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교구 平壤敎 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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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성당 앞의 르 장드르 신부와 신자들(1897년경, 왼쪽). 의주 본당 사제관 앞에 선 신자들과 서병익 신부(1919.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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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성당 앞의 르 장드르 신부와 신자들(1897년경, 왼쪽). 의주 본당 사제관 앞에 선 신자들과 서병익 신부(1919. 10. 7).


평안남북도를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교구. 1927년 3월 17일 서울 대목구에서 지목구로 분리되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가, 1939년 7월 11일에 대목구로 설정되었다. 이후 1962년 3월 10일 한국천주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면서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다. 〔역대 교구장〕초대 번(J.P. Byrne, 方溢恩) 주교(1927. 3~1929. 8), 2대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몬시뇰(1930. 4~1936. 7), 3대 부드(W. Booth, 夫文化) 몬시뇰(1936. 8~1938. 10, 서리), 4대 오세아(W. O'Shea, 吳) 주교(1938. 10~1942. 1), 5대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1942. 1~1943. 3, 서리), 6대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주교(1943. 3~1950. 10), 7대 캐롤(G. Carroll, 安) 몬시뇰(1950. 11~1975. 6, 서리), 8대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1975. 6~1998. 6, 서리), 9대 정진석(鄭鎭奭 니콜라오) 대주교(1998.6~현재, 서리).
I. 천주교의 관서 지역 확산과 박해
〔논재 교회의 형성〕 평양교구에 속한 평안도 지역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일찍부터 빈번하게 스쳐 지나간 곳이었다. 이 지역은 한국에 천주교를 수용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초기 신자들이 100여 년 동안 북경을 왕래하던 주요 교통로였다. 이 때문에 평양교구는 한국의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통로이며, 사제나 평신도의 피와 땀의 발자취가 이어진 곳이었다.
평안도 지역의 최초 신자가 누구이며, 어느 때에 어떤과정을 거쳐서 생겨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비교적 커다란 박해를 받지 않고 교세가 발전할 수 있었던 19세기 중엽에 황해도를 거쳐서 평안도에까지 천주교가 수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평양교구를 포함한 관서 지역의 천주교 확산은 매우 늦었다고 하겠다.
평안도 지역에서 천주교의 존재를 살필 수 있는 것은 1860년을 전후하여서이다. 이 지역에 천주교를 확산시킨 선구자들은 황해도 출신인 이덕보(李德甫, 마태오)와 김기호(金起浩, 요한)인데, 이 중 이덕보는 1862년 서울에서 세례를 받은 후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회 전교하였고, 김기호는 1863년 전교회장으로 임명된 후 평양에서 숙천까지 두루 다니며 전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평안도 지역의 교회 중심은 평양 교외의 논재(평안남도 대동균 율리면 답현리 소재)였다. 즉 논재 출신인 정태정(鄭泰正, 베드로)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까지 평양과 중화 등으로부터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전교 활동을 펼쳤고, 황해도 출신인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도 1863년 서울에서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고향에서 천주교를 믿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논재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덕보의 권유로 1864년에 입교한 유정률(劉正律, 베드로)은 논재 출신의 유명한 순교 성인이었다. 따라서 논재 지역은 평안도에서 천주교가 확산되는 중심지였다고 할수 있다.
이처럼 신자들이 활동한 결과 평안도 지역에는 1865년경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논재를 비롯하여 평양 근처의 광너울, 순천의 은산등지에 공소가 생겨났다. 이에 베르뇌 주교는 황해도뿐만 아니라 평안도 지역에까지 순회하며 사목 방문을 하였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황천일(黃千一)과 같이 서울에서가 아니라 현지에서 베르뇌 주교에 의하여 입교한 사람도 나타나게 되었다.
〔병인박해와 2명의 성인〕평안도 지역의 천주교 박해는 1865년부터 시작되었다. 즉 평안 감사가 천주학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2명의 신자를 체포하였는데, 이때 수백 명의 신자들이 감영으로 몰려가 시위를 함으로써 석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어진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는 평양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이 불태워졌다.
