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영]The Portuguese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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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족에게 리스본을 탈환한 후 1150년에 건립한 세(Sé)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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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족에게 리스본을 탈환한 후 1150년에 건립한 세(Sé) 성당.


유럽의 남서쪽 끝에 위치한 공화국으로, 공식 명칭은 포르투갈 공화국. 북쪽과 동쪽으로는 스페인과 국경선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은 대서양과 맞닿아 있고, 오래된 역사를 통한 문화 유산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총면적은 92,391k㎡, 인구는 1,052만 명(2004년 현재)이며, 수도는 리스본(Lisbon)이다. 대서양에 위치한 마데이라(Madeira) 제도와 아조레스(Azores) 군도를 포함하여 20개의 지방 자치주가 있으며,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리스본, 포르투(Porto) , 쿠임브라(Coimbra) 브라가(Braga), 세투발(Setibal) , 에부라(Evora), 파루(Faro)가 있다. 루시타니아인(Lusitanos)이 현재 포르투갈 국민의 원조이며, 이후 라틴족, 게르만족, 무어족 등 다양한 민족이 이 땅에 들어와 서로의 혈통, 문화, 관습 등이 혼합되었다. 공용어는 '라틴 속어' (Latim Vulgar)에서 파생된 포르투갈어이다. 포르투갈은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로서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오로가 선교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때부터 포르투갈의 역사는 이베리아 반도의 교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정착〕 이베리아 반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50만 년 전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의 포르투갈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먼저 거주한 민족은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베리아인이며, 기원전 12세기에 페니키아인, 기원전 7~6세기에 카르타고인과 그리스인이 이베리아 반도에 나타났다. 이후 켈트족이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하였고, 이들과 원주민인 이베리아인과의 인종 혼합으로 켈트이베리아인이 생겨났다. 이들을 여러 부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도루(Douro) 강과 과디아나(Guadiana) 강 사이로 여겨지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부 지역, 즉 루시타니아(Lusitania)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루시타니아인들이 현재 포르투갈인들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목축을 주로 하며 산이 많은 북부 지방에 정착한 이들은 평야가 많은 남부 지방을 지배한 그리스, 페니키아, 카르타고 등과 같은 지중해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나,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로마 문명이었다. 지중해에서의 상권과 세력 확장을 놓고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쳐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 218~201, 149~146)을 치렀던 로마는, 카르타고가 이베리아 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정치적 안정을 위협하자 기원전 218년 루시타니아를 지원하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카르타고의 침공을 물리친 후 로마는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이 지역을 지배하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베리아 반도인들은 로마인들을 추방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결국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의 지배 기간 동안 이베리아 반도인들은 법, 행정, 건축, 농경 및 생활 양식 등 로마 문화에 점차 동화되었다. 그중에서도 언어의 동화가 가장 두드러져 로마인들에 의하여 전해진 '라틴 속어' 는 포르투갈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를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 언어의 기원이 되었다. 포르투갈어는 이후 갈레구-포르투갈어(Galego-Portugues)를 거쳐 현재의 언어로 정착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이 시기에 이베리아 반도에 전파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확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포르투갈을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교화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보낸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져 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베리아 반도를 방문할 의향을 언급하였고(15, 24-28), 교황 글레멘스 1세(90/92~101?)