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카르포, 스미르나의 Polycarpus Smyrnensis(?~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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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카르포.

폴리카르포.


성인. 순교자. 사도 교부. 스미르나(Smyma)의 주교. 요한 복음사가의 제자. 축일은 2월 23일. 〔생 애〕 폴리카르포의 생애를 전해 주는 작품으로는 《폴리카르포의 생애》(Vita Polycarpi), 《폴리카르포 순교록》(Martyrium Polycarpi) ,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bius Caesariensis, 260/265?~339)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그리고 리용의 이레네오(Ireneus Lugdunensis, 130/140?~202?)가 쓴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 등이 있다. 이레네오는 《이단 논박》에서 자신의 스승인 폴리카르포에 관한 짧은 전기를 전한다(3, 3, 4). 그리고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에 나오는 이레네오가 쓴 편지 단편이 이 전기를 보충 · 설명해 준다(《교회사) 5, 20, 4-8 ; 24, 12-17). "나는 복된 폴리카르포가 앉았던 자리와 가르쳤던 자리, 드나들던 장소, 그의 모든 행동과 외모, 사람들 앞에서 행한 연설을 당신(플로리누스)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요한과 주님을 본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교제하고 그들의 말을 어떻게 인용하였으며, 그들에게서 주님과 그분의 기적과 가르침에 관하여 무엇을 들었는 지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폴리카르포는 로고스(말씀)의 삶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대로 모든 것을 성서와 일치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교회사》 5, 20, 6). 이레네오가 폴리카르포에 관하여 이와 같이 언급한 것에는 신학적인 의도도 숨어 있다. 즉 그는 로마의 모든 주교에게 내려오는 제도적인 계승(《이단 논박》 3, 3, 3)은 물론, 전통의 중요함도 알리고자 하였다. 이레네오와 테르툴리아노(Q.S.F. Tertullianus, 155?~ 230/240?)에 따르면, 폴리카르포는 사도들의 제자이며 사도들이 그를 스미르나 교회의 주교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폴리카르포 순교록》은 그를 "사도적 스승" 이라고 하였다. 아니체토(154/155-166?) 교황 시기에 폴리카르포는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의 많은 이단자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에 남아 있는, 이레네오가 교황 빅토르 1세(189~198/199?)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볼 수 있듯이, 폴리카르포는 부활 대축일의 날짜와 관련된 의견 차이 때문에 방문하였던 것이다. 당시 소아시아 교회는 서방의 관습과 달리, 사도 요한과 다른 사도들이 행한 전통에 따라 과월전 전날인 니산 달 14일에 부활절을 거행하였다. 부활절 날짜 조정 문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지만, 폴리카르포와 아니체토, 즉 로마 교회와 아시아 교회 사이의 공동체성이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레네오는 폴리카르포가 "매우 오래 살았으며 연로한 나이에 영광스러운····순교를 하였다"(《이단 논박》 3, 3,4)라고 전한다. 《폴리카르포 순교록》에서 폴리카르포는 "여든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9, 3)라고 고백한다. 이 진술에서 그의 나이는, 루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안나가 "남편과 일곱 해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어 여든네 해가 되도록··(하느님을) 섬겨 왔다" (2, 36-37)에 나온 햇수를 그녀의 나이로 해석하듯이, 적어도 86세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폴리카르포 순교록》은 그의 정확한 사망 일자를 전한다. "복된 폴리카르포는, 트랄레스의 필립투스가 대사제이고 스타티우스 콰드라투스(Statius Quadratus)가 지방 총독(proconsul)으로 있을 때··크산티쿠스 달 둘째날, 3월 초하루의 7일 전, 대안식일 오후 2시경에 순교하였습니다"(21). 이 증언에서의 '대안식일' 을, 어떤 학자들은 유대교의 해방절 축일로 이해하고 요한 복음서 19장 31절을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 로르도르프(W. Rordorf)는 대안식일이 문제가 된 연도의 토요일이고, 이교인과 유대인의 축제일(2월 23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 피오니오(Pionius)도 '대안식일' 에 처형되었으며(《피오니오 행전》 3, 6), 락탄시오(L.C.F. Lactantius, 250?~321?)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303년 2월 23일에 시작하였다(《박해자들의 최후》 12, 1)라고 전해 주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한편 순교 연도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워딩턴(W.H. Waddington)과 램지(W.M. Ramsay)는 스타티우스 과드라투스의 연대기에 근거하여 155년 2월 23일 또는 156년 2월 22일로 추론하였다. 