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탈, 페르낭 Portal, Fernand(1855~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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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선교 수도회(Congregatio Missionis, Lazaristae) 회원. 교회 일치 운동가. 〔생애와 활동〕 포르탈은 1855년 8월 14일 프랑스 남부의 에로(Hérault) 주에 있는 라로크(Laroque)의 소박한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868년 보케르(Beaucaire) 소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이듬해에 선교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몽펠리에(Montpellier) 소신학교로 옮겼다. 1874년 8월 19일 선교 수도회에 입회한 지 2년 뒤에 서원을 하였고, 25세 때인 1880년 5월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중국 선교를 지원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는 리스본(Lisbon)과 니스(Nice) 등 여러 나라의 대신학교들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였으며, 1882년부터는 카오르(Cahors) 대신학교에서 4년 동안 교의 신학을 가르쳤다. 1886년부터 또다시 건강이 악화되자 이듬해에 기후가 따뜻한 리스본으로 갔고, 그곳에 머물면서 선교를 위해 몇차례 스페인을 방문하였다. 당시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영적 · 지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배웠고, 그들의 문화와 관습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였으며, 많은 신학 서적들을 읽었다. 34세 때인 1889년에 휴양지인 마데이라(Madeira) 섬에서 건강 때문에 휴양 온 영국 성공회의 핼리팩스(C.L.W. Halifax, 1839~1934) 경을 만나게 되었고, 그와 맺은 우정은 이후 평생 동안 유지되었다. 당시 50세이던 핼리팩스 경은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 교회 사이의 분열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자고 포르탈을 부추겼다. 포르탈은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의 만남과 이해 증진을 통해 서로가 분리된 역사적 이유를 연구하였으며, 그들과 힘을 모아 함께 일하였다. 1890년 5월에 포르탈은 바레토(Barreto) 주교의 교황청 정기 방문 때 그와 함께 로마로 갔다. 같은 해 7월 11일 로마에서 개인적으로 교황 레오 13세(1878~1903)를 알현하였는데, 이때 교황은 사도 서한인 <동방의 교육에대하여>(De disciplina orientalium)를 준비하고 있었다. 교황은 이 서한을 통해 동방 교회에 경의를 표명하고, 세계 교회를 가톨릭화하려는 그동안의 노력들을 멈추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95년 포르탈은 성공회와의 일치를 위한 가톨릭 협회를 설립하였으며, 모든 종교 일치 모임이 상호 정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896년부터 살롱쉬르마른(Châlons-sur-Marne) 신학교에서 1년 동안 교의 신학을 가르쳤는데, 이때 러시아 황제 가문과 친분을 갖고 동방 교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97년에 니스 대신학교의 학장이 되었으며, 1900년에는 파리의 생 뱅상 드 폴(Saint Vincent de Paul)신학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1903년에는 니스에 두 번째 신학교를 세웠고, 신학자인 모렐(G. Morel, 1872~1905)을 세 차례에 걸쳐 러시아로 보내어 러시아 정교회와의 일치를 시도하였으나, 첫 번째 방문부터 큰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04년에 포르탈은 《교회의 가톨릭 잡지》(Revue Ca-tholique des Eglises)를 창간하였으며, 파리의 자벨(Javel)가에 의학 상담소이자 교회에 봉사하는 여성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수도복을 입거나 서약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영국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동방 교회 등의 신자들로 구성된 '종교 연구회' (Société d'études religieuses)를 1905년에 만들었다. 1908년 교황청의 지시로 교회 일치를 위한 그의 활동이 중단되었지만 일치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1912년에는 그르넬(Grenelle) 가에 생 뱅 상 드 폴 신학교를 신축하였으며,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1926년에 성공회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함께 모이는 '연구의 집' (Maison d'Études)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연구뿐만 아니라 미사도 함께 봉헌하였고, 테야르 드 샤르댕(P. Teilhard de Chardin, 1881~1955)도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하였다. 또한 청소년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포르탈은 교회 일치가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데에서 구체화된다고 여겨, 종교 일치 운동을 따르는 동료들과 함께 내적인 말씀' 혹은 '친밀하고 개인적인 필요' 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이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힘과 용기를 청하였다. 그는 자벨 가에서 사랑의 선교를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기를 원한다는 그 자신의 말처럼, 1926년 6월 19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 상〕 포르탈은 독특한 자기 사상을 발전시킨 신학자라기보다는 신학자들에게 많은 논제를 제공하고 조언한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신학에서 어떤 주제를, 어떤 측면에서 발전시켜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신학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계시한 역사일 뿐이었다. 그리고 신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대한 동의(받아들임)가 아니라 하나의 현존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 활성화는 유일한 중개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것을 위한 그의 활동은 타협을 모를 만큼 강경하였다. 포르탈에게 있어 그리스도 중심 사상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인간이란 신적인 가능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인간이 더욱더 개발되고 성숙해질수록 신적인 것이 점차적으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의 대부분은 종교 일치와 관련된 성사론과 교회론이며, 그중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것은 영국 성공회와의 대화나 일치를 위해 필요한 성품성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사 자체보다는 성사에 동반되는 예식을 교회가 변경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성품성사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 큰 변화를 겪었던 견진성사도 연구하였다. 그리고 성체성사에 대해서는 당시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사이에 문제가 되고 있던, 성체 축성 중 '성령 청원' (epiclesis) 문제에 집중하였다. 그는 역사적 · 신학적으로 명확한 해명과 연구가 필요한 교회의 의도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런데 교회의 교의에 기초하여 영국 성공회의 사제 서품 유효성을 변호하는 이들을 그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성공회와 가톨릭 교회의 일치 운동에서 문제가 된 것은 신법에 기인한 교회의 권위와 누가 이것을 행사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포르탈은 교회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성령에 의해 축성된 그리스도의 사도들인 주교직에서 대답을 찾았다. 