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르카, 프란체스코 Petrarca, Franceso(1304~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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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관 시인 페트라르카.

계관 시인 페트라르카.

이탈리아 인문주의의 창시자. 단테(A. Dante, 1265~1321) 이후 최고의 시인.
"상실되고 소멸되었던 옛 문체의 아름다움을 재생시킬수 있을 만큼 대단한 재주를 지녔던 첫 번째 인물"이라고 브루니(L. Burni, 1370?~1444)가 《페트라르카의 생애》(1436)에서 기록하였듯이, 그는 위대한 인문주의자였다.
〔생 애〕 페트라르카는 1304년 7월 20일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의 아레초(Arezzo)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단테와도 친교를 맺었던 인물로 공증인이었다. 피사(Pisa)에 잠시 체류한 후 가족 전체가 1312년에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간 것은,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피렌체(Firenze)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는 그곳에서 수사학, 문법, 변증법을 공부한 후, 1316년 부친의 권유로 몽펠리에(Montpellier)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320년에는 동생 게라르도(Ghe-rardo)와 함께 볼로냐(Bologna)로 가서 6년 동안 법률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법률이 아니라 고전 문학에 있었다. 1326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아비뇽으로 돌아온 그는 주로 고전 문학, 특히 치체로(M.T.Cicero, 기원전 106~43), 리비우스(T. Livius, 기원전 641 59~서기 17) , 베르질리우스(M. Vergilius, 기원전 70~19), 그리고 교회의 교부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더할 수 있었다.
페트라르카는 1327년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것은 4월 6일 아비농의 산타 키아라 성당에서의 젊은 숙녀와의 만남으로, 그녀가 누군지는 아직도 알려져 있지않다. 다만 그녀의 이름에 대해 페트라르카의 한 소네트(sonnet)에서는 라우레타(Laureta)로, 다른 곳에서는 라우라(Laura)라고 지칭한다. 비록 짝사랑이었지만 그녀는 페트라르카의 영원한 여성으로 남아 그의 시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의 친구로 롱베(Lombez)의 주교가 되는 자코모 콜론나(Giacomo Colonna)는 그녀의 실존에 대해 의심을 나타냈는데, 이에 대해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너무나도 진실된 사랑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 왔으며, 아무리 해도 그녀로부터 피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 사랑이 그에게 수없이 많은 이탈리아어로 된 시와 라틴어로 된 시를 쓰도록 하였던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사제가 되기 위해 1330년에 소품(小品, minor orders)을 받았다. 그리고 볼로냐에서 알고 지냈던 자코모 콜론나와 아비뇽에서 재회하여 두터운 친교를 맺었고, 1333년에는 프랑스와 독일 등지를 여행하였다. 그의 여행은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혹은 사업상의 여행이 아니라 오로지 미지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되었으며, 새로운 것에 대한 페트라르카의 열정은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바깥 세상에 투영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것은 곧 자아의 진실된 발견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우라에 대한 사랑이나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고전 연구에서 멀어질 수는 없었다. 이 여행 중에 그는 리에주(Liège)의 수도원 서고에서 치체로의 연설문 2개의 사본을 찾았으며, 아우구스티노회수사인 산 세폴크로의 디오니기(Dionigi de San Sepolcro)와 친교를 맺었다. 그로부터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고백록》(Confessiones) 사본을 받은 페트라르카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사본을 간직하고 영적 생활의 지침서로 삼았다. 또한 그는 교회 인사들과도 친교를 맺었는데, 특히 자코모의 형제인 조반니콜론나(Giovanni Colonna) 추기경의 가문 경당에서 1·337년까지 일하였으며, 이후 그와의 우정뿐만 아니라 후원까지 받게 되었다.
