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아시시의 Franciscus Assisii(1181/182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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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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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성인.
성인. 부제. 프란치스코회와 글라라회의 설립자. 축일은 10월 4일. [생 애] 초기 생애와 활동 : 프란치스코는 1181년 또는 1182년에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주의 작은 도시인 아시시(Assi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rdo-ne)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피카(Pica)였다. 어머니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는데, 아버지가 포목상을 하는 관계로 프랑스를 좋아하여 '프랑스 사람' 이란의미의 프란치스코로 이름을 바꾸었다. 프란치스코는 값비싼 옷을 즐겨 입었고 친구들과 자주 연회를 가졌으나,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많았다. 그는 대단히 명랑하였으나 어려움을 몹시 싫어하였고, 비위가 약하였으며 인내심이 없어 화를 잘 냈다. 기사가 되는 것이 그의희망이었기에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Perugia) 사이에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역사적으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처절하였던 이 전쟁에 참전하였지만, 아시시의패전으로 포로가 되었다. 페루자로 끌려간 그는 의외로 감옥 생활을 즐겁게 받아들였고, 전쟁에서 이미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한 언행을 보였다. 포로들 간의 화목을 도모하였고, 자신은 앞으로 성인이 될 것 같다는 예언까지 하였다. 아버지의 금전적 도움으로 1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나 아시시로 돌아온그는 이내 병상에 앓아 누웠는데, 이 병상 생활 중에 그에게 많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병상에서 일어났지만 기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아풀리아(Apulia,Puglia)로 가서 젠틸레(Gentile) 백작 휘하의 교황군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스폴레토(Spoleto) 계곡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의 환시를 보고 아시시로 돌아갔다.이후 동굴을 찾아다니면서 회개 생활을 시작하려고 하였지만, 나환자를 만난 후부터 비로소 결정적으로 그의 회개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어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하는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성당 수리에 착수하였다. 프란치스코가 주임 신부와 성당 수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전해 들은 아버지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아들에게 화가 치밀어 아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건과 앞으로의소유권마저 빼앗으려고 그를 주교 앞으로 끌고가 재판을받게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주교 앞에서 아버지로부터받은 속옷까지 내어 줌으로써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벌거숭이가 되었다. 그러자 주교가 자신의 망토로 프란치스코를 감쌌고, 이후 그는 은둔자의 옷을 입었다. 초기 수도 생활 : 프란치스코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환자를 돌보는 일과 성당 수리에만 열중하였다. 1209년에 그를 따르려는 동료들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2월 24일의 미사 중에 "여러분의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 때에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마태 10, 9-10)라는복음을 듣고 깊이 감동되어, 이를 자신들의 생활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은둔자의 옷을 종들의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이 옷이 현재 프란치스코회의 수도복이 되었다.그러나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세 번에 걸쳐 복음서를펴 본 결과 "당신이 완전해지려고 하면 가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마태19, 21),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 8), "누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루가 9, 23)라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탄성을 지르며기뻐하였다. 