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2세 - 二世 Felipe II(1527~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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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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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

스페인의 왕(1556~1598)이자 포르투갈의 왕(1580~1598).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 개혁을 옹호하였으며, 그의 재임 시기에 스페인은 최고의 국력과 영토를 자랑하였다.
〔생 애〕 초기 생애 : '신중한 사람' (el Prudente)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펠리페 2세는 1527년 5월 21일 스페인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카를 5세(1519~1556)와 포르투갈의 주앙 3세(1521~1557)의 누이인 이사벨라(Isaella)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왕으로부터 직접 정치와 외교를 배우며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 카르타헤나(Car-tagena)의 주교였던 실리세오(Juan Martinez Siliceo)로부터 초기 교육을 받았으며, 카스티야(Casilla)의 사령관인 후안 데 수니가(Juan de Zúñiga)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펠리페 2세는 그들에게서 신앙심과 진지함을 배웠으며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다지고, 학문과 예술 및 정치에 대한 논평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펠리페는 1540년에 부왕으로부터 밀라노 공작령을 물려받았다. 그러자 밀라노에 대한 간접적인 지배력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1515~1547)가 이 조치에 격분하여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543년부터 카를 5세는 스페인을 떠나 독일로 갈 때마다 펠리페에게 섭정을 맡겼다. 1548~1551년에 걸쳐 펠리페는 이탈리아와 독일, 네덜란드를 여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과묵한데다 카스티야어 외의 다른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독일과 플랑드르의 귀족들에게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는 1554년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인 메리 1세(1553~1558)와의 결혼에 즈음해서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을, 1555년 10월 25일에는 네덜란드를, 이듬해 1월 16일에는 나바라와 카스티야의 왕위 및 사르데냐를 포함하여 아라곤, 카탈루냐의 왕위는 물론 해외 식민지까지 차례로 물려받았다.
스페인의 왕 : 그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심을 품고 있던 부왕 카를 5세로부터 방대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물려받아 다스렸다. 그의 영토는 카스티야, 아라곤, 카탈루냐, 나바라, 발렌시아 등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시칠리아, 사르데냐, 밀라노, 나폴리, 튀니지, 포르투갈, 아프리카 식민지, 필리핀, 그리고 중남미 대륙 전체에 이르렀다.
펠리페 2세는 중산층 출신의 관료를 중용하여 귀족 계급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화된 절대 군주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은(銀)과 세금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전쟁 비용 염출 및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줄곧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고, 세 번(1557, 1575, 1596)에 걸쳐 국가 파산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하지만 그를 더욱 괴롭힌 것은 불행으로 점철된 가정사였다. 그는 1545년에 사촌인 포르투갈의 마리아(Maria de Portugal)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그해에 아들 카를로스를 낳다가 죽었다. 1554년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결혼하여, 4년 후 메리가 자식없이 죽을 때까지 그녀와 공동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하였다. 1559년 프랑스의 앙리 2세(1547~1559)의 딸인 이자벨(Isabelle de Valois)과 세 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이 결혼은 이탈리아 지배권을 놓고 65년간(1494~1559) 지속되던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을 종식시킨 카토-캉브레지(Peace of Ca-teau-Cambresis) 조약의 초석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도 2명의 딸을 낳고 1568년에 세상을 떠났다. 1570년 펠리페는 마지막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1564~1576)의 딸인 안나(Anna)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도 역시 10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 중 5명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고령에 선출된데다 정치적으로 비합리적이었던 교황 바오로 4세(1555~1559)는 즉위 직후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알게 된 펠리페는 1557년 8월 10일 피카르디에 있는 생강탱(Saint-Quentin)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승리함으로써 교황과 프랑스의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그는 1559년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후 오직 마드리드에 머물면서 모든 종류의 관직과 성직 임명권을 직접 행사하며 넓은 제국을 다스렸다. 따라서 카스티야 지역 외의 신하들은 차츰 중앙 관료들뿐 아니라 펠리페에 대하여서도 반감을 갖게 되었다. 특히 네덜란드, 그라나다, 아라곤에서 이런 양상이 두드러졌다.
