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平和 〔히〕שָׁלוֹם〔그〕εἰρήνη [라]pax [영〕peace

글자 크기
11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바에 새겨져 있는 평화라는 글자와 비둘기.
1 / 2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바에 새겨져 있는 평화라는 글자와 비둘기.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 각종 형태의 인간 공동체 상호 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 또는 대립적 폭력 상태가 어느 정도 계속적으로 정지되고 있는 상태.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평화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한 총괄적인 약속이며, 하느님이 화해와 평화의 유효한 표지로 인간에게 보낸 그리스도가 주는 선물이다. 평화는 그리스도적 덕행 전체를 포함하며, 사랑이 사회적, 또는 전체적 의미를 띠고 나타나 있는 것이다. 즉 수많은 덕행들이 함께 모여 어떤 복합적 실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평화는 구원받았음을 드러내는 표지요, 분쟁과 갈등 중에서 하느님과의 계약(恩約에 충실하다는 뚜렷한 표지이다.
① 성서에서의 평화 : 〔고대 세계에서의 의미〕'평화'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이레네' (εἰρήνη)가 지닌 기본적인 뜻은, 사람들이 서로 좋은 사이를 지속시켜 나간다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 간에 침공의 위협이 없는 상태 혹은 그런 기간을 가리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이다. 따라서 '에이레네' 는 그리스 문화권에서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 볼 때 '평화' 의 가장 적절한 개념 정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에이레네' 가 개인적인 차원으로 좁혀지면 '마음이 평온한 상태' 를 가리킨다. 특히 후기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인 에픽테토스 (Epictetos, 50~138)가 '에이레네' 를 그런 의미로 사용하였다(Epict., Ⅲ. 13, 13). 그러나 로마가 지중해권을 정복하면서 '평화' 라는 개념에 또 다른 차원이 도입되었다.
로마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로마' 라고 하면 일종의 거대한 문화 현상을 가리키는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기 때문이다. 로마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을 장악하였으며, 전성기 때인 2세기에는 5,000만 명의 인구가 로마 제국에서 살고 있었다. 로마는 언어, 법, 예술, 건축, 토목, 정부 조직 등 전 분야에 걸쳐 제국의 형태를 만들어 갔다. 또한 로마인들은 국가 경영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영토를 넓혀 가는 일뿐만 아니라 제국의 평화를 유지시켜 나가는 데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른바 '분할하여 통치한다' (divide et impera)는 정책이 주효하였다. 즉 식민지가 된 도시(나라)들과 각기 다른 조약을 맺음으로써 식민지들 사이의 이해 관계에 차이를 두었고, 이는 결국 식민지들 간의 연합을 막는 정책이 되었다. 식민지(속주)에는 자치권이 주어졌으나, 총독이 파견되어 로마가 진정한 통치자임을 언제나 잊지 않도록 하였다.
로마 제국에는 황제를 신격화시키는 종교가 있어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원칙적으로 지배하는 힘을 발휘하였다.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서기14)는 '황제 숭배' 의 기틀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현실 정치에서는 '충성 서약' 을 막는 등 냉정함을 유지하였지만, 국가적인 행사에 있어서는 자신을 신에 버금가는 존칭인 '지존자' (至尊者, Augustus)로 부르도록 하였다. 제국의 백성들에게 신이 자신들을 다스린다는 자부심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원로원에서는 '아우구스투스 평화의 제단' (ara pacis au-gustae)을 쌓았다.
이러한 점들, 즉 로마 제국의 판도와 그 판도를 유지시키기 위해 기울인 제국 경영의 결과로, 제국에는 이른바'팍스 로마나' (Pax Romana)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화' 는 개인적인 마음의 평화나 나라 간의 친밀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민족이 제국이라는 거대한 힘 밑에서 강제로 누리게된 저항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짓밟힌 입장에서 보면'굴욕적인 평화' 일 뿐이다. 이것이 성서 밖의 세계에서'평화' 가 갖는 세 번째 의미이다.