1년 동안 함께 생활한 경험들이 틀을 갖추게 되자, 그는 이것을 갖고 1209년 또는 1210년에 동료들과 함께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로부터 4월 16일 회칙으로 구두 인준을 받았다. 이것이 소위 원(原)수도 규칙(Protoregula, Regula Primitiva)이다. 당시 교황은 교회의 머리이자 어머니인 교회 건물이 비스듬히넘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가난한 수도자 한 명이 달려와서는 그의 어깨로 교회를 떠받쳐 바로세우는 꿈을 꾸었고, 꿈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프란치스코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고 한다. 아시시로 돌아온 그들은 한 헛간에 자리를 잡았다. 몇몇 형제들은 오직 관상 생활에만 전념하려 하였으나, 프란치스코가 이를 만류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회칙에 따라 관상과 노동 그리고 구걸과 설교를 병행하였다. 그런데 한 농부가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헛간에 당나귀를 끌어들여 생활을 방해하자, 프란치스코는 이를 하느님의뜻으로 알고 현재 천사들의 마리아 성당(Santa Maria degliAngeli)으로 알려진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경당으로거처를 옮겼고, 이때부터 이곳은 수도회의 영원한 요람이 되었다. 이 경당은 베네딕도회 소유였기에 사용료로1년에 생선 한 광주리를 지불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똑같이 시행되고 있다. 포르치운쿨라로 거처를 옮긴 후 수도회에 입회하는 이들의 숫자는 배로 증가하였고, 수사들은 경당 둘레에 작은 헛간들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살면서 활동을 하였다. 수도회의 성장 : 형제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코르토나(Cortona), 체토나(Cetona) 등에 헛간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수사들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순교의 열망에 싸여,사라센인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전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시리아로 떠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한겨울 여행 중에 폭풍을 만나 이탈리아로 되돌아오게 되어,이탈리아에서 선교 여행을 하였다. 1212년 3월 18일 밤에 글라라(Clara Assisiensis, 1194~1253)는 포르치운쿨라에 있는 프란치스코에게 가서, 프란치스코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착복식을 하고 순명을 서약하였다. 이로써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인 글라라회가 시작될 기초가 놓여 졌다. 이 해 가을에 프란치스코는 모로코를 마지막 목적지로 하여 몇몇 형제들과 함께 스페인으로 향하였으나, 질병으로 여행을 포기하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80 de Compostella)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귀족들과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입회하였는데, 그의 단 한 번의 설교로 30명이 입회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수사들의 수가 200명을 넘어섰고, 이에 따르는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기 모임인 총회가 1215년에 처음 열렸다. 프란치스코는 1215년의 제4차 라테란공의회에 참석하였다. 1216년에 교황 인노천시오 3세가 서거하고, 호노리오 3세(1216~1227)가 페루자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새 교황은 이후 프란치스코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 당시수사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회원수는 이탈리아와 거의비슷하게 되었고, 독일과 영국은 물론 성지인 팔레스티나에서조차 걷잡을 수 없이수가 늘어났다. 1217년 포르치운쿨라 총회의 결정을 통해, 프란치스코는 수사들 에게 임무를 분담시켜 해외에 파견하였다. 이탈리아에는여섯 개의 관구가 생겨났고, 프랑스에는 이미 두 개의 관구가 있었으며, 독일과 스페인과 팔레스티나가 새 관구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역할을 대신할 각관구 봉사자들이 임명되었다. 이 총회를 기점으로 수도회의 초기 역사가 일단락되었고, 이후의 수도회는 프란치스코의 이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 갔다. 선교 여행과 수도회의 변화 : 1217년 선교를 위해 프랑스로 가던 프란치스코는 피렌체(Firenze)에서 후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가 된 우골리노(Ugolino diSegni, 1170?~1241) 추기경을 만나 저지를 당하였다. 그는 프란치스코가 프랑스보다 이탈리아에서 더 필요하다고 설득하였으며, 이때 프란치스코회의 보호자 추기경이되겠다고 수락하였다. 