는 95년경 쓴 《제1 고린토 서간》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베리아 반도를 방문하였다고 확인하였다. 또한 순교자인 리용의 주교 이레네오(Ireneus Lugdunen-sis, 130/140?~202?)는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 증언하였고, 최초의 라틴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노(Q.S.F. Tertullianus, 155?~230/240?)가 이베리아 반도 전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존재함을 언급한 것 등으로 볼때 3세기 중엽에는 그리스도교가 이베리아 반도 전 지역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해 시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였을 정도로 그리스도교 전파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하지만 313년 콘스탄틴 대제(306~337)가 밀라노 관용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후 토속 신앙, 그노시스주의, 마니교 등의 이단을 근절시켜 가는 동시에 브라가(3세기)를 시작으로 에부라(3세기), 리스본(4세기)에 교구를 설립하며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5세기 초 유럽 북쪽에 있는 게르만족들의 침략으로 그리스도교는 붕괴의 위기에 놓였다. 로마 문명과는 비교가안 되는 낮은 수준의 문명을 갖고 있어 '야만족' 으로 불리던 이들은 서로 주도권 다툼을 하다, 415년 더 강력한서고트족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면서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서고트족은 알라노족, 수에보족 등 기존의 게르만족들을 정복하였으며, 레오비질도(568-586) 왕이 사망할 무렵에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던 서고트족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베리아 반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교회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본래의 사명을 잃지 않고 게르만족을 개종시켜 나갔다. 그 결과 레오보질도의 아들 레카레도(586~601) 왕은 제3차 톨레도 교회 회의(589)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을 왕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로마 문화는 그리스도교 문화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무어족의 침입과 국토 수복 전쟁〕 무함마드(Muhammad, 571~632)가 사망한 지 70여 년이 지나지 않아 인도양에서 대서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넓게 확장된 이슬람 세력은, 왕위 계승 문제로 심각한 내분에 휩싸인 서고트 왕국의 혼란을 틈타 709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였다. 711년 과달레트(Guadalete) 전투에서 타리크 이븐 지야드(Tariq ibn Ziyad, ?~720) 장군이 이끄는 무어족은 서고트 군대를 대패시킨 후, 718년에는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며 13세기 중반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 무어족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았지만, 모사라베(Mocarabe)들과 같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일정액의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자유로이 신앙을 유지하는 등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무어인들은 아랍 문화의 영향을 크게 남겼다. 쌀, 면화, 사탕수수, 레몬 등 다양한 농작물과 새로운 경작법이 유입되었고, 저수지와 수로 등이 축조되어 농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건축, 수학, 철학, 자연 과학, 천문학, 의학 등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언어에도 영향을 미쳐 현재 약 700개의 아랍어가 포르투갈어에 남아 있을 정도이다. 무어족의 침략으로 북부 산악 지대로 쫓겨난 이베리아 반도인들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반격을 시작하였다. 레카레도 왕의 아들인 펠라요(718~737)는 그리스도교 왕국인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세우고 '국토 수복 전쟁' (Reconquista)을 벌이는 한편, 붕괴의 위기에 놓인 그리스도교를 재정비하였다. 이후 십자군 전쟁의 일환으로 이베리아 반도에 온 프랑스 기사단의 전투력에 힘입어 이베리아 반도인들은 무어족을 남부와 중부 지방으로 격퇴시키고, 레온(León) 나바라(Navarra), 아라곤(Aragon), 카스티야(Castilla) 등 그리스도교 왕국을 세웠다. 포르투갈 역시 이 국토 수복 전쟁의 결과로 세워졌다.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돕기 위해 기사단을 이끌고 온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출신의 엔리케(Henrique, ?~1112)는 서십자군 원정대에서 가장 뛰어난 공훈을 세워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1072~1109)의 서녀인 테레사(D. Teresa, ?~1130)와 결혼하였고, 도루 강 하구에 위치한 포르투칼레(Portucale) 지방을 하사받았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포르투칼렌스 백작령(Condado Portucalense)이 탄생하였다. 