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티펙스 막시무스

[라]Pontifex Maxi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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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9세를 폰티펙스 막시무스라고 칭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문 .

교황 비오 9세를 폰티펙스 막시무스라고 칭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문 .


'대사제' 라는 의미로 교황 칭호들 중 하나. 라틴어로 '다리' 〔橋〕를 의미하는 '폰스' (pons)와 '하다, 만들다' 라는 의미의 동사 '파체레' (facere)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폰티펙스는, '다리를 놓는 사람' (pontem faciens)을 뜻한다. 신성한 강으로 여긴 테베레(Tevere) 강 위의 주요 교량들이 있는 로마에서 폰티펙스는 매우 중요한 지위였다. 반면 복수형인 '폰티피체스' (Pontifices)는 로마 공화국에서 공적 예배와 사적 예배를 감독하고, 종교적 의무를 만족시키는 방식에 대해 조언하며, 달력을 작성하거나 축제일을 고정하고, 신전들의 축성을 관리하는 등의 과제를 지녔던 사제단(司祭團, Collegium Pontificum)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이들을 지휘, 통괄하던 '대사제' 였다. 기원전 3세기부터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로마 종교의 책임자로서 법적인 권리를 지녔다. 기원전 12년에 '폰티펙스 막시무스 라는 칭호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서기14)가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처음 사용하였다. 이후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정식으로 로마 국가 예배 시 대사제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어 로마의 예배를 관장하였다. 황제는 법의 원천으로 종교법(lex sacra)도 정하였다. 콘스탄틴 대제(306~337) 시대에 이르러서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313년 밀라노 관용령을 반포한 이후에도 콘스탄틴 대제는 전임 황제들처럼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이교적 국가 의식의 대사제 칭호와 직무 및 권한을 계속 가졌고, 이를 통해 교회 문제(ius in sacris)의 법적 독점권과 최고의 재판 권위를 지녔다. 콘스탄틴 대제가 교황과 상의하거나 어떤 조언을 구하지도 않고 325년에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개최하고, 특히 수도 로마에 있는 사도들의 무덤 위에 대표적인 성당들(특히 베드로 대성전)을 세운 것은, 정치 권력의 최고 소유자이며 '폰티펙스 막시무스 로서의 권위를 황제가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 황제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황제가 있으며, 종교 문제에 있어 황제는 주교들, 특히 로마 주교인 교황의 판결에 종속된다는 사상을 통해 교회의 독립을 위한 첫걸음을 밀라노의 주교(373~397)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가 내딛었다.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서로마 제국의 황제 그라티아누스 375~383)는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사제가 아니기 때문에 '폰티펙스 막시무스 란 칭호를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판단, 382년에 '폰티펙스 막시무스' 라는 칭호와 의복을 거부하고 이교 예배를 위한 국가의 재정 지원을 중단하였으며, 이교 사제들에게 부여된 면책권도 제한하였다. 그리고 교황 다마소 1세(366~384)에게 그 칭호를 줌으로써,다마소 1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라는 칭호를 가진 역사상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그로 인해 로마의 주교들이 이 직무를 떠맡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법적인 칭호였다. 교황들은 당시 이 칭호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권위가 사도 베드로로부터 유래한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 후 교황들은 점차 자신들의 법적 권위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교황이 오늘날 '폰티펙스 막시무스 또는 최고 사제' (Summus Pontifex)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 이유이고, 이교로부터 어떤 것도 넘겨받지 않은 이유이다. 한편 '폰티펙스 막시무스 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 교부들에 의해 많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칭호가 로마의 이교도적인 종교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로마 제국 자체가 이교였기 때문에 경멸적이고 이교적인 방식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다 테르툴리아노(Q.S.F. Tertullianus, 155?~230/240?)에 의해 '폰티펙스 막시무스 란 칭호가교황 갈리스도 1세(217~222)에게 최초로 적용되었는데, 이것은 초기 교황직의 권위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다.220년경 테르툴리아노는 비록 '상습범' 일지라도 교회로 돌아오는 속죄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황 갈리스도 1세의 참회 규정 완화 조치로 교황과 충돌하였던 몬타누스주의자였다. 당시에 사도 전승 또는 교회의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던 그는 교령을 유효하게 하는 "맺고 푸는" 자신의 베드로좌 권위를 언급한(테르툴리아노, 《정숙론》 21, 9-10) 교황 갈리스도 1세에 대한 대답으로서, 경멸하고 비꼬는 뜻으로 그를 "주교 중의 주교" 이며 "폰티펙스 막시무스" 라고 하였다(《정숙론) 1). 이 두 개의 칭호는 당시 이교적인 칭호들이었다. 그러나 이단자인 테르툴리아노가 이런 방식으로 교황을 언급하였다는 사실은, 교황 갈리스도가 자신의 고유한 주교직을 넘어 보편 교회에 권위를 행사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시대, 특히 350년이 지나면서 로마 교회와 로마 주교는 서방의 군주적인 권력 지위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다마소 1세는 로마 교회를 배타적 의미의 '사도좌' 로 지칭하는 동시에,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높은 서열을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레오 1세(440~461)는 우두머리 주교로서 자신을 폰티펙스 막시무스 로 지칭한 최초의 교황이다. '교황을 통해 베드로가 직접 말씀하신다" 라면서 교황직에 대한 높은 자의식을 갖고 서구 교회를 이끔으로써 수위권의 고전적 종합을 이룬 교황 레오 1세 때부터, 로마의 주교는 서방의 모든 지역에서 전체 교구의 수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이때부터 '폰티펙스 막시무스 는 교황의 명예 칭호가 되었는데, 간혹 다른 주교들도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4~5세기 동안에는 베드로좌에 착좌한 교황들을 나타내기 위한 특별한 칭호가 없었다. 다른 주교들도 '최고의 사제장' (Summus Pontifex) , '아버지' (Papa), '사도' (Apostolicus) , 그리스도의 대리자' (Vicarius Christi)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최초로 폰티펙스 막시무스 라는 칭호를 공식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이 칭호는 1400년경 교황 보니파시오 9세(1389~1404)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지만 공식 문서에서는 이 칭호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교황의 공식 칭호가 되지는 않았으며, 다만 르네상스 시대부터 교황만이 쓸 수 있는 배타적인 의미에서의 명예 칭호가 되었 다. (→ 교황 칭호 ; 테르툴리아노, 컨투스 셉티무스 플로렌스) ※ 참고문헌  Y. Congar, Titel, welche fiir den Papst verwendet werden, Concilium 11, 1975, pp. 538~544/ J. Martin, 《LThK》, 3rd ed., 8, p. 416/ G. Schwaiger, 《TRE》 25, pp. 647~6761 K. Bihlmeyer · H. Tuechle, Storia della Chiesa 1 : l'antichità christiana, Brescia, Morcelliana, 1st ed., 1989/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H. Kiing, 이종한 역,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분도출판사, 2002/ 一, 배국원 역, 《가톨릭 교회》, 을유문화사, 2003/ R. Kottje · B. Moeller, 이신건 역, 《에큐메니칼 교회사 1 : 고대 교회와 동방 교회》, 한국신학연구소, 1995. 〔吳允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