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 가브리엘 위르뱅 Fauré, Gabinel-Urbain(1845~1924)
글자 크기
11권
프랑스의 작곡가. 〔생 애〕 포레는 1845년 5월 12일 프랑스 아리에주(Ariege)의 파미에(Pamiers)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성당에서 오르간을 치거나 합창단에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9세 때(1852) 아버지는 그를 파리로 데리고 가서 니더마이어(L. Niedermeyer)의 문하생으로 넣었다. 마침 니더마이어는 교회 음악과 고전 음악을 연구하는 음악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곳에서 포레는 비로소 일반 교양과 함께 음악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당시 파리 음악원에서는 매우 편향적으로 프랑스 음악가들에 대한 강의만 하였지만, 니더마이어의 학교에서는 교회 음악의 대가들인 팔레스트리나(G.P. da Palestrina, 1525~1594), 빅토리아(T.L. de Victoria, 1548~1611), 라소(O. di Rasso, 1530/1532~1594), 바흐(J.S. Bach, 1685~1750), 헨델(G.F. Händel, 1685~1759) 등과 세속 음악의 대가들인 하이든(J. Haydn, 1732~1809), 모차르트(W.A. Mozart, 1756~1791), 베토벤(L. van Beethoven, 1770~1827) 등 이탈리아나 독일 출신의 음악가들의 작품까지 연구하였다. 1861년에 니더마이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당시 26세인 생상스(C. Saint-Saëns, 1835~1921)가 이 학교를 물려받았는데, 그는 제자들이 고전 음악가들을 깊이 연구하기를 원하면서도 동시대 음악가들의 작품을 접촉하는 것도 막지 않았다. 포레는 그 덕분에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포레는 20세에 한 작곡 경연에서 일등상을 받으면서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학창 시절의 작품으로는 <나비와 꽃>이라는 가곡과 <라신의 노래>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졸업 즉시 파리의 여러 성당에서 오르간 연주자와 음악 감독으로 일하였고, 1877년에는 마들렌(Madeleine) 성당의 음악 감독이 되어 1896년까지 재직하였으며, 오르간 연주자로도 계속 활동하였다. 1883년에 프르미에(Fremiet)라는 조각가의 장녀와 결혼하였으나, 1885년 아버지가, 2년 뒤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었다. 이런 슬픔 속에서 1888년에 위령 미사곡 <레퀴엠>(Requiem)을 작곡하였다. 1896년부터 그는 파리 음악원에서 작곡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그로 인해 많은 젊은 음악가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라벨(M. Ravel, 1875~1937) 케클랭(C. Koechlin, 1867~1950), 뒤카스(P. Dukas, 1865~1935), 슈미트(F. Schmitt)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눈에 띄는 성공 시대였다. 그래서 파리뿐만 아니라 런던에서도 환영받았고, 심지어는 스승인 생상스보다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침체기를 맞았다. 1903년에 로잔(Lausanne)으로 휴양차 갔을 때 갑자기 심한 통증이 나타났고, 이 통증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를 괴롭혔다. 또한 귀에 이상이 생겨 청각을 잃었고, 악보를 보거나 머리 속에서 상상하는 음과는 전혀 다른 음을 듣곤 하였다. 1905년 파리 음악원의 원장이 된 포레는 이 시기에 독일의 여러 도시들과 영국, 스페인, 러시아 등을 여행하며 성대하게 환영받았다. 1914년에는 다시 모든 직책에서 떠나 성당 음악 감독으로 되돌아갔다. 1920년에는 그 직책에서 은퇴하였고 시력조차 잃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4년 동안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작곡에 몰두하여 좋은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1924년 11월 4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작품과 평가〕 포레는 동시대 인물인 드뷔시(C. Debussy, 1862~1918)와 자신의 제자인 라벨과 함께 신(新)프랑스 악파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앞 세대에도 베를리오즈(H. Berlioz, 1803~1869), 프랑크(C. Franck, 1822~1890), 비제(G. Bizet, 1838~1875), 구노(C. Gounod, 1818~1893) 등 대가들이 많았지만, 이런 신프랑스 악파의 지도적 음악가들과 비교할 때 포레는 유별나게 특이하다. 우선 파리 음악원 출신이 아니며, 로마 대상(Grand Prix de Rome)을 수상한 적도 없다. 그 대신 그레고리오 성가에 익숙하고 교회 선법에도 능한 그의 재능이 후기 창작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교회 음악의 원천부터 창작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적 감수성도 지녔다. 또한 거의 모든 영역의 작품들을 작곡하였는데 그중에서 성악 분야의 걸작을 3개 꼽는다면, <레퀴엠>과 <즐거운 노래>(La Bonne Chanson, 1891~1892) 그리고 <이브의 노래>(La Chanson d'Eve)를 들 수 있다. 포레는 당시 프랑스에서는 익숙하지 않았던 연가곡들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런 연가곡들은 독일의 연가곡들과는 전혀 유사성이 없다. '포레는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가 간혹 토론의 주제로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드뷔시와 비록 같은 시기를 살았지만 그들의 사상과 음악적 표현은 매우 다르다. 포레는 인상주의 음악가가 아니라 낭만주의 음악가이며, 낭만주의 시대를 넘어서서 살았다. 그의 작품들로는 오페라, 심포니적 작품들, 실내악곡, 피아노곡, 그리고 매우 많은 가곡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 교회 음악곡은 <바단조 미사곡> 하나와 <레퀴엠> 하나, 그리고 11개의 모테트 정도로 비교적 미미하다. 그래도 그의 전 생애는 성당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으니 참된 교회 음악가라 할 수 있다. (→ 레퀴엠)※ 참고문헌 F. Blume ed.,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vol. 3, pp. 1867~1880/ J.-M. Nectoux, 《NGDMM》 6, pp. 417~428/ V. Raad, 《NCE》 5, 2003, pp. 646~6471/ 편집부 편, 《음악 인명 사전》, 세광음악출판사, 1994. [白南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