(구약성서의 평화] 구약성서에서 평화를 뜻하는 단어는 '샬롬' (שָׁלוֹם)이다. 이 말은 그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다. 국가의 안녕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인사말로도 사용되고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평화의 도시'라는 도시 이름에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바탕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철저한 야훼 신앙이 있다. 즉 '평화' 는 신학적인 개념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돌보심 : '살롬' 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돌보심과 연결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분이다. 하느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없애 달라고 그분에게 기도하고, 하느님은 그에게 평화를 준다 (이사 38, 17). 그러므로 누구라도 하느님이 머무는 성전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는 하느님이 주는 평화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시편 125, 5 ; 128, 6 ; 신명 6, 24-27). 그처럼 '평화' 란 세상 어느 것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며 그분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다. 평화란 곧 하느님이 이 세상에 주는 '구원' 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은 만날 때나 헤어질때 '살롬' 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식으로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돌보심이 같이 하시오' 라는 의미가 그 저변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다분히 종교적인 차원의 인사말이다.
국가적인 차원 : '살롬' 은 또한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시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평화를 줄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예레 14, 13 : 23, 17 ; 27, 9. 14 ; 미가 3, 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으로 나라는 종종 곤경에 빠지곤 한다(예레 6, 14 ; 8, 11 : 12, 12 ; 에즈7, 25). 이때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려 한다(이사 6장 등). 신명기계 문헌의 역사관에 보면, 평화란 국가적인 차원의 주된 관심사임을 알 수 있다 (2사무 7장). 이스라엘은 국가적인 불행을 당할 때마다 이를 하느님과 인간의 문제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진정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는 분인가?(시편 10,4 : 14, 1)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떠한가? 구약성서에서의 대답은 한결같이 "그렇다"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 질문은 거꾸로 인간 자신에게 던져지게 된다. 즉 "우리 나라(이스라엘)가 겪는 불행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우리의 책임이 아닌가?라는 자문을 하게 된다.
종말론적인 의미 : 구약성서에서 '살롬' 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궁극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 으로 구체화되는데, 메시아가 세상에 와서 모든 적을 쳐부수고 나면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다시는 도전받지 않는 궁극적인 평화가 완성된다(이사 9, 1-6 ; 11, 1 이하 ; 미가 5, 1 이하 ; 예레 30, 8 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낸 메시아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평화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을 전제로 한 것이지, 완벽한 미래를 제공하는 저 세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평화' 이해를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각각 문서 예언자 시대, 바빌론 유배 이전 시대, 바빌론 유배 이후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이는 평화의 개념이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평화는 철저히 하느님에 의해 이 세상에 주어진다.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엇나갔을 때 그 평화는 참혹하게 깨지고 만다. 이스라엘이 역사를 통해 얻은 뼈저린 교훈이 '평화' 라는 개념에 담겨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평화〕평화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이레네' 는 신약성서에 모두 92회 등장한다. 그 숫자를 나누 어 보면 공관 복음서와 사도 행전에 26회, 요한계 문헌에 11회, 바오로 서간에 43회, 기타 작품에 12회 등장하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뜻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사말 : '에이레네' 가 인사말로 나오는 경우가 공관 복음에 여러 번 있다(마르 5, 34 ; 루가 7, 50 8, 48 ; 10,5 ; 24, 36 등). 그리고 요한계 문헌에 나오는 '평화' 중 상당수는 인사말이다(요한 20, 19. 21. 26 ; 2요한 3절 ; 3요한 15절 ; 묵시 1, 4). 이는 물론 히브리어 '살롬' 의 번역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이 집에 평화(살롬)를 (법니다)' 하시오. 거기에 평화의 아들이 있으면 여러분의 평화가 그에게 내리겠고,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루가 10, 5-6 ; 마태 10, 12-13)라고 가르쳤다. 이는 유대인의 일반적인 인사말이지만, 예수와 제자들 간의 상호 관계를 감안할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의 구원(복음)을 전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평화" (루가 24, 36)라고 하였을 때는 부활한 예수가 친히 베푸는 '평화' 로 볼 수 있다.
