리고 360~359년에 군대를 동원하여 이집트 정벌에 나섰지만, 매번 패배하였다. 그리고 이 패배로 군사적인 손실은 물론 페르시아 대왕의 위엄이 크게 손상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아날키다스 평화 조약을 서둘러 체결하도록 한 이유 중 하나는 이집트에 군사력을 집중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군대의 거듭된 패전이 다른 여러 지역들의 반란을 부추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왕실은 기원전 4세기 내내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여러 방백들의 반란으로 수차례 위기를 겪었고, 그로 인해 왕실이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왕실 군대가 출동하여 이 반란들은 초기에 진압되었고, 이로 인한 소동은 곧 사라졌다.
고레스 원정 때부터 상당수의 용병들을 참전시키는 것이 페르시아의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기원전 359~338)는 즉위 후 방백들에게 그리스 용병을 휘하에 두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스인들은 고도의 전쟁 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뛰어난 용병들을 방백들 휘하에 남겨 두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51~350년 페르시아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다시 한 번 패배하자, 다음해에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의 육군과 해군을 출동시켰다. 기원전345년 시돈은 항복하였지만 끔찍한 보복을 당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43년 페르시아 군대는 상당수의 그리스 용병을 거느리고 이집트에 출정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340년경에는 기원전 480년에 정복하였던 이집트 영토의 대부분을 다시 차지하였다. 여러 차례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는 정복지에서 확고한 통치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소아시아에서는 충성도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페르시아에 복종하는 왕들에게 맡겨졌던 지역의 통치권을 방백들의 권한으로 이양시켰다.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저술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페르시아는 건재하였다.
왕조의 멸망 : 서부 전선의 위협이 증대되면서 페르시아 왕조는 기원전 4세기 동안 심각한 위기를 다시 경험하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막내 아들인 아르세스(기원전 338~336)를 추종하는 천인대장 바고아스(Ba-goas)에 의해 살해되었다. 바고아스는 왕조의 먼 친척을 다리우스 3세(기원전 336~330)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등극시켰다.
페르시아가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고 그리스에 대한 걱정을 덜어내는 동안 필리포스 2세(기원전 359~336) 치하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는데, 페르시아 왕들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필리포스 2세는 몇 년 만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를 지브롤터(Gib-raltar) 해협까지 확장시켰고, 그의 군대를 무적의 군대로 길렀다. 그리고 기원전 338년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Chaeroneia)에서 완파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코린트 동맹을 결성하였는데, 그 명분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페르시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었다. 이후 소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 군대의 강력한 작전이 펼쳐졌으나, 기원전 337년 페르시아의 장군 멤논(Memnon)이 이를 격파하였다. 필리포스 2세가 죽자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대왕이 왕위를 이었고, 마케도니아 군대를 바다 건너편으로 몰아내라는 임무가 소아시아의 방백에게 주어졌다. 기원전 334년 5월의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더는 소아시아의 방백에게서 페르시아의 군대 조직과 병참 분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기원전 334년 겨울에 페르시아는 소아시아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다음해 봄에 멤논이 죽자, 페르시아는 알렉산더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페르시아 해군의 막강한 전력에 종언을 고하였다.
위기 상황이 커지자 다리우스 3세는 왕실 군대를 동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란의 동부 지역을 맡고 있는 군대를 제외한 제국 내의 거의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바빌론에 집결시킨 후 킬리기아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33년 11월의 이수스(Issus)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고, 자신의 부인과 자녀들 및 왕실 가족을 남겨 두고 도주하였다. 다리우스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그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연안 그리고 이집트를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을 포기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동부 이란 주둔군을 소집하여 새로운 진용을 정비하였다. 군대는 바빌론에 집결하여 훈련을 받은 다음 티그리스(Tigns) 강 상류계곡과 아르벨라(Arbela, 현 Irbīl에 산개하였고, 왕실 전용 도로에서 마케도니아 군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31년 10월 초순에 재개된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다시 알렉산더에게 패하여 엑바타나로 도주하였다. 이 싸움으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주요 수도(首都)인 바빌론과 수사를 저항 없이 장악할 수 있었고, 여기서 막 대한 페르시아 왕실의 재산을 획득하였다. 그는 그해 말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하였는데, 이 도시는 기원전 330년 봄에 약탈을 당하기 이전 알렉산더에게 항복하였다. 다리우스는 메대로 가서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준비하였으나 부하들의 반란과 마케도니아 군대의 빠른 추격으로 전투를 치루지도 못하였고, 결국 기원전 330년 7월에 박트리아 지방의 방백인 베수스(Bessus, ?~기원전 329?)에게 암살되었다. 베수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라 박트리아에서 알렉산더의 군대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싸움에 패하고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다리우스 3세의 죽음으로 페르시아가 사라졌다고 할수 있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조직은 알렉산더 대왕 생전에는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존속되었다. 알렉산더는 기존의 방백 제도나 공물 헌납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란과 페르시아의 귀족들이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였던 정책은 페르시아와 이란 사람들을 점진적이고 유연한 방법으로 새로운 제국의 통치 계급으로 부상시키는 것이었다. (→ 느헤미야서 ; 메대 왕국 ; 밀레도스 ; 바빌론 ; 바빌론 유배 ; 에즈라서 ; 이란 ; 이스라엘 ; 이집트 ; 조로아스터교)
※ 참고문헌 정태현, 《성서 입문 상권 : 성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 도서출판 일과 놀이, 2000/ Pierre Briant, From Cyrus to Alexander :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Eisenbrauns, 2004/ John M. Cook, Persian Empire, Knopf Publishing Corp., 1983/ Roland Kent, Old Persian Grammar Texts Lexicon, American Oriental Socieity Series 33, American Oriental Society, 1989/ A.T. Olmstead,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72/ Karen Zeinert, Persian Empire, Marshall Cavendish Inc., 1996/ R. Mayer · W. De Vries, 《LThK》 8, pp. 283~287 E. Pax, 《LThK》 8, pp. 111~115/J.P. De Menasce, Persian religion, ancient, 《NCE》 11, 2003, pp. 142~145/ R.N.Frye, 《NCE》 11, 2003, pp. 134~141. 〔邊琪燦〕
페르시아 [히]פרס [그]Περσική [라 · 영]Per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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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에게 침략을 받은 페르세폴리스의 유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