1336년 4월에 페트라르카는 동생 게라르도와 함께 방투(Ventoux) 산으로 등산을 갔었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다가 지니고 있던 《고백록》을 우연히 펼쳤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되었다. "사람들은 산들의 높이, 바다의 장엄한 파도, 강들의 기다란 흐름, 대양의 무한성, 별들의 움직임을 찬미하면서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다." 그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보다 엄격한 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보다는 땅의 문제를, 영혼보다는 육신을 우위로 삼아 왔다고 여기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때부터 그의 고독한 삶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성직자다운 삶, 즉 금욕과 절제의 삶을 동경하였다. 그리하여 1337년에 '지상에서 하늘의 대리를 담당하고 있는' 로마를 여행한 다음 아비뇽으로 되돌아와 인근의 보클뤼즈(Vaucluse)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목가시》(Camen bucol-licum), 《고독한 삶들》(De vita solotaria) 2권, 그리고 《비밀》(Secretum) 3편, 《아프리카》(Africa), 자전적 에세이 등의 집필을 시작하거나 완료하였는데, 이 모든 작품은 라틴어로 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라틴어 시인, 박학한 시인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고, 명예에 대한 욕구도 커져갔다. 학자와 시인으로서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로마에서는 잊혀진 전통을 다시 회복시킨 페트라르카에게 계관 시인' (桂冠詩人)의 영예를 주고자 하였고, 그는 1341년 4월 8일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서 월계관을 부여받았다. "시와 역사 분야에서 고대 작가들을 강독하고 논평하고 해석하였으므로,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저서와 시를 썼으므로" 계관 시인에 추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진 연설에서 "시는 도덕적 · 역사적 진실을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라고 하였으며 "시는 곧 신학"이라고도 역설하였다. 시를 성스럽게 여긴 것이다. 이처럼 시를 성스럽게 지켜야 한다는 승화된 신념이 있었기에 시를 통해 세상의 헛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이 수치스러워 페트라르카는 월계관을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사도들의 무덤에 바쳤다.
이후 그는 얼마 동안 여행을 하다가 1343년 보클뤼즈로 돌아와 은거하며 생활하였다. 하지만 이후 발생한 여러 사건들이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아비뇽 교황청과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1346년 콜론나 추기경과의 우정이 깨졌고, 1348년의 흑사병으로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또한 그는 여러 차례 로마로 성지 순례를 하였으며, 1350년 성년(聖年)의 성지 순례를 통해 관능적인 쾌락을 버렸다. 그 와중에도 방대한 문학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1353년에는 밀라노(Milano)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였으며, 1361년 초에는 흑사병을 피해 파도바(Padova)로 옮겼고, 1362년 9월에는 베네치아(Venezia)로 갔다. 이곳에서 베네치아의 정치 및 여러 분야에 걸쳐 영예로운 역할을 하였지만, 1367년 다시 파도바로 거처를 옮겼다. 1370년 이후 인근의 에우간네이(Euganean Hillls) 산지에 있는 아르콰(Arquà)에서 생활하였으며, 1374년 7월 19일 서재에서 일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작품과 사상〕 페트라르카의 서간문은 그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서간들은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대략 네 묶음으로 집약될 수 있다. 즉 1325~1361년의 서간문에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24권과, 1361년부터 죽을 때까지 썼던 편지 묶음 <노후> 17권, <무명>이라는 묶음의 수신자 없는 편지들, 그리고 <기타>가 있다. 페트라르카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캄파니아(Campania)의 루도비코(Ludovicus)에게 헌정하였는데, 여기에 담겨진 글들은 주로 친척 및 친구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 넬리에게 바친 <노후>에는 페트라르카의 정치 사상 및 스콜라 철학과 점성술에 대한 반론이 전개되어 있다. 그리고 <무명>에는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의 부패상을 비판하면서 초대 교회의 청빈 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편지들은 주로 치체로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분명한 수신자가 있는가 하면 가상적인 수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어 내용이 다양하다. 그리고 모든 편지들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훌륭한 문학 작품, 즉 에세이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러한 글들 속에 자신의 사상을 털어놓고자 하였다. 때로는 인생, 인정, 고뇌, 고독,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때로는 철학, 정치, 문학 등에 대해서 아름답고 품위 있는 문체로 기술하였다.