이들 중 유정률은 논재에 인접한 고둔 공소에서 체포되어 300대 이상의 매를 맞고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체는 대동강에 던져졌다. 우세영 역시 고둔 공소에서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상경하여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정태정은 황해도 황주에서 체포된 후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이들 중 유정률과 우세영은 100년 후인 1968년 10월 6일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Ⅱ. 공소의 부활과 본당의 확대
〔교회의 재건〕병인박해 이후 평안도 지역의 교회를 재건하는 데 앞장선 것은 평신도들이었다. 예를 들어 김기호는 1881년부터 3년간 전교 활동을 펼쳤는데, 이를 통해 다시 복음이 평안도 지역에 전파되었다. 그 뒤 차츰 교우집단이 생기게 되면서 공소가 부활하게 되었고, 이 공소들은 황해도 수안 본당의 관할하에 있었다. 이것은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교회가 전교의 자유를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 대목구를 담당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 교회는 아직 교우 숫자가 적은 평안도 지역까지 전임 성직자를 파견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파리 외방전교회는 평안도 지역의 전교 임무를 중화 출신의 윤창혁(尹昌赫, 비오)과 같은 평신도에게 맡겼다. 윤창혁은 1887년 이후 전교 활동에 투신하였으며, 밝은 교리 지식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냉담자들을 회두시키는 한편, 많은 사람들을 새로이 입교시켰다. 여기에는 평양(관후리) 본당 창설의 주인공인 조신종(曹信宗, 야고보)을 비롯하여 중화, 안주 등지의 본당과 공소 설치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그 결과 평안도 지역의 교세에 변화가 생겼고, 이에 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1896년 황해도 수안(遂安)에서 사목하던 르 장드르(L.G.A.A. Le Gendre, 崔昌根) 신부를 평안도로 진출시켜 본당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본당의 설립과 확대〕1895년 가을 르 장드르 신부는 평양 외성(外城)에 있는 조신종의 집을 방문하여 공소예절을 보게 되었다. 자기 고장에서 처음으로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은 그 감격을 성당 건립에 대한 의욕으로 발전시켰고, 이에 신자들은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기와집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1896년 봄르 장드르 신부가 이곳으로 부임해 옴으로써 평안도 지역 최초의 본당인 평양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평양 본당은 . 1898년 5월 평양 읍내의 관후리로 이전되었고, 1900년 봄에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 세워졌다.
평양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평안도 지역의 신자수는 계속 늘어갔다. 이에 평안도 여러지역에 본당이 신설되었는데, 1898년에는 병인박해 때 평원군 일대로 피난 갔던 신자들로 구성된 섶가지 본당이, 1900년에는 관서지방의 항구로 각처에서 주민들이 모여드는 진남포에 본당이 세워졌다. 그리고 1902년에는 평안남도의 중앙 지대로 농 · 어산물의 집산지였던 영유에 본당이 설치되었고, 1911년에는 의주 본당과 비현 본당이, 1922년에는 철도 개설과 함께 만주와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신의주에 본당이 세워졌다. 이러한 본당들은 교통이 편리한 평야 지대나 신흥 도시에 세워졌는데, 이 중의주, 비현, 신의주 본당에는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김윤근(金允根, 요셉),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등 한국인 신부들이 초대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본당이 증설된 결과, 평안남북도에는 1923년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진출하기 이전까지 5개의 본당과 50여 개의 공소가 설치되었다. 원래 7개 본당이 설립되었으나, 섶가지 본당은 1902년 영유 본당의 공소가 되었고, 비현 본당은 1913년 12월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가 사리원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의주 본당의 공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시 평안도 지역의 신자수는 5,000여 명에 가까웠는데, 이것은 1896년의 총 신자수가 437명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발전임을 알 수 있다.