바오로의 편지에도 '평화' 가 자주 등장한다. 특히 첫인사말을 할 때면 예외없이 '평화' 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1데살 1, 1 : 갈라 1, 3 ; 1고린 1, 3 등), 이는 유대인의 인사 습관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평화' 와 함께 '은총' (χάρις)이 인사말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평화와 은총' 이라는 인사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없는 것으로 바오로가 처음 사용한것인데, 이를 통해 '평화' 가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평화는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총이라는 뜻이다. 짐작컨대 히브리어에 능숙하지 못한 이방인을 상대로 '평화' 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에는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전제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즉 그리스인에게 평화' 란 정치적인 의미이지만, 그리스도인의 '평화' (살롬)는 온전히 종교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 의도는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에 등장하는 "평화의 하느님" (ὁ Θεὸς τῆς Εἰρήνης)에서도 잘 드러난다(1데살 5, 23 ; 갈라 6, 16; 2고린 13, 11 등).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평화 : 신약성서에서 '평화' 는 종종 이 세상의 구체적인 삶에서 실현되는 평화를 뜻한다. 마태오 복음서의 행복 선언 중에 일곱 번째 항목으로 나오는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리니" (마태 5, 9)에서의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평화이다. 하느님 나라의 윤리는 구체적으로 마태오 복음서 5장 21-48절에 등장한다. 하느님 나라의 윤리를 철저히 지키는 이는 형제에게 분노를 품지 않고(21-27절), 간음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28-29절), 보복을 포기하고(38-42절) 원수를 사랑하는(43-47절) 등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 (48절).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의 또 다른 예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 33절을 꼽을 수 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평화가 무질서의 반대 개념으로, 세상이 질서가 잡혀 건강하게 유지되는 상태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 그에게 있어 하느님은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의 주인인것이다.
종말론적인 차원 : 신약성서의 '평화' 는 또한 종말론적인 차원을 가진다. 예수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습니다" (루가 12, 51 ; 마태 10, 34)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임박한 종말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내에 의견이 분분해질 것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의인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장차 이루어질 종말을 겨냥한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평화' 에도 종말론적인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평화' 는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보여 주는 척도이다(요한 14, 27 : 16, 33). 요한 복음서 13-17장은 예수가 제자들과 하직하면서 한, 이른바 고별 설교 이다. 그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평화' 를 남겨 주고 간다는 말을 한다. "나는 평화를 여러분에게 남겨 두고 갑니다"(14, 27). 앞뒤 문맥을 볼 때, 이는 예수 안에서 누리는 평화로 해석할 수 있다(특히 16, 33). 따라서 비록 예수는 떠나지만 그분의 궁극적인 돌보심은 여전히 제자들에게 남아 있다는 뜻, 혹은 부활한 예수가 같이한다(만찬례를 통해)는 식의 설명이 가능하다. 예수의 종말론적인 현존을 깊이 있게 느끼는 상태가 곧 평화인 것이다. 그 외에도 '평화' 라는 낱말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로마 16, 20 ; 1데살 5, 23 ; 2베드 3, 14).
종교적인 의미만의 평화 : 신약성서의 '평화' 는 철저하게 종교적인 개념이라 정치적 · 사회적인 차원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단어에 대한 성서 외적인 쓰임새와 비교할 때 뚜렷한 차이가 나는 점이다. 특히 루가 복음서에서는 로마의 평화(곽스 로마나)와 예수의 평화를 대비시켜 그 점을 분명히 하였다(정태현,《모든 이에게 평화의 복음을》, 성서와 함께, 1993, pp. 171~182). 구약성서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있고 그들로 구성된 나라가 있어 정치적인 변수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신약성서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가치로 동일성을 찾았던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약성서의 '평화' 도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하느님을 전제한 개념이며, 이 '평화' 는 현재라는 시간대에서나 종말론적인 시간대에서나 온전히 하느님의 몫이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 평화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는 평화는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구원' 이라는 말로 형상화 시킬 수 있다. 