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주의 平信徒主義 〔라〕laicismus 〔영〕laicism

글자 크기
11
평신도가 성직자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교회 법규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세속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모색하는 운동. '세속주의' , '비성직주의' , '반교계주의' 라고도 한다.
〔의 미〕이 용어의 어원과 실제 사용은 전적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만 발견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유럽의 중세와 근대는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던 시기였고, 결국에는 국가가 교회를 종속시키거나 약화시켰는데, 여기서 말하는 교회가 사실상 가톨릭 교회였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세속 군주들이 추구하는 중앙 집권적 제도였고, 국왕의 영토 안에 있는 백성들의 정신과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방대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늘 견제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 권력과의 관계만이 평신도주의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평신도주의를 지지하는 인물이나 집단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오늘날 사용되는 평신도주의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기에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현대 평신도주의의 일파 중에는 가톨릭 교회에 전혀 속하지 않거나, 어느 종교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신앙인과 대비되는 의미의 세속인인데, 이들은 교회 밖에 있고 심지어 교회에 대항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교회 용어를 빌려 쓰고 있다. 평신도주의는 이보다 역사가 길고, 평신도주의의 부정적이고 통속적 형태인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 anticlericalismus)와 자주 혼동되므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내 용〕교계 제도적 관점 :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는 것은 교회가 하느님이 세운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정하거나 펌하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평신도주의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신도주의의 기원은 초대 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면 몬타누스주의자(Montanismus)들은 교회의 어떠한 교계적 권위도 부인하였으며, 성서의 권위보다 몬타누스 개인의 권위가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단은 177년경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되었지만, 2~5세기까지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중세에는 가타리파(Cathar)와 발도파(Valdesii) 같은 이단들이 평신도주의적인 색채를 띠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 으로 부름을 받을 만하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시험을 거쳤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만을 고귀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위클리프(J.Wycliffe, 1330?~1384)는 예정된 자들만이 진정한 사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태도들은 교회에 계속 남아 다른 요소들과 섞였으며, 현재까지 잔존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교계 제도를 포기하고 교계의 몇 가지 요소들만을 차용하는 태도들도 존재하였다.
루터(M. Luther, 1483~1546)와 칼뱅(J. Calvin, 1509~1564)은 종교 개혁 시기에 평신도주의를 주창한 인물 중 하나이다. 루터는 <독일 국가의 귀족들에게 고함>(1520)에서 교황, 주교, 사제, 수도자들만이 성직 계급에 속한다는 가르침을 과도하고 위선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왕자, 귀족, 장인, 농부들은 평신도 신분으로 간주하였다.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제직이 있으며, 세례를 받는 순간 사제로 성별(聖別)된다고 주장하였다. 칼뱅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사제이고 교회 안에는 세례와 성체의 두 가지 성사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이 둘을 제외한 성품성사를 포함한 다른 성사들은 모두 '거짓 성사' 라고 하였다.
얀센주의(Jansenismus)에 동조한 극단적인 갈리아주의자(Gallicanismus)이자 오라토리오회(Oratoriani) 신부였던 케넬(P. Quesnel, 1634~1719)은 사제와 주교, 사제와 평신도를 동등하게 보는 평신도주의 입장인 리세리즘(riche-rism)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 사상의 주창자로 갈리아주의자인 리세(E. Richer, 1559~1631)의 사상 일부를 부활시켰다. 케넬은 옳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축출하고 성직자들을 서임하며 교의를 확정하는 역할이 평신도에게 속한다고 생각하였다.
정치적 관점 :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에게 "황제는 교회에 속해있고, 교회 위에 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개종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교회를 감시하고, 자신들을 '교회 밖에 있는 주교들' 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에는 야만족 왕들에게도 교회의 봉사직과 연결된 역할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교회의 주교 직무가 왕의 권한 아래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왕이 직접 주교를 서임하거나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회 회의의 교령에 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국왕들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여길 정도로 자신의 통치에 교회의 권위를 스스럼없이 이용하였다. 아망(E. Amann)과 뒤마(A. Dumas, 1802~1870)는 이렇게 된 이유가 주교들을 성직자들과 저명한 평신도들이 선출하였기 때문이라며, 자신들이 쓴 《교회사》(Histoire de I'Église) 제7권의 부제를 '평신도의 권력 아래 있는 교회, 888~1057 이라고 달았다. 이 시기에 세속 통치자들은 성직자가 서임한 주교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후보를 천거하기를 원하여, 황제와 일부 왕들은 수도원장과 주교들에게 십자가와 주교 반지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는 성직 서임권 논쟁(Contro-versia de investituris)을 통해 이와 같은 평신도주의의 침입을 억제하는 데 온힘을 쏟았지만 역부족이었다.
