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영]Republic of Po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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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앞쪽)과 성 베드로 사도 성당.
유럽 중앙에 위치한 국가로, 공식 명칭은 폴란드 공화국(Rzeczpospolita Polska) . 폴란드의 국토는 남북으로 689km, 동서로 649km이고, 면적은 312,685k㎡로 한반도의 1.4배이다. 서쪽으로 독일, 남쪽으로 체크와 슬로바키아, 동쪽으로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러시아(칼리닌그라드 지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북쪽은 발트 해이다.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뒤섞여 소나기가 자주 오는 온화한 여름과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겨울, 그리고 짧은 봄과 가을 등 사계절이 있다. 국토 대부분은 비옥한 평야 지대이고, 남부 국경만이 수데티(Sudety)와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으로 되어 있다. 폴란드는 16개 주로 나누어져 있으며, 수도는 인구 170만 명의 바르샤바(Waszawa)이고, 이외에 우지(Łódź), 크라쿠프(Kraków) , 브로추아프(Wrocław), 포즈나인(Poznan) , 그다인스크(Gdansk) 슈체친(Szczecin) 루블린(Lublin) , 카토비체(Katowice) 등의 대도시가 있다. 인구 3,862만 명 (2004년 현재) 중 폴란드인이 97%이며, 슬라브어의 일종인 폴란드어가 공용어이다. 대통령제와 내각 책임제가 혼합되어 있으며, 총리가 행정을 책임지고 있어 내각 책임제 성격이 강하다. 입법부는 양원제로 상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9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도입한 시장 경제 체제하에 꾸준한 경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슬라브계 부족들이 기원전 2000년경에 비수아(Wisła) 강 유역에 정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서기 800년 이후 서슬라브계의 몇몇 부족이 연합하여 작은 국가를 이루었고, 이 국가들 중 하나인 피아스트(Piast) 왕조(960?~1370)가 현재의 포즈나인 지역을 통일하였는데 이 지역이 대(大)폴란드이다. 966년에 가톨릭이 전래되면서 폴란드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폴란드는 연이은 독일의 공격을 막아내며 국가 기반을 튼튼히 다졌고, 폴란드 남부에 거주하던 종족들이 연합하여 소(小)폴란드(Małopolska)를 이루었다. 야기에 우오(Jagiełło) 왕조라고도 불리는 야기엘로인스키(Jagiellonski) 왕조 시대(1386~1572)에 폴란드는 유럽의 강국이 되었으며, 특히 16세기에는 절정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후 왕을 선거로 뽑게 되면서 그 특권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만 챙기던 귀족 계층의 이기심으로 내적 갈등을 겪었고 연이은 전쟁, 즉 스웨덴, 러시아, 투르크, 카자크와의 전쟁으로 국력은 쇠약해졌다. 결국 18세기에는 주변의 강국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세 번에 걸쳐 분할되었고(1772, 1793, 1795), 결국 주권 국가로서의 폴란드는 사라졌다. 당시 음악가인 쇼팽(F. Chopin, 1810~1949)과 물리학자인 퀴리 부인(M. Curie, 1867~1934), 《쿼 바디스》(Quo Vadis?, 1895~1896)의 작가인 솅키에비치(H. Sienkiewicz, 1846~1916) 등이 '나라는 멸망하였으나, 폴란드 민족은 죽지 않았다' 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활약하였다. 이후 여러 번에 걸쳐 독립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후 비로소 123년 만에 나라를 되찾았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며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으로 나치 지배하에 있을 때, 나치는 폴란드의 소수 민족인 유대인들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1944~1945년 겨울에 소련군이 폴란드 지역에서 독일군을 몰아냈으며, 그로 인해 1945년 종전후 소련이 주도하는 소비에트 블록하에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도 자유를 되찾고자 여러 번에 걸쳐 반소민주화 봉기가 일어났다. 1978년 크라쿠프의 추기경인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ła)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된 이후, 바웬사(L. Wałesa, 1943~ )가 의장인 연대 자유 노조(Solidamosc)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파업과 함께 민주화 물결이 일어났다. 