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카르타고의 순교자. 축일은 3월 7일.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Passio SS. Perpe-tuae et Felicitatis)가 순교자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로서 함께 순교한 펠리치타에 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이다. 이 수난기는 환시와 순교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며,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도 이 수난기를 자주 인용하였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는 202년 3월 7일 카르타고의 원형 경기장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두 성인들은 4세기경부터 3월 7일에 로마에서 순교자로 공경을 받았고, 성인 호칭 기도문에도 수록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는 제국 내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하였고, 이에 불응할 경우 혹독하게 처벌하였다. 그로 인해 박해가 심해졌다. 203년에 카르타고의 귀족으로 교리를 배우고 있던 22세의 페르페투아와 임신 8개월이었던 하녀 펠리치타, 그리고 레보카토(Revo-catus), 사투르니노(Saturninus), 세쿤둘로(Secundulus) 그리고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던 사투로(Saturus)가 체포되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수난기》에는 그들이 갇혀 있던 감옥의 무서운 분위기와 그들이 느꼈던 엄청난 두려움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자, 신앙이 없던 페르페투아의 아버지는 딸에게 배교를 설득하였다. 하지만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감옥에서 세례를 받았다. 페르페투아는 감옥에서 환시를 보았는데, 용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사다리를 올라가 푸른 풀밭에서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아름다운 곳에 다다르는 환시였다. 페르페투아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린 아들을 감옥으로 데리고와서 보여 주며 거듭 설득하고, 광장에서 이들의 무죄를 외치기도 하였지만 결국 그들은 로마 황제를 위해 열린 축제에서 짐승들의 먹이로 바쳐졌다.
한편 펠리치타는 다른 순교자들과 한 곳에 갇혀 있지않았다. 그것은 임신한 여인을 처형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에 아이의 출산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펠리치타는 엄청난 산고를 겪고 감옥에서 여자아이를 조산하였다. 아기는 그리스도인인 한 여인에게 입양되었고, 그녀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함께 붙잡혔던 동료들 중에서 세쿤둘로는 옥사하였고, 나머지는 매질을 당한 뒤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제일 먼저 페르페투아가 소에 받혀 허공에 떴다가 뒤로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펠리치타가 땅에 넘어져 있는것을 보고 달려가 손으로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이들은 경기장 밖으로 나왔지만, 사투로는 표범에게 내던져져 피가 낭자하였다. 하지만 역시 죽지 않자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를 비롯한 동료들은 참수될 장소로 보내졌다. 그들은 평화의 예식으로 서로 입을 맞춘 뒤, 사투로가 먼저 참수되고 페르페투아가 참수되었으며, 펠리치타 역시 목이 잘려 죽음을 당하였다. 순교하기 전에 페르페투아는 또 다른 환시를 보았는데, 그것은 병으로 죽은 막내 동생이 천국에서 그녀를 따라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의 축일은 모든 그리스도 교회에서 매우 유명한 축일이 되었으며, 초기의 로마 전례력과 시리아 전례력에도 수록되었다. 1907년에는 카르타고에 있는 성인들의 무덤 위에 대성전이 세워졌다. (⇦ 펠리치타 ; → 순교 전기)
※ 참고문헌 E. Hoade, 《NCE》 11, 2003, pp. 130~131/ David Hugh Farmer,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p.387~388. 〔宋炯萬〕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 Perpetua et Felic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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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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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페투아 성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