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暴力

[라]violentia · [영]vio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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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포기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일깨운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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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포기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일깨운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화.


난폭한 힘, 완력, 불법 · 부당한 방법으로 물리적인 강제력을 행사하는 일. I. 성서에서의 폭력 〔구약성서에서의 의미〕 구약성서에서는 폭력에 대해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 준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은 카인을 내쫓을 때 '보복의 기준' 을 언급하였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으리라" (창세 4, 15). 그리고 카인의 후손인 라멕이 아내들에게 다짐하는 장면에서는 보복이 그 열한 배로 늘어났다. "아다야, 실라야,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 23-24). 구약성서 시대에 이스라엘 주변에서 보복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바빌론의 왕이었던 함무라비(기원전 1792~1750)의 법전에는 이른바 '동태복수법' (同態復讐法, talio)이 등장한다. 바빌론이 위치해 있던 곳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며, 이곳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났던 고대 문명들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었기에 '동태 복수법' 을 보복에 대한 기준으로 삼았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 24 : 레위 24, 20 ; 신명 19, 21). '동태 복수법' 은 세상이 무법 천지가 되는 것을 막아 주어 사회의 질서를 잡아 나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눈은 눈으로" 라는 표현은 과격해 보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정신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 다시 말해 같은 양과 질로 되갚아 준다는 것은 모든 형법의 기초가 된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와 같은 지중해권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그 나라들의 힘이 융성해져 다른 세계로 진출할 때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전쟁을 수시로 치러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폭력이 하나의 일상사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을 침공할 때나, 다윗부터 시작된 통일 왕조, 남북 왕국으로의 분열,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두 차례에 걸친 유대 독립 전쟁 등은 이스라엘이 걸어야 하였던 파란만장한 길을 보여 준다. 그런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을 "복수의 하느님"(출애 20, 5-6), 혹은 적군에 맞서 싸우는 "장군"의 모습으로 생각하였다(여호수아서).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예리고와 그 임금과 힘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너희 군사들은 모두 저 성읍 둘레를 하루에 한번 돌아라. 그렇게 엿새 동안 하는데, 사제 일곱 명이 저마다 숫양 뿔나팔을 하나씩 들고 궤 앞에 서라. 이렛날에는 사제들이 뿔나팔을 부는 가운데 저 성읍을 일곱 번 돌아라. 숫양뿔 소리가 길게 울려 그 나팔 소리를 듣게 되거든, 온 백성이 큰 함성을 지르도록 하여라.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라. 그때에 백성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올라가라"(여호 6, 2-5). 〔신약성서에서의 의미〕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보면 폭력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발견된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다섯 번째 대립 명제(5, 38-42)에서 예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무릇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시오"(마태 5, 39).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에게 나아와 "형제를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보자, 예수는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하시오"라고 말하였다(마태 18, 21-22). 이 두 말씀은 앞서 지적한 구약성서에 드러난 입장과 견주어 볼 때, 폭력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선명하게 알려 준다. 예수는 "폭력을 포기하라" 고 말하는 대신 사랑을 가르쳤다. 어느 날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그에게 비법을 가르쳐 준다.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힘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루가 10, 25-28).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 을 말한 것이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고,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인' 의 예화를 들었다(10, 29-37).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받은 부족이다. 그들은 이방인과 혼인 관계를 맺은 바 있는, 말하자면 혼혈 민족이다. 이는 피의 순수성을 중요하게 여기던 유대인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유대교라는 종교 영역에서 사마리아인들을 제외시키게 된다(기원전 4세기). 