〔교육을 통한 전교 활동의 전개〕 평안도 지역을 사목하던 파리 외방전교회는 본당을 중심으로 한 전교 활동 외에 교육 기관의 신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교육을 통하여 전교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에 각 본당의 신부들은 전교에 앞서 문맹 퇴치 운동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서둘러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교육 기관의 설치는 1900년경 진남포 본당의 돈의학교(敦義學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평양 관후리 본당의 2대 주임인 르 메르(L.B.J. Le Merre, 李類斯) 신부는 1905년에 남자 교육 기관인 기명학교(箕明學校)를 설립하고, 그 다음해에는 여성에게도 신학문을 배울 기회를 주기 위하여 성모여학교를 설립하였다(1929년 성모보통학교로 통합). 그리고 1908년에는 영유 본당에 영청학교(永淸學校)가, 1909년에는 진남포 본당에 지정여학교(智貞女學校)가 세워졌다.
한편 평양 관후리 본당에서는 1909년에 부족한 교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녀들의 파견을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뮈텔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평양 지방으로 가서 활동하도록 권고하였고, 수녀회에서도 이러한 사업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낙하였다. 그 결과 1909년 9월 교육을 담당할 수녀들이 처음으로 평양에 도착하였고, 이로부터 수녀들의 전교 활동과 교육 활동이 평안도에서 시작되었다.
관후리 본당 외에 진남포 본당에도 1910년 2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지정여학교에 근무하다가 1914년에 철수하였고, 의주 본당에는 1921년에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해성학교(海星學校)의 기원이 되는 학교가 열리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교회의 교육 활동은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추진한 문서 보급 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이러한 점에서 당시 평안도 지역의 발전에는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적극적인 협조가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Ⅲ. 평양 지목구의 설정과 성장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과 지목구의 설정〕 1920년대 들어 평안도 지역의 교회 상황은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당시 이 지역에는 5개의 본당과 50여 개의 공소가 있었으나 5명의 신부가 이것을 모두 담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또 교회 외적으로는 천주교보다 먼저 평안도에 진출한 프로테스탄트의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어 교세상 천주교의 10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안도 지역은 사목상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였고, 이에 뮈텔 주교는 1922년 평안도에 대한 전교의 분할 문제를 교황청에 의뢰하면서, 한편으로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평안도를 미국의 외방전교회에 위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추진하였다.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미국에서 동아시아 전교를 주된 목적으로 창설된 선교 기관이다. 이들은 이미 중국과 만주 지방에서 크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언제든지 한국으로 진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메리놀회 초대 총장인 월시(J.A. Walsh) 신부는 1916년경 한국 선교의 뜻을 품고 직접 내한하여 현지 사정을 시찰한 바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22년 11월 교황청으로부터 평안도에 대한 포교권을 위임받은 메리놀회는 1923년부터 전교 신부를 파견하여 지목구 설정 준비에 착수하였다.
1923년 5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번 신부가 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어 10월에는 클리어리(P.H. Cleary, 吉) 신부가, 11월에는 모리스신부가 입국하여 지목구 신설을 위한 준비 작업과 한국어 공부 등을 위해 의주 본당에 거처를 정하였다. 이후 1924년에는 캐시디(J. Cassidy, 姜) 신부 등 3명의 신부가 6명의 메리놀회 수녀들과 함께 입국하였고, 1925년에는 메리놀 수녀회의 한국인 수녀 장정온(張貞溫, 앙네다)과 김교임(金敎任, 마르가리타) 수녀 등이 입국하였다. 메리놀회 수녀들은 1927년 영유에 여자기예학교(女子技藝學校)를 세웠고, 시약소와 병원 및 고아원, 양로원 등을 운영하는 가운데 점차 평안도 지역에서 샬트르성 바오로 수녀회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아울러 메리놀회 신부들이 전교지로 파견됨으로써 1926년 비현 본당이 부활되었고, 은산 본당(1928년 순천 본당으로 개칭)과 마산 본당이 신설되었으며, 1927년에는 중화 본당이 설립되는 등 각지에 본당이 세워졌다.