결국 1989년 원탁 회의 결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었고, 이후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하에서 꾸준한 경제 발전을 이루며 안정을 이루었다. 1999년 헝가리, 체크와 함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회원국이 되었으며 2004년 5월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였다. 〔가톨릭의 역사〕 전래와 발전 : 가톨릭 교회는 미에슈코 1세(963?~992)의 재임 시기인 966년에 시작되었다.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독일 군주와 주교들은 이교도인 폴란드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영토 정복에 나섰다. 하지만 폴란드는 자발적으로 로마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독일의 동방 정책에 대한 명분을 없앴다. 더구나 가톨릭 전래로 신흥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서유럽 가톨릭 국가들과 대등한 위상을 확보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968년 포즈나인에 첫 번째 교구가 설립되었으며, 1000년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어 그니에즈노(Gniezno)에 대교구가, 크라쿠프, 브로추아프, 코우오브제크(Kołobrzeg)에 주교좌가 설정되었다. 또한 미엥지체츠(Miedrzyrzecz)와 티니에츠(Tyniec)에 최초로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997년 현재의 리투아니아 지역에 거주하던 프루시족(Prusy) - '프로이센' 이란 명칭은 이 종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에 대한 선교 활동 중 순교한 프라하의 아달베르토(Adalbertus Pragensis, 956~997)가 폴란드 최초의 성인이 되었으며, 이후 폴란드의 수호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11~13세기의 성장 : 급속한 교회의 확장과 교계 제도의 설정, 교회와 국가 간의 밀접한 관계는 토착 민간 신앙 세력을 자극하여 1030~1040년대에 국가 권력과 가톨릭에 반대하는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나, 11세기 중반에 가톨릭 교회는 재건되었다. 왕들과 대귀족들의 영토 하사로 가톨릭 교회는 경제적인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11~13세기 동안 대토지의 소유자가 되었다. 당시 폴란드의 왕인 볼레수아프 2세(1058~1079)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에 맞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동맹 관계를 지속시키면서 폴란드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여러 교구와 대교구 및 수도원을 설립하여 발전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그의 부도덕한 생활을 비난한 크라쿠프의 주교 스타니슬라오(Stanislaus, 1030~1079)를 살해함으로써, 결국 왕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1세기 후반부터 주교좌 성당 참사회가 만들어졌고, 여러 수도회가 폴란드에 진출하였으며, 기사 수도회와 주교좌 성당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2세기 중반에 8개 교구가 새로이 설립되었으며, 12세기 말에는 폴란드 전 지역에 약 94개의 수도원, 800~1,000여 개의 본당, 1,400여 명의 성직자들이 있었다. 포즈나인 주변 지역의 방언들에 기초를 둔 폴란드어가 가톨릭 교회의 확산과 함께 체계를 갖추었다. 그래서 최초로 쓰여진 폴란드어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1130~1143)가 그니에즈노 대주교에게 보낸 칙서의 명단 목록이며, 기록으로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문장은 1270년에 작성된 문서의 인용문을 번역한 주석이다. 