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젤린, 조반니 바티스타 Franzelin, Giovanni Battista(1816~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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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신학자. 예수회 회원.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19세기의로마 학파(Scuola Romana)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 [생애와 활동] 프란젤린은 1816년 4월 15일 이탈리아 티롤(Tirol) 지방의 알데인(Aldein)에서 태어났다. 볼차노(Bolzano) 시에서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1834년에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에있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학문에 대한 집념이 강하였으며 사교적이지는 않았지만 교수들과 동료 학생들로부터 사랑과 호감을 받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성서를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읽을 정도로 박식하였다. 자신의 영성 증진을 위해 금욕을 수련기 때부터 지켰는데, 사순 시기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고 때로는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공부가 끝난 뒤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에서 교리와 철학, 수사학을 가르쳤고, 1845년에는 로마 신학원(Collegio Romano, 현 로마의 그레고리안대학교)에 입학하여 로마 학파를 대표하는 페로네(G. Per-rone, 1794~1876), , 파살리아(C. Passaglia, 1812~1887), 슈라더(C. Schrader, 1820~1875) 등 유명한 교수들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이때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조교 역할도 겸하였으며, '천사의 성' (Castello degli Angeli)에 감금된 죄수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848년 이탈리아에서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루뱅(Louvain)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마쳤으며 지칠 줄 모르는 학문적 열정과 개방된 정신으로 여러 학문적 난관을 잘 이겨냈다. 1849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르 퓌(Le Puy) 근처의 발(Vas)에서 예수회 신학생들에게 히브리어와 성서를 가르쳤다. 1850년 4월 나폴리 왕국의 가에타(Gaeta)로 피신 했던 교황비오 9세(1846~1878)가 로마로 돌아와 예수회 신부들에게 로마 신학원의 문을 다시 열 수 있다고 허락하자, 프란젤린도 로마로 돌아와 이 학교에서 아랍어, 시리아어등 동방 언어와 교의 신학을 가르쳤다. 1853년부터 3년 간 독일 기숙사에서 고해 신부 겸 신학생 학문 담당 주임으로 활동하였고, 신학과 성서 입문을 복습시키는 책임장이 되었다. 1857년부터는 그레고리안 대학교의 정식교의 신학 교수가 되어, 이후 19년 동안 이 학교에서 가르쳤다. 1868년 발간된 그의 책 <신적 전승과 성서》(DeDivina Traditione et Scriptura)는 프로테스탄트교세가 강한독일과 영국에서도 번역되었다. 능숙한 라틴어와 철학을기초로 프란젤린은 1876년까지 라틴어로 된 수많은 신학서적들을 출판하였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말씀의 육화론》(De Verbo incarmato, 1867), 《일반 성사론》(De Sacra-mentis in genere, 1868), 《성사적이고 희생적인 성체성사론》(De S.S. Eucharistiae Sacramento et Sacrificio, 1868), 《인격에 따라 삼위이신 신론》(De Deo Trino secundum per-sonas, 1869), 《본성에 따라 한 분이신 신론》(De Deo Unosecundum naturam, 1870), 《그리스도의 교회론》(De Eccle-sia Christi. Opus posthumum brevi praemisso de eiusdem vitacommentario, 1887) 등이 있다. 이 저서들에서는 그의 스승들처럼 천재적이고 독특한 그의 지성을 엿볼 수 있다.당시 그는 신학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의 책은 사목하는 신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프란젤린의 조직적이고 실천적인 신학은 로마 학파를 구성하였던 그의 스승들을 앞지르는 것이었다고 역사가들이 평가할 정도이다. 당시 그가 선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사가인 묄러(J.A. Möhler, 1796~1838)가 신학에서 발견한 새로운 방향과 튀빙겐 학파(Tubinger Schule)인 드라이(J.S.von Drey, 1777~1853)의 호교론에 대한 연구들, 밖르츠부르크(Wurzburg) 대학교의 덴칭거(H.J.D. Denzinger, 1819~1883)와 헤팅거(F. Hettinger, 1819~1890)의 사상들,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yssenus, 335?~395?) 신학을 연구한 헤르겐뢰터(J. Hergenröther, 1824~1890)와 될링거(J.J.I. Döllinger, 1799~1890) 등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은개방적이면서 논리 정연하고 명확하며 실질적인 그의 신학에 따른 것이다. 또한 로마와 프랑스 오통(Autun)에서발견된 고문서, 유물의 역사적 비판과 사실에 대한 새로운 추구 방법도 그의 신학 방법론에 추가시킬 수 있다.이 새로운 연구 방법은 대학에서 공부할 때 페로네 교수의 강의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저서들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신학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기초 신학서로 채택되었다. 학문뿐 아니라 영성도 깊었던 그는 특히 예수 성심에대한 신심이 남달랐다.