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카, 로마의 Francisca Romae(1384~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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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로마의 프란치스카 성녀.
성인. 15세기의 위대한 신비가.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 Francesca Romana)의 설립자.축일은 3월 9일. 1384년 로마의 트라스테베레(Trasteverse)에 사는 부유한 귀족이면서도 열심한 신자 집안인 부소(Busso) 가문에서 출생한 프란치스카의 어린 시절 꿈은 수도자가 되는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가 되던 1397년 인근의 부유한 영주 로렌초 데이 폰치아니(Lorenzo deiPonziani)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시동생 부부와 같은 집에서 생활하였는데, 동서(同棲)인 바노차(Vanozza)는 프란치스카의 이상을 함께 나누었다. 그래서 어린 두 부인은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특히 병원에 있는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프란치스카는 1400년태어난 첫 아이를 시작으로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대부분 어린 나이에 죽었다. 1400~1440년까지 로마는 정치적으로 또 자연 재해로 크게 동요하였는데, 교황의 편에 서 있던 남편 로렌초는 정치적 격변에 휘말려 여러 번 곤경에 처하였다. 특히1408년 나폴리의 왕인 라디슬라오(Ladislao, 1386~1414)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였을 때, 로렌초는 캄파냐(Cam-pagna)에 있는 가솔들과 재산을 교황군을 지원하는 데사용하였다. 하지만 프란치스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계속 봉사하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육체적인 금욕 생활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교황의 허락을 받아 폰치아니 집안에서 운영하고 있던 산타 마리아데 카펠라(Santa Maria de Capella) 병원을 통해 많은 병자들을 돌보았다. 한편 자신이 살고 있는 로마의 풍속을 쇄신하는 일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1413~1414년 흑사병이 발생하였을 때, 프란치스카는 로마를 떠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녀는 남편과 맏아들이 피신하고 없는 성으로 환자들을 모아 돌보았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그녀의모범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귀족 부인들이 그녀의 주위에모여들어 자선과 세속 안에서의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였다. 1425년 두 명의 아이를 잃은 후, 프란치스카는 서약은 하지 않지만 《베네딕도 규칙》을 따르는 새로운 형태의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로 결정하였다. 회원들은 봉쇄생활을 하지 않았고 세상 안에서 자선을 실천하였다.1433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리아의 오블라티회(Oblatedi S. Maria)로 알려졌지만 후에 캄피돌리오(Campidoglio)근처에 있는 '스페키의 탑' (Tor de' Specchi) 근처에 있다고 하여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로 알려졌고, 다시현재의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회는 그해 7월 4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1431~1447)의 승인을 받았다. 1436년에 남편이 죽자프란치스카는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원장이 되어 세상을떠나는 날까지 남은 4년 동안 자선 사업에 전념하였다. 프란치스카가 직접 남긴 글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그녀의 전기 작가인 마티오티(Giovanni Mattiotti, +1450)가 특히 비범한 행적을 중심으로 성녀의 삶을 기록하여놓았을 뿐이다. 프란치스카는 자주 환시를 보았으며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녀는 수호 천사를 눈으로 보거나 연옥과 지옥에 관한 계시를 보기도 하였으며, 서방 교회의 분열이 곧 종식될 것 임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또한 양심의 비밀을 읽을 수도있었고, 악마의 계략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카는 겸손하고 초연하며, 순명과 인내의모범을 보인 사람이었다. 남편이 실종되고 자식들이 죽고재산을 잃게 되었을 때, 이러한 덕성은 더욱 두드러지게드러났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역사적 · 신학적으로 미묘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이전하는 성인의 여러 덕목들, 가정에 대한 의무를 지키면서도 자선과 금욕, 자기 포기를 실천하고, 깊은 묵상 속에여러 신비 체험을 하며,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를 설립하고 스스로 그 회원이 되어 살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프란치스카는 아들을 방문하러 갔다가 병을 얻었으며,스스로 예언한 날짜인 1440년 3월 9일 로마에서 세상을떠났다. 그녀에 대한 시성 절차는 세상을 떠난 즉시 시작되어 1608년 5월 9일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에의해 시성되었다. 그러나 시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신자들은 포로 로마노(Foro Romano)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Santa Maria Nuova) 성당에 안치된 프란치스카의 유해를 경배하였다. 현재 이 성당은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Santa Francesca Romana) 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그녀가 자신의 수호 천사를 여러 해 동안 보았다는 이유에서 교황 비오 11세(192~1939)는 프란치스카를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참고문헌 M. Monaco, 《NCE》 5, 2003, pp. 863~8641 H.-M.Féret, 《Cath》 4, pp. 1559~1560/ D. Farmer, Oxford Dictionary of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 185.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