한편 메리놀회 신부들이 계속해서 입국하는 가운데, 1926년이 되자 한국의 메리놀회는 15명에 달하는 신부를 확보하여 지목구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교황청에서는 1927년 3월 17일 정식으로 평안도 지역을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하여 평양 지목구로 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에 번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신부를 제외한 서울 대목구 신부들은 소속인 서울 대목구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번 신부는 비현에 있던 메리놀회 본부를 교통이 편리한 신의주로 옮겼고, 다시 평양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대지 물색이 여의치 않자 평양 인근인 서포에 지목구 본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토지를 매입하였다. 서포의 지목구청 건물은 1931년 3월에 완공되었고, 이 해 본부가 서포로 이전함으로써 평양 지목구의 서포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모리스 지목구장의 활동과 평양 지목구의 발전〕 초대 지목구장이었던 번 신부가 평양 지목구의 기초를 다져 주었다면, 1930년 4월에 임명된 제2대 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놀은 그가 머문 6년 동안 평양 지목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1930년 초반부터 평양 지목구는 당시 한국의 여러 지목구와 대목구 가운데 가장 활기찬 지목구로 성장하게 되었다.
모리스 몬시놀은 평양 지목구의 사목 책임을 맡게 되자, 먼저 본당 신설과 사목 조직의 확충에 힘을 쏟았다. 즉 1930년 안주 본당과 중강진 본당을, 1931년 숙천 본당과 서포 본당을 설립하였고, 이어 강계(1933), 선교리(신리-대신리, 1934), 강서(1935), 성천과 정주 본당(1936)을 차례로 신설하였다. 특히 평안남도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평안북도의 전교를 위해서 중강진과 강계 등지에까지 본당을 설치한 결과,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평양 지목구의 본당수는 모두 19개로 증가하였다.
이와 함께 모리스 지목구장은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30년 양기섭(梁基涉, 베드로)과 1931년 강영걸(康永杰, 바오로)이 서울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33년에는 홍용호가 평양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또한 1933년에는 신학생 김필현(金泌現, 루도비코)과 박용옥(朴瓏玉, 디모테오)을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강현홍(康賢洪, 요한)을 일본 도쿄의 성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또한 한국인 수녀들의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1931년부터 직접 한국인 수녀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수녀회 창립 사업을 지원하였고,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에 입회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가 탄생하였다. 이 수녀회는 교황청으로부터 1938년에 정식 인가를 받은 한국 최초의 방인 수녀회였다.
모리스 지목구장은 성직자와 수도자의 양성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평신도의 양성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지목구의 사목 조직을 다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들을 잘 인도하여 교회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도자로 길러내려는 의도였다. 이에 1933년 9월 제1회 평양 지목구 전교회장 강습회를 시작하였고, 1934년 8월에는 제1회 평양 지목구 평신자 대회를 4일 동안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에서 처음 열린 행사였으며,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적 회합이었다. 이러한 평신도 양성 노력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일치를 통해서만 진정한 천주교회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울러 문서 전교라고 할 수 있는 문서 보급 운동도 시작되었다. 그것은 1934년 1월 《가톨릭 연구 강좌》의 간행으로 나타났는데, 이 잡지는 문맹 퇴치 운동과 문서 보급, 한글 교육과 학교 설립 문제 등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후 《가톨릭 연구 강좌》는 7월부터 《가톨릭연구》로 개칭 · 간행되었고, 1937년 1월부터는 《가톨릭조선》으로 바뀌어 발행되다가 1938년 12월에 폐간되었다.