그러나 이 연도는, 폴리카르포의 죽음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재위 7년(167)으로 본 에우세비오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교회사) 4, 15, 1). 이에 근거하여 마루(H.-I. Marrou)와 브랭다무르(P. Bind'Amour)는 167년 2월 23일로 추정하였고, 그레구아르(H. Grégoire)와 오르겔(P. Orgels)은 이보다 더 늦은 177년으로 제안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가설은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폴리카르포의 순교 연도를 155년 또는 156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데, 이에 대한 근거와 167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논박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폴리카르포 순교록》의 문헌 비평적 · 양식 비평적 연구를 통해 에우세비오가 전하는 본문이 가장 오래된 사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둘째, 에우세비오는 사건들의 시대 배열을 잘못 기록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로마의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종종 혼동하며, 폴리카르포의 순교 연도와 유스티노(Justinus, 100/110?~165)의 순교 연도를 혼동하였다. 게다가 《폴리카르포 순교록》과 《폴리카르포의 생애》를 동시대의 작품으로 잘못 알고 있다. 셋째, 폴리카르포의 사망 연도가 늦어질수록 스미르나 주교가 주님의 여러 사도들을 알았다는 이레네오의 증언은 난관에 부딪힌다. 넷째, 스타티우스 과드라투스가 142년에 집정관(consul)이었면, 그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기에 집정관에서 지방 총독으로 승진한 155년경까지 걸린 기간인 13년은 일반 승진 기간과 일치한다. 사망 연도 문제 외에도 폴리카르포의 생애에 관해서는 확증할 수 없는 여러 문제가 남아 있다. 우선 '폴리카르포의 스승인 요한은, 사도 요한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로 요한 중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로마의 아니체토가 재임 몇 년에 폴리카르포를 만났을까?' 하는 것이고, 셋째는 '폴리카르포의 순교 연도를 밝히는데 중요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의 순교 연도를 105년과 135년 사이에서 어디에 가깝다고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작품과 사상〕 이레네오는 폴리카르포가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고 전한다(에우세비오, 《교회사》 5, 20, 3). 그러나 남아 있는 유일한 서간은 14장으로 된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뿐이다. 이 편지의 본문은 9장까지는 그리스어로, 그 나머지는 라틴어 번역과 에우세비오의 인용으로 전해진다(에우세비오, 《교회사》 3, 36, 14-15). 17세기부터 이 편지의 일부 내용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 편지에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그의 동행자들이 이미 순교하였다고, 즉 "이냐시오나 조시모와 루포··그들에게는 주님 곁에 그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라고 언급되어 있다(9, 1-2). 이와 달리 13장에서는 수신인들에게 "이냐시오와 그의 동행자들에 대해 여러분이 더 정확한 소식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알려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이 모순에 대해 1936년 해리슨(P.N. Harrison)은 폴리카르포의 편지는 본래 두 통이었으며 뒤에 합본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3장(과 아마도 14장)이 폴리카르포의 첫째 편지이고, 1~12장은 둘째 편지이다. 그는 첫째 편지를, 필립비인들이 폴리카르포에게 이냐시오의 편지를 베껴서 보내 달라고 요청한 편지의 첨서로 보았다. 따라서 첫째 편지는 이냐시오가 로마로 압송되던 당시인 107년에, 둘째 편지는 135년 또는 137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폴리카르포는 편지에서 신앙의 규범이자 처음부터 전승되어 온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듯이, 자신의 정체성을 무엇보다 "사도 전승을 지키는 사람" 으로 밝힌다. 그가 항상 사도들에게 배운 것과 교회가 선포한 것을 가르쳤다는 이레네오의 증언이 이 정체성을 뒷받침한다. 폴리카르포가 중요하게 여긴 전승은 구약성서와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가르침이다(3, 2 : 6, 3 : 7, 2). 그리고 이 가르침은 이냐시오의 편지들과 교황 글레멘스 1세(90/92~101?)의 편지에도 나타나는 "사도적 정신"이다. 폴리카르포의 편지가 신약성서, 글레멘스의 편지, 이냐시오의 편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스미르나의 주교가 그 이전의 그리스도교 문헌을 되새기면서 작품을 구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폴리카르포는 구약성서를 잘 알지 못하였지만(12, 1) 당시 그리스도교 시대에 통용되던 구약의 도덕적 가르침(2, 1 : 6, 1 이하 : 10, 2 ; 12, 1)을 존중하였으며, 사도 전승을 중시하여 신약성서의 많은 구절을 인용하였다. 