그는 서간문을 통해 자신의 세계는 물론 문학 세계도 정리하고 있다. "나는 학문에 관하여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학문 자체를 더욱더 사랑하며, 일정한 학파에 속하려고 갈망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페트라르카의 소박함과 겸손이 담긴 글이다. 그는 자신이 웅변가, 역사가, 시인, 철학자 등이 아니라 촌부(村夫)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시인이기를 갈망하였다. 철학은 그에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치체로의 영향 때문인지 그는 철학을 단순히 생활 방법을 교육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였고, 인문주의 정신을 무엇보다도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시와 역사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란 참으로 어려운 양식의 문학이라고 브루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적하고 있다. 페트라르카는 서간문 곳곳에서 정치에 관해서도 말하였으나, 그에게 있어 정치는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기회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은 자신의 삶은 물론 타인의 삶을 측정하고 이해하는 화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기술은 고전을 연구하고 또 고전 정신을 이해하는데 스스로 개발한 새로운 정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페트라르카는 중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삶의 개념, 당시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고전 속에 있다고 보았기에 그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래서 그를 '인문주의 창시자' 라고 하는 것이다. 고전 연구의 중요한 결실은 그의 시와 산문에 잘 나타난다. 《아프리카》, 《목가시》, 《시적 서간문》(Metricae) 등 세 권은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모두 인문주의의 이상에서 나온 작품이다. 고대 로마 공화국의 위대성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산물로, 육각시(六脚詩) 형태에 서사적 요소를 담고 있는 《아프리카》는 나폴리 왕국의 국왕 로베르토 단지오(Roberto d'Angio)에게 헌정되었다. 목적 의식이 너무나 강해 시적 가치가 약간 떨어진다는 일반적인 평을 듣고 있지만, 고뇌 속에 허덕이는 인간사에 대해 비애를 느끼는 점에서는 탁월한 시 정신이 발견된다. 《목가시》는 로베르토 왕에 대한 애도, 콜라 디 리엔초(Cola di Rienzo, 1313~1354)의 유토피아적인 사상에 대한 칭송, 부패한 아비농 교황청에 대한 비난 등을 다루고 있는데 비교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페트라르카의 라틴어 시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은 《시적 서간문》이다. 1331 1361년에 쓴 이 작품에는 정치적, 윤리적 혹은 아부적 기질이 담겨있는 반면, 제벤나(Gebena) 산상에서 조국 이탈리아에 보낸 찬사나 조반니 콜론나에게 보내는 시 등은 행복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집에서 제일 유명한 시는 <이탈리아에게>(Ad Italiam)이다. 조국에 바치는 헌정시 성격을 지닌 이 시에서 그의 근대적 정신이 수용된 정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산문에서 근대 정신을 고취하였다. 특히 인문주의적 성격을 강조한 《위대한 인물론》(De viris illustibus), 《기억해 둘 사건들》(Rerum memorandarum libri quattuor)을 비롯하여 《고독한 삶들》, 《종교적 안락론》(De otio religioso) 등의 산문들을 통해 그의 정치, 역사, 철학, 인생에 대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단테에 의해 제1의 철학자라고 지칭될 만큼 중세 철학의 상징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보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이 페트라르카의 관심을 더욱 끌었다. 아울러 치체로와 아우구스티노를 열심히 연구하면서 새로운 학풍의 창설에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는 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으며, 또 철학 자체를 단순히 행복한 삶을 위한 기술과 교훈적인 학문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컸다. 그 예가 로물루스(Romulus)부터 카이사르(J. Caesar, 기원전 100~44)까지의 인물들을 역사적 기술로 엮어 놓은 《위대한 인물론》이다. 이 산문은 심리묘사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 높은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후에 구약성서와 고전 시대, 그리스도교 세계로의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담부터 시작되는 모든 시대의 유명인들의 전기로 확대되었다. 또 윤리적인 사고를 바탕에 두고 있는 산문으로는 《기억해 둘 사건들》이 있다. 페트라르카는 이 글에서 그리스, 로마의 역사에서 따온 삽화나 간단한 이야기들을 들어 윤리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페트라르카의 산문 중 높은 평판을 받고 있는 작품은 《나의 비밀》(Secretum meum)이다. 1343년경에 쓰여진이 작품은 그의 《시집》(Rime)과 함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시인 자신과 아우구스티노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고 그 대화를 지켜보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진리의 표상이며, 아우구스티노는 플라톤, 치체로, 세네카(L.A. Seneca, 기원전 4~서기 65)의 지혜를 그리스도교의 정신 속에 통합 시키는 인물로 부상되고 있다.
페트라르카는 라틴어의 절대적인 신봉자였다. 그는 수많은 시를 이탈리아어로 썼지만,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긴 작품들은 모두 라틴어로 저술하였다. 가장 훌륭한 문어(文語)는 라틴어이고, 또 라틴어로 써야 보편성과 우주성을 보다 깊고 높게 나타낼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를 무시하거나 가벼이 여겼던 것은 아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이탈리아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는 <나는 이탈리아인>이라는 시에서 "이탈리아인은 라틴인을 의미하고, 라틴인은 문명인, 문명인은 반야만인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페트라르카의 라틴어에 대한 편애는 대단하였다. 심지어 말년에는 젊었을 때 발표하였던 이탈리아어 작품들을 모두 불사르려고 하였으며, 그래서 이탈리아어로 된 보카치오(G. Boccaccio, 1313~1375)의 《데카메론》(Dea-meron)도 매우 무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탈리아어 시를 갖고 있는 친지들에게 더이상 유포시키지 말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를 후세에 유명하게 만든 것은 라틴어 작품이 아니라, 그 자신이 등한시하였던 이탈리아어 작품들이다.