모리스 지목구장의 문서 보급 운동은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가톨릭 액션' (Catholic Action)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가톨릭 운동이란 교회 당국의 위임과 지도하에서 행하는 평신도의 조직적 활동을 말하는데, '평신도의 교계적 사제직' 참여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가톨릭 운동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1933년에 '조선 가톨릭 진흥회' 의 위원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가톨릭 운동' 은 한국 천주교회에 가장 바람직한 교회 운동이며, 천주교회가 한국 민족에게 크게 공헌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하였다. 이에 모리스 몬시놀은 1934년 8월에 '평양 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 을 조직하여 교무금 납부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1935년 10월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150주년 및 순교자들의 시복 10주년' 을 기념하여 축하식을 평양에서 개최하였다. 이 축하식에는 주일 교황 대사 마렐라(P. Marella) 대주교 및 전국 5교구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기념식과 함께 사료 전시회, 전국 교리 경시 대회, 성극 공연 등이 거행되었다. 이에 1930년대 평양 지목구의 가톨릭 운동은 가톨릭 계몽 운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모리스 지목구장의 재임 중인 1930년대 일제는 한국 천주교와 한국 민족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평양 지목구에서는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국가 권력이 종교에까지 관여한다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양 지목구의 노력은 교구별로 입장이 달랐던 한국 천주교회의 내부 사정과 일제의 강압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1936년 7월 모리스 몬시놀의 지목구장직 사임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국제 정세가 날로 긴박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도 평양 지목구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즉 모리스 지목구장의 부임 초 평양지목구에는 9개의 본당과 65개의 공소가 있었고, 신자수는 7,200명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날 때에는 본당이 19개, 공소가 134개였으며, 신자수는 18,000명, 예비 신자도 3,200명에 달하였다. 특히 성인 세례자와 예비 신자의 총수는 당시 한국천주교회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1936년 7월 모리스 지목구장이 사임한 후 부드 신부가 지목구장직(서리)을 맡아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에 운향시 본당(1936)이 설립되고, 지목구 창설 10주년 기념 대회(1937)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1938년 10월에는 오세아 신부가 4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9년 7월 11일에는 평양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오세아 신부도 그해 10월 29일 로마에서 주교로 성성되었다.
IV. 시련과 수난의 평양 대목구
〔일제 말 교회의 시련〕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 평안도 지역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즉 1938년 2월부터 일제가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노골화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가톨릭조선》에 <황국 신민의 서사>가 실리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구실만 있으면 외방 전교회를 일본과 한국에서 몰아낼 궁리를 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평양 대목구의 메리놀회 신부들을 즉시 연금하였다.
오세아 주교만 주교관에 연금되고, 나머지 신부들은 각 지방 경찰서로 연행되어 감금되었다. 그 뒤 오세아 주교가 본국으로 철수할 것을 약속하자 평안북도의 메리놀회 신부들은 신의주 본당 사제관에, 평안남도의 신부들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살던 평양의 양촌에 감금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메리놀 외방전교회 수녀들도 영유 수녀원에 모두 감금되었다. 이때 메리놀 외방전 교회의 철수 문제는 1942년 1월 평양 대목구장 서리가된 노기남 주교와 오세아 주교 사이의 협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후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와 수녀들은 같은 해 6월 전원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에 앞서 대목구에서는 1940년 1월 관후리 본당에서 기림리 본당(평양시 기림리)을 분할하여 사목 구역을 재조정한 바 있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신부들을 모두 추방하고 일본인 성직자로 대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대구 대목구와 광주 지목구를 제외하고 그들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즉 서울 대목구는 1942년 1월 노기남 주교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평양 대목구는 노기남 주교가 대목구장 서리로 있다가 1943년 3월에 홍용호 신부가 대목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홍용호 신부는 1942년 2월부터 평양 대목구장 대리로 활동하였으며, 1943년 3월 9일에 대목구장으로 임명되면서 3월 21일 평양 관후리 성당에서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1944년 4월에 주교로 임명되고 6월 29일에 주교 성성식을 거행함으로써, 노기남 주교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주교가 되었다. 결국 일본의 정책은 오히려 한국인 주교를 탄생시켰고, 평양 대목구가 독립 교구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평양 대목구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표대로 현지인 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평양 대목구 앞에는 신부의 부족과 재정적인 어려움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특히 일제의 무리한 요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그들은 유기(鍮器) 헌납 운동의 명목으로 성당의 종을 빼앗아 갔고, 1944년 2월에는 평양의 관후리 성당을 징발하는 대신, 관후리 성당 이웃에 있는 장로교의 산정현(山亭峴)교회를 사용하도록 주선하였다. 이에 홍용호 주교는 그곳으로 주교좌 본당을 이전하였고, 주교관과 교구 본부는 경창리(景昌里) 2-12번지로 옮겼다.