〔포르투칼렌스 백작령〕 이 백작령은 정치적으로 갈리자(Galiza)에 종속된 형태여서 엔리케는 자주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귀족들과 권력 투쟁을 하게된 그는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며 포르투갈 건국의 초석이 되는 기초를 닦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섭정이 된 아내 테레사의 친(親)갈리자 정책으로 인해 아들인 아폰수 1세(아폰수 엔리케스, 1139~1185)를 중심으로 뭉친 독립 지지파들과 갈리자 추종파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아폰수는 사웅 마메드 전투(Batalha de São Mamede, 1128)에서 승리하여 수년간에 걸친 내전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려는 레온 왕국과 1137년까지 전쟁을 하는 한편, 남쪽의 무어족들을 완전히 추방하기 위한 국토 수복 전쟁을 동시에 벌여야 하였다. 오우리크 전투(Batalha de Ourique, 1139)에서 무어인들에게 대승한 아폰수는 1139년 스스로 왕의 지위에 올라 포르투갈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독립국으로 완전히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여러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과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아폰수는 왕국을 교회에 봉헌하며 독립된 교회를 포르투갈에 설립함으로써 정치적 독립을 이룩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특히 산타크루스(Santa Cruz) 수도원(1131)과 같은 여러 수도원들을 건립하는 등 교황청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결과, 1143년 교황청의 특사인 비코(Vico)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자모라 궁정 회의(Cortede Samora)에서 레온 왕국으로부터 공식적인 포르투갈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며, 1179년에는 카스티야와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국가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초까지 무어족을 축출하며 영토를 확장해 가던 포르투갈은 점차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교회 역시 무어족과의 국토 수복 전쟁에서 성전 기사 수도회, 병원 기사 수도회, 칼라트라바(Calatrava) 기사 수도회, 산티아고(Santiago) 기사 수도회 등과 같은 여러 기사 수도회들의 활약을 통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정복전뿐만 아니라, 정복지의 식민지화나 방어에서도 맹활약을 하며 포르투갈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초기 포르투갈 왕들은 왕국의 부를 쥐고 있던 귀족 및 성직자 계급과 많은 충돌을 해야만 하였다. 산수 1세(1185~1211) 때에는 시토회의 영향으로 반교황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처음으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친 아폰수 2세(1211~1223) 때에는 기존의 영주와 왕실 그리고 왕과 교회 간의 알력도 심화되었다. 그 결과 산수 2세(1223~1248)는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에 의해 폐위당하였고, 이는 3년간에 걸친 내전의원인이 되었다. 1248년 아폰수 3세(1248~1279)가 즉위함으로써 안정을 되찾은 포르투갈은 관료층이 체계를 잡고 로마법의 중앙 집권 정신을 지향하는 법률가의 영향이 강화되었으며, 리스본이 수도로 결정되는 등 국내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남부의 알가르베(Algarve) 지역을 무어족으로부터 탈환하고(1249) 카스티야 왕국과 알카니지스 조약(Tratado de Alcanizes, 1297)을 맺음으로써, 현재와 같은 국경을 확정하였다. 디니스(1279~1325)의 통치 시기는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국가 조직이 정비되고, 정치 · 경제적인 발전이 이룩된 시기였다. '현군' (賢君, 0 Sabio)이라 불리는 디니스는 포르투갈어를 정비하여 민족적 동질성 확립에 주력하였고, 교황청과 40개 조의 정교 협약(Concordata dos 40 Artigos)을 맺으며 끊임없이 지속된 교회와의 분쟁을 해결하였다. 교회 역시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큰 역할을 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이할 만한 점은 이 시기에 유일한 포르투갈 출신 교황인 요한 21세(1276-1277), 일명 스페인 사람 베드로(Petrus Hispanus)라 불리는 교황의 출현이다. 이렇게 대내외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발전하던 포르투갈은 디니스의 사후에 잠시 침체기를 맞았다. 특히 14세기 말 페르난두 1세(1367~1383)가 서거하자 포르투갈은 왕위 계승 문제로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스페인은 이 기회를 빌어 포르투갈을 병합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로 인해 스페인과 전쟁을 하게 된 포르투갈은 1385년 알주바로타(Aljubarrota)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주앙 1세(1385~1433)가 왕위에 올라 부르고뉴 왕조에 이은 아비스(Avis)왕조가 시작되면서 국내의 정치 혼란도 끝났다. 〔아비스 왕조와 해양 진출〕 주앙 1세는 영국 랭커스터 공작의 딸인 필리파(Filipa de Lencastre, 1360~1415)와의 정략 결혼에 이어 카스티야와 평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대외적으로 확고히 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그는 특히 디니스의 정책에 따라 교황청과 91개 조의 정교 협약(Concordatas de 91 artigos)를 맺으며 국내 안정을 꾀한 후, 북아프리카 정복을 도모하여 1415년 세우타(Ceuta) 정복에 성공하였다. 