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어바흐,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Feuerbach, Ludwig Andreas(1804~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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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포이어바흐.
독일의 대표적인 유물론 철학자. 종교 철학자. 〔생 애〕 포이어바흐는 1804년 7월 28일 독일의 남부 바이에른(Bayem) 주에 있는 작은 도시 란트슈트(Land-shut)에서, 형법 이론 연구에 공헌을 하였고 그로 인해 바이에른 시민 공로 훈장을 받아 귀족의 호칭을 받은 아버지 파울 폰 포이어바흐(Paul von Feuerbach, 1775~1833)의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형인 안셀름은 이름 있는 고고학자 겸 미술 비평가가 되었는데, 유명한 화가 안셀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가 그의 아들이다. 둘째 형은 수학 교수가 되어 '포이어바흐 원' 을 발견하였으며, 셋째 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학자가 되었다. 활달한 성격을 지녔으며 질서를 존중하고 근면하였던 포이어바흐는 고등학교에서 논리학 · 윤리학 · 자연 과학 · 수학 등을 공부하였고 특히 종교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고등학교 시절에 확고하게 나를 사로잡은 최초의 방향은 철학이 아니라 종교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방향은 내게 별 관심이 없었던 종교 교육을 통해서, 혹은 어떤 다른 종교적인 영향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로부터, 즉 환경이나 학교 교육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구로부터 나타났다. 이러한 방향을 추종하면서 나는 종교를 내 인생의 목적과 직업으로 삼아 신학자가 되려 하였다." 그는 성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어나 라틴어뿐만 아니라 히브리어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이어바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여 아버지의 친구인 파울루스(Paulus) 교수에게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파울루스의 강의보다 헤겔(G.W.F. Hegel, 1770~1831)의 영향을 받은 다우프(Daub) 교수의 철학적인 신학 강의에 마음이 끌렸고, 결국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강의를 듣기 위해 베를린 대학교 철학과로 옮겼다. 이렇게 헤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포이어바흐는 훗날 헤겔좌파의 거두가 되었다. 헤겔 좌파는 헤겔의 관념론적인철학 체계에 반기를 들고 종교 비판을 통해 유물론을 정착시키면서 독일의 통일과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 헤겔의 젊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마르크스(K.H. Marx, 1818~1883)와 엥겔스(F. Engels, 1820~1895)도 한때 이 그룹에 속해 있었다. 헤겔의 철학에 매료되었던 포이어바흐는 점차 헤겔 철학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스스로의 철학을 확립해 갔다. 자연이 절대 정신의 발전 과정에서 부산물로 발생하였다는 헤겔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구한 숫처녀인 논리는 스스로 어떤 자연도 결코 산출하지 못할것이다." 헤겔 철학의 한계는 자연의 경시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 포이어바흐는 자연 과학을 더 깊이 공부하기위하여 에를랑겐(Erlangen) 대학교로 옮겼고, 여기서 <이성의 무한성 · 통일성 · 보편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이 대학에서 철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강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30년 26세 때 집필한 책한 권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죽음과 불멸성에 관한 고찰》(Gedanken eines Denkers iiber Tod und Unsterblichkeit)이 바로 그것으로, 익명으로 출간된 이 책에서 포이어바흐는 개인의 영혼은 사멸하며 불멸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유적인 본질뿐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 종족은 영원히 존속하지만 개인의 영혼은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는 것으로, 그것은 개인의 영혼이 살아 있어 사후에 심판을 받는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스피노자(B. de Spinoza, 1632~1677)의 범신론적 경향이 짙은 이 책의 저자가 포이어바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교 당국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그에게 강의를 일절 금지시켰다. 철학 교수가 되려는 꿈이 사라져 크게 실망한 그는 친구의 소개로 브루크베르크(Bruckberg)에서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뢰브(Low)라는 여자를 알게 되고, 1837년에 결혼, 공장 옆에 조그만 서재를 꾸미고 조용히 연구와 저술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포이어바흐는 처음에 주로 헤겔 철학을 비판하는 단편적인 글과 철학사에 관한 저술을 발표하였다. 철학사에관한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 《베이컨에서 스피노자에 이르는 근세 철학사》(Geschichte der neueren Philosophie von Bacon von Verulam bis Benedikt Spinoza, 1833)이다. 또한 프랑스의 무신론적 철학자인 벨(P. Bayle, 1647~1706)을 다룬 《피에르 벨》(Pierre Bayle, 1838), 중세의 연애 사건으로 유명한 아벨라르(P. Abèlard, 1079~1142)와 엘로이즈(Hèloise, 1098?~1164)를 다룬 《아벨라르와 엘로이즈》(Abèlard und Hèloise, 1834), 《철학과 그리스도교에 대하여》(über Philosophie und Christentum, 1839), 《비판적으로본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 1835~1836) 등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저서들을 통해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유물론 철학의 정당성을 확신해 갔다. 