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청

捕盜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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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한성부(漢城府)의 치안을 담당하던 관서. 좌포청(左捕廳) · 우포청(右捕廳) 양청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 이후에 창설되었다. 좌포청은 당시 중부(中部)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동북쪽(현 서울 종로구 수은동 단성사 일대)에, 우포청은 서부(西部) 서린방(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남쪽현 종로구 종로 1가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포도청은 1894년 갑오 개혁 때 폐지되었고, 대신 내무아문(內務衙門) 소속의 경무청(警務廳)이 설치되었다. 〔설립과 임무〕 포도청은 1471년(성종 2년) 도적의 횡포를 근절하기 위해 홍이로(洪利老)를 경기도 포도장(捕盜將)에, 조한신(曹漢臣)을 황해도 포도장에 임명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리고 1481년(성종 12년)에는 <포도사목>(捕盜事目)을 제정하여, 좌 · 우 포도장을 두고 한성부와 경기도를 관할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포도장 제도는 전국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 치폐를 거듭하다가 1541년(중종 36년)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설치하면서 비로소 포도청이 상설 기구화되었다. 포도청의 직제는 16세기 중반에 가서야 제자리를 잡게 되며, 영조 때 만들어진 《속대전》(續大典) <병전>(兵典)에 의해서 법제화되었다. 이때 정해진 포도청의 직제로는, 좌 · 우 포도장 각 1명(좌 · 우윤을 역임한 사람으로 차임, 종2품), 좌 · 우 포도군관 10명 , 좌 · 우 포도부장 3명, 포도군사 각 50명이었다. 그러나 도성 안팎에서 성행하는 도적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였고, 이에 종사관(從事官) · 무료부장(無料部長) · 가설부장(加設部將) · ]록부장(兼祿將) · 서원(書員) · 사령(使令) 등이 증설되는 가운데, 19세기에 이르면 290여명의 관원이 한성부의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설립 당시 포도청은 서울과 경기 일원을 관할 범위로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서울이 도성 밖 성저(城底) 십리(十里)까지 확대되면서 경기 지역은 포도청의 업무 지역에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좌 · 우 포도청은 서울을 각기 8패(牌), 곧 8개 지역으로 나누어 순찰하면서 치안을 유지하였다. 포도청의 임무에 대해 《속대전》에는 "도적과 간악한 불량배를 체포하고 야경을 도는 것을 관장한다" (掌輯捕盜賊奸細分更夜巡)라고 규정하고 있다. 도적은 강도와 더불어 물건을 훔친 절도 죄인의 경우가 일차적으로 해당되는데, 여기에는 궁궐이나 관청의 물건을 훔친 경우도 포함된다. 그리고 일반 단순 절도범은 물론이고 부녀자를 납치하는 경우도 절도죄에 해당되었다. 도적의 범주에는 화적(火賊)들도 포함되었다. 즉 조선 중기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화적을 체포하고 조사하여 상급 기관에 넘기는 일은 포도청의 기본 업무였다. 그리고 모반 · 역모 사건, 괘서(掛書) 부방(付榜) 사건도 역시 국가 안전과 관련된 문제로 포도청에서 일차적으로 조사를 담당하였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사학(邪學) 관련 죄인들에 대해 기찰과 단속이 엄격해지는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던 이 시기에는 천주교도들을 수색하고 체포 · 조사 · 처형하는 것이 포도청의 주된 업무가 되었다. 게다가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면서 서양 선박과 접촉하거나 장사를 한 사람들에 대한 단속도 포도청 업무에 추가되었다. 이외 금제(禁制), 금화(禁火), 수직(守直), 풍속 사범단속 등도 역시 포도청의 중요한 임무였다. 즉 우금(牛禁, 소 도살 금지), 주금(酒禁), 송금(松禁, 소나무 벌채 금지) 및 교자(轎子)를 타는 것, 무인(武人)들의 도박 활쏘기, 도고(都庫), 잠상(潛商) 등에 대한 단속도 포도청의 업무였으며, 화재에 대한 사후 처리와 사전 감시 등도 포도청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도박 등 풍속을 단속하거나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 행위를 적발하고 조사하는 것도 포도청의 소관이었으며, 임금이 능행(陵幸)할 때 현직 양 포도대장이 가마를 수행하는 업무도 추가되었다. 포도청은 상급 사법 기관인 형조, 의금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관할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에 대해 일차적으로 조사하고 죄인을 체포하였으며, 이후 사안에 따라 단순한 중죄인은 형조로 이관하고, 역모 · 사학 죄인 등과 강상(綱常) 죄인은 의금부로 이관하였다. 아울러 한성부나 지방 관아에서 죄인을 다루다 포도청으로 이송하는 경우도 있었다. 〔천주교와 포도청〕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임무는 서울의 포도청을 비롯하여 지방의 진영(鎭營)이나 수영(水營) · 병영(兵營) 등에서 담당하였다. 이 중 포도청은 관할 구역인 서울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신자들을 체포하여 압송하였다. 포도청 소속의 포졸들이 다른 지역에서 신자들을 체포해 올 때는 우선 해당 지역 수령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은 뒤, 그 고을의 포졸들과 함께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또한 지방의 진영이나 수영 및 병영에서 신문을 받은 신자들 가운데 상급기관의 조사가 더 필요한 사람들도 서울의 좌 · 우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이와 같이 포도청에서 직접 체포한 신자들과 지방에서 이송된 신자들은 좌 · 우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사안의 경중에 따라 상급 기관인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신문을 받고서 확정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신자들의 처형은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교수형이나 백지사형(白紙死刑)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좌 · 우 포도청에서 신자들을 심문할 때 형조보다도 매질을 더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다. 이렇게 볼 때 좌 · 우 포도청 자리는 박해 시기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 《포도청등록》) ※ 참고문헌  《經國大典》 《續大典》 《捕盜廳謄錄》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 육백년사》, 서울시, 1993/ 허남오, 《너희가 포도청을 어찌 아느냐》, 가람기획, 2001. 〔趙允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