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지우스주의 - 主義 〔라〕Pelagianismus 〔영〕Pelag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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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지우스.

펠라지우스.

인간은 오직 본성과 자유로운 의지 결정에 따라 구원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본보기(exempl-um)라고 한 펠라지우스(Pelagius, 354?~418?)의 주장 또는 그를 따르던 이들.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가 이 주장의 이단성을 처음으로 제기하였고, 결국 단죄를 받았다.
〔펠라지우스의 생애〕 354년경 영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펠라지우스는 380년경에 로마로 왔다. 법을 전공한 금욕적인 수도자였던 그는 로마에서 귀족들에게 금욕 생활의 덕을 가르쳐 큰 명성을 얻었고, 사제들과 젊은 학생들로부터 영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다.
당시에는 미온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받았기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신앙인들의 영적 게으름과 로마귀족들의 도덕적인 타락을 비난하고,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금욕과 순결과 청빈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며, 교회는 순결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펠라지우스의 엄격주의와 이상적인 금욕 생활은 수도 생활에 대한 욕구와 결합되어 큰 호응을 얻어, 수도원을 후원하는 것을 커다란 명예로 생각하던 귀족들도 그를 적극 지지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드루메툼(Had-rumetum, 현 튀니지 Susah) 수도원에 펠라지우스의 "선을 행할 능력도 나에게 있고, 자유도 바로 나의 것이다" (Ep.216, 5)라는 말이 유포되어 있다고 증언하였다.
펠라지우스는 원죄를 부정하면서, 사람의 의지는 금욕적인 실천을 통해 강화될 수 있으며 타락한 인간도 선행을 실천하면 완전해지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감복한 젊고 유능한 법률가 철레스티우스(Caelestius)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펠라지우스는 405년에 처음으로 아우구스티노의 은총에 대한 사상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죄의 덩어리' 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고트족이 로마를 침공하자(410), 펠라지우스는 철레스티우스와 함께 북아프리카로 피난을 떠났다. 이때 아우구스티노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던 그는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러 히포로 갔으나, 아우구스티노는 도나투스주의자(Donatismus)들과의 논쟁 때문에 카르타고로 가고 없었다. 그래서 펠라지우스는 다시 카르타고로 갔지만 아우구스티노가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 참석 중이었기에 결국 만나지 못하고, 그의 사상을 염려한다는 쪽지를 남겨 둔 채 팔레스티나로 떠났다. 그곳에서 418년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첼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에 머물면서펠라지우스의 가르침을 주장하다가 카르타고 교회 회의(411)에서 단죄를 받았다.
〔펠라지우스의 사상〕 인간의 본성 : 펠라지우스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그 본성은 선하다. 선하게 창조된 본성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선택의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이성을 지닌 인간은 누구나 선과 악을 구분할수 있으며, 양심과 법을 통해서 선과 악을 구분할 수도있다.
펠라지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가능성(pos-sibilitas), 의지(voluntas), 행동(actio)이라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 가능성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지와 행동은 인간의 것이다. 펠라지우스는 선의 가능성이 인간의 본성에 주어졌고 의지와 행동이 인간에 의해 좌우되므로, 인간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강조하였다.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에게 부족한 것은 단지 의지일 뿐이므로 인간은 은총의 도움 없이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지만, 은총의 도움이 있다면 훨씬 더 쉽게 선을 행할 수 있다. 인간이 선을 실천하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자유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펠라지우스는 그리스도의 육화 이전에도 죄 없이 산 의인들이 있었으며 '노아, 멜기세덱, 아브라함, 욥' 등이 '복음 이전의 복음의 사람들 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구약성서에는 아브라함, 노아, 에녹, 아벨 등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졌다' 라고 나온다.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자체가 펠라지우스에게는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었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후에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고,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은총의 상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이 죄를 지을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강조하였고, 가능성, 의지, 행동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세례를 통해 원죄가 용서된다는 것은 육욕이 제거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감을 용서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세례받은 이후에도육욕은 여전히 남아 있으 며, 계속 은총이 필요하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본성이 태초에는 선하였지만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다고 주장한 반면, 펠라지우스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의 선한 본성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아담을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지만, 펠라지우스는 아담을 단지 한 인간으로 간주하면서 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선을 행할 수없다고 인간의 나약성을 주장하면서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강조하였다.