그러나 예수는 사랑해야 할 대상인 '이웃' 에 사마리아인을 포함시켰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원수 중의 원수가 바로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 이라는 뜻이었다. '폭력을 포기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는 예수의 사상은 여섯 번째 대립 명제에 잘 드러난다(마태 5, 43-48). "네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레위 19, 18)는 율법 규정에 대해 예수는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라는 반격을 퍼붓고, 이처럼 해야 하는 이유로 차별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제시한다(마태 5, 45-48). 이웃의 가까운 사람들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진정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려면 이웃뿐 아니라 불구대천의 원수라 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참 그리스도인의 사랑법이고, '하느님의 의' 를 실천하는 일이다. 예수의 말씀을 통해 사랑할 대상의 한계가 없어진 셈이다.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은 1세기 교회에서도 '폭력 포기와 원수 사랑' 을 구체적인 실천율(實踐律)로 제시하였다.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복수의 포기를 주장하였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시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생각을 품으시오.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힘이 닿는 데까지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시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겨 두시오. 실상 (성경에도) '복수는 내 것이니 내가 갚겠노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 그대는 악에 정복 당하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정복하시오"(로마 12, 17-21). 구약 시대 때부터 복수는 하느님의 몫이었다(신명 32, 35 ; 출애 15장 ; 판관 6-7장 ; 레위 19, 18). 의로운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다. 그분은 비록 당장은 적수들을 응징하지 않으나, 장차 혹은 종말에 이르면 그분의 '진노' 가 내려 모든 일의 제자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로마 2, 5-8 : 3, 5 ; 4, 15 : 5, 9).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원수라도 갚을 필요가 없다. 아니, 인간에게는 원래 복수의 권리가 없으니 "아예 복수하지 말라" 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보낸 사람들에 의해 체포될 때 한 제자가 칼을 꺼내어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자르자, 예수는 "당신 칼을 칼집에 도로 넣으시오.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하는 법입니다. 당신 생각으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청하기만 하면) 이제라도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우실 것입니다"(마태 26, 52-53)라고 꾸중하였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다양한 해석〕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입장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구약성서처럼 생각하는 것은 그리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칼을 들어야 마땅한 때도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 포기와 원수 사랑' 을 강조한 예수의 말은 '폭력' 에 대해 매우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물론 가장 어려운 문제는 현실적으로 폭력이 행사되는 상황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수없이 많은 전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엄청난 폭력이 자행되었다. 현재도 이런 상황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지난 교회 역사에서 등장하였던 해석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본다. 실천 가능 윤리 : 이들은 예수의 극단적인 명령들을 글자 그대로 지킬 수 있다고 여겼다. 초대 라틴 교부들은 '폭력 포기와 원수 사랑' 의 가르침을 배운 것에서 그치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라틴 교부들의 입장 뒤에는 그런 무제한적인 사랑을 통해 이교인들을 감동시키려는 선교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i, 1181/1182?~1226), 에라스무스(D. Erasmus, 1466/1469?~1536), 톨스토이(L.N. Tolstoy, 1828~1910) 등도 같은 노선을 견지하였다. 즉 예수의 말씀은 철저히 지킬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입장이다. 사실 원칙적으로 보면 모두가 예수의 지상 명령이기에 그대로 지키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중 윤리 :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른바 '이중 윤리' 라는 잣대로 예수의 명령들을 풀이한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 후안 데 말도나도(Juan de Maldonado) 등이 있다. 이들은 폭력 포기와 같이 예수가 내린 윤리 지침들은 단지 초기의 사도들과 수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니, 일반 평신도들은 그 말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실천 불능 윤리 : 종교 개혁을 주도한 루터(M. Luther, 1483~1546), 칼뱅(J. Calvin, 1509~1564), 츠빙글리(U. Zwingli, 1484~1531) 등은 예수의 명령을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예수의 명령들이 수사학적인 과장이 아니라 실천하라는 것임은 분명하나 인간은 도저히 그런 실천 명령을 지킬 수 없기에, 오직 하느님이 우리 죄인들을 선처(善處)해 주시는 길밖에 없다. 