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지오 Pelag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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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지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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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지오 1세.

① 펠라지오 1세(?~561) : 교황(556~561).
〔생 애〕 6세기의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교황 펠라지오 1세는 이탈리아 로마의 공직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부제였던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527~565)가 이탈리아 내 동고트인들의 섭정이었던 아말라순타(Amalasuntha, 526~534)의 복수를 구실로 이탈리아를 공격하려고 하여, 교황 아가피토 1세(535~536)와 함께 황제를 만류하기 위해 536년에 콘스탄티노플로갔다. 하지만 교황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4월 22일 세상을 떠났으며, 죽음을 맞기 전에 펠라지오를 교황 대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황후 테오도라 1세(Theodora I, 527~548)에게 협력하여 비질리오가 교황이 되도록 하는데 관여하였으며, 팔레스티나에 어떤 사명을 띠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멘나(Mennas, 536~552)와 함께 황제를 움직여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의 주장을 단죄하는 칙령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537년 3월 로마로 돌아온 그는,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플 주재 교황 대사로 계속 활동하였다.
삼장서 논쟁 : 당시 교회 내에서는 '삼장서 논쟁' (con-troversia de tribus capitulis)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리스도 단성설을 받아들인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44년 겨울에 삼장서를 단죄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교황 비질리오(537~555)를 콘스탄티노플로 호출하여 이 칙령에 서명하도록 하였다. 547년 1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교황은, 결국 이듬해 4월 11일 <판결문>(Judicamm)이라는 칙령으로 삼장서 단죄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삼장서의 내용을 단죄하는 것이었지, 그 문제의 당사자들을 단죄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로마의 대부제로 있던 펠라지오는 546년 동고트족의 왕인 토틸라(Totila, 541~552)가 로마를 점령하자, 로마인들을 구하기 위해 토틸라를 설득하였다. 동고트족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동로마 제국과 교전 중이었기 때문에 토틸라도펠라지오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어 황제와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55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펠라지오는 황제에게 계속 붙잡혀 있는 비질리오 교황을 만나 교황의 삼장서 단죄에 반대하는 결심을 더욱 굳혀 놓았기 때문에,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런데 후에 비질리오 교황이 삼장서 단죄에 동의하고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의 결정에도 동의하자, 그는 <반박>(Re-futatium)과 <삼장서 옹호>(In defonsione Trium Capi-
tulorum)라는 글로 교황 비질리오를 비난하였다. 또한 황제에게 교황과 공의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글을 보냈다.
555년 비질리오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세상을 떠나고 그는 석방되었다. 교황과 총대리조차 없던 로마 교회를 이끌던 마레아스(Mareas) 신부마저 8월에 세상을 떠나자, 펠라지오를 교황으로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열렸다. 그것이 황제가 원한 바였으며, 펠라지오도 황제와 화해하며 그의 요구에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펠라지오는 교황 선거로 교황이 될 수는 없었다. 《연대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적힌 간결한 문장의 내용처럼 "그를 서품할 주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곱 달 뒤인 556년 4월 16일에야 두 명의 주교와 한 명의 신부에 의해 펠라지오는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으로 교황의 서품을 담당해 온 오스티아(Ostia) 포르투스(Portus) 또는 알비눔(Albinum)의 주교들은 아니었다.