우골리노 추기경의 많은 혜택을받으면서 수도회가 특권층의 권력을 누리기 시작하자,프란치스코는 고심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1219년 5월6일 소위 '돗자리 총회' 인 성령 강림 총회에서 새로운선교가 결정되었고, 우골리노 추기경도 그의 순교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자리를 두 명의총대리에게 맡기고 스페인으로 향하였으며, 몇몇 수사들과 함께 이집트의 다미에타(Damietta)에서 십자군의 패배를 목격하였다. 그해 9월에 술탄(Sultan)이었던 말리크알 카밀(Malik al-Kamil)을 만나 설교를 하였는데, 이에감화를 받은 술탄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회원들에게 팔레스티나 성지를 방문하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우골리노 추기경이 교황 호노리오 3세를 설득하여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에게 설교할 수있는 특전과 함께 많은 혜택을 부여하였고, 두 명의 총대리와 함께 총회를 소집하여 단식 규정을 더 강화하였다.교황은 1년 동안 수련을 하도록 요청하였으며, 우골리노추기경은 자신의 뜻이 실행되는지를 점검하였다. 이전에 는 자유롭게 다니며 설교할 수 있었고, 세상 사물과 특권과 안정을 포기할 수 있었으나 이 조치로 그런 일들이 제도화되어 구속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술탄의 안내로 성지를 여행하고 시리아에 가 있었는데, 새로 만들어진 규제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학문 연구를 위한 수도원이 볼로냐(Bologna)에 이미 건축되어 있음을 목격한 그는 그 집에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강요로 그집에 들어서자 안에 있던 환자 수사들까지 쫓아내고 집을 허물려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우골리노 추기경이 그집은 자신의 소유임을 내세워 프란치스코의 행동을 만류하였다. 당시 수도회는 이미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고, 수도회 설립 당시의 이상과도 멀어져 있었다. 그래도 이를 막아 보려고 노력하였던 그는 다음해인 1221년에 아시시 총회에서 총장직을 사임하였고, 카타니의 베드로(Pietro Cathanii)를 자신의 후임자로 지명하였다. 이사이에 모로코에서 복음을 전하던 다섯 명의 수사가 순교하였다. 또한 카타니의 베드로가 일찍 죽자, 총회에서엘리아(Elias di Cortona)를 후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동안의 많은 변화에 맞추어 프란치스코는 원수도 규칙을 24장으로 증보하였다. 이 회칙이 1221년 5월 30일 총회에서 논의되었으나, 많은 봉사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회칙을 '인준받지 않은 수도 규칙' (Regula non Bullata) 혹은 '제1 회칙'이라고 부른다. 당시 프란치스코는 눈병과 다른 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수도회에서 계속 약해져갔다. 그리고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우골리노 추기경이작성한 재속 수도회 회칙을 인준하였으며, 시에나의 루케치오와 보나돈나가 재속 수도회의 첫 번째 회원이 되었다. 1220년 이후 가난, 특전, 사제직, 학문 연구가 수도회내에서 점차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프란치스코는절대적으로 극단적인 가난을 고수하였고, 이와 반대로상급 장상들은 수사들의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수준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프란치스코에 의해 만들어진 회칙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이 회칙을 고수하였고, 다른 수도회에서만든 회칙에 관해서는 수사들이 언급도 못하게 하였다.그러다가 1222년 가을에 폰테 콜롬보(Fonte Colombo)로가서 회칙을 다시 쓰기 시작하여 1223년 초에 새 회칙을만들었고, 자신이 직접 이 회칙을 로마의 우골리노 추기경에게 전달하였다. 그해 총회에서 이 회칙에 대한 토론을 거친 후 최종적인 회칙이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전달되었으며, 교황은 11월 29일 칙서 <솔렛 안누에레>(Soletannuere)를 통해 회칙을 인준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준받은 수도 규칙' (Regula Bullata) 혹은 '제2 회칙' 이다. 오상과 죽음 : 프란치스코는 1224년 8월 여러 명의수사들과 함께 아시시에서 멀지 않은 라 베르나(La Ver-na)로 갔다. 처음에는 움집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나, 프란치스코가 자주 탈혼 상태에 빠지면서 더욱 깊이산 속으로 들어갔다. 9월 17일 새벽에 그는 십자가에 달 린 세라됨 천사의 환시를 보면서 오상(五傷)을 받은 후,늦가을에 당나귀를 타고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왔다. 오상으로 인해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해 겨울과 이듬해봄까지 그는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하지만 그는 날로 기력이 쇠하여졌고 눈은 실명되어 갔다. 이러한 고통의 와중에서 <태양의 노래>가 탄생하였다. 1226년 여름에 병세에 차도가보이자, 그는 리에티(Riett)로 가서 눈 수술을 받았으나효과가 없었다. 