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나평생 동정에 대해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으며, 많은 성인들을 자신의 영적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프란젤린은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에서 활동하였고, 교황청의 여러기관에서 고문 위원직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교황청의각성(省)에서 여러 책임을 맡게 되었고, 특히 신앙 교리성의 일을 돕게 되면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위한 초안 작성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다. 그가 맡은 일은 교의헌장인 <하느님의 아들>(Dei Filius)의 초안을 작성하여공의회 교부들에게 제출하는 일이었다. 프란젤린은 그리스 교부들의 사상을 비판 · 분석하고 다른 신학자들과의 자유 토론에 근거하여 교의 헌장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초안은 교회를 성서적이지만 너무 광범위하게 '그리스도의 신비체' 로 소개 · 서술하였다는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외의 장들도 성서적 관점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의회 준비위원회에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 초안은 다시 신학 위원회에서 교정 · 조정된 후 받아들여져 공의회에서 공포되었다. 공의회 이후에 프란젤린은 교황 비오 9세의 고문 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1876년 4월 3일 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이후 그는 교황청 예부성성(현 전례 성사성)의 장관으로그리고 다른 성성의 고문 위원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 하지만 추기경으로서의 많은 업무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한편 그는 교황청에서 일할 때비서를 두지 않았으며, 자신의 봉급을 모두 가난한 사람,선교 그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는 이유로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허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교회에 봉사하는 연구와 기도로 일관되었다. 가난과 순명 그리고 겸손의 덕을 지니고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미사와 기도로 시간을 보냈으며, 매주 토요일에는 단식(말년에는 금요일에도 함)을 통해 육체적 속죄 행위와 청빈을 실천하는 소박한 삶을 살았다. 프란젤린은 과도한 일과 지나친 금욕 생활로 로마에 있는독일 기숙사에서 1886년 12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신학 사상] 1870년대의 교회는 정치적 · 사목적 이유등 여러 상황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우선 물리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합리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물질주의가 판을치고 있었다. 또한 인간 중심 사상과 철학적 주관주의에힘입어 인격적이며 창조주, 구원자로서의 하느님의 계시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무시하는 많은 지성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안으로는 얀센주의에 대한 토론으로 신학적 힘이 고갈된 상태였으며, 교회 권력은 교황청의 중앙 집권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편 교회 안에서는 에피스코팔리즘(episcopalis-mus)의 영향으로 교황의 수위권이나 무류성에 반대하는물결이 유럽 교회를 휩쓸고 있었다. 교회는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사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무정부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새롭고 건전한 교의가 필요하였다. 이는 종교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현대 국가들의 요구 앞에 계시 문제뿐 아니라 교회가 가진 신적 권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였다. 세상을 혼란시키고 파괴시키는 물질주의, 무신론, 합리주의, 범신론의오류에 대한 단죄는 오류표(Syllabus) 안에서 발견할 수있지만, 교황 비오 9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이것을 재확언하며 장엄하게 선포하기를 원하였다. 프란젤린은 로마 학파를 대표할 수 있는 페로네, 파살리아, 슈라더 등의 그레고리안 대학교 예수회 신학자들과 함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 작성자로 활동하게되었다. 로마 학파는 스콜라학뿐만 아니라 교부들의 사상 특히 그리스 교부들의 사상에 정통하였으며, 주로 전승과 성령의 활동에 중점을 둔 교회론을 강조하였다. 이 들은 교회가 신학적 전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속육화하는 '초자연적 신비' 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란젤린이 제출한 교의 헌장 초안은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대해 서술하며, 2장은 그리스도교가 오직 그리스도가 세운 사회(societas)에서만 실현됨을, 3장은 교회는 왕적이며 완벽하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사회라는 것을, 4장은 교회의가시성을, 5장은 하나인 교회에 대해 언급하였다. 6장은구원을 위해 필연적인 교회를, 7장에서는 교회 밖에서는구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8장은 교회의 무결점을, 9장은 교회의 무류성을, 10장은 교계 제도를, 11장은 베드로의 수위권을 다루었다. 