하느님 앞에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그분의 은총을 갈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극단적인 명령 뒤에 숨은 예수의 뜻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지향 윤리 : 지향(志向) 윤리의 기본적인 노선은 실천 불능 윤리와 같다. 이 같은 노선은 하르나크(A. von Harnack, 1851~1930)와 바움가르텐(O. Baumgarten)이 대표적인데 예수의 극단적인 명령들은 그 명령 자체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예수의 명령을 들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오직 하느님을 향해 자아를 다듬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명령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20세기 초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상당한 반응을 얻었던 주장이다. 이 주장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A. von Harnack, O. Baumgarten). 사실 폭력을 포기한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오히려 그 뒤에 있는 '마음의 진실함' 에 우리의 행동을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하느님과 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고, '폭력 포기' 는 그리 대단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종말 비상 윤리 : 예수의 가르침이 극단적인 것임은 분명하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어 보이는 것임도 분명하다. 그런데 만일 '종말이 곧 닥치리라' 는 징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폭력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떨어지든지, 그렇지 않은 방법을 택하든지 간에 양자 택일을 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면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또 불구대천의 원수와 화해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든지, 아니면 그 원수와 함께 멸망을 하든지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 화해를 할 것이다. 슈바이처(A. Schweitzer, 1875~1965)와 바이스(J. Weiss, 1863~1914)는 그런 점에 착안하여 예수의 명령들을 종말론적인 차원, 즉 종 말이라는 절대 위기 상황에서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해설이다. 오늘날 비록 '종말' 을 먼 이야기처럼 여기기는 하지만, 언제 어느 때 하느님이 우리의 '목숨' 을 가져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폭력 저항 : 20세기의 위대한 종교인들 중에는 비폭력 저항 운동을 펼친 이들이 많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킹(M.L. King, 1929~1968) 목사와 간디(M.K. Gandhi, 1869~1948)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간디는 비록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 뺨마저 돌려 대시오" (마태 5, 39)라는 명령을, 어떤 어려운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 주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하였다. 비폭력 저항을 주창한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괴한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 주었던 진정한 용기는 영원히 남아 있으며,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을 적절하게 이해하였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법이 아니라 복음 : 산상 설교는 법이 아니라 복음이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예수의 극단적인 명령들이 인간이 지켜야 할 실천 규범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언뜻 보면 종교 개혁자들의 실천 불능 윤리와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해석이다. 예수의 가르침들을 법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이면, 여기에는 인간이 지킬 수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대에 올리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되고, 결국 인간의 의지가 중요한 잣대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복음은 다르다. 복음은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거나 인간 존재의 하잘것없음을 알려 주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구원에 그 지향점이 있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의 명령이 극단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뒤에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아스의 해석은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전혀 무리가없는데, 하느님의 뜻에 대한 깊은 반성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상황 윤리 : 예수의 가르침을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결과를 예측한 사랑' 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상황 윤리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다(U. Lutz). 히틀러(A. Hitler, 1889~1945) 살해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본회퍼(D. Bonhoeffer, 1906~1945)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 있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였다.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질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예수는 원수를 무제한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밀어야 한다. 