〔공산 정권 아래 교회의 수난〕 홍용호 주교는 1945년 5월 평양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있는 옛 수녀원 자리로 주교좌 본당을 옮겼고, 몇 달 뒤 민족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평양 대목구는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혀야만 하였다. 즉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그들로부터 주교관이나 수녀원이 괴롭힘을 당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군 측에서는 곧이어 교회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회유 정책의 일환으로, 교회가 자신들의 정책에 협조해 줄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평양 대목구에서는 이를 기회로 일제에 빼앗겼던 관후리 성당 터를 되찾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구장 비서였던 강창희(姜昌熙, 야고보)가 피살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1946년 3월 관후리 성당 터가 마침내 평양 대목구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울러 1946년 11월에는 소련 당국의 요청에 따라 경창리에 있는 주교관 건물을 양도하고 기림리 92번지로 이전하였다.
한편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공산 정권이 가장 큰 장애물로 여긴 것은 종교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통제하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기독교도 연맹' 이라는 어용 단체를 만들었고, 천주교도 여기에 가입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홍용호 주교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그들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증대시켜 나갔다. 종교 활동을 감시 · 방해하는 것은 물론, 마침내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폐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학교의 폐쇄 조치는 1947년 비현의 성심학교로부터 시작되었고, 1948년 2학기가 되자 천주교 재단에서 경영하는 교회학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 당국과 소련군 사령부는 천주교회를 남한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근거지로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항해서 평양 대목구는 되찾은 관후리 성당 터에 주교좌 대성당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대성당을 세워서 공산주의자들 앞에 신앙의 승리를 드러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46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1947년 12월에는 공사 중인 1층으로 상수구리에 있던 임시 주교좌 본당을 옮겨왔다. 그러나 1948년 12월 관후리 성당 건물을 평양 인민위원회에 양도하라는 조치가 전달되었다. 평양 대목구에서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는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산 정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즉 1949년 5월에 홍용호 주교가 구금되었고, 6월부터 계속해서 평양 시내 성직자들이 체포 연행되었다. 이때 끌려간 신부들은 김필현, 박용옥, 강영걸, 홍건항(洪健恒, 갈리스도) 등 15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규식(李圭植, 베드로) 신학생과 강유선(姜有善, 요셉), 최삼준(崔三俊, 프란치스코) 등 평신도 지도자 및 김운삼(金運三, 요셉), 송은철(宋恩哲, 파트리치오) 등 어린 복사들도 함께 수난을 당하였다. 이러한 탄압은 1950년 6월 한국 전쟁과 함께 가열되었는데, 6월 25일 진남포 본당의 조문국(趙文國, 바오로)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신부들이 체포되었고, 10월에는 장정온 수녀와 서원석(徐元錫, 요셉) 수녀가 체포되었다.
그런 가운데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평양이 수복되었다. 당시 강현홍 신부와 장선흥(張善興, 라우렌시오) 신부는 종군 사제로 평양에 입성하여 주교와 그 밖의 성직자 및 수녀 그리고 신자들의 모습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 이들 전원을 비밀리에 북방으로 이송하였다는 풍문만이 들릴 뿐 그들의 생사 여부조차 알길이 없었다. 때문에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새로운 박해로 인한 순교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평양 대목구를 비롯한 북한의 전 교회는 한국 전쟁 이후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되었다.