그리고 12~14장은 세속 권력, 국가의 권리, 국가 앞에서의 교회의 권리 등에 대해서술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초점은 신앙의 교의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시작된 신앙 존재의 근거(fundamentum)였다.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들>의 3~4장에서 사용된 '신앙 근거' 역시 그 시대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복음과 그에 대한 교회의 해석은 역사적 중개 즉성서나 전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구원 경륜과 교회의 초자연성으로 소급되고 있다.16세기에 사용되었던 '신앙 근거' 는 성서와 쓰여지지않은 전승을 지시하였는데, 이것은 교회 헌장 <영원한목자>(Pastor Aetermus)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제1차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신앙 근거에 더 첨가된 것은 교회 일치를 위한 견고한 원칙과 가시적 기반' 인 '교도권'과 교황이 가지는 '해석권' 이다. 프란젤린의 교회론을살펴보면, 교회는 종교적 사회 집단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전망 안에서 그리스도의 육화가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이며 동시에 초자연적 질서 안에 있는 '윤리체' (Corpus morale)이다. 또한 교회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연결된 공동체이며 교회 구성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은사와 은총을 받는다. 프란젤린은 하느님의 계시가 말씀과 행위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육화는 계시하는 자(revelans)와 계시된 것(revelatum)이 일치된다는 점에서정점이 된다. 그는 육화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육화가 지속된다는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인성과 신성의 일치로 인간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됨을 의미한다. 이때 인간은교회를 통해서 구원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따라서 교회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실제 최고의 권위' (Magnum commentarium reale)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를 대표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하느님의 말씀에 종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을 알 수 있도록 선포해야 하고 믿음에 대한 신빙성을 주기 위해 말씀과 행동을활성화시켜야 한다. 즉 살아 있는 전승에 대한 두 가지측면, 즉 교회의 신앙 의식(conscentia fidei)과 교회의 설교(praedicatio ecclesiastica)가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치 없이는 하느님의 계시가 교회 안에서지속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젤린에 의하면,좁은 의미로 볼 때 교회는 전적으로 '육화의 연장' 자체는 아니다. 그 이유는 육화는 역사 안에 나타난 하느님자체 전달의 유일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의말씀인 성서는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 탁월한 자리를 차지한다. 성서는 명시적으로 신앙인이 믿어야 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전승과는 다른 것이다.전승은 신앙의 핵심은 아니지만 성서에 기반한 함축적인진리, 즉 성서에 바탕을 두고 시대의 필요에 의해 발전한그리스도교 지혜인 교의이기에 중요하다. 프란젤린은 교의는 하느님의 자체 전달 사건인 계시와는 구별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이론은 후에 세벤(M.J. Schee-ben, 1835~1888)에 의해 받아들여져 신학적으로 발전되었다. 프란젤린은 전승에 대한 교의를, 삼위 일체 교의와 실제적 일치 관계에 있는 유기체로 파악한 파살리아와는달리 신앙 행위의 동기와 같은 계시의 개념 안에서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 원칙적으로 교회의 살아 있는 가르침인 전승에 의해 보존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바로 계시된 진리를 보존 · 전승하고, 교의의 신빙성을 계속 보장할 수 있도록 교회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바로 살아 있는 '실제 복음' 으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다.결국 프란젤린의 교회론은 교회를 '그리스도 신비체' 로보는 유기체인 교회론과, 호교론적인 면에서 접근하는가시적이고 계급적 조직으로서의 교회론을 통합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공헌한 그의 사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도 영향을 끼쳤고, 특히 교회론에서 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 교회 ; 교회론 ; <그리스도의 신비체> ; 바티칸공의회, 제1차 ; 세벤, 마티아스 요제프 ; 전승 ; 파살리아, 카를로) ※ 참고문헌  G. Bonavenia, Raccolta di memorie intorno alla vitadell'Emminentissimo Cardinale Giovanni Battista Franzelin dellaCompagnia di Gesi, Tipografia Poliglotta(di Propaganda fide), Roma,1887/ W.E. Hubert, Der Katholik 67, 1887, pp. 225~2521 F. Polese, IlCardinale Franzelin, Note e memorie, Livorno, 1888/ J. Pra, Lecardinale Franzelin, Etudes 47, 1889, pp. 320~325/ N. Walsh, JohnBaptist Franzelin,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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