그 같은 비폭력 정신이 인도의 독립과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 신장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살인은 어떤 경우에라도 죄가 된다는 점을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본회퍼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만일 어느 미친 사람이 차를 끌고 인도에 뛰어올라 왔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저 사람들에게 길에서 비키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미친 사람을 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야 할까? 답은 자명하다. 예수도 성전에 들어서자 채찍을 휘두르지 않았는가! 그러니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도 사랑의 한 가지 표현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능성 속에 떠 있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과감하게 붙잡아라. 사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행동에서만 자유가 있다. 초조한 조바심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계명과 너의 신앙에만 의지해서 역사의 폭풍 안으로 들어가라" (D. Bonhoeffer, Winderstand und Ergebung, Miinchen, 1970, p. 403). 〔현대의 폭력〕 지난 인류 역사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폭력이 사용되었던 적이 많았다. 만일 무력을 통해서라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였다면 유대인들에게 자행된 나치의 폭력은 더욱 잔인하게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 같은 폭력의 당위성에 대해 파농(F. Fanon, 1925~1961) 같은 진보적인 사상가는 피지배층에게 폭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 아니라 적극적인 의사 표명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매우 심각한 질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벌어지는 폭력의 문제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에 폭력이라는 낱말이 약한 자에게 가해지는 물리적인 힘을 위주로 정의되었다면, 오늘날에는 폭력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분야가 대폭 넓어졌다. 물리적인 폭력 외에도 언어 폭력, 미디어 폭력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청소년에게는 폭력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비단 청소년이 폭력을 당한다는 측면을 넘어서서 그들이 사회와 가정에서 폭력을 배워 스스로 사용한다는 측면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일을 막는 데 최선을 기울여야 한다. 청소년들은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과제는 폭력에 대한 신학을 정립시키는 것보다 어떻게 폭력을 막아야 하는가에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도 그 사실을 분명히 하여 "평화의 건설을 위해서는 우선 불의부터 뿌리뽑아야 한다" 라고 가르치면서 "폭력의 방종을 억제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사목 83항). (→ 간디 ; 동태 복수법 ; 본회퍼, 디트리히 ; 비폭력 저항 ; 슈바이처, 알베르트 ; 전쟁 ; 킹 , 마틴 루터 ; 평화, 성서에서의) ※ 참고문헌  J. 예레미아스, 박상래 역, 《산상 설교》, 분도 소책 38, 분도출판사, 1973/ 정양모 역주, 《마태오 복음서》, 200주년 기념 성서, 분도출판사, 1990/ 장익 엮음, 《폭력》, 분도 소책 40, 분도 출판사, 1987/ 박태식,《왜 예수님이어야 하는가?》, 생활성서사, 2001/ H.-H. Schrey · M. Moser, 《TRE》 13, pp. 168~184/ 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Miinchen, 1970. 〔朴泰植〕 Ⅱ. 사회학에서의 폭력 〔의 미〕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살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관심, 견해, 주장의 공존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이 같은 다양성의 조정 과정이 합리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서 야기된다. 갈등의 조정 과정이 합리적인 경우, 그 귀결은 '평화'로서 구성원 모두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태이다. 평화는 모든 긍정적인 논의의 종착점으로 종교 역시 적극 지향하는 바이다. 보편 교회 역시 항상 인간 사회의 평화를 강조하고 있으며, 평화의 필요 조건은 정의이고 충분 조건은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한편 지배권 장악 · 강화와 기득권 유지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갈등 조정 수단인 물리적 힘의 행사는 오히려 갈등 · 대립만을 증폭시키고 억압된 불만을 누적시켜 결국에는 엄청난 파괴를 초래한다. 즉 '폭력' 은 '평화' 에 대립되며 정의에 배치된다. 따라서 폭력은 반평화 및 불의의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다. 폭력은 혁명, 전쟁, 테러, 린치 등의 정치 차원과 독점, 실직, 물가고 등의 경제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폭력은 직접 폭력의 형태로, 거짓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지만 그 대신 공포의 두려움이 지배적이다. 사회 문화 분야의 폭력은 인종, 성별, 연령, 장애, 질병, 문맹, 기아, 가난 등의 각종 차별로, 구조적 폭력의 형태인 이 폭력들은 처음부터 거짓과 억압의 형태로 나타난다. 폭력에 대해 고려해야 할 점은, 첫째 평화와 정의의 전제 조건일 경우 반드시 목적과 수단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여 다룰 때 필연적으로 거기에는 거짓과 불의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둘째 '평화는 폭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가?' , 즉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셋째는 '폭력의 악순환을 해결할 방법은 있는가?' 이며, 마지막은 '폭력과 권력(power)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 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 다르다. 