이 시기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민간 우상을 가톨릭 신앙으로 대체시키는 과정에서 토속 신앙적인 요소가 일부 도입되었다. 이것은 외적 종교 행위에 가장 많이 남았으며, 민간 신앙은 13세기까지 일반 대중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교회는 1364년 크라쿠프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야기엘로인스키 왕조 : 폴란드가 급속히 발전하던 13~15세기 동안, 당시까지 무인 지대로 남아 있던 지역에 대한 이주로 가톨릭 세력이 강화되었다. 교구가 확장되어 본당수가 1300년의 3,000여 개에서 1500년에 6,000여 개로 늘어났다. 야기엘로인스키 왕조의 왕들은 왕국 내의 토지를 소유한 귀족 계급들에게 점차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농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와 함께 가톨릭 교회도 국가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세속 사법권으로부터 성직자 계층이 벗어나는 사법 특권과 여러 가지 국가 세금으로부터 가톨릭 재산이 제외되는 경제 특권으로 나타났다.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성직자들도 14세기 중반까지 로마 교황청에 세금(Peter's pence)을 냈으며, 특권을 향유하던 성직자들은 13세기까지 교황에게 교회록의 첫해 수입을 바쳤다. 가톨릭 경제가 중앙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1180년 모든 교구가 재산 불가침의 특권을 얻은 것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특권으로 성직자들은 13세기에 독립된 사법권을 갖는 사회 계층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교회의 윤리를 재건하고 세속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효율적으로 성무 집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자는 그레고 리오 개혁이 교회 내에 전반적으로 퍼지던 것과 연관되었다. 폴란드에서 가톨릭 교회는 그니에즈노 대교구를 중심으로 지역 분할 공국 시대에 민족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통합체 역할을 하였다. 당시 귀족 중심의 지역 분할을 극복하는 데 스타니슬라오 성인 공경 전례와 그니에즈노 대주교인 시빈카(Jakub Swinka)의 활동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13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스타니슬라오 성인 공경은 사지가 잘린 성인의 시체가 다시 합쳐지는 기적이 일어나면 폴란드도 재통일된다는 전설로 일반 국민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1418년부터 폴란드의 수도 대주교가 '수석 주교' (primas)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1515년부터 교황 사절직도 겸임하였다. 그래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야기엘로인스키 왕조 시대부터, 왕이 부재하는 경우 '수석 주교' 가 임시 왕(interrex)직을 수행하였다. 수도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으며, 15세기 말 성직자 수는 전체 인구의 0.4%인 22,000여 명(이 중 15,000여 명이 교구 신부)에 이르렀다. 막강한 경제력, 높은 교육 수준, 다수의 특권으로 성직자 계층의 사회 신분이 급속히 상승하였으며, 고위 성직자들은 행정(후에 상원이 되는 왕실 고문단 및 수상으로 임명) 및 크라쿠프 대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교수단을 구성함으로써 지식인 계층을 형성하였다. 13세기부터 세워져 15세기에 널리 퍼진 주교좌 성당 부속 학교가 교육을 확장시키는 주축이 되었다. 근대 : 종교 개혁 시기에 가톨릭 교회는 일부 특권을 상실하였으나, 기존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많은 성직자들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으며, 그로 인해 성직자 수가 극도로 부족한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 폴란드 추기경에 의한 예수회의 도입, 반종교 개혁으로 가톨릭이 재건되면서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특히 스카르가(P. Skarga, 1536~1612)를 비롯한 예수회 회원들의 활동으로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시토회, 도미니코회, 가르멜회의 진출로 재건된 교회 조직은 폴란드의 국가 조직이 약해진 시기에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폴란드에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강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폴란드 내에서 우크라이나 비잔틴 전례를 따르는 동방 교회 대다수와의 일치였다. 