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拋棄

[라]relictio · [영jabando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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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권리나 자신이 가진 자격을 사용하지 않는 것. 교회에서 말하는 포기는 일반적으로 '영적인 포기'(spiritual abandonment)를 의미한다.〔의 미〕 영성 신학에서 포기는 능동적 · 수동적 의미로 사용되는데, 능동적 의미의 포기는 신학적 덕행들을 통하여 각자가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반면 수동적 의미의 포기는 영혼이 실제로 죄로 인해서나 외형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버림받은 상태가 되는 경우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저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포기는 내적인 시련이다. 이는 덕으로 나아간 영혼이 고통스러운 부족함(painful need, 결핍)을 느끼는 것으로서, 하느님이 그 영혼을 버린 것처럼 느껴져 더이상 그분의 호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태이다. 이런 영혼은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우리 주님의 포기들' 을 배워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포기들' 을 배워야 한다. 그렇기에 포기는 '신적인 것에 합치하려는 좋은 의지나 사랑에서 태어나 높은 단계로 고양된 것' 이다. 보다 낮은 단계에서의 포기는 하느님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나, 보다 격렬한 상태는 하느님으로부터 거부되어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고통은 높은 단계의 영성에 이른 영혼들만이 맛보는 아픔이다. 일부 버림받음은 죄나 신앙의 미지근한 상태로 인해 일어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실제적인 영적 포기는 거룩한 영혼들이 겪는 것으로서 하느님을 그들의 유일한 열망과 사랑의 대상으로 여겨왔는데 이제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뜻한다. 이런 경우에는 포기와 의미가 비슷한 쓰라림(arriditas), 쓸쓸함(desolatio), 내버림(derelictio), 정화(purificatio) 등의 유사어들을 쓰기도 한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이런 체험들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으며, 주로영성가들의 서신들과 자서전 등에서 발견된다. 〔근 거〕 예수의 모범들과 성서의 가르침 : 모든 덕행들처럼 포기는 성서에서 드러난 예수의 모범들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수난을 앞두고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이 흐르도록 기도하면서 "아버지····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루가 22, 42)라고 하던 말과 골고타에서 임종 직전에 고통 속에서 아버지께 부르짖은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루가 23, 46)라는 기도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적인 포기의 모범을 볼 수 있다. 이상적인 포기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태도이다. 성서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질적 부에 대해서도 포기할 것을 가르친다(마태 6, 25-34 : 루가 12, 22-31). 사도 베드로는 "여러분은 모든 근심을 그분께 내맡기시오"(1베드 5, 7)라는 말씀으로 포기에 관한 일반적인가르침을 제시하였다. 하느님의 섭리 :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이고,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이라면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가르침이다. 즉 "전능하신 분이 원하지 않으시거나 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거나 그분이 친히 하지 않으시면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Non ergo fit aliquid nisi omnipotens fieri velit, vel sinendo ut fiat vel ipse faciendo, Augustinus, Enchiridion de fide, spe et caritate, n. 24). 둘째는 하느님의 지고한 뜻은 한없는 자비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선하다. 그 원천이 선하고, 목적도 선하고, 형상(형태)도 온전히 선하며, 전체적으로 언제나 선하다.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처럼 이 세상의 악들도 하느님에게 있어서는 선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Opus imperf. contra Julianum, I.V. n. 60 ; 《PL》 45. 1495). 그러므로 포기의 관점에서 각자는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여기에는 모든 것을 선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에 맡기는 관대한 태도가 요구된다. 〔포기와 다른 덕행들〕 발생 : 포기는 주로 수행 생활에 힘쓰는 이들이 겪는 정화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특히 수동적 정화의 과정에서 체험하는 어두운 밤의 경우인데, 십자가의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의 체험이 무게 있게 다루어진다.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초대되는 영혼은 그분과 유사한 영적인 포기(버림받음)를 체험하게 된다. 성덕에 정진하는 영혼은 능동적인 정화를 거쳐 수동적인 정화를 거치게 되는데, 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끝난 후 오직 하느님이 영혼을 정화시키는 특수하고도 높은 단계의 정화 과정이다. 여기서는 감성의 밤과 심령의 밤을 겪게 된다. 감성의 밤에서는 영혼의 인내력이 가혹하게 시험받는데, 장기간 무미건조함을 겪게 된다. 이때 영적인 포기가 일어난다. 영혼은 하느님과 관련된 일에서 기쁨이나 위안을 찾지 못하고 덕에 진보하였다기보다는 후퇴한 느낌을 받으며 무력함을 맛본다. 이런 일반적인 포기 외에도 어떤 경우에는 친구나 장상들로부터 비웃음이나 조롱을 받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의 밤을 맛보는 영혼은 극히 고통스러운 시련을 통해 아직 정화되지 않은 내적인 결함, 즉 욕망의 정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상태에 이른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체험을 겪게 되며, 하느님으로부터 오던 모든 기쁨과 위안이 완전히 사라진다. 마치 죽음을 당하더라도 이보다 더 힘들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한다. 하느님은 너무나 무정하고 마치 영혼에게 앙갚음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빌라의 데레사(Theresia ab Avila, 1515~1582)는 '변형 일치' (다른 말로 '영적 혼인의 단계' )가 이루어지는 제7 궁방(宮房)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반드시 영의 밤을 거쳐야 한다고 하였다. 십자가의 요한은 체험을 통해 하느님이 영혼을 당신과의 완전한 일치로 이끌기 위해 영혼에게 영의 밤을 허용한다고 하였다. 영성가인 아린테로(J.G. Arintero) 신부도, 어두운 밤은 영혼이 완전한 일치에 이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하였다. 포기와 연관된 덕행들 : 영성 생활은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찾고 일치시키는 데에 있다. 포기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합치시키려는 태도이다. 완덕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여러 영성 신학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 논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iscus Salesius, 1567~1622)의 《신애론》(1, VIII, ch. 3 et 5-9)에 의하면, 하느님의 뜻은 보이지 않으므로 하느님의 계명들과 교회의 가르침, 복음적 권고들, 영감들과 정해진 규칙들 및 회헌을 잘 지키고 장상들의 원의와 명령을 잘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 하느님의 뜻을 잘 준행한다는 것은 질병이나 죽음, 어려움, 위안, 역경이나 순경 등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잘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한다. 