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평택시 비전1동 626-31소재. 1928년 4월 14일 왕림 본당과 안성 본당에서 분리 ·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성모 승천. 관할 구역은 평택시 비전1동, 비전2동 일부, 신평동, 합정동 일부, 세교동, 원평동, 통복동, 유천동 일부, 군문동.〔교 세〕1937년 1,222명, 1953년 1,321명, 1958년 2,409명, 1965년 3,789명, 1970년 3,049명, 1975년 3,702명, 1980년 4,687명, 1985년 5,132명, 1990년 6,976명, 1995년 6,842명, 2000년 7,496명, 2004년 6,371명.〔역대신부〕초대 몰리마르(J. Molimard, 牟) 요셉(1928. 4~1937.1), 2대 김영식(金永植) 베드로(1937. 3~11), 3대 몰리마르(1937. 11~1938. 10), 4대 멜리장(P. Mélizan, 梅履霜)베드로(1939. 7~1948. 7), 5대 부드(W. Booth, 夫文化) 굴리엘모(1948. 8~1949. 8), 6대 페티프렌(R.D. Petipren, 邊聖行) 로이(1949. 8~1950. 6), 7대 황정수(黃貞秀) 요셉(1951. 10~1954. 10), 8대 신인균(申麟均) 요셉(1954.10~1956. 7), 9대 봉희만(奉喜萬) 안토니오(1956. 7~1959.9), 10대 하한주(河漢珠) 요셉(1959. 9~1967. 1), 11대한종훈(韓鍾勳) 스테파노(1967. 1~1968. 5), 12대 조원길(趙源吉) 그레고리오(1968. 5~1970. 7), 13대 서강하(徐康夏) 마태오(1970. 7~1975. 1), 14대 한의수(韓義壽) 베드로(1975. 1~1978. 7), 15대 양병묵(楊柄默) 루가(1978.7~1985. 2), 16대 김병렬(金炳烈) 보니파시오(1985. 2~1990. 11), 17대 박건순(朴建淳) 베네딕도(1990. 11~1995.8), 18대 김화태(金華泰) 제르바시오(1995. 8~1998. 8),19대 이상영(李相榮) 베드로(1998. 8~2003. 9), 20대 조영오(曺永五) 도미니코 사비오(2003. 9~현재) .평택 지역에 언제 천주교가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알수 없지만, 대추리(大秋里) 공소에 내려오는 구전에 따르면 1791년 평택 현감(平澤縣監)으로 부임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처소에서 30여 리 떨어진 대추리에찾아가 처음 전교하였다고 한다. 평택 지역은 1888년왕림 본당, 1890년 양촌(현 구합덕) 본당, 1895년 공세리 본당, 1901년 안성 본당에 편입되었다. 이와 같이 본당이 연이어 설립되고 전교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1922년경 평택 지역의 공소는 왕림 본당 관할 열세 곳(신자수 421명)과 안성 본당 관할 세 곳(신자수 364명) 등열여섯 곳이 있었다. 1925년 왕림 본당에서는 평택 지역이 본당으로부터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하여 신자들이 자주 성사를 볼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본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같은해 서탄면 적봉리에 진위(振威) 본당이 설립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왕림 본당 보좌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하지만 신자들이 가난하여 성당 건축비를 부담할 수 없었던 데다가 김영근 신부가 1927년 7월경 경기도 양평 마룡리(현 용문) 본당으로 전임되면서,진위 본당은 설립 2년 만에 폐쇄되었다. 본당이 폐쇄됨에 따라 수원군 태장면 병점(餠店) 공소에 있던 몰리마르 신부가 진위 본당의 관할 지역을 임시로 담당하였다.
몰리마르 신부는 안성 본당의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신부와 함께 평택 지역에 새로운 본당 신설을 모색하고, 지역 사정에 밝은 공소 회장들을 동원하여 성당대지를 물색한 끝에 1928년 2월경 현 본당 소재지인 비전리 605 · 608 · 609-4번지 2,924평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4월 14일 몰리마르 신부가 병점 공소를 떠나 평택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평택 본당이 설립되었다. 평택 본당의 관할 공소는 왕림 본당 소속 열세곳과 안성 본당 소속 세 곳이었고, 신자수는 780여 명이 었다.