이는 1596년 브제시치(Brzesc)에서 맺은 조약으로 탄생하였다. 반종교 개혁은 17~18세기 폴란드 교계를 주도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관습, 즉 바로크 문화, 사르마티즘(sarmatyzm), 폴란드 귀족주의를 만들어냈다. 반면 중등, 고등, 대학 교육은 대부분 예수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의 최고 지식인들 중에는 신부가 다수를 차지하였으며, 이들은 계몽주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772년에 신부수는 약 17,000명, 본당수는 5,100여 개였다. 1650년대에 폴란드 남동부의 변경 지대(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타타르인들과 카자흐족의 대규모 반란은겨우 진압되었지만, 1655년에 시작된 스웨덴의 침공으로 1660년에는 영토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 1772년 폴란드 영토의 4분의 1 이상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넘어갔고, 1793년 제2차 영토 분할이 이루어져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더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그리고 1795년 제3차 분할의 결과로 폴란드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당시 폴란드의 가톨릭 교회는 식민지 당국의 정책에 좌우되었다. 분할 삼국은 모두 교회에 대해 국가 권력이 우위를 가진다라는 정책을 실행하며, 최대한 교회 조직을 장악하려 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를 따르는 러시아와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프로이센의 점령 지역에서 가톨릭은 관용을 받았으나, 정치 권한과 주도적인 위치는 상실되었다. 프로이센 점령 지역(1772, 1796)과 러시아 점령 지역(1772~1796, 1842~1843)에서 가톨릭 교회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성직자들에게는 얼마간의 봉급이 주어졌다. 가톨릭이 주도적이던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얻었지만, 18세기 말 황제 요제프 2세(1765~1790)의 개혁으로 가톨릭 교회는 국가 권력에 종속되었다. 분할 삼국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협약(1797)으로 폴란드 점령 지역에 대한 종교 정책을 맺어, 각국의 점령지에 있는 가톨릭 교회들의 상호 연결 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리고 바르샤바에 주재하던 교황 사절단의 폐쇄(1796)로 교황청과의 접촉을 제한하였으며, 이후 교황청과의 접촉은 국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폴란드의 가톨릭 교회는 비밀리에 교황청과의 접촉을 계속하였다. 외국의 통치 : 분할 삼국은 정치 · 경제적 이유로, 특히 게르만-러시아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 내의 수도원을 몰수하였다. 이것은 수도원이 폴란드 문화를 보급하며 민족 · 애국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에서 특히 심하였다. 폴란드 가톨릭 교회, 특히 각 지역 교구와 수도원은 1794년 코시치우슈코(T. Kosciuszko, 1746~1817)의 봉기와 이후 연이은 봉기 시기에 민족 의식을 북돋우며 봉기군에 물질적인 원조를 하였다.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 내에 독자적인 정치 체제와 군사력을 갖추고 수립된 폴란드 왕국 시대(1815~1918)에 교회 조직이 재건되었으나, 남아 있던 많은 수도원의 재산 몰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1830 ~1831년 11월 봉기 때 신부들은 애국적인 행동을 권유하는 미사를 집전하였고, 일부 신부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봉기의 실패 후 많은 성직자들이 탄압을 받았고, 수도원이 대거 폐쇄되었다. 1860~1862년의 애국 시위와 1863~1864년의 1월 봉기에 가톨릭 교회가 적극적으로 가담하자, 러시아로부터 또다시 거센 탄압을 받았다. 