사도 행전에 보면 '평화의 복음' 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며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바로 이분이 만민의 주님이십니다"(10, 36). 하느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평화' 는 곧 '구원' 이다. 바오로는 이를 좀 더 구체화시켜 '평화' 를 하느님과 화해한 상태로 간주하였다. 인간은 하느님을 등져 죄의 종으로 팔려 갔다. 그러나 하느님은 죄값(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치러 인간을 속량해 주었다. 이로써 소원하였던바 대로 하느님과 인간은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2고린 5, 18-21). 바오로의 '화해' 사상은 그 후학들에 의해보다 구체화된다(골로 1, 15-22 ; 에페 2, 13-18 : 정양모, <신약성서의 평화관>,《현대 사회와 평화. 김규영 교수 고희 기념 논문집》, 서광사, 1991, pp. 33~85) .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6/ 《2000년대의 희망과 현실》, 들숨날숨,2000/ 정태현, 《모든 이에게 평화의 복음을》, 성서와 함께, 1993/ 정양모, <신약성서의 평화관>, 《현대 사회와―평화-김규영 교수 고희 기념 논문집》, 서광사, 1991/ 《TDNT》 2, pp. 400~419/ H.-W. Gen-sichen · H.H. Schmid · W. Thiessen · G. Delling · W. Huber, 《TRE》11 , pp. 599~646/ W. Klassen, 《ABD》5, pp. 206~212. 〔朴泰植〕

② 윤리 신학에서의 평화 :〔의 미〕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신국론》(De civitate Dei,413~426)에서, 평화의 여러 차원을 질서와 조화에서 관철(觀徹)하며 다음과 같이 점진적이고 상승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즉 지체들의 조화를 지니는 육체의 평화, 욕구가 충족된 비지성적 동물의 평화, 인식과 행동의 조화를 이룬 지성적 존재의 평화, 영과 육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삶을 이루는 평화, 죽을 인생에 있는 인간이 영원법에 순응하며 신앙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는 인간의 평화, 화목하게 사는 인간들의 평화, 가족 간에 명령하고 순명하는 데 있어 화목한 가정의 평화, 신민들의 명령과 복종에 있어 화목한 국가의 평화, 가장 완전한 질서와 친교가 지배하는 사회인 하늘나라의 평화로 구분해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평화를 개념화하는 데에도 항상 사물의 창조 질서 및 인간의 지성과 자유에 근거한 질서, 즉 정의와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화합과 친교를 내포하게 된다.
교회적 측면에서는 1925년 12월 11일에 교황 비오 11세(1922~1939)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선포하고 그리스도 왕국을 천명하며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 로 설명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이해와 노력의 방향도 새로워졌다. 그렇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전까지는 윤리적 측면에서 '팍스 로마나' 의 원용(遠用)인 '정당한 전쟁' (bellum justum)과 합당한 방법에 대한 토의가 주제였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윤리 방향이 깊이 있게 논의되었다. 구체적으로는 교황 요한 23세(1958~1963)의 회칙<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4. 11)가 발표됨에 따라 평화에 대한 윤리적 이해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회칙은 과거와 같이 전쟁에 있어 어떤 정당성을 찾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대한 의무와 권리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창조주의 뜻에 의한 질서와 평화의 왕인 성자를 통해 확립된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또한 시대의 징표를 알아내어 평화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추구함과 동시에 정치 · 사회적으로 인류의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하여 누구와도 협력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선의의 모든 사람을 동참하도록 초대한 것이다. 이로써 평화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시각이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생활과 사명에 대해 살피면서 특히 <사목 헌장>(Gaudium et Spes,1965. 12. 7)을 통해 평화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그중 제2부의 5장인 '평화 증진과 국제 공동체' 에서 평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하였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오로지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로 전락될 수도 없고, 전제적 지배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올바로 또 정확히 말하자면, 평화는 '정의의 작품' 이다. ··· 지상의 평화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나며,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습이자 결실이다" (78항). 즉 평화가 온전히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성서적인 평화의 개념을 구현하였다. 이어서 '전쟁의 회피' 와 '국제 공동체의 건설' 을 구체적인 실현 방안으로 제시한다. 