원죄 : 펠라지우스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는 주장과 원죄 교리는 마니교(Manichaeismus)적이며 불경스럽고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죄를 배우고 모방한다. 아담의 불순종은 인류에게 나쁜 표양을 보여 주었고, 아담의 나쁜 표양이 후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뿐이다. 반면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이 죄를 '모방' 하는 것이 아니라 원죄가 모든 사람에게 유전되고, 인간은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펠라지우스는 원죄란 없고, 원죄가 인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원죄로부터 벗어날수 있는 은총이 필요없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는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가 아닌 한 개인으로 간주하면서, 아담의 죄를 하느님께 불순종한 한 인간의 개인적인 행위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아담의 죄는 단지 아담 자신만을 해쳤을 뿐 인류를 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아담의 죄는 후손에게 물려지지 않았고, 따라서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이 후손에게는 없다는 주장이다. 펠라지우스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됨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정의로움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죄가 유전된다면 그리스도는 죄의 본성 때문에 구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전된 죄가 본성에 들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역시 죄인이어야만 한다. 또한 죄가 혼인을 통해서 전해진다면, 혼인을 단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혼인을 통해서 욕정의 죄가 유전되기 때문이다.
펠라지우스는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변하거나 약해지거나 상처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아담의 죄가 그의 본성을 타락시킨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전의 상태로, 다만 선과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갖고 태어난다.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있다. 왜냐하면 죄는 인간 의지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악과 죄의 창조자가 아니며, 아담은 자유 의지로 죄를 지었다. 펠라지우스는 아담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설사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아담의 죽음은 결코 죄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펠라지우스의 주장에는 '죄의 유전성' 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그의 원죄론은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펠라지우스는 바오로 서간에 대한 주석에서 보여 주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피력하면서 원죄와 원죄의 결과를 부정하였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완전함에 이를 수 있고, 완전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죄는 생물학적 유전에 의해 자동적으로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담의 죄를 모방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죄의 보편성은 아담이 나쁜 본보기를 보인 결과로 초래된 사회적 관습일 뿐, 죄자체는 개인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펠라지우스의 이론은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에 정반대된다. 아우구스티노는 원죄가 육체적 행위를 통해 유전된다고 보았다. 아담의 죄로 인해 후손들은 멸망의 총체(massa perdictionis), 죄의 총체(massa peccati), 죄인들의 총체(massa peccatorum)가 되었다. 죄는 한 개인의 잘못된 행위가 아니라 아담의 후손들이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 소외감 때문에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하지만 펠라지우스와 첼레스티우스는 원죄를 부정하면서 인간의 의지는 금욕적 실천을 통해 강화될 수 있으며,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선업을 행하면 완전해질 수 있고 무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을 이성적으로 창조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으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방 교회(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암브로시오)에는 '원죄' 개념이 있었다. 이처럼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보다 더 심오한 차원의 '죄악' 개념과 '은총' 개념을 갖고 있었다.
자유 의지 : 펠라지우스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은 모두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 즉 선택의 자유가 있다. 선택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나온다.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결코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도덕적 주체일 수 없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만 주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 하는 최종 결정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다. 이처럼 펠라지우스는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다른 피조물처럼 자연 법칙에 종속시키지 않고, 인간에게만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신적인 의지를 성취시킬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을 주었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인간 앞에 삶과 죽음을 내놓고 삶을 선택하라고 명하였으나(신명 30, 19), 최종 결정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맡겼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이 준 자유로 선을 행할 수 있다. 죄를 짓지 않을수 있는 능력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아담의 의지나 마귀라 할지라도 이 능력을 파괴시킬 수는 없다. 펠라지우스는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 5, 8)에 근거하여, 인간은 스스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의로운 하느님은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을 주었다. 이런 믿음을 가진 펠라지우스는 "당신 말씀으로 제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고 어떤 불의도 저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119, 133)라는 기도를 즐겨 바친 아우구스티노를 운명론자로 간주하였으며, 그의 기도문은 인간을 하느님의 사슬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고 인간의 도덕성 자체를 파괴시킨다고 비난하였다.