당시 전체 성직자의 5% 정도가 탄압의 대상이 되어 30여 명이 처형당하고, 100여 명이 강제 노역형을 받았으며, 수백 명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1864년에는 남아 있던 거의 모든 수도원이 폐쇄되었고, 1865년에는 폴란드 왕국 내의 교회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었다. 1867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정교회에 폴란드 가톨릭 교회를 종속시키고 폴란드 민족 교회를 설립하여 가톨릭의 분열을 획책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주교들이 유배되어, 1870~1872년에 주교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폴란드 가톨릭은 자체 기구 조직과 성직자 임명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러시아 동화 정책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분할 삼국시기에 모든 지역에서 사용되던 폴란드 가톨릭에 대한 또 다른 억압은, 구역 분할을 조정(부유한 구역 폐쇄, 가난한 구역 설립, 일부 교구 폐쇄)하여 성직자 수의 성장을 제한(19세기 중반 폴란드 왕국 내에는 약 2,500명 정도의 신부가 있었는데, 1910년 신자수가 2.5배로 늘어난 반면 신부수는 2,900여 명에 불과하였음)한 것이다. 부족한 성직자를 대신하기 위해 신부복을 입지 않는 비밀 조직이 다수 조직되었고, 외국 망명지에서 폴란드 수도원이 다수 탄생하였다. 프로이센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비스마르크(0. von Bismarck, 1815~1898)가 문화 투쟁(Kulturkampf)으로 가톨릭 세력을 근절시키려 시도하였다. 1873~1875년의 법령으로 일반 대중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제한하였고, 교회가 지닌 학교 교육권을 박탈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1875~1877년에는 당시까지 남아 있던 수도원 대다수를 폐쇄하였고, 성직자 서품에 국가가 관여할 수 있는 법률을 도입하는 등, 교회가 국가 권력의 통제하에 놓였다. 이 모든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모든 곳에서 폴란드 가톨릭은 기존 세력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일반 대중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가톨릭 신앙에서 국가와 민족이 살아 있는 것을 본 폴란드인들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졌으며 신자수도 늘어났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폭정에 대항하여 생존을 위해 식민지 정권과 투쟁을 벌인 폴란드 가톨릭 교회는 1864년 이후 교육과 봉사 활동에 주력하면서 기존의 사회 운동 분야 활동을 제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러시아 식민지인 폴란드 영토에는 신부와 가톨릭 조직이 운영하던 500여 개의 교육 · 봉사 단체가 있었다.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러일 전쟁(1904~1905)과 1905년 발생한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러시아 점령지에서 부분적인 자유가 허용되었고, 가톨릭 교회의 사회 · 정치 활동이 가능해졌다. 반면 프로이센 점령지의 가톨릭 교회는 탄압에 대해 사회 · 문화 · 경제 운동으로 대응하였다. 비스마르크의 문화 투쟁 정책으로 일반 대중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증대 · 강화되었고, 교회는 실증주의 운동, 즉 교육 선전, 농민 조합 설립, 상호 금융 기관 설립을 추진하며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1918년에 바르샤바 대주교는 점령 분할지 세 곳 전체의 가톨릭 교회 수장이 되었다. 폴란드 공화국 : 1918년 독립을 되찾은 제2 공화국 시기(1918~1939)의 폴란드 가톨릭 교회는 1921년의 헌법 전문에 명시된 "로마 가톨릭은 모든 종교 중에서 최고 수위를 점한다"라는 문구로 대표된다. 1925년 2월 국가와 교황청 사이에 맺은 조약으로 가톨릭 교회의 광범위한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교구의 행정 구역이 새로이 정해지고, 교회 활동의 근간이 되는 경제 정책이 규정되어 국가는 매년 2,000만 주오디(zroty, 폴란드 화폐단위)를 지불하고, 교회는 24만 헥타르의 토지를 국가로부터 받았다. 1931년 가톨릭 신앙을 지닌 이들은 전체 인구의 65%였으며 5,000여 개의 본당이 있었고, 1937년에는 12,200여 명의 성직자를 보유하였다. 이 시기에 수도원, 특히 여자 수도원이 현저하게 발전하였다. 