2세기 후에 이러한 교황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속 통치자들의 주장이 지식인층과 자신들의 권리를 의식한 평신도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평신도 정신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의 정치론에 자극을 받은 철학과 플랑드르 지방,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있었던 자치 단체의 자유 획득 운동 등의 영향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1285~1314) 사이의 갈등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독일의 루트비히 4세(1314~1347)도 교황 요한 22세(1316~1334)가 1327년에 파문한 《평화의 수호자》(Defen sor Pacis)의 작성자인 파도바의 마르실리오(Marsilio da Pa-dova, 1280?~1343?)의 입장을 계속 따르고 있었다. 이 책에서 마르실리오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열심한 신자들을 독점해서는 안 되며, 국가가 성직 후보자들의 선발, 고위 직무자와 다른 성직의 임명, 사제들이 하는 종교적 가르침에 대한 통제, 신심 행위들에 대한 감시, 하위 성직자에게 월급을 주는 권한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오컴주의(Ockhamismus)와 로마법 연구의 부활로 세속 통치자의 권력이 교회에 더욱 강하게 관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세속 군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야 하였다. 1516년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체결한 정교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은 고위 성직자 임명권을 얻어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주교와 수도원장으로 임명할 수 있었으며, 또한 프랑스 정부는 '평신도 정책' 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신대륙 분할 문제를 다룬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칙서들' (Alexandrine Bulls)을 무시하고 '임자가 없는 땅은 첫 점유자가 주인' 이라는 자연법에 따라 식민지를 정복하였다.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는 낭트 칙령(1598)으로 프로테스탄트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으며, 여러 방식(외국과의 동맹, 식민지 문제, 국내정치)으로 프랑스의 세속적인 일들이 종교적인 일로부터 멀어져 갔다. 유럽 각국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프랑스 왕을 흉내내어 '자기 왕국의 황제' 처럼 행동하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누리던 특권들을 거의 비슷하게 누리려 하였다.
〔발전과 변화〕 18세기 : 11세기의 동방 대이교와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 교회의 큰 두 집단이 떨어져 나갔다. 물론 이들은 로마에서 떨어져 나갔어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흠숭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가톨릭 국가들은 그리스도교를 부인하였고 심지어는 모든 종교와 단절하였는데, 프랑스 대혁명 기간(1787~1799) 동안의 프랑스가 대표적이었다. 교회의 해체를 진행하는 방법은 사제들이 세례, 혼인, 장례 등을 공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가 규제하고, 신자들의 이혼을 허가하며,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결혼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회 해체 작업은 프랑스 혁명력이 그레고리오력으로 바뀐 1793년까지 계속되었다. 파리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서 가톨릭 전례 집행이 금지되고, 교회는 이성(Reason)의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고, 신자들의 회합도 의심스러운 일로 간주되어 금지당하였다. 이 법을 어기면 사형으로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서슬이 시퍼랬기 때문에 1795년까지 프랑스 공화국에서 종교 예식은 거행될 수 없었다.
19세기 : 1820년과 1835년에 스페인, 1834년에 포르투갈, 1855년과 1866년 이탈리아 북서부의 피에몬테(Piemonte) 지방에서 수도자들에게 부과된 법률은 평신도화 계획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3 공화정하의 프랑스 정책은 1879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었는데, 마치 미리 짜 놓은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50년 이상 계속된 반성직주의는 종교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으나, 이러한 형태는 그나마 감상적인 것이었다. 프랑스의 반성직주의 계획을 준비한 사람들은 사상가들이었다. 이 작업의 뿌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모든 종교를 거부하는 쿠쟁(V. Cousin, 1792~1867), 자네(P. Janet, 1859~1947), 르낭(E. Renan, 1823~1892)과 같은 이들의 '유심론' (rationalistic spiritualism), 인간을 신격화하고 모든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도덕의 실천을 권장하던 르누비에(C.-B. Renouvier, 1815~1903)의 '무신론적 인간론' , 그리고 신학과 형이상학을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으로 치부하였던 콩트(A. Comte, 1798~ 1857)와 텐(H. Taine, 1828~1893)의 '실증주의' 등에 있었다.
프랑스 평신도주의의 전개 과정에는 뚜렷이 구별되는 세 가지 핵심 단계가 있었다. 첫 번째는 종교 교육을 억압하기 위하여 초등 교육을 공교육화하는 단계로(1882), 이 조치가 시행되면서 초등 교육에 종사하던 남녀 수도자들이 교직에서 쫓겨났다(1886) 그리고 학교 교육은 평신도나 종교에 중립적인 사람들이 맡도록 법제화하였다. 1882년 3월 28일 발효된 이 법안을 작성한 페리(J.Ferry, 1832~1893)는 "내가 의도하는 것은 하느님과 왕 없이 인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정책 담당자였던 비비아니(R. Viviani)는 다수의 반성직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를 알고 있었기에, 하원(下院)에서 "학교에 대한 중립 논의가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중립성은 외교적인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입니다" 라고 연설하였다.