세우타 정복은 포르투갈의 해양 진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포르투갈은 주앙 1세의 아들인 항해 왕자 엔리케(Henrique 0 Navegador, 1394~1460)의 활약으로 마데이라 제도(1419), 아조레스 군도(1427), 보자도르 곶(Cape Bojador, 1434), 카보베르데(Cabo Verde)와 기니(Guinea, 1456), 시에라리온(Sierra Leone, 1460) 등지를 발견하며 대서양과 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엔리케의 사망(1460) 이후 잠시 중단되었던 해양 진출은 주앙 2세(1481~1495)가 등극함으로써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인도 항로 개척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던 주앙 2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포르투갈의 해양 진출은 콩고(Congo, 1482), 희망봉(1487) 발견에 이어 마침내 바스코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14)의 인도 도착(1498) 카브랄(P.A. Cabral, 1467/1468~1520)의 브라질 발견(1500)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은 고아(Goa), 말라카(Malacca, 현 Melaka)를 정복하면서 동양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마침내 중국(1513)과 일본(1543)까지 진출하였다. 이렇게 전 아시아의 주요 교역 중심지에 도착한 포르투갈은 당시 아랍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동양과 서양 간의 교역, 특히 향료 교역을 주도함으로써 고아-말라카-마카오-일본을 아우르는 광대한 해상 왕국, 즉 동양 제국(Império do Oriente)을 건설하며 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열게 되었다. 스페인과 경합하며 15~16세기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해양진출 원인은 정치, 경제, 지리, 시대 그리고 종교 등에서 다양하게 들 수 있다. 먼저 유럽 최초의 중앙 집권 국가가 된 포르투갈은 영토 확장을 꾀하였으나 레온, 카스티야, 갈리자 등의 왕국에 둘러싸여 유럽의 중앙으로 진출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대서양을 통한 진출만이 그 해결책이었다. 또한 유럽 서쪽에 위치하여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인접해 있었으며, 일찍부터 페니키아, 카르타고 같은 해상 문명과 접촉함으로써 항해술과 선박 건조술뿐만 아니라 긴 해안선으로 인해 많은 항구가 발달되어 있었다. 나아가 왕위 계승 전쟁에서 상인의 협력으로 왕위를 얻은 주앙 1세는, 지중해 상권에 도전하고 싶은 상인들로 이루어진 중산 계급의 의견을 받아들여 바다를 통한 해외로의 진출 야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실크로드 차단은 동방 무역에 대한 원대한 꿈을 지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해양 진출은 포르투갈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군의 연장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는 포르투갈의 해양 진출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 · 사상적 기반이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추구하였던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 외에 종교적으로 '십자군의 사명' 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영토의 확장과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위해서' 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실질적인 영토 확장과 더불어 이민족을 개종시켜 그리스도교 왕국을 확장하라는 하느님의 소명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가 포르투갈의 국왕에게 1493년 5월 3일 식민지 개척의 독점권을 인정해 주는 동시에, 선교 활동도 병행할 권한과 임무인 '보호권' (padroado)을 부여한 탓도 있다. 당시 리스본 항구를 출발하였던 바스코 다 가마나 카브랄의 선단과 같은 수많은 선단들에는 신부가 꼭 승선하였듯이, 포르투갈은 그리스도교 확장을 위해 그들의 발길이 닿은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선교사를 파견하여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다. 교회 역시 이러한 포르투갈의 정책에 부응하여 기니, 콩고, 카보베르데, 상 토메(São Thome) 등 아프리카의 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내륙 지방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하며 수많은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에 따라 16세기 말에는 개종한 원주민 수가 2만 명 이상에 달하였다. 