은총론 : 펠라지우스에 의하면, 하느님의 은총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가능성' 에만 영향을 미칠 뿐, 인간의 의지와 행동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쉽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도 어떤 일을 할 수 있는데 단지 은총에 의해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 의지에 선을 행하도록 어떤 압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반대하였다.
펠라지우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한 공로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은총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펠라지우스가 말하는 은총은 율법과 교훈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낙관론자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을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펠라지우스의 주장대로라면,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 행위에 아주 미소하게 작용할 뿐이다. 펠라지우스가 말하는 은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펠라지우스는 왜 교회의 정통 가르침과 상반되는 주장을 하였을까?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낙관적이던 그는 당시 교회가 하느님의 은총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구원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을 축소시키고 수동적으로 몰고 간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논쟁의 역사〕 411년의 카르타고 교회 회의 : 이 회의는 카르타고에 남아 있던 첼레스티우스가 제기한 '영혼의 기원' 과 '아담의 죄에 대한 인류의 연대 책임', '갓 태어난 영혼은 전혀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죄책감을 갖는가?' 하는 문제들을 다루었다. 즉 이 주제들은 유아 세례를 베풀 필요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는데, 첼레스티우스는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거슬러 원죄의 유전성과 유아 세례의 필요성에 반대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죄짓는 사람만이 죄의 결과를 겪을뿐, 어떠한 아이도 원죄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유아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유아 세례는 필요없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유아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왔다.
당시 첼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에서 사제 서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카르타고에 머물던 밀라노의 부제로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의 전(前) 서기관이었던 바울리노(Paulinus de Milano)가 첼레스티우스의 가르침에 대해 일곱 가지 오류를 지적하며 고발하였다. 그가 오류라고 고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아담은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설사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죽었을 것이다. ②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해를 끼쳤을 뿐 인류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니다. ③ 어린이는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로 태어난다. ④ 아담의 죄 때문에 인류가 죽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류가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⑤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으며, 하느님의 계명을 쉽게 지킬 수 있다. ⑥ 복음과 마찬가지로 율법도 하늘나라로 이끈다. ⑦ 그리스도의 육화 이전에도 죄를 짓지 않고 산 사람들이 있었다.
첼레스티우스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자 411년 7~8월에 개최된 카르타고 교회 회의는 그를 단죄하였으나, 단죄를 받은 첼레스티우스는 에페소로 가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는 펠라지우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그들은 주로 오리제네스주의자들이었다.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의 영향 아래 있던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와는 달리 펠라지우스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 불참하였던 아우구스티노는 412년과 415년에 몇 편의 글을 써서 그들을 반박하였다.