몰리마르 신부는 평택 본당에 부임하기 전에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비전리에 30평 규모의 사제관과 50평 규모의 성당을 세웠고, 1928년 11월 7일 서울 대목구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보좌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29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몰리마르 신부의 고향 사람들로 추측되는 프랑스 신자들이 보내 온 '천상의 모후' 대상본을 성당에 안치하였다. 몰리마르 신부는 매주일 주보 혹은 매월 월보를 발간하여 본당의 소식을 공소에 알리는 한편 1933년 8월경 성당 대지로 비전리 617번지 383평을 추가로 매입하였고,1934년 5월과 9월 서정리(현 서정동)에 각각 임시 사제관과 성당을 세웠다. 1937년 1월 몰리마르 신부가 휴가를 얻어 본국 프랑스로 떠나자 3월 김영식 신부가 2대주임으로 부임하였고, 같은 시기에 프로망투(E. Fromen-toux, 包萬壽) 신부도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평택 본당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11월 휴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몰리마르 신부는 3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서정리에 서양식 벽돌로 된 2층 사제관 건물을 신축하였고, 1938년 10월 서정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4대 주임 멜리장 신부 재임기인 1943년 4월에는 서울 대목구장 노기남(盧基南,바오로) 주교가 사목 방문하여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1948년 6월 서울 대목구에서 충청남도 지역을 독립포교지로 설정하면서, 서울 대목구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대전 독립 포교지로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멜리장 신부는 충남 온양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8월에 5대 주임으로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부드 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8월에 6대 주임으로 부임한 페티프렌 신부는 성당에 무료 시약소를 개설하여 성가 소비녀회(현 서울 성가 소비녀회) 수녀들과 함께 고통받는 환자들을 돌보았고, 소규모 보육 시설을 인수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보살폈다. 1950년 봄 성당 증축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고, 성당 내부가 심하게 훼손되고 수녀원 물건이 모두 도난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7대 주임 황정수 신부 재임기인 1951년 11월 '성신보육원' (聖神保育院)을 개원하였고, 1952년에는 평택주둔 미군 부대의 원조를 받아 한국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성당 증축 공사를 마무리하여 성당 전체 공간을 50평에서 85평으로 확장하였다. 같은 해 11월 전교와 시약소 일을 담당하던 성가 소비녀회 수녀들이 본원으로 돌아갔다. 8대 주임으로 부임한 신인균 신부 재임기인 1954년 11월에는 안중 공소를 설립하였고, 1955년 2월에는 성당 종각(鐘閣)을 건립하였다. 9대 주임 봉희만 신부 재임기인 1957년에는 벽돌 2층으로 된 성신보육원 건물을 신축하였고, 1958년에는 약 29평 규모의 궁리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959년 8월에는 본원으로 돌아갔던 성가 소비녀회 수녀들이 다시 파견되어 보육원 원아들을 보살폈다.
10대 주임 하한주 신부 재임기인 1959년 말에는 42평 규모의 목조 한옥으로 된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평택본당 신자들을 위한 공동 묘지를 세교리 산 9-1번지에 마련하였다. 1961년에는 34평 규모의 청년 회관과 16평 규모의 학생 도서실을 지었고, 1962년에는 성당 마당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통을 재현한 구조물인 '십자가의 길' ( '골고타' 라고 명명)을 건립하였다. 1963년 5월 본당에 프란치스코 재속 형제회를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10월 평택 루르드의 성모 꾸리아를 설립하는 등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66년 1월 안중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하였는데, 그 관할공소는 열한 곳이었고 신자수는 1,209명이었다. 11대주임 한종훈 신부 재임기인 1967년 10월에는 매주일 복음과 본당의 공지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본당 주보를 창간하였고, 11월에는 서정리 본당 방축리 공소를 본당에 편입하였다. 또한 신자들이 성당에서 편안한 자세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신자용 장궤틀 40개를 1968년에설치하였다. 12대 주임 조원길 신부 재임기인 1968년 12월에는 수많은 전쟁 고아들을 보살펴 왔던 성신보육원이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원생이 감소하여 결국 폐원됨에 따라 원생들을 돌보던 성가 소비녀회 수녀들도 본당에서 철수하였고, 대신 1969년 2월 인보 성체 수도회 수녀 2명이 파견되었다. 같은 해 3월 주일학교의 교육 지침을 확립하여 교리 교육을 보다 체계화하였고, 4월에 23개 구역을 25개 구역으로 재편한 후 일부 구역 회장과 반장을 새로 임명하여 구역 활성화를 도모하였으며, 1970년 5월 세교리 공동 묘지를 보다 합리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관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와 같이 평택 본당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1970년경에는 신자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지만, 1928년 설립 이후 성당이 소규모로만 증축되어 신자들을 수용하기에는 비좁았다. 이에 13대 주임 서강하 신부 재임기인 1971년 5월 성당 건립 기공식을 거행하여 12월에 연건평 약 209평의 콘크리트 연와조 건물인 성당을 준공하고, 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와 역대평택 본당 신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72년 4월 대추리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고, 9월 연건평 75평 규모의 단층 건물인 본당 사제관을 완공하였으며, 10월 본당 사목 협의회를 발족하였다. 1973년 2월 건립 45년 만에 옛 성당을 철거하였고, 4월에는 초대 주임 몰리마르 신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상을 세웠으며, 5월에 25평 규모의 본정리 공소, 8월에 24평 규모의 방축리 공소를 건립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4대 주임 한의수 신부 재임기인 1975년 5월에는 20평 규모의 두리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고, 1976년 3월부터 5월까지 성당 내부를 수리 · 개조하였으며, 1977년 8월에는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 행사를 마련하였다. 원래 본당 설립일은 1928년 4월 14일이었으나 1977년 당시에는 1927년 8월 15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8월에 5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수원교구장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주교와 평택 본당역대 주임 신부들의 공동 집전으로 50주년 경축 미사를 봉헌하고, 마사비엘 성모 동굴을 조성하여 축복식을 거행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였다. 1978년 3월 4일에는 40평 규모의 진사리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고, 3월26일에는 신용 협동 조합을 설립하였다.