새 신심 운동(Devotio moderna)을 주장한 저술가들과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79/1380~1471)는 포기를 라틴어로 '레시냐시오' (resignatio)라고 표기하였다. 즉 포기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르오데(V. Lehodey) 신부는 "하느님 뜻에 복종하는 것은 완덕에 이르는 한 방법이다" 라고 하였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 준행한다는 의미이다. 그 영역은 무한하다. 열성을 다해 성실하고 기쁜 마음으로 실천할 때 포기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이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mardusde Clairvaux, 1090~1153)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submissio) 단계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두려움으로 시작하는 자는 인내를 다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 희망으로 준행하는 자는 기쁘게 지고 간다. 사랑 안에서 준행하는 자는 이미 열성을 다해 수용한다." 결국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합치(confommitas)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는 자이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적인 포기만이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맡김으로써 온전한 중용의 단계에 들어설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에 온전히 위탁하는 태도이다. 중용과 무관심 : 포기는 수동적 측면과 포기의 한 방법으로 중용(中庸, indiferentia)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로올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에 의하면, 영성 수련의 원리와 기초에 관한 묵상에서 포기를 위한 전제 조건은 중용이다. 즉 인간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는 "만물에 대해서,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의 자유 의사에 맡겨져 있고 금지되지 않았다면, 중용을 지녀야 한다" 라고 하였다. 이때 인간적인생각은 완전히 초월한다. 이냐시오는 인간을 최고 목적으로 인도하는 사물만을 더 원하고 선택하도록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포기는 무관심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를 '거룩한 무관심' (sainte indifference)이라고 하였다. 즉 "이는 모든 것들을 회복하기 위한 완전한 무관심이다. 이에 따라 하느님의 섭리의 질서에 순응할 수 있고 환난을 위안처럼, 질병을 건강처럼, 가난을 부귀처럼, 업신여김을 명예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Ile Entretien)라고 하였다. 《신애론》에서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위탁(soumission)하는 자는 포기(résignation)와 무관심(indifférence)을 구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포기의 기본 요소와 대상〕 르오데 신부는 포기의 기초로 초탈(détachement),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과 의탁,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열거하였다. 반면 보쉬에(J.B. Bossuet, 1627~1704)는 보다 완전한 신앙과 보다 큰 희망, 보다 순수하고 충실한 사랑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Instruction sur les états d'oraison. Traité X, n. 18). 그리고 코사드(J.-P. de Caussade, 1675~1751)는, 포기의 행위는 분명 믿음, 희망, 사랑의 혼합적 행위이며 마음을 오직 하느님과 자신의 행위에 합치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Traité de l'abandon à la providence divine, Paris, 1870). 생활 중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포기의 대상이다. 구체적으로 부귀 영화, 직업, 연령 및 건강과 질병, 영혼에 관계되는 것들도 있다. 리지외의 데레사(Theresia ab Infante Jesu, 1873~1897)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마치 부모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가 부모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기듯이 '포기의 유아(幼兒) 정신' 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부모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끼며, 이런 태도에서 신뢰와 온전한 포기의 정신이 보인다. 여기서 단순함, 포기, 특별한 겸손, 뛰어난 순종, 지속적인 극기, 중단 없는 승리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참된 포기의 조건과 실천〕 내적 정화를 겪는 영혼은 하느님께 관대한 마음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태도와 올바른 신앙, 그리고 성덕에 진보하려는 열성과 여기에 방해되는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태도 및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은총의 도움을 청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포기는 모든 이들에게 권고해야 할 사항이다. 이러한 포기는 우선 인간의 조건에서 나온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순수 본성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포기 없는 삶은 자신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한다. 둘째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이들은 완덕에 부름을 받고 있으므로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포기가 절대적이다. 고등 종교에서도 자신의 완성이나 득도를 위해 절대적으로 포기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신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성실히 지려는 태도는 수행의 첫 번째 조건이다. 즉 고통에 대한 공포를 이김으로써 의무를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감수하며, 자발적으로 극기하고, 자신을 제물로 봉헌한다. 〔포기의 열매들〕 첫 번째는 '자유' 이다.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영혼은 한없는 영의 자유로움을 느낀다. 두 번째는 '평화' 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진실한 평화이다. 포기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영혼은 온전하고 관대하며 취소할 수 없는 평화를 그분 안에서 누린다. 어떤 것도 그 영혼으로부터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세 번째는 '행복' 과 '기쁨' 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면 더 큰 안전을 누리며 살아간다"(Augustinus, De dono perseverantiae) . ※ 참고문헌  V. Lehodey, Le saint abandon, Paris, 1919/ J.G. Arintero, The Mystical Evolution, Tan Books & Pub., 1979/ K. Kavanaugh, 1, p. 51 H. Martin, Dictionaire de spiritualité ascétique et mystique. Doctrine et histoire, vol. 3, pp. 504~517, 631~645.〔田達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