415년의 예루살렘 교회 회의 : 415년에 팔레스티나에서 두 번째 논쟁이 발생하였다. 당시 펠라지우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Joannes, 386~417)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펠라지우스를 반대하는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를 지원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노는 415년에 오로시오(Orosius)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오로시오는 예로니모와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을 찾아가 카르타고 교회 회의가 결정한 단죄 내용과 아우구스티노의 견해를 설명하였지만, 요한은 이미 펠라지우스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 무렵 갈리아에서 추방당한 2명의 주교인 헤로스(Heros)와 라자로(Razarus)가 팔레스티나로 순례를 왔다. 그들이 추방당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은 펠라지우스의 위험성에 대한 문서를 작성하여 그를 지지하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에게 제출하지 않고 체사레아의 에울지오(Eulgius) 주교에게 제출하였다. 에울지오는 팔레스티나의 디오스폴리스(Diospolis)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415. 12. 20). 이 회의에는 14명의 주교가 참석하였으나, 정작 문서를 제출하였던 갈리아의 주교들은 참석하지 못하였다. 디오스폴리스 교회 회의에 참석한 펠라지우스는 자신에 관한 비난에 대해 해명하면서, 여러 주교들이 자신에게 보낸 '존경의 편지' 와 아우구스티노가 보낸 쪽지를 보여 주며 결백을 주장하였다. 415년 초에 펠라지우스가 온갖 미사여구로 아우구스티노를 칭찬하는 편지를 보내자, 아우구스티노는 답례로 '너무 너무 싶은' (desideratissimus)이라고 표현한 짤막한 쪽지를 그에게 보냈던 것이다. 펠라지우스는 자신의 견해가 철레스티우스의 견해와 다르고, 자신은 정통 신앙을 고백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단죄를 받지 않았다. 예로니모는 이회의를 파렴치한 회의라고 비난하였으며(서간 143, 2), 오로시오는 회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편지 두 통을 갖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416) 한 통은 예로니모가 보낸 것이고, 다른 한 통은 펠라지우스를 고발하였던 헤로스와 라자로가 보낸 것으로, 펠라지우스는 자신의 무죄와 주장을 설명한 《자유 의지의 방어》라는 작품을 썼다.
418년의 카르타고 교회 회의 : 오로시오가 북아프리카에 도착하기 전에, 북아프리카 교회는 416년의 카르타고 교회 회의(67명 참석)와 밀레비스 교회 회의(약 60명 참석)를 개최하여 411년에 내린 단죄를 재확인하였다. 416년의 카르타고 교회 회의는 펠라지우스와 첼레스티우스를 단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첼레스티우스가 411년에 이미 단죄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단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카르타고 교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1세(401~417)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냈다. 한 통은 펠라지우스 문제를 다루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였고, 다른 한 통은 펠라지우스가 로마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단죄를 피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 펠라지우스와 첼레스티우스의 오류에 대해 자세하게 지적하면서 로마 교회가 그들을 공식적으로 단죄해 줄 것을 요청하는 특별 서한이었다(서간 175). 북아프리카 교회의 단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교황은 교회 회의를 따로 개최하지 않고 북아프리카 교회에 답장을 보냈다(417. 1. 27). 교황은 북아프리카 교회의 결정에 동의하며, 유아 세례에 대한 펠라지우스의 이론을 반대하고, 펠라지우스와 첼레스티우스가 정통 교회로 되돌아올 때까지 파문한다고 선언하였다(서간 181~183).
그러나 417년 3월 12일에 교황 인노첸시오 1세가 서거하고 후임 교황으로 그리스 출신인 조시모(417~418)가 선출되자, 펠라지우스와 첼레스티우스는 자신들은 은총에 대한 정통 교회의 가르침을 인정하는데 북아프리카 주교들이 부당하게 자신들을 단죄하였다고 새 교황에게 탄원하였다. 417년 11월에 교황 조시모는 펠라지우스의 신앙 고백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북아프리카 주교들이 펠라지우스 문제를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였으므로 두 달 이내에 로마에 출두하여 펠라지우스를 단죄한 것에 대한 적법성을 밝히라는 내용의 편지를 북아프리카로 보냈다.