따라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조정해야 한다. 여기서 상대방의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의 · 거짓 · 증오를 통해 강제로 조정을 요구할 때 그것은 폭력' 이며, 한 개인이나 집단이 이성, 정의, 사랑, 평화의 설득 방법으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의 행태에 영향을 주는 능력은 '권력' 이라고 부른다. 〔내 용〕 역사 이래 인간은 끊임없이 각종 폭력에 시달리면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폭력에 항거하여 왔으며, 폭력 없는 인간 사회를 갈구하여 왔다. 인간의 이성적 질서는 정의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며, 평화는 이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폭력의 문제는 이처럼 현실과 당위의 기본 틀 속에서 다루어야 할 대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 :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는 폭력이 인간 본성과 인격성에 배치되며, 나아가 사랑의 계명에 어긋나기 때문에 거부하였다. 한편 그는 폭력을 정당한 폭력과 부당한 폭력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예를 들면 인간의 생명과 재산, 공동체의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폭력으로 인정하였는데, 정당성의 기준은 인격성과 공동선이라는 잣대이다. 정당한 폭력은 개인적으로는 정당 방위의 차원으로, 사회적으로는 정당한 공권력의 집행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아가 폭정에 대한 항거나 시민 불복종 운동, 위임받은 공적인 이익과 안녕 유지의 의미를 어기는 경우 이에 대한 시정을 목적으로 한 완력 행사도 이에 포함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폭력을 의지와의 관계에서 논의하였다. 의지란 인식 차원의 것으로, 인간 본성의 내적인 근원에서 표출되는 경향성이다. 한편 강제나 강요는 인간 외적인 근원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강요된다는 것은 인간 의지의 본성에 배치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을 역류시킬 수도 있으나, 이 같은 현상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강제에 의한 일시적인 혼돈일 뿐이다. 즉 강요라는 폭력의 결과일 뿐이다. 폭력은 이처럼 외부적인 것이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 현상이요 예외가 없는 물의 본질에 기인하고 있듯이, 인간 의지는 본성적 경향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비록 필연적으로 동일한 현상이 초래된다 해도, 그것은 외적 강요가 아니라 내적 본성의 발로인 것이다. 일반적인 구분 : 일반적으로 폭력은 물리적 강제력을 뜻한다. 첫째 정치학적으로는 강제적 완력의 행사 일반을 뜻하고, 둘째 법학적으로는 부당 · 불법적인 방법에 의한 물리적 강제력의 사용을 뜻하며, 셋째 사회학적 입장에서는 단순히 정치적 · 법학적 고찰에 대한 범죄 집단의 완력 행사나 무장 봉기 등만이 아니라 국가가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관장하는 군 · 경이 집행하는 실력 행사까지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학적 입장과 달리 법학적 입장에서는 폭력은 법이 허용하지 않는 물리력의 행사만을 뜻하므로, 군대나 경찰 등의 실력 행사는 법에 의거하고 있는 한 정당화되며 공권력의 집행이라고 부르지 폭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와 함께 정당 방위 등의경우, 개인에 의한 완력 행사였다 해도 그것이 법으로 허용되는 한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폭력의 전형적인예는 전쟁과 혁명이다. 여기에는 파괴, 테러, 린치 등의 직접적 폭력과 빈곤, 억압, 차별 등의 구조적 폭력이 있다. 이 같은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참된 평화를 보장한다. 형태 : 폭력의 형태는 신체에 직접적으로 가하는 공격 등의 물리적 형태를 비롯하여 불법적인 수단으로 행사하는 심리적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신체에 대한 공격에도 직접 신체의 기능에 가격하는 공격 행동과 타인의 면전에서 꾸짖는 등의 언어적 공격이 있다. 나아가 상대방을 직접 공격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상대방과 중요한 관계에 있는 인물(남편 또는 부인, 자녀 등)이나 소유(재산, 명예 등)를 위협하는 간접 공격이 있으며, 심지어는 자해나 자살 등을 통해 고통을 주는 공격도 있다. 원인 :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폭력이 발생하는 원인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 · 갈등의 조정이 합리적이지 못한 데서 비롯되며 나름대로는 욕구 불만 해소책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폭력과의 관계에서 산상 설교를 살펴보면, 그 내용들이 모순된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 메울 수 없는 단절을 나타내고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산상 설교의 의미는 실제로 우리가 어떤 것을 참으로 바란다면 그것과 거리를 두거나 잊어버릴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역설적인 진리이다. 인간에게서는 직접적 요구-좋으면 좋다라는 반응-와 역설적 요구-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반응-라는 두 가지 상반된 형태의 요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역설적 형태의 요구임을 인정하게 된다. 즉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진정으로 얻기 바란다면 오히려 그것을 버릴 때 가능하다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러한 요령을 터득한 후 주변의 반발이나 억지를 초래하지 않고도 순리적으로 자신의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익히게 된다. 폭력이 아니라 일치와 평화 가운데 자기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산상 설교의 가르침인 것이다. 폭력과 인간 본성 : 생명은 탄력이며 유연성이다. 