15대 주임 양병묵 신부 재임기인 1979년 8월에는 단층 건물이었던 사제관을 2층 건물로 증축하여 1층은 단체 회합실로, 2층은 주임 신부와 보좌 신부가 거주하는 사제관으로 사용하였다. 1982년 3월 소화유치원 제1회 입학식을 거행하였고, 6월 옛 수녀원을 철거한 후 그 자리에 연건평 256평 규모의 교육관 겸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1983년 8월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팽성 본당을 설정 · 분리하였는데, 그 관할 구역은 팽성 전 지역이고 신자수는 1,115명이었다. 1984년에는 성당 내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16대 주임 김병렬 신부 재임기인 1985년 11월 원곡 공소를 설립하였고, 1986년에는 구역 · 반 재조정 작업에 착수하여 신자 간의 유대 강화와 효율적인 사목을 위해 약 50세대를한 구역으로, 15세대 내외를 1개 반으로 개편하였다. 1987년 본당 설립 60주년 기념으로 평택 지역에 제2의본당 설립을 추진하였고, 1988년 1월에는 한국 원폭 피해자 진료회와 함께 평택 성당 교육관에서 원폭 피해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실시하였으며, 9월에는 제2 본당설립 부지로 비전동 산 32-6번지를 매입하였다.
17대 주임 박건순 신부 재임기인 1991년 3월에는1988년에 매입하였던 비전동 부지가 1990년 11월 평택시에 수용됨에 따라 비전2동에 토지 650평을 마련하였고, 1992년 12월 비전2동 성당 대지에서 새 성당 신축 기공 미사를 거행하였다. 1993년 1월에는 1991년 3월에 매입하였던 대지에 인접한 땅 151평을 추가로 매입하여 총 801평을 새 성당 대지로 확보하였고, 1993~1994년에는 본당 관할 구역에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신자수가 증가하자 효과적인 사목을 위해 구역을 38개 에서 43개로 증설하였다. 1995년 1월 비전동 성당을 신축 · 분리하여 신자 741세대 2,334명을 이관하였고, 6월 대강당과 소화유치원 등을 갖춘 지하 1층 · 지상 2층의 부속 건물을 완공하여 7월에 김남수 주교의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8대 주임 김화태 신부 재임기인 1995년 12월에는 본당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구역단위로 형제회를 구성하였고, 1996년 6월에는 성당 내부와 외부 보수 공사를 마무리하여 성당을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11월에는 궁리 공소의 본당 승격을 추진하기 위해 '새 성당 분당 추진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그 결과 1998년 1월 본당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궁리 공소를 본당으로 분리 · 승격하고 신자 295세대 1,066명을 이관하였으며, 5월 본당의 역사를 기록한 《평택 성당 70년사》를 발간하였다. 19대 주임 이상영 신부 재임기인 2003년 5월에는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피살된 초대 주임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를 대전교구 천주교 공원묘원에서 평택 본당 구내로 옮겨와 안장하였다. 현재 20대 주임 조영오 신부가 부임하여 2004년 10월 세교동 본당을 승격 · 분리하였다. (→수원교구)※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신문> 1988년 2월 14일자/<평화신문> 2003년 5월 18일자 · 2004년 9월 26일자/ 《경향잡지》850호(1937. 3. 28) · 1041호(1954. 12. 1) · 1061호(1956. 8. 1)/《수원교구 3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1993/ 서상요 엮음, <평택 성당 7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평택 성당, 1998. 〔梁仁誠〕
평택 본당 平澤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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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