수사들이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을 하였으나, 그의 병세가 절망적임을 알게 되었다. 엘리아가 여름에 그를 아시시로 데리고 갔고, 프란치스코는 잠시 아시시의 주교관에 머물렀다가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이때 그는 유서를 작성하였는데, 유서에서 자신의회개 생활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지극히 높으신분이 친히 수도회를 설립하셨음을 주지시켰다. 죽음이다가온 것을 안 그는 자신을 알몸으로 잿더미 위에 눕히도록 하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인 10월 4일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2년 후인 1228년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1230년 5월 25일에 그의 유해는 엘리아가 그를 기념하여 지은 대성전의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활동과 영성] 프란치스코의 설교 : 그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허물어져 가는 교회를 수리해야 함을 깨닫고, 처음에는 성당 수리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차츰 설교로 교회를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생애동안 한 설교는 오직 회개와 찬미와 감사에 대한 설교뿐이다. 그는 인준받지 않은 회칙 21장(모든 형제들이 할 수있는 찬미와 권고의 말)에서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하였다."여러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주 하느님, 삼위이시며 일체이신 주 하느님, 전능하신 주 하느님, 만물의 창조자이신 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며 찬미하고 찬양하며 감사드리고 흠숭드리십시오. 우리는 오래지 않아죽을 것이기에 회개하고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십시오. ···회개하고 죽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복됩니다.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이 회개와 찬미와 감사의 강론은 그의 생애마지막 글인 <태양의 노래>에서도 시와 노래의 형식으로나타난다. 평화의 순회 설교자 프란치스코 : 그는 자신을 회개자로만 여기지 않고, 평화의 전도자로도 여겼다. 당시 정주(定住) 수도원 안에서만 이루어졌던 설교와 달리, 그는나그네처럼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였다.그는 돌아다니며 평화를 전하였고, 설교를 하지 않을 때에는 늘 평화 안에 머뭄으로써 그 자체로 설교가 되었다. 그의 《권고집》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권고 13, 14, 15,16은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되어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사람들"(마태 5, 9)에 대한 그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권고 13은 인내, 권고 14는 가난, 권고 15는 평화를다루고 있으며, 권고 16은 13, 14, 15의 결론으로서"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되다"라고 말한다. 즉 16의 주제는 '순수' 인데, 이처럼 《권고집》 전체가 '순수' 를 축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순수의 최고 모습은 '숨음' 이다.권고 1도 숨어 계신 하느님이 주제이며, 마지막 권고 28 도 숨어 계신 하느님이 주제이고, 《권고집》의 한 중심을차지하고 있는 권고 16도 주제가 숨어 계신 하느님이다.숨어 계신 하느님이 축이면서 동시에 양쪽 끝이 되어, 바퀴처럼 도는 형상이 그의 《권고집》의 구성이다. 따라서그가 전하려고 하였던 평화란 구체적으로 인내와 가난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요, 숨음으로써 절대(絶對) 고요로드러나는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프란치스코가 가장 잘 드러낸사건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의 만남에서 자신을 "사막에서 숨어 사는 가난한 여자"로 비유한 것이다. 또한술탄과의 만남에서 보여 준 그의 가난하고 겸허한 태도도 그 예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쓴 거의 모든 글에서조차 자신의 의도를 철저히 숨기면서 하느님의뜻을 드러낸다. 프란치스코와 가난 : 가난에서 오는 그의 평화는 성공적인 탈출(exodus)에서 정점을 이룬다. 유언에서 그는세속을 떠난 이야기를 하지만, 인준받은 회칙의 한 중심에서도 자신의 탈출을 이야기한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 이분이 여러분들을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고, 여러분들을 물질에는 가난하게 하고 덕에는 풍요롭게 하는, '지극히 높은 가난의 극점(極點)' (illacelsitudo altissimae paupertatis)이십니다. 이분이 생명을 얻은 사람의 땅으로 인도하는 여러분의 몫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이 가난에 완전히 매달려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 아래서는 결코 다른 어느 것도 가지기를 원치 마십시오"(인준받은 회칙 6, 4-6). 