한편 417년 말에 아우구스티노는 펠라지우스가 단죄를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속임수를 쓴다고 주장하면서, 《펠라지우스 논쟁》(De gestis Pelagii)이라는 작품을 집필하였다. 로마로부터 소식을 전달받은 북아프리카 주교들은 카르타고에서 다시 417년 말에 약 200명이 참석한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교황에게 선임 교황의 결정을 재확인해 줄 것을 탄원하였고, 418년 5월 1일에 카르타고 교회 회의를 다시 개최하여 펠라지우스에 대한 단죄를 재확인하였다. 418년의 제16차 카르타고 교회 회의가 내린 결정은 다음과 같다(DS 225 ~230).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단죄받는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의롭게 한다. 그런데 그 은총은 이미 범한 죄를 사해 주기만 하지, 더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 주지는 못한다(3조).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단죄받는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긍정적인 계명들과 부정적인 계명들을 잘 이해하고 깨닫는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단지 죄를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가 해야 할 의무까지 다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을 주는 것은 아니다(4조).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단죄받는다. 의화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가 해야 할 의무를 쉽게 행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의화 은총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약간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들을 준수할 수 있을 것이다(5조).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단죄받는다. '우리가 죄 없다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 1, 8)라는 요한의 진술은 요한이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말이지, 우리가 실제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은 아니다(6조).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단죄받는다. 성인들이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마태 6, 12)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성인들에게 그런 기도는 필요치 않다. 성인들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남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7조)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단죄받는다. 성인들이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죄를 지어서라기보다는 겸손해서 그렇다(8조)."
북아프리카 주교들이 펠라지우스 문제에 대해 황제에게 탄원하자, 황제 호노리우스(395-423)는 418년 4월 30일에 펠라지우스와 첼레스티우스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해 여름에 교황 조시모도 선임 교황의 결정과 카르타고 교회 회의의 결정을 재확인하는 회칙 <트락타토리아>(Tractatoria)를 발표하면서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한 단죄에 서명하라고 모든 주교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남부 이탈리아 에클라눔의 주교 율리아누스(Julianus)를 비롯한 18명의 주교들이 이 요구에 반대하고 펠라지우스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러자 419년 6월 9일에 호노리우스 황제는 칙령을 내려 이들을 모두 추방하였고, 425년 7월 9일에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423~455)도 갈리아 지방의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을 추방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418년부터 펠라지우스 논쟁의 주역은 아우구스티노와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 주교로 바뀌었다. 가장 쟁점이 된 것은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된다면, 결혼을 단죄해야 하는가? 즉 결혼의 선성(善性)과 원죄의 유전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율리아누스는 아우구스티노의 원죄 사상이 도덕성을 훼손시키고 마니교도들처럼 결혼을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비난하였으며, 그 후 논쟁의 쟁점은 주로 원죄와 인간의 욕정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한편 동방 교회는 펠라지우스 논쟁의 본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교황 철레스티노 1세(422~432)에게 펠라지우스 문제에 대해 문의하였으나, 교황으로부터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us Mopsuestenus, 350?~428)와 네스토리우스는 추방당한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그러나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은 430년 초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모두 추방당하였으며 네스토리우스 문제를 다루기 위해 개최된 에페소 공의회(431)에서 펠라지우스주의는 단죄를 받았다(1, 4조). 에페소 공의회 이후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은 반(半)펠라지우스주의(Semi-Pelagianismus) 형태로 계속 남아 있다가 539년 오랑주(Orange) 교회 회의에서 단죄를 받았다.
〔평 가〕 펠라지우스에 의하면,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 없다고 해서 구원을 보증해 주는 선을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인간의 자유는 선 그 자체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은 구원을 보증해 주는 선을 실천할 수 있다. 마치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돕는 것처럼, 은총도 자유를 완벽하게 돕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없다면 인간의 자유는 표류하고 만다.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펠라지우스는 세 가지 오류를 범하였다. 첫째 원죄를 부정한 점, 둘째 의화 은총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에 따라서 주어진다고 주장한 점, 셋째 세례받고 나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점 등이다.