그는 마태오 복음서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루가 복음서, 사도 행전을 자주 언급하며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사목 서간, 베드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도 인용하였다. 폴리카르포는 편지 3장 1절에서 저술 동기를 정당화 하면서 주제를 명확히 밝혔다. "의로움에 관하여 이 편지를 씁니다." 의로움에 바탕을 둔 이 편지가 지향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북돋는 윤리와 도덕에 있다. 그는 바오로처럼 행실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고 하였다(1, 3 ; 11, 4).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 은총은 확실히 예정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앙을 믿음뿐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른 행동으로 이해하였다. 즉 행업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덕을 쌓으려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를 돕는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에, 폴리카르포는 은총 안에 머물기를 기원하면서 마침 인사로 편지를 끝맺는다. 이 편지에서 강조한 주요 악(惡)은 금전욕, 탐욕, 중상, 거짓 증언과 불의이다. 일례로 4장에는 장로 발렌스(Valens)와 그의 아내가 금전욕을 뿌리치지 못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러한 악을 극복하기 위해 폴리카르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인이 지녀야 할 도덕과 윤리의 과제로 단호히 권고한다. 한편 유일하게 언급되는 이단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부정하는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us)이다( 1). 폴리카르포는 사도적 전승과 상반되는 그리스도 가현설을 강한 어조로 경고한다(6, 3-7, 2).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와 십자가가 구원과 생명이기에, 이단자들에 맞서 믿음에 충실히 머물기를 권고한 다(1, 2 : 2, 1 : 6, 3). 편지의 인사말 가운데 "필립비에 나그네로 사는 하느님의 교회"는 하느님과 주님이 선택하신 이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여기서 "하느님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낯선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는 교회가 아직은 나그네 신세로완전하지 못하며, 하느님 나라인 것은 아니고 다만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교회의 표상으로 제시하는 바오로의 가르침은 편지 11장 4절에서 암시된다. 공동체는 믿음을 통하여 주님의 지체가 된다. 사람 몸에서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룬다. 이렇듯 교회는 선인들과 악인들로 구성된 성도들의 공동체인 것이다(6, 1 참조) . 2세기 중엽까지도 스미르나의 공동체에서 주교직과 장로직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폴리카르포의 편지는 스미르나의 주교직이 사목 서간에 나타나는 주교직의 발전 단계와 동일한 단계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폴리카르포가 주교였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이냐시오, <막네시아 교회에 보낸 편지> 15 : <에페소 교회에 보낸 편지> 21, 1 ;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편지> 8, 1-9, 1 ; 12, 2 ; 《폴리카르포 순교록》 16, 2 : 이레네오, 《이단 논박》 3, 3, 4). 폴리카르포가 편지 머리말에서 왜 주교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주교직이 그때까지만 해도 공동체에서 강조되지 않았고, 이 사실은 이냐시오가 폴리카르포에게 보낸 편지의 머리말에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또한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필립비 공동체의 주교도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시소아시아와 필립비는 합의 주교단에서 단일 주교직으로 발전하지 않은 단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영 향〕 바우어(W. Bauer)는 폴리카르포를 교회 가르침에 일치하고, 단일 주교직을 발전시키며, 동방에서 로마 교회의 주장과 관련하여 교회 전통을 옹호한 투사로 묘사하였다. 반면 스트레커(G. Strecker)는 이를 신랄하게비판하면서 폴리카르포의 가치는 순교자 공경을 드높인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폴리카르포 순교록》은 스미르나 공동체가 프리기아(Phrygia) 지방의 필로멜리움 공동체에 보낸 편지이다. 이 순교 전기(acta martyrum)는 새로운 문학 유형을 시작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저자는 폴리카르포의 순교를 목격한 마르치온(Marcion, 또는 마르코스, 마르키아노스)이라는 인물이다(《폴리카르포 순교록》 20). 