V. 평양교구의 현재
국군에 의한 평양 탈환은 평양 대목구가 재출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캐롤 신부가 평양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됨으로써 다시 평양 대목구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담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캐롤 신부는 관후리 성당에 머물면서 교회의 정상화를 시도하였지만, 1950년 11월 중공군이 개입함에 따라 12월에 평양을 다시 철수해야만 하였다. 이후 평양 대목구의 교구로서의 기능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월남 후 서울 중림동 본당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강현홍 신부는 김경하(金璟河), 강창훈(康昌勳), 윤원희(尹元熙) 등 평양 대목구의 청년 신자들과 함께 1949년 11월 '천주교 평양교구 신우회' 를 발족하였다. 신우회의 목적은 회원 상호 간의 부조와 친목 도모는 물론, 앞으로 통일과 대목구 복귀에 따른 대비책을 추진하는 데 있었다. 특히 성직자 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57년에는 평양 대목구 소속 유학 신부와 신학생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58년에는 신학교 보내기 운동을 결의하는 등 신학생 양성 사업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롤 몬시뇰은 1960년 3월에 서울대목구와, 1962년 1월에는 부산 대목구와 협약을 맺어 평양 대목구 출신 사제들이 이들 대목구에서 봉직할 수 있도록 하였고, 다시 1970년 3월에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과 협약을 맺어 평양교구 소속 신부들이 서울대교구에 입적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75년 6월부터는 김수환 추기경이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게 되었다.
1977년 평양교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에 평양교구 출신의 성직자와 신자들은 12월 5일 명동 성당에서 기념 미사와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1981년에 《천주교 평양교구사》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998년 6월에는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정진석 대주교가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되었고, 1999년에는 평양교구 출신의 순교자들을 정리한《북녘 땅의 순교자들》을 간행하였다. 그런 가운데 정진석 대주교는 2004년 6월 23일 서울 광장동(서울대교구 동서울 지역청)에서 제1차 평양교구 사제 회의를 개최하고, 황인국(黃仁國, 마태오) 몬시놀을 평양교구장 대리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2007년 평양교구 설정 80주년을 앞두고 정식으로 교구의 틀을 갖춤과 동시에,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북널 교회의 재건을 준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치였다. 아울러 평양교구에서는 교구 설정 80주년을 기념하여《화보집》과 자료집 간행을 준비 중에 있다(2007년 간행 예정).
한편 한국 천주교회가 평양교구를 비롯한 북한의 교회를 '침묵의 교회' 로 규정한 것은 철의 장막에 갇힌 수난의 교회를 표현한 것이었다. 또한 북한과 그 교회가 다시 회복되어 북한 신자들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오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천주교회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 천주교회의 교류가 추진되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1992년 3월 주교 회의는 정기 총회에서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이란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로 바꾸었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북한 선교를 위한 커다란 방향 전환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한국 민족의 최대 과제인 통일에 대비하면서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인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즉 북한이 남한에 의하여 회복되어야 할 곳이 아니라, 화해와 일치로 상호 간에 쌓인 불신과 미움의 벽을 허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신자들은 통일될 앞날을 기다리며 평양교구의 역사가 새롭게 전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평양교구 신우회 ; 관후리 본당 ; 메리놀 수녀회 ; 메리놀 외방전교회 ; 모리스, 존 에드워드 ; 침묵의 교회 ; 한국 전쟁 ; 홍용호)
※ 참고문헌  최석우, 《한국 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평양교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평 양교구 순교자 사료 수집위원회 편, 《북녘 땅의 순교자들》, 가톨릭출판사, 1999/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문서전교>, 《부산 교회사보》 46, 부산교회사연구소, 2005/ ―, <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한국사학사학회 48회 발표문, 2004/ 一, <1930년대 평 양교구의 신사 참배 거부 운동>,《한국 민족 운동사 연구》 38,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2004/ 一, <1930년대 평 양교구의 가톨릭 운동>,《교회사 연구》 1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과 활동>, 《부산 교회사보》 22, 부산교회사연구소, 1999. 〔金壽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