가장 활약이 뛰어난 선교회로는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도미니코회를 들 수 있는데, 프란치스코회는 북아프리카와 아프리카 내륙 지역 뿐만 아니라 고아, 실론(Ceylon, 현 스리랑카), 말라카, 말루쿠(Maluku) 등 동남 아시아에서 성당, 수도원 등을 세우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1540년 포르투갈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예수회는 프란치스코회에 뒤이어 대규모의 선교사들을 동양에 파견하였는데, 그중 프란치스코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 신부는 '인도 및 일본의 사도' 로 불릴 만큼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고아에 설립된 성 바오로 학교는 예수회 소속으로, 동양의 '포르투갈 대학' 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도미니코회 역시 중국에서 활동한 가스파르 다 크루스(Gaspar da Cruz, 1520~1570) 수사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을 동양에 파견하며 많은 활동을 벌였다. 이 같은 여러 선교회의 활동으로 17세기 말엽 포르투갈은 동양에만 9개의 교구, 즉 인도에 4개, 인도차이나에 1개, 일본에 1개, 중국에 3개를 각각 설립하는 등 그리스도교 전파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제국의 몰락과 공위기〕 15세기에 시작된 해양 진출로 포르투갈은 유럽에서의 경제적 ·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해외 무역을 위해 설립된 인도청(Casa da India)은 동양에서의 피륙, 향료, 광산물 등이 넘칠 정도로 포르투갈에 큰 이윤을 가져다주었고, 리스본은 유동 인구, 특히 외국 상인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이는 포르투갈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경우였으며, 당시 유럽 왕실의 유행을 주도할 정도로 포르투갈의 문화를 급속히 발전시켰다. 포르투갈 출신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포르투갈의 최고 시인으로 해양 문학의 걸작인 《우스 루시아다스》(Os Lusia-das, 1572)를 남긴 카몽스(L.V. de Camoes, 1524/1525?~ 1580)를 배출하는 등 문학 또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해양 왕국으로서의 명성은 식민 거점의 분산으로 인한 통제의 어려움, 인재의 해외 유출,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 및 이에 따른 부패와 사치, 산업의 부재와 허약한 재정 상태 등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포르투갈은 1580년 국권을 상실하는 큰 위기를 맞았다. 1557년에 세바스티앙(1557~1578)이 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왕권이 안정되지 않아 불안한 정치 상황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유입되던 부(富)가 계속 줄어들어 경제적인 어려움 등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 신부들의 교육을 받아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세바스티앙은 십자군의 일환으로 대규모의 북아프리카 원정을 계획하였다. 모든 국가 재정을 기울인 이 원정에서 포르투갈은 무어인들과 벌인 1578년의 알카세르 키비르(Batalha de Alcácer-Quibir) 전투에서 세바스티앙의 생사 조차 모를 정도로 대패하였고, 그로 인해 왕위 계승 문제로 국론이 분열되었다. 1580년 스페인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일부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마누엘 1세(1495~1521)의 외손자이자 왕위 승계권 1위인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1556 ~1598)를 펠리페 1세(1580~1598)란 이름으로 포르투갈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1640년까지 60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국권 회복과 브라간사 왕조〕 스페인 통치하의 포르투갈은 자치권을 보장받았으나, 펠리페 왕조는 스페인 귀족을 행정부에 배치하여 모든 면에서 포르투갈에 불리한 정책을 수립 · 시행하며 통치를 강화하였다. 특히 포르투갈은 스페인이 벌인 영국, 네덜란드 등과의 전쟁 수행을 위한 과중한 세금, 강제 모병 및 인력 동원뿐만 아니라 앙골라, 브라질 등에서 식민지 상실 등 스페인 지배에 따른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또한 반유대주의의 결과로 1536년에 설치된 '이단 심문(Inquisitio) 법정'이 국가 경제력을 쥐고 있던 유대인들을 강제로 추방하거나 타국으로 이주하게 만들면서 국가 주요 산업은 피폐해졌다. 이 시기는 포르투갈 교회사상 최악의 시기로, 스페인 왕실은 교황 사절과 예수회를 추방하고 해외 선교도 금지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당연히 위기 의식을 느끼고 주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민중 주도의 폭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이후 대규모 저항으로 확산되면서 '국권 회복 운동' (Restauracoo)으로 발전하였다. 마침내 1640년 리스본에서 브라간사 공작(Duque de Braganga)이 주앙 4세(1640~1656)란 이름으로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네 번째 왕조인 브라간사 왕조(Dinastia de Braganga)가 시작되었다. 독립 후 포르투갈은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해외 식민지를 되찾았으나, 동양에서의 상권은 이미 네덜란드와 영국에 넘어간 후였다. 