또한 가톨릭 평신도 단체의 조직과 확장이 특히 두드러져 농민과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계열 노동 조합의 도움으로 교회는 노동자 계층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이 외에도 가톨릭 지식인 운동이 매우 활발하였으며, 특히 대학생 가톨릭 단체의 규모가 컸다. 1926년 육군 원수 피우수트스키(J. Piłsudski, 1867~1935)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 이후, 우파 정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가톨릭 교회는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는 가톨릭 교회와 우파 정당의 연결을 끊으려 했던 당시 지배 정권이 교황청과의 조약을 철저히 준수하고 가톨릭 교회에 계속하여 양보하던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나치 독일 점령 시기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점령 기간 동안, 나치는 독일에 합병한 폴란드 지역(폴란드를 점령한 뒤 영토의 반은 합병하고, 나머지 영토에 독일 총독부를 세웠음)에서 가톨릭 교회에 대해 무자비한 정책을 폈다. 합병한 지역에서 성직자의 90%가 체포 또는 추방되었고(주교 2명 살해), 교회 조직과 기구는 해체되거나 독일화되었다. 또한 1944년까지 1,300여 개의 성당을 폐쇄하였으며(500여 개는 창고로 개조), 재산을 몰수하고 많은 재물을 약탈하였다. 반면 총독부 지구에서는 500여명의 신부와 수사들이 살해되었고, 성당 일부가 독일 사교 단체와 동방 교회에 넘겨졌다. 성직 후보자인 신학생 선발은 금지되었고, 종교 단체는 해체되었으며, 교회 재산이 몰수되었다. 1939년에는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도 대다수의 성당과 수도원이 폐쇄되거나 영화관, 창고, 무신론 선전장으로 개조되었으며, 신학교, 수도원 그리고 교회 기관이 운영하던 학교들도 폐쇄되었다. 수많은 신부들이 탄압을 받아 체포되었고, 신자들에게는 종교 포기가 강요되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공격한 후 장악한 폴란드 지역에서 나치는 총독부 지구에서와 유사한 가톨릭 탄압 정책을 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1,900여 명의 성직자(전체 성직자의 19%), 1982년에 시성된 콜베(M.M. Kolbe, 1894~1941) 신부를 포함한 850여 명의 수사와 289명의 수녀가 목숨을 잃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폴란드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폴란드는 동쪽의 넓은 영토를 소련에 빼앗겼지만, 독일로부터 서쪽의 상당한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가 된 폴란드에서 가톨릭 교회는 소련과의 관계 등 외적인 정치 상황에 따라 좌우되었다. 1945년 사회주의 정권이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하였으나, 1949년까지 가톨릭 교회는 독자적 행보를 계속하였다. 전쟁 중 파괴된 성당이 재건되었고, 각종 평신도의 활동 단체, 신학교, 수도원,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 · 양로원 · 학교 등이 커다란 방해 없이 유지되었으며, 수십 개에 달하는 가톨릭 신문도 등장하였다. 전후 국경선 변경, 강제 주민 이주, 유대인 학살 등으로 폴란드 내의 가톨릭 인구가 65%(1931)에서 90%(1952)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1949년부터 시작된 스탈린화 정책으로 가톨릭에 대한 정권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1949년 8월 5일 법령으로 수도원, 종교 집회, 가톨릭 단체의 활동 자유에 대한 제한 정책이 발표되었고, 9월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기 위한 공산 정권의 하수 기관으로, 애국 신부 운동이라 불리던 '자유와 민주를 위한 전투 협회 산하 신부위원회' 가 설립되어 1954년까지 전체 신부의 10%를 참여시켰다. 또한 교회와 수도원이 운영하던 병원이 국유화되었고, 1950년 1월에는 교회의 사회 봉사 단체인 카리타스(Caritas) 내에 감찰 기구가 도입되었으며, 3월에는 가톨릭 교회 소유의 부동산에 대한 국유화가 실시되었다. 1950년 4월 정부 대표단과 주교단 사이에 체결된 국가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 설정 협약-학교에서 종교 과목 유지, 가톨릭 학교 유지, 가톨릭 단체 단결권 인정, 언론과 출판의 자유 인정, 성인 공경과 성지 순례의 자유 인정-이후에도 탄압(1950년 3월 주교 한 명 체포)은 계속되었다. 