그를 가난의 극점인 하느님께 도달하도록 한 매체는오직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누차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는 감미로운 선(善)의 상속자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觀想)함으로써 모든선인 덕(德)에 풍요롭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지상에서는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으로써 지상선(至上善)이요 사랑인 가난의 극점을 체험하였다. 그는 하늘 아래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원치 않는 가난을 통하여 여기에 이르렀다.그러므로 그의 기도 방법은 무방법(無方法)의 방법이요무형식(無形式)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無限)이신 분을 유한(有限)한 기도 형식에 담을 수는 없으며, 유한한 기도 형식은 유한만을 담을 수 있다. 프란치스코와 교회, 그리고 형제성 : 프란치스코는1224년 9월 17일 라 베르나 산에서 오상을 받았다. 이사건은 오랫동안 그에게 내적으로 감동을 주어 가슴 깊이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외적으로 드러난사건일 뿐이다. 그는 오상을 받은 직후 자필로 <지극히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를 쓴다. 프란치스코가 자필로 쓴 글은 이 글 하나뿐이며, 그는 글의 제목까지도직접 썼다. 오상을 받을 당시 프란치스코는 세라핌 천사의 몸이십자가에 달려 있는 환시를 보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의몸이기에, 세라핌을 본 환시는 교회와 일치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시로 해석된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관상하는 교회는 제도적 교회, 미신자들을 포함하는 교회와우주 교회, 그리고 천상 교회를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 자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기 때문에, 살아서든 죽어서든 늘 그리스도와 대화를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형제성을 지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형제요, 성자성(聖子性)을 지닌다. 프란치스코와 마리아 :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성모 마리아는 교회의 탁월한 모상(模像)이고, 교회의 얼굴이며모습이다. 마리아의 모습이 그대로 교회의 모습이 되었다. 마리아는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한' 거처이다. 그녀는 교회이며 성전이다. 즉 동정녀 마리아는 교회이고 거룩한 삼위 일체에 의해 축성된 첫 번째 교회이다.프란치스코는 마리아를 삼위 일체와의 관계 안에서 삼위인 하느님의 위대한 작품으로 관상하였다. 그는 교회를통해 그녀를 관상하고, 그녀를 통해 교회를 관상하였다.동정녀인 하느님의 어머니는 정결한 어머니인 교회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완벽한 모상은마리아뿐이다. 프란치스코와 삼위 일체 : 그는 자신의 질병으로 인한고통과 형제들로 인해 야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상처로 여기고 그 상처를 자신의 몸에 지님으로써 삼위 일체에 참여하였으며, 교회의 지체인 이웃과 늑대를부축하고 보살펴 주는 봉사를 통해 삼위 일체에 생생하게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라 베르나 산의 환시를 통해서 겸손이신 성부와 인내이신 성자와 사랑이신 성령을 보았다. 삼위 일체를 본 것이다. 그에게는 삼위 일체에 대한 깊은이해가 있었다. 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삼위이시고 일체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하고, 또 다른 사람도 기도하도록초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성삼의 구체적인 모습을 자신의 글에 스며들게 할 정도로 성삼께대한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가 가난과 겸손과 존경을 말할 때는 성부를, 지혜와 순종과 인내를 말할때는 성자를, 단순성과 평화와 사랑을 말할 때는 성령을가리킨다. 이와 같이 그에게 있어서 덕은 윤리적 차원이아니고 신비적 차원으로서, 삼위 일체가 머무는 곳이다.그런데 프란치스코의 여러 덕은 서로 가족 관계를 이룬다. 그는 하느님을 덕의 이름으로 나타내며, 이 덕은 하느님이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가시적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를 선행으로 인도하는 힘은 바로삼위 일체 안에 머무는 덕의 힘이다. 그러나 의지를 나의것으로 여기면 악(惡)의 충동이 생기면서 악을 따르지않을 수 없게 되고, 그리스도처럼 의지를 포기하면 그 즉시 삼위 일체에 참가하게 되어 나에게 선이 들어오고 덕이 들어온다. 덕 앞에서 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프란치스코와 관상 : 프란치스코는 들판의 양 무리나길가의 바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관상하였듯이, 눈에들어오는 주변의 작은 사물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느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육화를관상하였고, 지성과 의지와 감성을 통해서 하느님의 활동을 관상하였다. 