그 결과 포르투갈은 동양의 식민지 대신 브라질과 아프리카, 특히 브라질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에 나서 18세기 초에 브라질의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와 바이아(Bahia)에서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였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은 16세기의 '향료 주기' (Ciclo das Especiarias)로 일컬어지는 황금기에 이어서 '금과 다아아몬드 주기' (Ciclo do Ouro e dos Diamantes)로 불리는 제2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폼발 후작(Marquês de Pombal, 1699~1782)이 재상(1750~1777)으로 활약한 주세(1750~1777) 국왕의 재위 기간 동안 광범위한 개혁으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철권 정치를 펼친 폼발은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여 왕실의 지배력을 강화하였으며, 새로운 경제 기구 설치 및 산업 구조 개편을 통해 포르투갈 내에서 영국인들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강화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예수회 추방을 통해 교육 개혁을 실현함으로써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국가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으로 근대 포르투갈의 기초를 다지고 절대 왕정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 시기에 예수회 소속의 에부라 대학 폐쇄,쿠임브라 주교에 대한 박해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1759년 '예수회 회원 추방 및 모든 종교 단체와 수도원의 폐쇄에 관한 폼발법' 제정으로 200여 년 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예수회의 추방은 포르투갈과 교황청 간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으며, 교회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주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마리아 1세(1777~1816)는 폼발법을 폐지하며 교회와의 갈등을 수습한 후, 폼발에 의해 시작된 국가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 포르투갈은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1806년 나폴레옹의 영국에 대한 해양 봉쇄 명령을 받은 포르투갈은 경제적으로 영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이 봉쇄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세 번에 걸쳐 프랑스의 침공(1807, 1808, 1810)을 받게 된 포르투갈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왕실이 식민지인 브라질로 옮겨간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군 사령관 브레스포드(Bresford)의 통치라는 굴욕적인 상황을 겪었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 속에서 시민 혁명의 기반이 된 자유주의가 도화선이 되어 자유주의 이념을 지닌 민족주의자들이 두 번의 반란을 일으킨 끝에 1820년 영국 주둔군을 물리쳤다. 이들은 그때까지 브라질에 있던 주앙 6세(1816~1826)를 포르투갈로 다시 오게 한 후 삼권 분립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헌법을 공포하였다(1822). 주앙 6세의 사망으로 페드루 4세(1826~1834)가 1826년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나, 그는 1822년에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페드루 1세(1822~1831)로 왕위에 오른 상태였기에 브라질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귀족의 권한이 강화된 새로운 헌법을 포르투갈로 발송하면서 자신의 포르투갈 왕위를 딸인 마리아 2세(1826~1828, 1834~1853)에게 양위하였다. 하지만 페드루 4세의 동생인 미겔(Miguel, 1828~1834)이 이 헌법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페드루 4세와 미겔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절대 왕정주의자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은 1834년 절대 왕정주의자들의 패배로 종결되었으나, 왕정주의자들의 반란과 카브랄(C. Cabral, 1803~1889)의 독재, 농민 폭동 등 극도로 혼란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1850년에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포르투갈은 국가 재건 계획을 수립하며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외국에 대한 경제적 종속은 심화되었고 부의 분배는 요원하였다. 특히 몰락해 가는 귀족을 대신하여 외국 기업의 동업자가 된 부르주아가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며 교회의 토지를 매입하는 등, 극소수의 부유층과 대다수의 빈곤층으로 이루어진 열악한 사회 구조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사회 ·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왕실과 독재 성향의 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반발로 사회주의와 공화주의 이념이 1871년 이후 사회 전반에 급속도로 퍼졌다. 특히 영국에 대한 경제 종속 심화, 식민 정책의 실패로 발생한 1890년 영국의 '최후 통첩' (Ultimato) 사건은 공화주의자들에게 불만을 지닌 사회 계층들을 규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 중산 계층들에게는 공화정만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비추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공화주의자들은 카를루스(Carlos, 1889~1908) 왕과 왕세자를 암살(1908)하고 1910년 10월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린 후 공화 정부를 수립하였다. 