펠라지우스주의 논쟁의 주인공은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우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노는 첼레스티우스 및 율리아누스와 많은 논쟁을 벌였다. 펠라지우스가 일찍 죽고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사상을 전개시키면서 아우구스티노와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펠라지우스의 원래 주장을 가려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교회는 오랫동안 아우구스티노의 작품을 바탕으로 펠라지우스주의를 그리스도교의 '이단' (Augustinus, Retractationes, Ⅱ, 33)으로 간주하였으나, 펠라지우스에 대한 플랭발(G.de Plinval)의 연구 덕분에,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펠라지우스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부정한 이단자로, 또 다른 이들은 인간의 자유를 옹호한 수호자로 간주한다. 마치 아우구스티노를 어떤 이들은 하느님 은총의 수호자로, 또 다른 이들은 인간의 자유를 박탈한 장본인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후자는 인간이 자유 의지로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미 그렇게 결정하였다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이야말로 운명론이자 이단이라고 비난한다.
펠라지우스주의 논쟁의 핵심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펠라지우스주의 논쟁은 인간 자유의 가치와 가능성, 하느님의 은총, 그리스도교 삶의 성사성에 대한 열띤 논쟁을 촉발시켰다. 펠라지우스와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 즉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서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 것이다. (→ 아우구스티노, 히포의 ; 예로니모 ; 원죄 ; 이단 ; 인노첸시오 1세)
※ 참고문헌  Augustinus, 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I, II/ 一, De gestis Pelagiil 一, De Natura et Gratial 一, De Gratia et Libero Arbitriol 一, 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de Baptismo Parvulorum ad Marcellinuml A. Harnak, History of Dogma, vol. 5, trans. by Neil Buchanan, New York, Dover Publications, pp. 188~221/ B.R. Rees, Pelagius : A reluctant Heretic, Woodbridge, 1988/ C. Lepelley, Les Lettres de Saint Augustin découvertes par Johannes Divjak, Paris, 1983, pp. 155~164/ E. TeSalle, Rufinus the Syrian, Caelestius, Pelagius : Explorations in the prehistory of the Pelagian Controversy, Philippian Studies 22, 1974, pp. 26~48/ G.Bonner, Augustine and Modern Research on Pelagianism, 1972/ G.Bonner, Some Remarks on Letters 4 and 6 ed., Georges de Plinval, Pélage, ses écrits, sa vie et sa réfome étude d'histoire littéraire et religieuse, Lausanne, Payot, 1943/ G. Greshake, Gnade als konkrete Freiheit. Eine Untersuchung zur Gnadenlehre des Pelagius, Mainz, 1972/ John F. Clarkson, S.J. et al., The Church Teaches Documents of the Church in English Translation, Kansas, B. Herder Book Co., 1955, pp. 218~220/ J. Morris, Pelagian Literature, 《JThs》 16, 1965, pp.26~60/ J.P. Burns, Augustine's Role in the Imperial Action against Pelagius, 30, 1979, pp. 67~83/ Karl Bihlmeyer, Church History, vol. 1, trans. by Victor E. Mill, MD, The New Man Press, 1958, pp.281 ~2891 0. Wennelinger, Rom und Pelagius, Stuttgart, 1975/ P.Brown, Pelagius and his supporters : Aims and Environment, 19, 1968, pp. 93~114/ 一, The Patrons of Pelagius : the Roman Aristocracy between East and West, 21, 1970, pp. 56~72/ R.F.Evans, Four Letters of Pelagius, London, 1968/ 一, Pelagius. Inquiries and Reappraisals, London, 1968/ 一, Pelagius : Fastidius and the pseudo-Augustinian De Vita Christiana, 13, 1962, pp.72~94/ V. Grossi, La Polemica Pelagiana : Amici de Avversari di Agostino, Patrologia Ⅲ, Roma, pp. 437~458/ 一, La crisi antro-pologica nel monastero di Adrumeto, Augustinianum 19, Roma, 1979, pp. 103~133/ 一, Pelagio-Palgiani-Pelagianesimo, 《DPAC》 2, Roma, 1994, pp. 2730~2736/ 一, Pelagio, 《DIP》 6, Roma, 1980, pp.1327~1330. 〔盧成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