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시우스 Photius(801?~897)
글자 크기
11권

포시우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858. 12. 24~867. 9. 25, 878~886. 12). '포시우스 이교 를 일으킨 장본인. 〔생 애〕 포시우스는 801년경 콘스탄티노플의 한 신심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부모인 세르지오(Sergius)와 이레네(Irene)는 성화상 파괴론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PG) 120, 1020 A). 그는 문법부터 철학, 신학, 의학, 법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한때 수도 생활에 마음이 끌렸지만,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황후 테오도라(Theodora, 842~856)의 수상인 테옥티스투스(Theoctistus)가 콘스탄티노플 대학의 철학 교수로 그를 선발하였기 때문에 세속적인 직업을 택하였다. 철학과 신학에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교육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교육 기술을 전수받았다. 포시우스는 형제인 세르지오가 황후의 동생인 이레네와 결혼하자, 황실 상서국장이자 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그의 형제들인 세르지오와 타라시오(Tarasius) 또한 황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포시우스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어린 황제인 미카엘 3세(842~867)의 재위 기간 동안 영향력이 컸던 황제의 삼촌 바르다스(Bardas)로부터 지원과 호의를 받고 있었고,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외교 사절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런 바르다스가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847. 7. 4~858, 867. 11. 23~877. 10. 23)였던 이냐시오(Ignatius)와 충돌한 후 황궁 내에서 가장 박식하고 저명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포시우스를 총대주교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포시우스는 4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858. 12. 22~25), 이냐시오 총대주교로부터 면직되고 교황 베네딕도 3세(855~858)에 의해 직무 정지된 그레고리오 아스베스타(Gregorio Asbesta) 대주교로부터 삭발례, 강경품, 시종품, 부제품, 사제품, 주교품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신앙 고백을 담은 편지를 860년 봄에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에게 보냈다. 동방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관철시키려 하였던 교황 니콜라오 1세는 포시우스의 이러한 행동을 고무적으로 생각하였으나,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승인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포르토의 라두알도(Radualdo di Porto)와 아나니의 자카리아(Zaccaria di Anagni) 주교를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여 이냐시오와 포시우스 사이의 소송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진상을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주교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861년 4월부터 9월까지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이냐시오의 해임에 동의하였다. 교황은 이 교회 회의의 결정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포시우스가 자신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주장한 변증론도 거부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포시우스의 반대자로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에 대해 거짓 보고한 테오뇨스투스(Theognostus) 아빠스의 이야기만 듣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알린 후 포시우스를 인정하지 말라고 설득하였다. 그 후 교황은 863년 4월에 로마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포시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공식적으로 단죄하였다. 교황의 이 같은 단호한 조치에 포시우스는 분노하였으며, 교황에게 반대하여 867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의 교회 회의에서 교황을 파문함으로써 포시우스 이교 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교황이 45일 만에 사망하자 후임자인 교황 하드리아노 2세(867~872)는 이 상황을 바꾸어 보려고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동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 바실리우스 1세(867~886)가 포시우스를 해임시킨 후 이냐시오를 총대주교좌에 복귀시키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이견을 좁힐 공의회를 개최하기 위해 교황 사절들을 보내 주도록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바실리우스 1세는 866년 섭정이었던 바르다스를 죽이고, 867년에 미카엘 3세까지 살해한 후 황제가 된 인물이다. 포시우스는 신임 황제의 이런 행동을 비난하였고, 그로 인해 총대주교좌에서 쫓겨났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스티아의 도나토, 네피의 스테파노 주교와 마리노 부제를콘스탄티노플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제8차 세계 공의회인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870)를 주재하였고교황은 이 공의회에서 발표한 교령을 승인하였는데, 교령은 포시우스를 다시 단죄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 교령이 황제의 호감을 받고 있던 이냐시오가 877년 10월 사망하기 얼마 전에 받아들여졌는데, 콘스탄티노플의 합법적 주교인 이냐시오가 사망한 때는 858년에 발생한 분쟁이 있은 지 20년이 지난 후였다. 새로운 교황 요한 8세(872~882)는 이냐시오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총대주교좌에 다시 포시우스가 취임하였으니 이를 승인해 달라는 서신을 황제와 포시우스로부터 받았다. 이에 교황은 새로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하여(879~880) 이 공의회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불가리아에 대한 관할권을 포기하며, 어떤 평신도도 주교직에 즉시 오를 수 없다는 교회법을 받아들인다면 승인할 수 있다고 표명하였다. 이러한 조건들을 포시우스가 대부분 이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요한 8세는 880년에 그에게 보낸 한 서신에서 온건한 질책만 하였을 뿐 그를 승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학자 그루멜(V. Grumel)과 드보르닉(F. Dvornik)은 교황 요한 8세와 그 후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포시우스를 파문하지 않았기에 '포시우스 이교 라는 말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견해는 적어도 개연성은 있지만, 후기에 즉 886년에 포시우스가 새로운 황제인 레오 6세(886~912)에 의해 총대주교좌에서 물러난 후 897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가 가톨릭적 정서를 지녔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특히 '필리오궤(Filioque) 논쟁' 이 시작되면서부터 가톨릭에 대한 그의 투쟁은 절정에 달하였다. 포시우스는 897년 아르메니아의 보르디에 있는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 서〕 포시우스는 언어학과 해석학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는데, 신앙에 관한 용어 해설과 《암필로키아》(Amflochia)라는 저술 및 성서 주석들은 이를 입증하는 사례들이다. 또한 그는 문학적으로도 박식하였다. 예를 들면 비록 유실되었지만 그의 저술 《뮈리오비블론》()에는 그리스 고전과 그리스도교 문학 저술들의 많은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논쟁적인 내용들을 제외한다면 그의 서신들에도 많은 문학적인 내용들과 특히 금욕적인 기도 내용들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는 그의 연설 내용들도 풍부한 그리스도교 사상을 담고 있으며, 그 형식은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과거에 그가 저술한 책이라고 알려진 저서들은 오늘날 부인되는데, '바오로주의자들' (Pauliciani)을 반대하는 그 저술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평 가〕 포시우스는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초기에 그리스어로 번역한 몇몇 저술들을 제외하고는 라틴어와 서방 교부들의 보고(寶庫)들에 무지하였고, 그로 인해 '필리오궤 논쟁' 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의 저술들 중에서 특히 《삼위 일체론》(De Trinitate, 399~420)에 대한 이해는 그에게 유익하였던 것 같다. 한편 그는 총대주교로서 자신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해 탁월한 수완을 보였으나, 교황청과 대립하여 투쟁하던 상황에서는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적지 않은 사목적 열성과 관심을 보였으며, 갈라진 그리스도교인들(예를 들면 아르메니아인들)을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 원본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소실되었기에, 포시우스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인물됨에 대한 연구는 어려운 실정이다. (→ 니콜라오 1세; 동방 이교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4차 ; 필리오궤 논쟁) ※ 참고문헌 V. Grumel, Les regestes des actes du patriarcat de Constantinople, I, 2. Les regestes de 715 a 1043, Paris, 1935, pp. 456~497, 508~589/ E. Amann, 《DTC》 XII, pp. 536~604/ Fliche-Martin Frutaz, Storia della Chiesa, vol. VI, Torino, 1948, pp. 48 1 ~520/ F. Dvornik, The Photina Schim. History and Legend, Cambrige, 1948/ G. Hofmann, Lo stato presente della questione circa la riconciliazione di Fozio con la Chiesa romana, 《Civ.cat.》 Ⅲ, 1948, pp. 47~60. 李文 [全壽洪]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