〔제1 공화국과 신국가〕 1910년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나 정치인 암살, 독재 정치, 왕정 복구를 위한 반란, 폭동 등이 국내 곳곳에서 일어나 국민들은 큰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국가는 점점 더 피폐해졌다. 특히 교회는 공화 정부의 여러 조치, 즉 폐지되었던 폼발법의 부활, 학교에서 그리스도교 교리 교육 폐지, 이혼법 제정, 법정과 공공 활동에서 종교 선서의 폐지 등과 같은 반가톨릭적인 법 제정과 수많은 성직자들의 구금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1911년 '국가와 종교의 분리법' 공포는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 단절을 가져와 교회와 국가 간의 위기는 극에 달하였다. 교회와의 갈등뿐만 아니라 정치 분쟁, 엄청난 외채, 인플레, 국내 적자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서 1926년 코스타(G. da Costa, 1863~1929) 장군을 수반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공화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독재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후 독재 정치는 살라자르(A. de Oliveira Salazar, 1889~1970)에 의해 1968년까지 계속되었으며, 20세기에 포르투갈이 낙후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1928년 재무 장관(1928~1940)으로 입각한 살라자르는 극단적인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하여 입각한 지 3년 만에 경제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힘입어 1932년 총리까지 겸임하게 된 그는 1933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 후 비밀 경찰 창설, 검열 제도 실시, 국민연합당 이외의 정당 불인정 등 무솔리니(B. Mussolini, 1883~1945)를 모방한 '신(新)국가' (Estado Novo)라는 공화제적 조합 국가의 체제를 확립하였고, 이러한 장기 독재 체제는 이후 40여년간 지속되었다. 신국가는 1933년 공포된 헌법에서 "국가는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 분리 체제를 유지하지만, 교회에 자유로이 조직을 구성하는 권한을 인정" 하며 그동안 불편하였던 교황청과 포르투갈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살라자르 정권은 계속해서 교황청과 교회 권위 인정, 교회 재산 소유 인정, 가톨릭 교육 및 가톨릭 결혼 인정등 여 러 권리를 보장하는 선교 협약(Acordo Missionàrio, 1940)을 맺으며 교황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다졌다. 1930~1940년대 포르투갈은 살라자르의 신국가 건설 추진 정책으로 극도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벗어나 정치적 · 사회적 안정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가 구속되고 중세적인 냉혹한 검열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것이었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발전은 부진하였다. 특히 중산층 말살 정책으로 빈민은 더욱 고통을 받고 부유층, 지도층으로 형성된 소수의 엘리트가 왕정 시대처럼 부상하면서 부의 불균형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독재 정치에 반발하여 사회 곳곳에 변화와 개방을 갈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앙골라를 비롯한 아프리카 식민지에서의 독립 전쟁은 살라자르 독재 정권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살라자르가 병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1968년 카에타누(M.J. das Neves Alves Caetano, 1906~1980) 정권이 들어섰으나, 이미 시작된 권력의 누수 현상은 멈추지 않고 국내 반체제파들의 지하 투쟁 강화, 더욱 거세진 식민지 독립 전쟁 등 말기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결국 40년 이상 지속된 독재 정권은 1974년 4월 25일 진보적인 군부 소장 장교들에 의한 무혈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군사 혁명과 민주화〕 혁명 초기의 포르투갈은 좌우익의 대립, 수많은 군소 정당의 출현, 우익에 의한 역쿠데타, 갑작스런 자유의 획득과 대외 개방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 등 극도의 혼란을 겪었다. 1976년 공포된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및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져 혁명을 주도하였던 에아네스(A. dos Santos Ramalho Eanes) 중령이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수아레스(M. Soares)가 이끄는 사회당(PS) 정부가 출범하여 서구 민주주의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수 단독 내각인 사회당 정부는 오래가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구성된 정부도 소수 단독이나 정당 연합에 기반을 둠으로써 거의 매년 정권이 교체되는 등, 민주 정치의 외양은 유지되었으나 불안정한 국면이 1985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0년간의 혁명의 시기는 1986년 수아레스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실바(C. Silva)가 이끄는 사회민주당(PSD)이 1987년 다수 단독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끝났다. 