이 작품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방법, 즉 위(僞)피오니오 전집과 에우세비오의 《교회사》(4, 15, 3-45)로 전승된다. 에우세비오의 작품에는 1~7장이 부분적으로 요약되어 있는데, 캄펜하우젠(H. von Campehausen)은 이를 개작 또는 삽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순교록의 편집 일치는 최근의 연구(Dehandschutter, Saxer, Buschmann)에서 더이상 의심받지 않는다. 폴리카르포가 처형될 때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스미르나의 원형 경기장에서 여러 가지 고문을 받으며 순교하였다. 이들이 끝까지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를 통해 영원한 벌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2, 4), 주님의 도움으로 고통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설명된다(2, 2-3). 폴리카르포의 경우에는 특별한 조력이 덧붙여진다. 경기장에 있던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들었듯이 하늘의 소리가 그를 격려하고(9, 1), 장작더미의 불꽃이 그의 몸을 태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15, 2). 저자는 폴리카르포가 장작더미 위에서 하느님께 바친 감사 기도(14)를 고대 교회의 성찬 기도와 관련하여 기술하였다. 폴리카르포는 이 문맥에서 자신을 "마음에 드는 살진 희생 제물"(14, 2)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죽음은 불멸의 월계관(17, 1 : 19, 2)이요 상(17, 1)이며, 동시에 불의한 세력에 맞선 승리(19, 2)이다. 폴리카르포가 죽은 뒤 많은 신자들이 그의 몸에 동참하기 위해 그의 시신을 가져가길 바랐다(17, 1). 그의 유골들은 신자들이 순교의 날을 기념할 수 있도록, 적당한 곳에 매장되었다(18, 2-3). 이는 순교자 유해에 관한 전례적 공경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다른 순교자들에 대한 유사한 공경(2, 1-3, 2)이 언급되지 않는 것도 눈에 띈다. 또한 순교자 공경에서 중재 청원이 아직은 화제가 되지 않고 있다(19, 2). 이는 테르툴리아노가 《순교자론》(Ad martyras, 197)의 1장 6절에서 증언하듯이, 이때는 고백자가 아직도 중재 역할을 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폴리카르포의 순교를 완전하고 복음에 따른 본보기로 내세웠으며, 순교자를 순교 신학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는 주님의 수난과 순교자의 수난이 유사함을 의도적으로 연결시키려 하였다(《폴리카르포 순교록》 1-2). 폴리카르포는 주님처럼 체포를 기다리고, 유다와 비교된 가까운 인물에게 배반당하며(6, 1-2), 헤로데라는 관리에 의해 체포되어 나귀를 타고 도시로 이송된다(8, 1). 아울러 주님의 수난과의 차이점, 즉 순교자의 사망 날짜와 시간(21, 1), 장작더미 위에서 못박히는 것의 거부(13, 3), 단도로 단번에 죽이는 행위(16, 1)도 강조된다. 이러한 차이도 저자의 의도적인 구성일 것이다. 작품을 복음에 따라 저술하려는 의도는 《폴리카르포 순교록》의 핵심 요소이다. 이와 상반되는 요소는 하느님의 뜻(2, 1 ; 7, 1)을 거스르는 자발적인 순교 열망(4장), 자신만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1, 2), 순교에 직면하여 배교하는 것(4장) 등이다. 순교록에 나타난 순교 정신은 주님께서 취하신 태도나 행동을 넘어서지 말고 광신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복음이 이와 같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4장).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발적으로 나서는 순교를 금하였으며, 이를 따르지 않은 광신자들에게는 순교자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다(4장). 오히려 《폴리카르포 순교록》의 순교자 개념은 말과 행위의 일치를 요구하는 이냐시오의 작품처럼 '주님의 제자' 개념과 '본받음' 개념을 결합하였다. 또한 순교자 개념의 발전 과정에서 나오는 '피의 증인' 을 순교론의 의미로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는 순교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말-증인'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행위의 증인이요 피의 증인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즉 순교자는 그리스도의 제자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으로서 신앙을 고백하고 믿음에 관한 말씀들을 실천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 그리스도 가현설 ; 부활 축일 논쟁 ; 사도 교부 : 순교 ; 순교 전기 ; 스미르나 ; 아니체토 ; 이나시오, 안티오키아의 ; 이레네오, 리용의) ※ 참고문헌  J.B. Bauer, Die Polykarpbriefe, 《KAV》 5, Göttingen, 1991/ 一, 《LThK》 8, 1999, pp. 404~405/ G. Buschmann, Das Martyrium des Polycarp, (KAV) 6, Göttingen, 1998/ D. van Damme,《TRE》 27, pp. 25~281 H.R. 드롭너, 하성수 역, 《교부학》, 분도출판사, 2001/ 하성수 역주, 《폴리카르푸스 : 편지와 순교록》, 교부 문헌 총서 12, 분도출판사, 2000.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