그중에서도 《시집》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자신은 이를 《일반적인 사건의 단편들》(Rerum vulgarum fragmenta)이라 하였고, 후에 가서는 <시들> 혹은 《칸초니에레》 (Canzoniere)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366편의 이탈리아어 시가 집대성된 이 《시집》은 1330년 이후 창작된 시들로 이루어졌으며, 라우라의 생전 시와 사후의 시로 분류될 수 있다. 즉 페트라르카의 시심(詩心)은 대부분 사랑하는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이탈리아어 시를 묶으면서 더러는 버린 것들도 있으나, 후세 학자들이 다시 정리하여 <시집> 속에 첨가하였다. 이 책의 시들은 연대적 심리 및 도덕적 관점을 염두에 두고 배열한 시들이지만, 전체적으로 상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또한 사랑이 주제이지만, 기쁨과 환희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독한 시인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의 고백, 절망 등이 배합되어 있다. 한 여인에 대한 번민의 탓도 있겠으나, 비가적(悲歌的)인 사랑의 노래는 다분히 청신체(淸新體, dolce stil nuovo)의 특징이다. 그러나 청신체 시의 경우 사랑과 하느님의 화해, 그리고 여인을 하늘까지 고양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페트라르카의 시는 사랑과 여인(Laura)의 이상(理想)에 감동을 받는 것은 청신체풍과 같지만 속세적 미가 추구되고 있으며, 천상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존재로서 라우라가 인식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사랑의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세계에는 영과 육의 피로함이 용해되어 있다. 이는 그의 대표적 시로 여겨지는 <맑고 신선하고 달콤한 물>(Chiare, fresche e dolci acque)에 잘 나타나 있다. 단테의 시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의 여인, 기적을 보이려 지상에 내려온 여인으로 베아트리체(Beatice, 1266~1290)가 부상되지만, 페트라르카의 라우라는 지상에서 천상으로 승화한다. 다시 말해 실재 속의 여인인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인간과 삶, 그리고 현실에 대한 태도와 사상에 잘 어울리는 점이다. 《시집》은 사랑의 시 이외에 다른 주제를 담고있는 시들도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나의 이탈리아>와 같은 정치적 · 애국적인 시로, 라틴어로 된 <이탈리아에게>와 소재가 같은 이 시에서 페트라르카는 조국을 찬미하고 또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작품집은 3연체 형식의 연작시 《승리들》(Trionfi)이다. 영원성과 영혼의 문제가 시인의 감정과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집은 사랑, 명성,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사랑은 인간들을 이기고, 순결은 사랑을 이기고, 죽음은 순결을 이기고, 명성은 죽음을 이기며, 또 시간이 명성을 이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은 영원성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다분히 《나의 비밀》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또 《시집》에서 드러나는 그의 인생 철학도 깊이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승리들》에서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영혼과의 심오한 대화를 중요시한다. 그는 《승리들》로써 단테처럼 이탈리아어의 시적 고양을 이루었고, 《시집》보다 더욱 시적이며 더욱 위엄있는 문체를 구사한 이 작품집으로 이탈리아어의 정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어의 문학성과 미학성을 개발하여 고전 문학의 경지에 다다르게 함으로써 르네상스 시기의 민족 문학의 발전에 커다란 자극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 가톨릭 문학, 이탈리아의)
※ 참고문헌  F. Petrarca, Opere di Petrarca, Milano, Mursia, 1969/ L.F. Wallace, The Renaisance, Holt, Berkshire, 1958(金聲近 역, 《르네상스》, 탐구당, 1972)/ E. Garin, Umanesimo italiano, Bari, Laterza, 1968/ F. Petrarca, Coronation, Oration, trans. by E.H. Wilkins, Cam-bridge, Mass, 1955/ M. Solmi, Renaissance in Encyclopedia ofWorld Art, vol. XII, N.Y., McGraw-Hill Book Co., 1966/ Mario Sansone, Disegno storico della letteratura italiana, Milano, Principato, 1969/ N. Sapegno, Compendio di storia della letteratura italliana, Firenze, La Nouva Italia, 1963/ E.H. Wilkins, The Life of Petrarch, Univ. of Chicago Press, 1961/ 단테, 한형곤 역, 《神曲》, 삼성출판사, 1990/ 한형 곤, 《이 탈리아 문학의 이해》, 거 암, 1984/ 一, 《풀어쓴 단테의 신곡》, 한국외 국어대학교 출판부, 2003/ 보카치오, 한형곤 역, 《데카메론》, 범 우사, 2000/ R. Montano, 《NCE》 11, 2003, pp. 212~217. 〔韓炯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