이를 보면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이루어내야 하는 '평화' 의 의무가 개인적인 차원의 구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훨씬 광범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다양한 가치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평화(구원)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교회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 문헌은 신학적으로 깊게 다룰수 없던 변화되는 정치, 사회와 발달된 과학 기술, 전술 핵무기나 화생방(化生放) 전쟁으로 입게 되는 피해뿐만 아니라 전쟁 억제 문제와 연결되어 무기 보유 여부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들을 시행하고 교회의 쇄신과 함께 새 질서와 기구 구성으로 교회는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교황청과 각 주교 회의 산하의 '정의 평화 평의회' 가 상설 기구가 되었으며,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3. 26) 회칙에서는 경제 문제가 평화에 기여하는 폭, 즉 경제 문제로 인한 평화의 파괴나 방해 요인이 검토되었고 '발전' 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76항). 즉 평화에 대한 개념이 정치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차원과 함께 인간 사회 전체와 복지 사회까지 겨냥한 '인간의 평화' 를 추구하는 범위로 확대되었다.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모든 요소의 배제로서 평화가 인류의 생활 발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선임 교황들의 가르침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역대 유례가 없는 잦은 세계 순방과 매년 교서를 통하여 가르침을 발표해 왔다. 특히 평화를 위해서는 어떠한 폭력도 배제되어야 함을 강조하였고, 세계 평화 증진을 위하여 '세계 평화의 날' 을 제정하였다. 또한 정의 평화 평의회의 발족과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이 되는 해에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Socialis, 1987. 12. 30)을 발표하여 소외 계층에 대한 깊은 관심과 참다운 인간 해방을 역설하고 불의에서의 회개를 설파하였다.
〔오늘날의 문제들〕 이른바 '냉전' 의 시대가 막을 내림으로써 인류가 공멸하리라는 위기감은 사라진 듯하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서는 '대량 학살' 의 비극에 버금가는 위기가 닥치고 있다. "초강대국들 사이에 벌어졌던 '냉전' 으로 세상이 죽음의 위협을 받던 시대가 끝난 후, 우리는 바야흐로 서방 세계의 시작과 미디어의 '세계화' 를 경험하고 있는데, 그 목표는 '하나된 세계' 의 구축이다. ··· 그러나 그런 새롭고 멋진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이것이 오히려 몰(沒)세계화라는 주장이 등장하고, '범세계적인 기도' 조차 들을 수 없으며, 대단히 빠른 속도로 (소외되는) '주변부 인간' 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오늘날 인류는 무기의 비축이나 군비 경쟁 등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 환경의 파괴, 생명의 파괴,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남녀 간의 부당한 불평등,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이나 민족들 사이의 지나친 경제적 · 사회적 불공정과 불평등, 사회 정의와 평등에 어긋난 모습 등은 국제적 평화에 배치된다. 이에 한 가지를 더하여 하나의 경제권, 하나의 미디어 세계를 구축하면서 인류가 당연히 누려야 할 다양성의 파괴를 꼽을 수 있다. 짐작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의 돈이 국제적으로 구축된 통신망을 통해 순식간에 오고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한 나라의 흥망이 좌우된다. 한국이 겪었던 IMF 위기도 그런 일이 벌어진 결과였다. 그런가 하면 미디어의 파괴적인 힘도 고려해야 한다.
하나의 가치, 또는 하나의 초강대국 밑으로 통합된 세계에서는 결코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 과거 로마 제국이 구축하였던 '팍스 로마나' 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세계를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는 독단적인 야욕이 들어 있었고, 그 밑에서 인간은 굴욕적인 평화를 맛보아야 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평화는 결코 정치적인 평화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가 넘치는 곳, 그래서 누구나 평등함을 누리며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인류의 희망이 있다. (← 세계 평화의날 ; → 공동선 ; 구원 ; <민족들의 발전> ; <사목 헌장> ; 전쟁 ; <지상의 평화> ; 팍스 로마나)
※ 참고문헌  Bernhard Häring, Free and Faithful in Christ, TheCrossroad Publishing Company, New York 1981(소병욱 역, 《자유와 충실》, 바오로딸, 1996)/ Hans Rotter· Giinter Virt, Neues Lexikon derChristlichen Moral, Tyrolia, Innsbruck-Wien, 1990/ 한용희, 《가톨릭정치 윤리》, 분도출판사, 1980/ 최창무, <평화- 하느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과제>, 《신학과 사상》 1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89,pp. 6~21/ 오경환, <성서와 교회의 평화관>, <사목> 131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9, pp. 85~102. 〔金政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