1950년 4월 교회의 활동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종교청이 신설되었고, 그로 인해 1951년 4월에 교황이 임명한 5명의 주교들은 1956년 12월에야 자신의 교구에 취임할 수 있었다. 1953년 1월에는 정부가 크라쿠프 대교구 직원을 간첩 혐의로 법정에 세웠으며, 같은 해 2월에는 성직자 임명에 대한 동의 거부권과 신부직 박탈권을 국가 기관에 부여하는 법령이 발표되었다. 9월에 카츠마레크(Cz. Kaczmarek) 주교가 조작된 재판으로 12년형을 선고받았고, 9월 24일부터 바르샤바 대주교인 비슈인스키(S. Wyszynski)의 연금(軟禁)이 시작되었다. 12월, 공산 정부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처음에는 주교단에게, 이후에는 신부들에게 강요하였으며, 이 맹세를 거부한 성직자들은 성직 수행이 금지되었다. 1956년 정치 해빙기를 맞아 정부와 교회와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 10월 비슈인스키 대주교가 연금에서 풀려난 뒤, 1950년 4월의 협약을 근간으로 하는 두 번째 협약이 12월 8일 정부와 교회 간에 체결되었다. 이 협약으로 학교 내 종교 수업이 재개되었고, 1953년 2월 법령이 철회되었다. 1957년부터 비슈인스키 대주교의 주도로 폴란드 가톨릭 전래 1,000주년 기념 행사가 준비되었는데, 정부의 방해 공작 속에서도 1966년 무사히 거행되었다. 당시 쳉스토호바(Czestochowa)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검은 성모상의 복사본이 폴란드의 모든 성당을 방문하는 순례가 이루어졌다. 이후 정부와 교회 사이의 마찰-1958년 성직자의 군 입대 재개, 1960년 학교에서의 종교 과목 철폐,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이 독일 주교단에 폴란드-독일 민족 단합을 청하는 서신 발송-이 계속되었으나, 제한적인 활동 자유는 보장되었다. 성직자(1988년 성직자 수는 24,100여 명,이 중 교구 소속이 18,100여 명, 수도원 소속이 6,000여 명), 본당(1987년 8,300여 개), 신학교(1987년 51개)가 증가하였고, 4개 교구가 신설되면서 가톨릭 교회는 계속 성장하였다. 1978년 10월 16일 크라쿠프의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된 이후, 가톨릭 교회는 공산 정권에 대항한 재야 민주 세력, 특히 연대 자유 노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1984년 포피에우슈코(J. Popieruszko) 신부가 비밀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현 황〕 1989년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가톨릭 교회의 관계 설정 및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법안이 5월 17일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7월 17일에는 폴란드와 교황청의 외교 관계가 재개되면서 교황 사절이 폴란드에 상주하게 되었고, 11월 23일에는 종교청이 해체되었다. 1992년 3월 25일 폴란드 가톨릭 교회의 조직이 개혁되어 대교구 13(8개 신설), 교구 38, 대목구 1, 군종교구 1개로 개편되었으며, 1993년 7월 28일에는 교황청과 새로운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2004년 현재 폴란드에는 대교구 15, 교구 26, 군종교구 1, 동방 대목구 1, 본당 10,036개가 있으며, 추기경 6, 대주교 17, 주교 98, 신부 27,635(교구 소속 21,462, 수도회 소속 6,173), 종신 부제 8, 수사, 1,309, 수녀 23,954명이 있다. (← 가시미로 ; 솅키에비치, 헨리크 ; 스카르가, 피오트르 ; 스타니슬라오 ; 아달베르토, 프라하의 ; 요한 바오로 2세 ; 콜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 참고문헌 J. Tazbir, Historia Koscioła katolickiego w Polsce(1460~1795), Warszawa, 1966/ J. Kfczowski ed., Koscioł w Polsce, t. 1-2, Krakow, 1966~1969/ J. Dowiat, Historia Kosciota katolickiego w Polsce(do połowy XV wieku), Warszawa, 1968/ B. Kumor · Z. Obertynski eds., Historia Kosciota w Polsce, t. 1-2, Poznan, 1974~1979/ S. Litak, Struktura terytorialna Kosciołałaczynskiego w Polsce do 1772 roku, Lublin, 1980/ H. Dylagowa, Duchowienstwo katorickie wobec sprawy narodowej(1764-1864), Lublin, 1981/ J. Kłoczowski, Dzieje polskiego chrzescijanstwa, t. 1-2, Paryz, 1987~1988. 〔金容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