이어서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느님의 '있음' 을 관상하기에 이르렀고,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오는 선을 통해서 삼위 일체를 관상하였다. "우리는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 머무르실 수 있는 자리와 거처를 우리 안에 마련합시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불행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미인준 회칙 22, 27-28). 이처럼 프란치스코는삼위 일체의 신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관상하였으며, 특별히 아들의 고통에 매료되었고, 성령을 관상하였 다. 또한 그는 일체 안에서 삼위의 신비를 관상하였다. 선에서 모든 선인 덕으로 넘어가려면, 프란치스코처럼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선을 실천하고 관상해야 할 것이며, 덕에서 지상선인 사랑으로 넘어가려면 덕을 실천하고 관상해야 할 것이다. 즉 실천과 관상이 필수적이다. 참되고 완전한 기쁨 : 인내의 덕을 기초로 하지 않고는 그에게 관상은 있을 수 없다. 관상의 높은 차원인 참되고 완전한 기쁨도 자신의 가난한 본모습에 흔들리지않고 머무는 인내의 덕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는<참되고 완전한 기쁨>의 마지막 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의 영성에서 핵심적인 말은 견딤(sustinere) 돌려 드림(reddere), 순종(oboedire), 봉사(servire)이다. 그의 글들을 종합해 보면, 견딤은 인내(patientia)에서 오고, 인내는 겸손(humilitas)에서 나오며, 돌려 드림은 지혜(sapien-tia)에서 오고, 지혜는 존경(timere)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이렇게 견디고 돌려 드림이 순종이라면, 이 순종의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봉사이다. 자신의 작고 하찮은 본모습에 머무는 진실한 인내의 덕을 통하여 참되고 완전한 기쁨에 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를 기점으로 작고 하찮은 이웃에 대한 봉사를 하게 된다. 이봉사 또한 우리에게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다. 참된 덕행도, 영혼의 이익도 여기에 있다. 프란치스코와 겸손 : 그는 <태양의 노래>를 지을 당시자신의 육신적 · 정신적 고통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고통과 일치시켜 삼위 일체를 더욱 힘차게 노래하였다. <태양의 노래>를 지을 당시, 다미아노 수녀원 귀퉁이의 작고 어두운 창고 바닥에 자신의 등을 대고 앓고 있던 프란치스코는 육신적 · 정신적으로 몹시 탈진한 상태였다. <태양의노래>의 마지막 구절 "한껏 겸손을 다하여"(cum grandehumilitate)에서 '겸손' 은 '땅' (humus)에 그 어원(語源)을 두고 있는데,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이처럼 만물이 땅에서 움트듯이 깊은 겸손의 땅인 그리스도로부터 솟아나왔다. 그의 생애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의 마지막 말이 겸손이라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닌 프란치스코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영성을 감사, 봉사, 견딤으로 요약한다면, 겸손은 그 세 가지의 요약이며 땅처럼 자신의 하잘것없음에 그저 묵묵히 있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그저 십자가에 못박혀 계셨듯이 그도 그렇게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그에게는 구원이었고 동시에 창조였다. 그래서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대로 있음으로써 많은 일을 하였고, 그렇게 있음에서 자유를 얻었다.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일을 하였고, 아무 일도 하지않으면서 만인과 만물과 만사에 생명을 주었다. 이를 통해 만인과 만물과 만사가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하였다. 인간을 향한 성부의 두려움과 경외와 존경 : 성자가 겸손한 것은 성부가 겸손하기 때문이다. 성부의 겸손이 프란치스코 영성의 마지막 비밀이다.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17장 16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거룩한 두려움과 거룩한 지혜와 거룩한 사랑을 갈망합니다" (Et semper omniadesiderat divinum timorem et divinam sapientiam et divinumamorem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이 문장은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의 거룩한 두려움과 성자의 거룩한 지혜와성령의 거룩한 사랑을 갈망합니다" 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를 선물로 받았다. 