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수녀회 - 修女會

[프]La Société des Soeurs du Prado · [영]Sisters of Pr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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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리용 시 뒤물랭(현 슈브리에) 거리에 있는 프라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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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리용 시 뒤물랭(현 슈브리에) 거리에 있는 프라도 성당.


프라도 사제회를 창설한 앙투안 슈브리에(Antoine Chev-rier, 1826~1878) 신부가 육화 신비 안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모범 삼아 일생 동안 가난하게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1860년 12월 프랑스 리용(Lym)에서 사제회와 함께설립한 수녀회. 현재 본원은 리용에 있고, 한국 지부는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450-5번지에 있다. [수녀회의 설립과 발전] 슈브리에 신부가 본당을 떠나'아기 예수 마을' (La Cité de I'Enfant Jésus)의 지도 신부로있을 때, 마을의 책임자인 평신도 카미유 랑보(CamileRambaud)는 기존 수도회에 소속된 수녀가 아니면서 마을의 설립 취지에 따라 마을 운영을 도울 협조자를 필요로하였다. 이에 슈브리에 신부는 '경로 수녀회' (Les PetitesSoeurs des Pauvres)의 입회를 준비하면서 자신에게 고해성사를 받던 마리 부아송(Maris Boisson)에게 함께 일할것을 권유하였고, 1858년 9월 그녀가 슈브리에 신부를도와 일을 시작함에 따라 프라도 수녀회 설립의 싹이 피어났다. 교리 교사의 양성과 가난한 사제의 양성이라는슈브리에 신부의 이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마리는, 1860년 12월 10일 슈브리에 신부가 아기 예수 마을을 떠나 프라도 집을 마련하자, 그를 도와 시기를 놓친어린이들의 첫 영성체 교육과 그들에게 필요한 인성 교육 및 종교 교육을 하였다. 이즈음 슈브리에 신부의 활동과 성덕이 알려져 프랑스 전역에서 지원자들이 찾아와마리 수녀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슈브리에 신부는 프라도의 사업을 위한 수녀회의 조직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수녀들은 점차 활동 범위를 지방으로 확대하였고, 설립자와 마리 수녀가 선종할 때까지 청소년 재교육과 정신지체아 사업을 꾸준히 시행하였다. 수녀회는 슈브리에 신부가 선종한 후인 1879년 10월 잠시 혼란을 겪었으나,점차 기존의 수도회와는 다른 사도직 수도회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설립자의 뜻을 충실히 살아가는 수녀회로서의 기반을 갖추었으며, 마침내 1925년 프라도 사제회로부터 독립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인가를 얻었다. 1936년 전국적 규모의 노동자 파업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통해서 프랑스 사회와 교회는 커다란 발전과 변혁을 경험하였고, 프라도회 또한 이에 영향을 받 아 많은 변화를 겪었다. 프라도의 청소년과 어린이 담당교육 센터가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젊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기숙사 운영과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가톨릭 액션 단체 지원 등으로 수녀회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다. 교회가 사제들의 교회 밖에서의 노동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한 1959년 이후 액션 단체 지도자들이 수녀들에게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일해 줄 것을 요청하자,기도와 공동체 생활, 사복 착용의 필요성 등 여러 가지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1961년 3월 교황청으로부터 사복 차림을 허가받은 프라도 수녀들은 가난한 노동자들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갈 수 있게 되었고,그 속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를 더욱 깊이체험함으로써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알리게되었다. 수녀회는 1958년 모로코 진출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 칠레 · 스페인 · 알제리 · 인도 · 한국 · 방글라데시 · 콜롬비아 · 마다가스카르에 차례로 진출하였다(현재이탈리아와 방글라데시, 북아프리카 공동체는 폐원되었음) .2004년 현재 300여 명의 수녀들이 세계 각지의 지역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사도직 안에서 동일한프라도의 삶을 살고 있다. [영 성] 프라도 수녀회 영성의 핵심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인 양 (중히)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드러나신"(필립 2, 6-7)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사는 것이다. 즉 '구유-십자가-감실' 안에 드러난 주님의 생애를 재현하는 삶으로, 가난하고 겸손하게 구유에서 태어나고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며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양식으로 스스로를 내어 주는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본받아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그들 중 하나가 되어 복음적 삶을 살아간다. 슈브리에 신부는 이 같은 영성을 살기 위해 무엇보다도 복음 공부의 중요성을 회원들에게 강조하였다. 자신이 전적으로그리스도에게만 속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이 첫 번째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진출과 사도직 활동]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는 급격한 산업화와 더불어 발생한 노동 문제가 커다란사회 문제로 부각되면서, 다양한 노동 운동이 일어났다.