그에 의하면, 주교는 단지 교황의 보조자나 사도 직무자여서는 안 된다. 즉 주교는 자기 교구의 통치권을 가지는 자기 교구의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주교단 전체 곧 교회 전체를 위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르탈은 역사 연구를 통해 분리된 교회 구성원 역시 '하나인 교회' 에 소속된다는 증명을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주교직에 대한 문제는 교황권에 대한 문제로 확산되었는데, 교황에 의해 발표되는 교회의 교의 확정에 대해 그는 확고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기간 내에 교황 마음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성공회 친구들에게 교황의 권력은 교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교황의 무류성은 곧 교회의 무류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황권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권리와 역사 속에서 발전된 요소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교구의 주교인 교황을 서양의 총대주교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중세의 정치 · 사회적 배경에서 획득한 세속 권력을 가진 최고 정치가, 재판관으로서의 교황 권력은 신적 권리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이론은 성공회의 핵심 인물들에게 부담없이 받아들여졌다. 포르탈은 가톨릭 교회의 잘못이 교회가 하나의 정부(국가)라는 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모든 제도를 성화(聖化)시키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하며, 그를 위해 교회는 정치 · 사회적 제도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 그는 사랑과 일치의 정신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것이 교회의 첫 임무라고 믿었다. 그리고 종교 간의 만남을 통해 가톨릭 교회 내의 수정과 혁신을 원하였으며 통합을 통해 교회 안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치와 혁신을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907년에 예수회 신학자인 위르뱅(J. Urbain)은 16세기부터의 이론을 비판하였는데, 이 이론에 의하면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이들이나 이단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소속될 수 없고 이들과의 화해 역시 필요없으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개인적 회개뿐이다. 위르뱅은 이에 반대하여 세례받은 이들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한 지체이며, 세례성사는 그리스도 신비체를 견고히 안정되게 하고 영속적이게 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므로, 정식으로 세례받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에서 교회로부터 제외될 수 없으며, 따라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교회라 하더라도 세례를 통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제외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신앙을 포함한 선한 행위나 습관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구조에 속한 것이기보다는 신비체 자체의 결과에 의한 것이므로, 만약 이러한 선한 행위들이 결핍되더라도 구성원들이 모(母)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나 동방 교회 역시 그리스도 신비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르탈은 위르뱅의 이러한 주장 속에서 자신이 주장하던 교회 일치 운동의 전망을 보았으며, 이 사상에 경의를 표하였다. 포르탈에 의하면, 일치는 바로 교회 자체의 변화에서 온다. 그리고 교회 일치를 위해서는 다른 종파에 접근하기 이전에 우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적인 쇄신이 필요하며, 교황을 수위로 하는 교회 일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교회 일치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종래와는 다른 특별한 호교론적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분리된 곳에서 출발하지 않고 일치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갈라진 형제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이고 법적인 원칙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들 안에 영적인 은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포르탈은 이 방법을 교회 일치 분야에 국한시키고 않고 사회와 학문 분야에도 적용시켰다. 또한 중국이나 인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사람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사고 방식을 버리고, 서양적인 신학과 철학적인 사고 방식 역시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나라의 환경이나 문화에 적응해야 하며, 선교는 또한 갈라진 형제를 만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평 가〕 저술 활동보다 사랑과 일치의 삶으로 신학을 살았던 포르탈은 자기 고유의 신학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다. 저술로써 다른 교회에 속한 이들을 공박하거나 그들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 일치보다는 분열을 더욱 가중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학자 콩가르(Y.M.-J. Congar, 1904~1995)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무한한 인내와 경계 없는 사랑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살다 간 포르탈에게, 특히 성공회와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헌신한 그의 정열과 활동에 경의를 표하였다. 어떤 이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영성 고무자' 이며 교회 일치 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인 그는 철학과 자유를 사랑하였고 진리와 가톨릭 교회를 위해 노력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성공, 동방 교회 신자 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이들 조차 그에게 감명을 받았으며, 그가 소속되었던 가톨릭 교회를 존중하였다. 포르탈은 현대인이 전쟁, 평화, 종교 간의 대화와 일치, 도덕, 윤리와 같은 큰 문제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어떤 해결책을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큰 공헌을 하였다. (→ 교회 일치 운동 ; 영국 성공회) ※ 참고문헌  C.L.W. Halifax, Leo XIII and Anglican Orders, London, Longmans, Green, 1912/ 一, The Conversations at Malines : Original Documents, London, Philip Allen, 1930/ W.H. Frere, Recollections of Malines, London, Centenary Press, 1935/ H.M. Hermmer, Fernand Portal, prêtre de la Mission. 1855~1926, Paris, 1947/ J. De Bivort de la Saude, Anglicans et Catholiques : le problème de L'urion angloromaine, 1833~1933, Paris, Plon, 1949/ R. Ladous, L'abbé Portal et lacampagne angloromaine 1890~1912, Lyon, 1973/ 一, Préface d'Emile Poulat. Monsieur Portal et les siens (1855~1926), Paris, Cerf, 1985/ A. Tamborra, Chiesa cattolica e Ortosia russa. Due secoli di confonto e dialogo. Dalla Santa Alleanza ai nostri giomi, Milano, 1991, pp. 382~384. [李再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