인간의자유가 인간에게는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고귀한 부분이지만, 반대로 의지를 아직도 자신의 소유로 하여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자유 앞에서 여전히 불안하고 우울하며 위험을 느낀다. 우리가 거룩함을 거절해도성부는 어쩔 수 없다. 성부는 자유를 지닌 인격(personali-ty)을 존경하고 경외하며, 자유의 위대함을 인정한다. 하느님의 두려움은, 마치 경호원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철 통같이 경호하듯이, 그렇게 원수의 침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원수를 여지없이 격파한다."당신의 집 문간을 지키는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권고27, 5). 이 두려움은 겨우 걸음을 걷는 어린아이의 뒤를 따르며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어머니에 비유할 수도 있다. 그렇게 인간을존경하고 경호하는 하느님이다. 인간에 대한성부의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경외의 시선을 모르는 자는 죄에서 해방될 수 없다. 끝없는 죄의 방황만이 있을 뿐이다. [프란치스코가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 프란치스코가살던 시대는 현대와 많이 다르다. 그러나 편하고 즐겁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프란치스코가 누리고 갔던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질투하는 나, 남을 탓하는 나, 자랑하는 나, 인정받기를 원하는 나, 나를 싫어하는 형제를 나도 같이 증오하면서 속을 끓이는 나, 약간의 멸시와 모욕 앞에서도 힘들어하는 나, 약간의 칭찬에 흐뭇해하는 나, 충고를 싫어하는나,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나, 높은 직책에 대한 끊임없는열망을 지닌 나,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 증오의 대상자를 제거하려는 나, 이러한 나는 분명 나의 불행의 원인일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들은 본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없는 존재임을 지각(知覺)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프란치스코처럼 우리가 본질적으로 구더기임을 고백할 수있어야, 비로소 신 인식(神認識)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우리들의 불행의 원인인 죄악으로부터 현대인도 프란치스코처럼 해방과 구원을 갈구한다. 이 점에서 프란치스코와 현대인은 동일하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렇게말하였다. "우리는 벌레들이기에 우리의 육신을 수치와멸시를 받을 만한 것으로 여깁시다"(신자들에게 보낸 편지Ⅱ, 46).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와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본모습을 벌레로 정의 내리고 묵묵히 그리스도처럼 아무것도 아닌 그곳에 어린이처럼 머물러 구원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본모습을 외면하고 의지를 나의 소유로 여겨, 거기에서탈피하려고 끊임없이 발버등침으로써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흔히 '나' 라고 여기는 그 '나' 는 도무지 없다는 사실을 지각하지 못한 채 나의 구더기적 본래의 모습을 외면하고, 내가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며 내가되려고 발버등친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오류와 불행은면할 길이 없다. (⇦ 방지거 ; 작은 형제회 ; → 글라라,아시시의 ; 끈벤무알 성 프란치스코회 ; 수도 규칙서 ;프란치스코회) ※ 참고문헌 프란치스코회 한국 관구 편,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 분도출판사, 1985/ 《프란치 스칸 삶과 사상》1(1992, 봄)~19호(2002. 가을), 프란치스칸 사상연구소/ 이재성,《신비가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칸 사상연구소, 2002/ L. Lehmann,Francesco Maestro di Preghiera, Roma, 1993/ 一, Francis' MarianPrayers, Greyfriars Review 13, No. 1, 1999/ T. Matura, The Church inthe Writings of St. Francis of Assisi, Greyfriars Review 12, No. 1, 1998/A. Rotzetter, Gott in der Verkundigung des Franz von Assisi,Laurentianum 23, 1982/ 0. Schmucki, The Mysticism of St. Francis inHis Writings, Greyfriars Review 3, No. 3, 1989, p. 2471 E. van denGoorbergh · T. Zweerman, Respectfully Yours, Signed and Sealed,Francis of Assisi, New York, 2001/ Saint Bonaventura, Itinerariummentis in Deum, New York, 1990. 〔李載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