20세기 : 두 번째 단계는 프랑스에서 수도회들을 해체하고 강탈하는 것이었다(1901~1904). 이것은 공개적인 전쟁이었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이 전술을 용인하였기에,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1740~1786)가 자신의 왕국에서 수도승들을 모두 쫓아내려는 계획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쓴 편지에서 "수괴인 수도승들을 통해 그리스도교 미신을 공격하려는 전하의 생각"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구절은 수도회에 관한 조항을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던 프랑스의 정치가 발데크 루소(R.Waldeck-Rousseau, 1846~1904)가 제안한 '발데크 루소법'에 관하여 토의 중이던 하원에서 인용되었다. 초등 교육국가 감독관(1879-1896)이었던 뷔송(F.-E. Buisson, 1841~1932)에 의해 공립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금지시킨 발데크 루소법' 은 학교의 평신도화가 진행된 이래 가장 반성직주의적인 법률이자, 공화정이 교회와 근본적인 갈등을 초래한 최초의 공법(公法)이었다. 비비아니는 자신의 연설에 갈채를 보내는 하원에서, 자신이 이 법률을 승인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이 열광적이고 호전적인 수도회들과 대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우리는··· 가톨릭 교회와도 대적하고 있습니다." 1903년 그는 하원에서 "우리는 종교, 그리고 모든 종교적 정서, 종교적 교의와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은 총리(1902~1905)였던 콩브(E. Combes, 1835~1921)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콩브는 신학박사이면서도 반성직 · 반가톨릭 사상을 주도하였고, 1901년 공포된 '제 단체에 관한 법률' 을 적용하였다. 그는 1904년 반수도회법을 제정하고 수도자들의 교육권을 박탈하였으며, 이어 교황청과의 관계 단절법과 11월 10일에는 정교 분리법을 제정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콩브의 작업과 유사한 평신도화 조치로서 정교 분리법의 성립이다(1905. 12. 9). 이 법은 신교(信敎)의 자유, 종교 예산의 폐지, 교회 재산의 평신도 및 공공 기관에의 양도, 공공 장소에서 종교적 행위와 표식의 금지들을 규정하고 있었다. 1879~1904년까지 계속된 '세속화에 관한 법률들' 의 폐해가 심각하였고 이법까지 제정되자,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회칙을 통해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럼에도 정부는 교회가 가져야 할 대부분의 권한을 평신도들에게 맡겼고(1907), 주교관과 신학교 등을 계속 장악하였다(1908).
포르투갈에서는 공화정이 선포된 이후(1910), 프랑스에서 25년 동안 진행되었던 것을 불과 서너 달 만에 시행하였다. 멕시코의 1917년 헌법은 평신도주의의 과제를 단 한 조항에 담아 놓았다. 종교 문제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국가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를 불허하는 것으로, 교구와 본당에 대한 합법적 권한을 갖는 인물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제 지망자들에게 참정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카예스(P.E. Calles, 1877~1945) 대통령의 독재하에 사제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 성무를 집행할 수 없었고(1926) 교회는 빼앗겨 박물관, 감옥, 창고(차고)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종교 예식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36년까지 계속되었다.
스페인은 1936년 내전이 발발하기 전 5년 동안 프랑스에서 만든 법률에 고무되어 평신도주의를 확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1931년 헌법에서는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고, 불시에 예수회원들을 쫓아낼 의도를 노골화하였으며, 이혼과 비교회 묘지 등도 승인하였다. 예수회 해산 법령(1932)과 다른 수도회들에 대한 탄압법(1933)이 시행되었으나, 공화정이 헌법에 명시한 교육에 대한 국가의 우위는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공산주의 통치하에서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한 나라들도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내 평신도화 방안을 도입하였다.
〔교회의 입장〕 20세기에 들어 노골화된 각국의 평신도주의적인 정책에 대해, 교황청은 교회의 권리와 자연법에 반대되는 반종교적 평신도주의를 단죄하는 문헌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교 분리가 시행되는 나라에서는 현재 더이상 평신도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예를들면 칠레에서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1922~1939)가 우호적인 연합으로 간주한 정교 분리가 시행되고 있으며, 미국도 이러한 정신을 헌법에 명기하고 철저히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방어적인 평신도주의와 공격적인 평신도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방어적인 평신도주의는 과거 왕정의 계승자이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 드리시오"(마태 22, 21)라는 성서의 말씀에서 근거를 찾을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종교를 존중하고 동시에 세심하게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다. 반면 공격적인 평신도주의는 하느님을 도외시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망각하려는 것으로, 모든 종교를 탄압하는 전제주의 국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회칙 <과스 프리마스>(Quas Primas, 1925. 12. 11)에서 평신도주의는 "우리 시대의 전염병"이라고 성토하였다. (↔ 성직주의 ; → 가타리파 ; 갈리아주의 ; 몬타누스주의 ; 반성직주의 ; 발도파 ; 보니파시오 8세 ; 사제직 ; 성직 서임권 논쟁 ; 요한 22세; 정교 분리 ; 케넬, 파스키에)
※ 참고문헌  오경환 신부 화갑 기념 논문집 간행위원회, 《교회와 국가》, 인천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최종고, 《국가와 종교》, 현대사상사, 1983/ 한국종교법학회 편, 《법과 종교》, 홍성사, 1983/ 柴田敏夫 편, 편집부 역, 《정치와 종교》, 교 양사, 1988/ A.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D.B. Barretted., World Christian Encyclopaedia, Oxford, Oxford Univ. Press, 1982/ C. Berthelot du Chesnay, 《NCE》8, pp. 281 ~284. 〔朴文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