또한 종교 문제에서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 종교 철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강의》(Vorlesungen über das Wesen der Religion, 1851)를 내놓으면서 그의 사상이 정리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담긴 근본 사상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의 객관적 본질이 인간적인 심성의 본질에 불과하며, 신학은 곧 인간학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무한자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의식, 곧 유한하고 제한된 본질이 아닌 무한한 본질로서의 자신에 대한 의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신의 모든 특성이 인간 자신의 특성으로부터 추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을 포이어바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하였다. 그래서 제1부는 종교를 인간의 본질과 일치시키는 관점에서 언급하였고, 제2부는 이 둘의 모순을 언급하였다. 우선 그에 의하면 종교는 우연히, 자의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 속에 필연적인 근거를 갖는다는 명제에서 출발하였다. 원칙적으로 종교는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에 의존한다. 오직 사유하고 의식하는 인간만이 종교를 갖는다. 여기서 의식이란 동물도 갖고 있는 감성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스스로의 유(類)나 본질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의식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만이 인간을 전체적으로 의식하고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뿐, 동물은 유와 개체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다. 이러한 의식이 결국 모든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발생하게 된 근거이다. 그래서 신이란 존재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모여서 이루어진 집합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많은 논쟁과 찬사를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강의》는 포이어바흐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학생회의 초청 강연에서 한 강의들을 모아 발간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스스로 확립한 유물론 철학을 기반으로 참된 종교란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해 주는 종교이며, 인간을 비하시키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종교는 잘못된 종교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최고의 본질' 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잡아야 된다는 것이다. 결국 포이어바흐는 종교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 되는 종교를 복원시키려 하였다. 그의 유물론도 '너와 나' 라는 공동 관계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데로 나아가는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인간학적 유물론' 이라 불린다. "인간이 인간에게 신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유사한 휴머니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과학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헤겔의 철학에서처럼 추상적인 사변을 통해서 파악될 수 없다. 그러므로 포이어바흐는 자연 과학의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인간은 항상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본질을 실현해 가기 때문에 자연 법칙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일도 인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는 "철학자는 자연을 애인으로 삼아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종교가 인간의 삶을 오히려 위축시키는 '종교적 소외' 를 벗어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종교를 실현할 수 있는 이론적인 기반을 제시한 것이다. 이 외에도 《신 계보》(神系譜, Theogonie, 1857), 《신성, 자유와 불멸》(Gottheit, Freiheit und Unsterblichkeit, 1866)을 저술한 포이어바흐는 1872년 9월 13일 독일의 뉘른베르크(Nuimberg)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 가〕 포이어바흐에 대해 독일의 시인 헤르베크(G. Herwegh, 1817~1875)는 "위대한 단테처럼 그대는 천국과 지옥을 걸어다녔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주장은 헤겔을 제외한 다른 학자들의 주장보다 마르크스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Thesen über Feuerbach)에서 포이어바흐가 비판한 유물론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비판에 대해 부인하였지만 그리스도교적인 신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한 포이어바흐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최초로 무신론을 주장한 철학자였다. 종교의 원천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헤겔에 대한 그의 비판은 헤겔의 이데아(idea, 觀念)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마르크스, 카를 하인리히 ; 헤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 참고문헌 L. Feuerbach, 강대석 역, 《미래 철학의 근본 원칙》, 이문사, 1983/ -, 강대석 역,《기독교의 본질》, 한길사, 1992/ 한스 마르틴 자스, 정 문길 역, ,《포이에르바하》, 문학과 지성사, 1988/ 안현수, 《인간적 유물론》, 서광사 1991/ 강대석, 《포이에르바하와 앵겔스》, 이 론과 실천, 1993/L. Dupré, 5, pp. 706~707. [姜大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