교황 재임 시기 : 당시 이탈리아는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서방 지역의 교회가 이 공의회의 법령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분열이 생겼다. 610년까지 지속된 이러한 분열이 발생하게된 이유에는 교황 펠라지오의 결정 탓도 있었다. 펠라지 오는 교황이 되면서 입장을 바꾸어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아퀼레이아 · 밀라노 · 이스트리아 주교들과의 분열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상 서방 지역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 공의회의 입장을 반대하는 자신들의 의견에 교황이 동조하여 주길 원하였다. 하지만 그는 삼장서를 단죄한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거명하지 않고 4차까지의 세계 공의회 결의에 대한 자신의 동의를 고백하였으며, 에데사(Edesa)의 주교 이바스(Ibas, 435~457)와 치루스의 주교 테오도레토(Theodoretus Cyrensis, 393?~460?)를 '존경하올 주교들' 이라고 칭하였다. 또한 '사도적인 교구' 로부터 분리되는 죄악과 위험을 강조하였다. 그의 목표는 교회를 통일시키는 것이었기에 다른 교구들이 로마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힐데베르트 1세(Childebert I, 511~558)에게 사절을 보내어 자신의 신앙이 정통 신앙에 근거한 것임을 밝혔다. 교황은 갈리아 교회가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교황 재임 기간 중 그가 긴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들 중 하나는 로마를 재건하는 일이었는데, 이 과업은 유스티니아누스가 554년에 교황의 세속 권력을 승인하고 확대시키는 "실용적인 재가" (Pragmatic Sanction)를 공포하였기에 쉬워졌다. 펠라지오는 동고트족과의 전쟁으로 파괴된 로마와 이탈리아를 치유하고, 교황청 재산을 재정비하였으며, 성당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성직자와 수도자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펠라지오는 시민의 공식 보호자였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확립하고, 교황의 주권 아래 세속 정부를 체계화하면서 교황의 정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동방의 황제들과의 적대 관계가 해소되자, 그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야만족의 침입과 위험으로부터 이탈리아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교황 펠라지오 1세는 561년 3월 4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나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평 가〕 교황 펠라지오 1세는 전임 교황인 비질리오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인해 추락한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이루려고 한 교회의 일치는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전임 교황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 (→ 삼장서 논쟁 ; 실베리오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2차)
※ 참고문헌  R. Devreesse, 《DTC》 12, pp. 660~669/ J.Barmby, A Dictionary of Christian Biography, H. Wace . W.C. Piercy, Hendrickson Pub., 1994, pp. 827~828/ J.F. Kelly, 11, 2003, pp.59~60/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62~64/ G. Schwaiger, 《LThK》 8, p. 2491 M.P. McHugh,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E. Ferguson ed., Garland Pub., 1997, p. 890/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邊琪燦〕
② 펠라지오 2세(?~590) : 교황(579~590) .
〔생 애〕 고트족(Goth) 출신 귀족이자 거부인 우니길트(Unigild)의 아들로 로마에서 태어난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초대 교회 때부터 다른 지역 교회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지녔던 로마 교회는 6세기에 이르러 신자수는 물론 교회 재산 역시 괄목할 정도로 증가하였다. 사도 베드로의 직접적인 후계자라는 역사적 근거에 따라 수위권과 교도권을 갖고 있던 교황 선출을 둘러싸고 여러 당파들 사이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하였으며, 주교들의 교회 재산 남용은 물론 주교 선출을 위한 각종 범죄까지 횡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당시까지 주교 선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게르만 왕국의 왕들이 점차 강력해지는 주교들의 권력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주교 선출 과정에서의 잡음이 국가에 대한 적대 세력들과의 연합 형성으로 이어져 제국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자신들의 특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선거에 의해 선출된 주교들은 황제의 승인을 획득한 후에야 공식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황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 주교로 선출되는 경우에는 예외가 인정되었다. 황제들은 다른 지역 교회들에 비해 특히 로마, 라벤나(Ravenna) 및 밀라노(Milano)의 주교 선출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펠라지오 2세는 고트족 출신으로서는 두 번째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로마는 롬바르드족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568년 북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하여 572년 파비아(Pavia)를 수도로 왕국을 건설한 롬바르드족은 영토를 급속하게 남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인근에는 롬바르드족의 공작령이 세워지고 이탈리아 남부 지역은 아라비아인들이 정복하여, 이탈리아 내에서 동로마 제국에 속하는 영토는 로마와 라벤나 주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래서 펠라지오 2세는 황제의 승인을 기다릴 여유 없이 579년 8월에 급히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허가 서류가 도착한 것은 11월 26일이었다. 