반면 폭력은 반생명적 현상이므로 경직 및 화석화의 과정과 직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폭력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정당 방위라는 생명 친화적 잣대가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당한 폭력의 예로 정당 방위 수단을 갖지 못한 태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나, 군비 없는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보편 교회는 인간의 정당한 권리 보호를 위해서는 폭력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약자라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평소 훈련을 통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권리와 의무를 존중하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다. 현대 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은 역설적으로 국가 간의 갈등이 무력이 아닌 평화적 노력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고 있다. 즉 정의와 평화는 혁명이나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이성의 바탕 위에서 실현될 뿐이다. 폭력은 파괴와 증오만을 가져올 뿐 화합과 일치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의 본성이 본래 폭력적이라는 이론도 있다. 인류의 기원과 폭력의 기원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사실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즉 무기가 인류의 기원이라는 주장과 석기인(石器人)은 석기를 이미 무기로사용하였다는 사실의 공통점은 폭력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무기를 만들고 무기는 인간을 만들면서, 즉 무기가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면서 인간의 역사는 발전하여 왔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인간의 첫 가공물의 본질과 보다 우수한 무기의 제작과 사용은 인간이 폭력과 직결되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인간의 지적 능력과 폭력의 사용은 무관하다는 것을 물리적, 육체적, 직접적, 후진국형의 폭력이나 정신적, 심리적, 간접적, 선진국형의 폭력을 들어 밝히고 있다.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의 설화에서 보듯 인간의 잔인성과 전쟁의 원인, 즉 인간의 폭력적 성향의 원인을 '원죄' 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대처 : 일반적으로 폭력과 불의에 대한 대처 방식은 ① 그저 참고 견딤, ② 기회주의적 타협, ③ 무력을 통한 저항, ④ 실천적 평화주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찾고 있는 바람직한 변화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이룰 수는 없다. 즉 무관심이나 침묵은 불의의 공범이 되는 것이며, 종국에는 자신의 파멸과 직결된다. 그렇기에 ①과 ②는 참된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부당한 수단으로는 정당한 목적이 관철될 수 없다는 윤리 원칙에 위배되므로 ③의 방식 역시 부적절하다. 따라서 폭력의 근절책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④의 수단뿐이며, 이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적절한 해결책이다. 나아가 제도적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비폭력적 수단으로 항거하는 행동들, 예를 들면 '시민 불복종 운동' 등은 '원수 사랑 계명' 에 어긋나지 않는 적절한 수단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폭력의 근절〕 인간 사회에 지속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폭력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으나, 이를 확실하게 통제하고 있지는 못하다. 단지 폭력을 순치시킬 수 있는 몇몇 원칙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법과정의, 용서와 사랑의 개념이다. 그러나 폭력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인간 사회는 아직까지 희망과 약속의 영역에만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인간 의지의 나약함이 인간이 원칙에 철저하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무원칙과 타협하게 만들어, 폭력의 악순환은 갈수록 인간 사회에 뿌리를 깊게 드리우고 있다. 따라서 폭력 없는 인간 사회 건설은 인류의 최대 현안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폭력의 근절책이 강구되어 왔다. 크게 폭력을 통해 폭력을 없애는 해결책과 비폭력을 통해 근절하는 해결책이 마련되고 있는데, 첫째 방안은 그 방법 외에는 폭력을 퇴치할 수 없을 때에 한하여 유효한 수단이 되기는 하지만,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관철시킬 수 있는가' 의 문제를 안고 있어 합리적 방안은 아닌 것 같다. 둘째 방안은 강렬한 호소력을 갖지는 못하지만, 수단과 목적의 동시적 정당성의 논리 문제와 재연될 수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근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그리고 '예수의 길' 이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폭력은 정태적 이론에서가 아니라 동태적 상황에서만 답변될 수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선명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대부분 애매모호하고 포괄적 차원의 현상으로 나타나 그 종류가 다양하며, 폭력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도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억압과 강요의 부당한 폭력인지, 참된 해방을 위한 약자의 몸부림인지는 분명히 구분된다. 왜냐하면 폭력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항상 거짓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짓이 드러나면 그 즉시 폭력의 추한 모습은 드러나게 되고, 동시에 폭력은 힘없이 무너진다.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비폭력적 근절책' 이 무기력이나 무원칙한 타협의 동의어는 아니라는 점이다. 때에 따라서는 결단과 용기가 요구된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다. 