한편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제국의 위용을 시기하는 유럽 각국, 특히 프로테스탄트 국가들로부터 편협하고 잔인한 폭군으로 매도되었고 '검은 전설' (leyenda negra)이라 일컬어지는 흑색 선전에 시달렸다. 이는 그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권세를 누리다가 부패 혐의로 체포된 페레스(Antonio Pérez)가 스페인을 탈출한 후 왕실의 어두운 비밀들을 폭로하면서 불거진 사건이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카를로스 왕자가 반역 혐의로 체포된 것과 그 의문의 죽음, 악명 높았던 스페인 이단 심문소(Inquisición) 역시 악소문의 유포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실제의 펠리페 2세는 책과 그림에 파묻혀 지내는 학구적이고 조용한 성품을 지녔으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매우 헌신적으로 업무를 보았고 의지력과 절제력이 뛰어나 매사에 신중을 기하며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로 인해 그의 재위 기간은 스페인 문학과 예술이 화려하게 꽃피는 시기로서 '황금 세기' (siglo de oro)라 불렸으며, 아빌라의 데레사(Theresia ab Avila, 1515~1582)와 십자가의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으로 대표되는 영성 신학과 신비 문학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는 문학, 건축, 음악 등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였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을 소장한 애호가였다.
대외 정책 : 펠리페 2세는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막아 그리스도교 세계를 보호하는 한편 유럽 내에서의 주도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지중해의 몰타(Malta)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에 승리를 거두어 이슬람 세력의 서진을 막았고, 1571년에는 교황령, 제노바, 베네치아 연합군과 연합 함대를 이루어 10월 7일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를 상대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이날을 '승리의 성모 축일' 로 제정·선포하였다. 이 축일은 1573년 이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교황비오 5세는 펠리페 2세와 교회에 대한 통치권을 놓고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리고 펠리페 2세는 1571년 그라나다 지방의 라스 알푸하라스(Las Alpujarras) 지역에서 일어난 무어인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또한, 같은 해 그의 이름을 딴 필리핀의 마닐라 시가 건설되었으며, 페루의 리마에 산 마르코스(San Marcos)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펠리페 2세는 1566년부터 네덜란드 지방 폭동과 반란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지역의 반발은 카를 5세(1516~1556)의 통치 시기부터 이어진 스페인의 정치적 · 경제적 · 종교적 탄압에 원인이 있었다. 과도한 세금을 물리는데다 네덜란드인에 대한 무시, 스페인에서 파견되는 관리,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억압과 이단 심문에 대한 반발 탓이었다. 특히 칼뱅파 목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성화상 파괴 선동에 추위와 식량난이 더해져서 빈민층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정예 병사들을 투입하여 진압토록 하였으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반란의 불씨는 꺼질 줄을 몰랐다. 결국 네덜란드 경제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1585년과 1595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항구에 들어와 있는 네덜란드 선박들에 출항 금지 조치를 내렸으나, 네덜란드는 아메리카와 직접 교역을 시작함으로써 스페인의 독점적 교역 활동에 오히려 위협이 되었다.