이때 가톨릭 노동 청년회 여성 회원들 중에는 노동 현장에서 수도복을 걸치지 않은 채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수도 생활을 갈망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적합한 수도회를 찾을 수 없었고, 다만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격려로 별도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있었다. 당시 세상 속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김 추기경은 노동 사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관한 공부를 시키기 위해 신학생들을 프랑스로 보냈다. 그 후 추기경은 그들을 통해 노동 청년회소속 여성 노동자들이 바라는 수도 생활이 프라도 수녀회의 삶과 부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시 수녀회의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75년 8월 28일 2명의 수녀 안 데레사와 도 모니카가 한국에 도착하였고,1977년 4월 28일 청원기를 시작으로 프라도 수녀회는서서히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프라도 수녀들은 어떤 특정한 형태의 사도직에 매이지않고 파견된 공동체가 사는 지역과 장소에 따라 또한 수녀회가 가진 가능성에 따라 복음화 사업을 위해 가장 우선적인 것을 선택한다. "나는 그들 가운데로 가서 그들의 삶을 살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신앙을 줄 것이다" 라고 한 설립자의 말에 따라 파견된 지역 사람들의생활 조건, 그들의 어려움, 고통, 기쁨과 갈망을 함께 나누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도록 하는 데온힘을 기울인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도 사도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가난한 사도 양성에 전념하며, 교회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그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도록 돕는다. 초기 프라도회 수녀들은 당시 사회와 교회의 요청에 따라 노동계의 복음화를 위한 노동 사목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였고, 가톨릭 사도직 단체(CWM, JOC)들과 함께 노동자들의 애환과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였다. 첫 분원인 문래동 공동체가1980년 4월 개원하여 1984년 6월에 소규모 공장이 밀집된 성수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85년 인천교구에 공동체를 개원하면서 좀 더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였다. 또한 빠른 경제 성장으로 인한 사회의 급속한 변화 로 서민 가정의 맞벌이 부부가 증가함에 따라 방치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사도직 운동을 시작하고,부평과 서울 지역 노동 사목회의 요청으로 산업 재해 환자 방문을 전개하였다. 회원들은 이들에 대한 법률 상담과 함께 정신적 · 영적 동반을 통해 불의의 사고로 삶의상실감에 빠진 그들이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살도록 돕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노동자 계층의 업종 전환과3D 기피 현상으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 결과 불법으로 입국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증가하였고, 회원들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서울대교구내 명동 외국인 상담소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3년부터는 한국의 노동 사목 안에 외국인 노동자 사목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전적인 투신을 계속하고 있다. 1992년에는 농촌에 남아 있는 농민들과 연대하고, 도심에 사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피정 혹은 휴식을 위한 쉼터를 제공할 목적으로 대전교구 공주에 시골 공동체를 개원하여농민들과 함께 논과 밭, 비닐 하우스에서 품팔이를 하며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에 따라사도직의 요청이 다양해지자 1994년부터는 동네의 한가족, 독거 노인, 장애인, 환자들을 방문하여 돌보는 재가 복지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알코올 중독자 가족 친목 모임과 지역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 공부 동반, 본당 내의 교리 교육 등 거주 지역과 교회의 필요에기꺼이 응답하고 있다. 2001년 6월 인천 공동체는 가난한 지역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공부방을 열게 되었고, 이와 함께 서울역 부근쪽방 동네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도 운영하고 있다. 그 외직장 사도직으로 노동 현장, 노인 식당 등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가서 직접 일하며 동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고, 사람들 안에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성령의 증인과 제자로서의 삶을 충실히살아가고 있다. 2004년 현재 종신 서원자 10, 유기 서원자 1명 등 총11명의 회원이 있으며, 총 3개 교구(서울대교구, 인천교구,대전교구)에 4개의 공동체가 있다. (→ 프라도 사제회 ; 프라도 여성 재속회) ※ 참고문헌  프라도회, 《슈브리에 신부의 생애》, 가톨릭 출판사, 1979/ 장 프랑수아 식스, 프라도 사제회 역, 《슈브리에 신부의생애》, 가톨릭출판사, 1993/ 프라도 이브 뮈세 신부 편, 프라도회역, 《슈브리에 신부의 영적 글》, 가톨릭출판사, 1996/ 《프라도 수녀회 역사》 I · Ⅱ, 프라도 수녀회/ 《복자 슈브리에 시복 조서》, 프라도회/ <수녀회 회칙>. [프라도 수녀회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