즉 평화를 위해서는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만일 매사에 중립적 위치만을 고집한다면 이는 양쪽을 똑같이 대한다는 뜻이며, 이러한 처신은 정당 · 부당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소극적으로는 부당한 쪽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변화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현실 도피를 의미할 뿐이다. 〔교회의 입장〕 역대 교황들이 발표한 사회 회칙에서는 폭력이라는 단어를 여러 경우에 사용하였다. 최초의 사회 회칙인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 5. 15)은 노동자와 고용주의 의무들을 언급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특히 노동자들이 "자기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경우에라도 폭력의 사용을 삼가야 하고, 자신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폭동으로 변질시켜는 안 된다"(14항)라고 하였다. <사십 주년>(Quadragesimo Anno, 1931. 5. 15)에서는 사회주의의 일파인 과격파 공산주의를 언급하면서, 이들이 "무자비한 계급 투쟁과 사유 재산의 완전 철폐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가르치고 추구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공산주의는 그 목표를 비밀히 숨어서가 아니라, 공공연하게 광포한 폭력까지 포함하는 모든 수단을 써 가며 달성하려 한다"(45항)라고 비난하였다.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4. 11)는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말을 통해 폭력의 사용 금지를 언급하였다. "폭력은 모든 것을 때려부수는 반면, 아무것도 건설하지 않는다. 또한 욕망에 불을 붙이지만, 진정시키는 일은 하지 못한다. 그리고 증오와 파괴를 축적시키고, 논쟁자들에게 화합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불목의 늪 위에서 고통을 겪은 후에 서서히 이전 상태를 복구하려는 강요에 의해 더욱 강하게 인간들과 정치적 정당들을 뒤흔든다"(162항).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폭력에 대해 추상적인 언급만 하였다. 그래서 "인간이 사랑으로 결합되어 죄를 극복한다면 폭력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권리를 옹호함에 있어 폭력을 쓰지 않고 약자에게도 가능한 방위 수단을 택하는 사람들을····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목 78항)라고 하였다. 그리고 폭력 없는 평화의 건설을 위해 전쟁 회피(79~82항)와 국제 공동체의 건설(83~90항), 각 신자들과 지역 교회의 임무(91항), 대화(92항) 등을 제시하였다. 이후 교황의 문헌들은 폭력의 사용을 계속 반대하였다. 그래서 "폭력의 사용은 투쟁 상태를 유발하게 되며 극단의 폭력과 폭력의 남용을 초래한다"(<팔십 주년> 43항)라고 경고하면서, 비폭력의 전략을 장려하였다(<세계 정의에 관하여> 59항). 특히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제3 세계의 신자들에게 폭력과 혁명을 신뢰하지 말라고 하면서, 특히 폭력은 그리스도교적인 것도, 복음적인 것도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교황은 "폭력은 언제나 폭력을 부르며 필연적으로 새로운 억압의 형태를 낳게" 하기에 교회는 폭력을 인정할 수 없으며, 인간 해방의 달성 방법으로 어떠한 인간의 살해(mortem)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현대의 복음 선교> 37항). 이러한 교황의 입장은 해방 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신앙 교리성의 훈령인 <자유의 전갈>(Libertatis Nuntius, 1984. 8. 6)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이 훈령에서는 마르크스주의는 폭력을 바탕으로 사회를 세우려고 한다고 규정하면서(8장 6항), 폭력은 폭력을 낳고 인간을 타락시킨다며(11장 7항) 第一 폭력과 투쟁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밝혔다(11장7~11항). 또 다른 신앙 교리성의 훈령인 <자유의 자각>(Libertatis Conscientia, 1986. 3. 22)은 교회의 사회 교리의 본질 중 하나로 행동 지침을 열거하면서 폭력에 대해 언급하였다. "조직적인 폭력 의존은 새로운 형태의 예속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는 하나의 파괴적인 환상으로 단죄받아야 한다. 이와 똑같은 강도로,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폭력과 경찰의 전횡적 행동 그리고 통치 체제에서 자행되는 온갖 형태의 폭력을 단죄하여야 한다" (76항). 그리고 교회의 교도권이 장기화된 폭정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 투쟁을 용인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지속적인 폭력 기술의 발달과 폭력 사용에 따르는 심각한 위험의 증대로 '소극적 저항' 이 성공 의 전망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였다(79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백 주년>(Centesimus Annus, 1991. 5. 1)에서 소련과 그 주변 국가 및 여러 대륙의 독재와 압제 정권의 몰락 이유를 설명하면서, 비폭력적 행동과 역할이 반대자들을 무장 해제시켰다고 하였다. "항상 폭력의 충동에 따르기를 거절하면서, 기회가 주어질때마다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을 발견한 사람들의 비폭력적 행동과 역할이 그 질서를 극복하였다. 진리가 반대자의 무장을 해제시킨 것이다. 폭력 자체는 거짓을 정당한 것으로 옹호하고, 비록 거짓임에도 다른 이의 권리를 보호하고, 다른 이가 받는 위협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척하기 때문이다" (23항) 이렇게 교회는 폭력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였지만, 주로 경제적 · 정치적인 면에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종 차별로 일어나는 폭력과 성폭력에 대해서는 '폭력' 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그 해결에 대해 충실하고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교회의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 비폭력 저항 ; 전쟁 ; 평화, 윤리 신학에서의) ※ 참고문헌  정의채, <우리 시대의 폭력과 정의와 평화(Violence, Justice and Peace in our Times)>, 제5차 아시아 가톨릭 철학회(일본, 2002. 8. 21~23) 발표 논문/ 《교회와 사회 -사회 교리에 관한 교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金漁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