이후 포르투갈은 민주화의 길뿐만 아니라 유럽 공동체 가입(1986)에 따른 시장 개방과 자유 시장 경제의 도입을 통해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정국 안정과 경제 발전에 힘입어 1995년까지 사회당의 수아레스와 사회민주당의 실바는 각각 대통령과 총리로 연임에 성공하였다. 1995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과반수는 차지하지 못하였으나 원내 제1당이 됨으로써 정권 교체에 성공하였으며, 1996년 대선에서 사회당 출신인 삼파이우(J. Sampaio)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사회당 정부는 외국 투자유치, 과감한 구조 조정 등을 통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며 국민의 높은 지지도를 얻어 1999년 총선에서 의석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삼파이우 역시 2001년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오랜 집권과 갑작스런 경제 침체로 사회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급락하여 2002년 실시된 총선에서는 바로주(J.M.D. Barroso)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원내 제1당을 차지하며 정권 교체에 성공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현황〕 포르투갈 교회는 2004년 현재, 1716년 라틴 교회의 총대주교좌로 설정된 리스본과 브라가, 에부라 등 2개의 관구로 나뉘어져 있으며, 20개의 교구(포르투갈 본토에 18, 마데이라 및 아조레스 제도에 각 1개)와 군종교구 1개 등 총 21개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본당은 총 4,364개인데, 이 중 2,677개는 교구 신부, 306개는 수사 신부가 맡고 있고, 나머지는 서품을 받지 않은 수사와 수녀 및 평신도가 담당하고 있으며, 사제가 없는 본당이 40개이다. 그리고 총대주교 1명, 추기경 2명, 대주교 6명, 주교 43명, 교구 신부 3,119명, 수도회 소속 신부 1,069명, 종신 부제 143명, 수사 327명, 수녀 6,329명이 있다. 신학생은 535명으로 지난 5년간 계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교회는 본당 사목 이외에 의료, 유아 시설, 장애인, 고아, 노인, 실업, 마약, 사회 재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활발한 사회 사업을 펼치고 있고, 출판, 신문, 잡지 및 각종 문화 행사 등을 활발히 전개하며 지역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신자들 간의 관계와 후원회 조직은 사회 중심체이며, 사회 계층 간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현재 미사 참석은 '평생 세 번(태어날 때, 결혼할 때 그리고 죽을 때) 교회에 간다' 고 할 정도로 매우 저조하다. 2004년 통계에 의하면, 7세 이상의 포르투갈인 중 29%만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수는 중부 베자(Beja) 교구의 3%부터 북부 브라가 교구의 63%까지 교구마다 다양하지만, 약 65~75%의 신자들이 주일 미사나 축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세례율은 7세 이전에 3.95%, 7세 이후 6.05%로, 대부분 7세 이전에 세례를 받고 있다.현재 포르투갈에는 공식적인 종교가 없으며, 종교의 자유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2004년 통계에 의하면 국민의 94%가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가 2%, 이슬람이 0.2%, 기타 종교가 1~2%, 무신론자가 2~3% 정도 된다. 가톨릭 신자가 많은 이유는 12세기 포르투갈의 건국 자체가 이슬람 세력에 대한 십자군의 일환으로 이루어졌고, 역대 왕실이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나라를 통치 ·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전통으로 인해 포르투갈에는 곳곳마다 오래되고 웅장한 성당들이 있으며, 주요 축일은 공휴일로 정해져 있다. 특히 1년 내내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순례 행사(Romaria)와 종교 축제는 포르투갈 사회의 오랜 가톨릭 전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대표적인 성지는 포르투갈 중부의 파티마(Fátima)로 현재 5월과 10월에 두 번 축제가 개최되는데, 이때는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신자와 관광객들이 참가하고 있다. 파티마에서의 성모 발현 이후 파티마는 곧 포르투갈 가톨릭의 중심이자 상징이 되었으며, 세계 3대 가톨릭 순례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가톨릭 문학, 포르투갈의 ; 보호권 ; 사베리오, 프란치스코 ; 스페인 ; 이단 심문 ; 톨레도 교회 회의 ; 파티마) ※ 참고문헌  Anuário Católico de Portugal 2001~2002, Coimbra, Secretariado Geral da Conferencia Episcopal Portuguesa · Gráfica de Coimbra, 2002/ Joel Serrão co. dir., Dicionário de História de Portugal, Porto, Figueirinhas, 1987/ José Mattoso dir., Historia de Portugal, 8 vols., Lisboa, Ed. Estampa, 1997/ Vários, Portugal Hoje, Lisboa, INA, 1995/ 강석영 · 최영수, 《스페인 · 포르투갈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88/ 김용재 · 이광윤, 《포르투갈 · 브라질의 역사 문화 기행》, 부산 외국어대학교, 2000. 〔金勇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