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다

[독]Fu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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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다의 장크트미하엘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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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다의 장크트미하엘 경당.


중부 독일 헤센(Hessen) 주의 풀다 강 우측 편에 있는도시. 풀다 교구는 파더보른(Paderbom) 관구에 속하며, 수호성인은 보니파시오(Bonifatius, 675?~754)이다. 강 우측편의 본당들은 뷔르츠부르크(Wurzburg) 교구에 속하고,좌측 편의 본당들은 마인츠(Mainz) 교구 관할이다. 풀다는 719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2세(715~731)로부터 라인 강 동편의 지역 선교 위임을 받고 파견된 보니파시오의 활동에 의해 복음화되었고, 이후 선교의 중심지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도시는 744년 3월 12일에 보니파시오의 제자 스투르미(Sturmi)에 의해 설립된 독일 최고(最古)의 수도원인 풀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풀다 수도원은 교황 자카리아(741~752)의 허락으로 면속 수도원이 되어 교황청에 직속되었다. 그러나 교구장의 재치권으로부터의 면제는 처음부터 지역이 아니라 수도원과 그 분원들에만 적용되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의 아빠스들은 정치권과의 연계를 통해 수도원에 속한전체 지역을 맡는 사목적 재치권(jurisdicio spiritualis)을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790년경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819년에 봉헌된 보니파시오의 무덤 위에 세워진 거룩한구세주 대성전은 서양 최초로 양쪽 가대(歌臺, double-choir)가 설치된 성당으로 유명하다. 또한 수도원의 묘지위에 822년 세워진 장크트미하엘(Sankt Mihael) 경당은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풀다는 9세기경 카롤링거 왕조(750~887)의 그리스도교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종교 개혁기인 1604년에 데른바흐(B. von Dernbach,1570~1606) 아빠스부터 이후의 아빠스들은 더욱 준(準,quasi)주교적 재치권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대신학교를 설치하고 교구 시노드를 개최하였으며, 사목 순시를 하고 총대리를 임명하였다. 1727년에 아빠스는 클로드(S. vonClodh) 신부를 풀다의 보좌 주교로 받아들였고, 1752년10월 5일 풀다는 교황 직속의 교구가 되어 수도승들의총회는 교구 총회가 되었다. 1752년 11월 27일 제후인아빠스 부섹(A. von Buseck)이 풀다의 첫 주교로 임명되었다. 1755년에 풀다의 6개 지구(deanery)와 3개 대학교회들이 마인츠 관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수도원과 분원들은 면속구로 남았다. 교구와 아빠스좌 수도원은1803년에 세속화되었다. 1821년 오베르하인(Oberr-hein) 관구가 설정되었을 때, 풀다 교구의 관할 지역이새로 결정되어 풀다 교구는 쿠르헤센(Kurhessen, Hessen-Kassel)과 작센-바이마르(Sachsen-Weimar)의 일부(1857년부터 전부)로 구성되었다. 1823년에 켐프(F. vonKempf) 신부가 쿠르헤센의 대목구장(Vicarius Apostoli-cus)이 되었다. 많은 토의 후에 카셀른(Kasseln)의 주임신부인 리게르(J.A. Rieger)가 풀다의 주교로 임명되었다.파프(J.L. Pfaff, 1832~1848) 주교는 가톨릭 초등학교 제도, 학교 교사 양성과 디아스포라 사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37년에 선교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쾨트(C.F.Kött, 1848~1873) 주교 때 여러 가톨릭 단체들의 활동이발전하였으며, 1866년 오르브(Orb)와 게르스펠트(Gers-feld) 지역이 풀다 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1867년 이래풀다에 있는 주교 회의는 독일 신자들의 생활에 있어서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쾨트는 문화 투쟁(Kulturkampf)때 프로이센의 교회에 대한 법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그로 인해 1873~1881년까지 8년간 주교좌가 공석이 되었다. 1881년에 코프(G. von Kopp)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여러 개의 라틴어 학교를 설립하였고, 1886년 대신학교를 재설립하였다. 1884년에는 교회 신문인<보니파시우스보테>(Bonifatiusbote)가 창간되었다. 바일란트(J. Weyland, 1887~1894) 주교 때에는 교구 내 수도회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콤프(G.I. Komp, 1894~1898)와 엔 데르트(A. Endert, 1898~1906) 주교는 새로운 본당을 설립하고 사목처를 신설하였다. 슈미트(J.D. Schmitt, 1906~1939) 주교 때에는 여러 면에서 교회 활동이 발전하였다. 1929년 6월 24일에 체결된 프로이센의 정교 조약으로 풀다 교구는 파더보른 관구에 속하게 되었고, 파더보른으로부터 에르푸르트(Erfur) 지구와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 지역을 관할로 받았다. 이때 풀다 교구는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 시에 속한 부분을 림부르크(Limburg) 교구에 넘겼고, 샤움부르크-리(Schaumburg-Lippe) 백작령을 힐데스하임(Hildesheim)교구에 넘겼다. 디에츠(J. Dietz, 1939~1958)와 볼테(A.Bolte, 1959~1974) 주교 때 동독에서 넘어오는 많은 가톨릭 피난민들 때문에, 그들을 위한 사목자들을 배치하였다. 1953년 교구의 동부 지역에 에르푸르트 총대리구가설치되었다. 쉬크(E. Schick, 1974~1982) 주교 때 신학교가 종합 대학교의 신학과가 되었다. 1994년 튀링겐(Thuringen) 지방이 풀다 교구에서 벗어나 에르푸르트 교구가 되었다. 2004년 현재 풀다 교구의 관할 총면적은1만k㎡이며, 250개의 본당에 가톨릭 신자 441,663명(14%)이 있다. 그리고 신부 410(교구 소속 325, 수도회 소속 85), 종신 부제 29, 수사 134, 수녀 400명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교구 소속의 교육 기관은 133개이고, 자선 기관은 173개이다. (→ 독일 ; 보니파시오) ※ 참고문헌  W. Kathrein, 《LThK》 4, pp. 218~220/ J. Semmler,《NCE》 6, 2003, pp. 21~23/ Annuario Pontificio 2004, Città delVaticano, 2004, p. 231/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김성태, 《세계 교회사 I》, 바오로딸, 1995. 〔吳允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