그 와중에 1578년 8월 조카인 포르투갈 왕 세바스티앙(1557~1578)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후계자 없이 죽자, 왕위 계승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한 펠리페 2세는 1580년에 무력으로 포르투갈을 합병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실질적인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지중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명실공히 제국의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보호자를 자처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자국 내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는 한편, 스페인의 식민지인 네덜란드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드레이크(F. Drake, 1540/1543?~ 1596)가 지휘하는 영국의 전함들이 1585년 스페인령 카리브 해에서 노략질을 하며 막대한 손해를 입혔으며, 1587년에는 스페인 선박 수십 척을 침몰시켰다. 그리고 프랑스도 네덜란드의 반란 세력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이에 펠리페는 무적 함대(Amada Invencible)를 파견하여 1588년 영국 정벌에 나섰으나 악천후로 크게 패배하였 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593년과 1594년에 다시 함대를 소집하여 영국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악천후와 물자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한편 펠리페 2세는 나바라의 앙리(Henri de Navarre, 1553~1610)를 중심으로 한 위그노파에 대항하는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에 군대와 자금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나바라의 앙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앙리 4세(1589~1610)로 즉위할 당시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570년대부터 신대륙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수입되었지만, 무적 함대의 창설과 같은 엄청난 지출을 필요로 하는 사업과 무리한 재정 지출로 인해 결국 1596년 11월 29일 그는 은행가들에게 일체의 지불 연기를 선언해야 하였다. 이미 두 차례의 파산 선언이 있었지만, 1596년의 파산 선언은 펠리페 2세가 견지해 온 제국주의에 대한 꿈이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하였으며, 동시에 스페인을 평화 정책으로 돌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호전적인 태도를 완화하였으며, 1598년 5월 2일에는 카토-강브레지 조약의 기본적 취지에 찬성하는 내용이 담긴 베르뱅(Vervins) 조약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은 끝났지만 펠리페 2세는 더이상 프랑스의 내정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고, 스페인이 유럽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종교 정책 : 펠리페 2세의 통치 이념의 근간은 정통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통합 국가의 건설 및 유지에 있었다. 따라서 모든 국가 정책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고 세비야(Sevilla)와 바야돌리드를 비롯한 스페인의 여러 도시에서도 프로테스탄트 조직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프로테스탄트와 이단에 맞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보루를 자임하며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사상이 반입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스페인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반종교 개혁의 교두보가 되어 이단 심문소의 기능을 강화하였고 가톨릭 교회의 결속과 내부 개혁을 외치는 예수회를 지원하였다. 외부 세계로부터 문을 걸어 잠근 폐쇄 정책으로 인해 스페인은 중부 유럽을 휩쓸었던 프로테스탄트와의 잔혹한 종교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유럽의 변방으로 몰락하는 길을 자초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펠리페 2세의 정통 신앙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바로 카스티야 평원에 우뚝 솟은 엘 에스코리알(EI Esco-rial) 궁전 겸 수도원이다. 1561년 제국의 수도를 톨레도(Toledo)에서 마드리드(Madrid)로 옮긴 후 그 북쪽에 21년에 걸쳐 건설한 이 웅장한 궁전은 성전(聖殿)이자 동시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무덤(靈廟, panteon)이기도 하였다. 궁전의 정중앙에 위치한 성당에서 봉헌된 미사에 매일 참여하던 펠리페 2세는 1598년 9월 13일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으며, 마지막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펠리페 3세(1598~1621)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평 가〕 펠리페 2세는 사람을 잘 의심하면서도 때로는 너무 쉽게 믿었으며, 공문서 속에 파묻혀 있을 때에만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의 어떤 시인은 그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 "한 군주, 하나의 제국 그리고 하나의 칼만이 존재하는 희망찬 새날이 머지않아 도래할 것" 이라고 노래하였다. 이는 펠리페 2세가 당시 이단과 전쟁으로 얼룩진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의 노래였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스페인의 절대주의의 기초는 이른바 신대륙 무역에 의한 거대한 부의 축적과 이동 목양업자 조합(移動牧羊業者組合)인 메스타(Mesta)를 기초로 하는 모직물 공업의 번영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칼뱅파에 대한 억제 정책과 국내의 중소 생산자인 무어인에 대한 종교적 억압 때문에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 시기는 스페인의 절정기였으며, 역대 교황들 및 교황청과 마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배 영토 내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노력은 신대륙에 가톨릭 신앙이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 스페인 ; 영국 ; 이단 심문 ; 카를 5세)
※ 참고문헌  존 H. 엘리엇, 김원중 역,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까치, 2000/ 이강혁, 《스페인 역사 100장면(알타미라 동굴 벽화에서 민주 회복까지)》, 가람기획, 2003/ Manuel Tuñon de La-raco., Historia de Espaia, Valladolid, Ambito, 1999/ Fernando Garcia de Cortázarco., Breve Historia de España, Madrid, Alianza Editorial, 1994. 〔申政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