교황은 선출 즉시 그레고리오 부제(후의 교황 그레고리오 1세)를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여 황제 티베리우스 2세(578~582)에게 교황으로서의 직무 수행 승인은 물론, 롬바르드족을 물리칠 수 있도록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동로마 제국 또한 페르시아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를 분산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황제는 단지 소수의 군사를 파병하면서 교황에게 롬바르드족 제후들을 매수하는 동시에 프랑크족 왕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교황은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580년 아를(Arles)과 오세르(Auxere)의 프랑크족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결국 황제 티베리우스 2세의 사망 이후 즉위한 황제 마우리치우스(582-602)가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군사를 파병함으로써 롬바르드족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585년에 라벤나의 동로마 제국 총독은 롬바르드족과 휴전 협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는 589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휴전 기간 동안 교황은 '삼장서 논쟁' (controversia de tribus capitulis)을 이유로 로마 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한 아퀼레이아(Aqulieia) 총대주교와 베네치아 및 이스트리아(Istria)의 주교들과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로마 교회와의 관계 회복을 거부하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이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던 그레고리오 부제가 로마로 돌아오자, 교황은 정통 교회의 확립을 위해 라벤나의 동로마 제국 총독에게 무력 행사를 요청하였지만, 양측의 화해를 성사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교황의 재위 기간 중 발생한 또 다른 문제는 수위권을 둘러싼 콘스탄티노플과의 논쟁이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이 탄생한 이후 정치적 중심이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넘어갔고,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서, 5세기에 들어서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 주교들은 정기적으로 '보편적 총대주교' (Ecumenical Patri-arch)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는 수위권이, 교황이 아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있음을 은연중에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교황 역시 이 명칭이 교황의 수위권을 훼손한다고 여겨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요한4세(582~595)가 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황제인 마우리치우스는 요한 4세를 지지하였고, 그 결과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 사이에 명칭 논쟁이 벌어졌다. 요한 4세가 승인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법령들을 교황이 인정하지 않자 논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러한 위험한 정치적 · 군사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로마 내에서 중요한 건축 사업을 진행하였다. 베드로 대성전의 건립이 시작된 것도 교황 펠라지오 2세의 재임 기간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높은 제단을 세웠으며, 무덤 뒤편에 일상적으로 미사를 거행하는 작은 경당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교황은 577년 롬바르드족에 의해 자행된 수도원 파괴를 피해 로마로온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을 위해 라테란 궁전 근처에 산 판크라치오(San Pan-crazio) 수도원을 건립해 주었다. 그 근처에 있던 교황의 사저는 병원으로 전환되었는데, 오늘날 성 요한 병원(Ospedale di San Giovanni)의 시초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 이루어진 발굴을 통해 교황이 산 로렌초(San Lorenzo fuori le Mura) 대성전 인근에 또 다른 성당을 건립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에는 모자이크로 된 교황의 초상이 성직자석과 회중석 사이의 큰 아치에 새겨져 있다. 교황은 590년 초 티베르(Tiber) 강의 범람으로 로마가 물에 잠긴 이후 창궐한 페스트에 감염되어 2월 7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베드로 대성전의 주랑(柱廊) 현관(portico)에 안장되었다.
〔평 가〕 교황 펠라지오 2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그는 정치적 · 사회적으로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로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거둔 성과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그의 재임기에 스페인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전 국민이 개종하였다. 교황은 재속 성직자들의 기능은 수도자들의 그것과는 별개라고 규정하여, 수도자들은 일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성직자들의 결혼 생활과 자녀 출산에 관련된 문제들을 새롭게 규정하였다. (→ 롬바르드족 ; 삼장서 논쟁)
※ 참고문헌  Histoire des Papes, Paris, Administration de Librairie, 1842, vol. Ⅱ, pp. 17~23/ J. Chapin, 《NCE》 11, 2003, p. 60/ J.N.D.Kelly,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 65/ G.Schwaiger, 《LThK》 8, p. 250/ M.P. McHugh,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E.Ferguson ed., Garland Pub., 1997, pp. 890~891/ A.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