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살레시오 (1567~162)
[라]Franciscus Salesius · [프]Francois de S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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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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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주교. 성인.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Institut de la Visitation Sainte-Marie)의 공동 설립자. 반종교 개혁의 지도자. 가톨릭 작가와 언론계의 수호 성인. 교회 학자. 축일은 1월 24일. 〔생 애〕 초기 생애 :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의 독립 공국인 사보이(Savoy)의 토렌스(Thorens)에 있는 가문의성(Chateau de Sales)에서 여섯 형제 중 첫째로 1567년 8월 21일에 출생하였다. 아버지 프랑수아(Frangois de Boisy)와 어머니 프랑수아(Francois de Sionnaz)는 사보이 공국의 열심한 가톨릭 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를 행정관으로 키우려고 7세 때 라 로슈(LaRoche)의 학교로 보냈다가 다시 9세 때는 카푸친회에서 운영하는 안시(Annecy)의 학교로 보냈다. 1582년부터 그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클레르몽(Clermont) 대학과 파리의 소르본(Sorbonne) 대학교에서 수사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신학 과정을 배웠다. 이 무렵 그는 오랫동안 극심한 좌절의 유혹에 시달렸는데, 이 유혹은 당대의 신학자들과 예정론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당시 소르본 대학교는 프로테스탄트들과 초기 얀센주의의 영향력이 강하였고, 엄격하고 비관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따라서 19세였던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지옥에 빠지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생테티엔데그레(Saint Etienne-des-Grès)에 있는 기적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유혹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정결을 지키고 성모님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주님 ,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저는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영생을 누리며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 생에서라도 저는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1588년부터 프란치스코는 파도바(Padova)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저명한 신학자이자 예수회원인 포세비노(Antonio Possevino, 1534~1611)의 도움으로 신학 공부와 영적 지도를 받았다. 교회법과 일반시민법을 모두 전공한 그는, 1592년에 판치롤로(Guido Pancirolo, +1599) 교수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친 프란치스코는 샹베리(Chambéry) 상원으로부터 법률가 자격 제의와 함께 청혼 및 상원 의원 자리를 제의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사보이 공화국의 가장 높은 귀족 중 한 사람을 후견인으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법률가 자격은 받아들였지만 결혼은 정중히 거절하였으며, 상원 의원직 역시 거절하였다. 그리고 곧 성직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그와 아버지는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러자 제네바(Geneva)의 그라니에(Claude de Granier) 주교가 나서서 그에게 제네바 교구의 참사위원직을 주선하였는데, 이는 주교 다음의 고위 성직자 직위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도 뜻을 굽히고 아들을 축복해 주었으며, 프란치스코는 모든 소품과 대품을 받았다. 그리고 1593년 12월 18일 안시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신부로서의 활동 : 종교 개혁이 시작된 이후 제네바의 주교좌는 안시로 옮겨와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도시에서 사도적인 열정에 불타 설교와 고해성사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1594년에 샤블레(Chablais) 지역의 선교를 자원하였다. 그곳은 칼뱅주의자들이 약 50년간 가톨릭 신앙을 금지하고 프로테스탄트를 강요하던 지역으로 사보이 공국이 되찾은 지 얼마 안 되는 선교 지역이었다. 그는 이 지역 중심지인 토농(Thonon)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알랭주(Allings)에 거점을 두고, 지역 전체를 찾아다니며 설교를 하여 열정과 학식, 친절과 성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토농으로 거처를 옮겨 칼뱅주의자들을 논박하였다. 한편 그는 교황 글레멘스 8세(1592~1605)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가서 칼뱅(J. Calvin, 1509~1564)의 후계자인 베즈(Théodore de Bèze, 1519~1605)를 만났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친절하게 맞이하였고, 한동안 마음이 흔들리는 듯 하였지만 최종적인 용기를 내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의 끈질긴 노력으로 많은 샤블레 사람들이1597 ~1598년에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다. 이에 제네바 교구장인 그라니에 주교는 프란치스코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주교로 선택하여 1599년 5월 22일에 프란치스코는 주교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라니에 주교는 자신을 대신하여 그해에 교황청 정기 방문(Ad limina)을 하도록 그를 로마로 보냈다. 교황 글레멘스 8세는 그라니에 주교의 결정을 승인하였지만, 추기경단 앞에서 개인적으로 그의 학문과 주교 선출에 따른 신앙심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프란치스코는 시험을 통과하였고, 교황은 흡족해 하며 "그대의 우물에서, 그대의 살아 있는 샘에서 물을 마시게. 그대의 물이 솟아 나오고, 그 물은 온 세상 사람들의 갈증을 채워 줄 물이 되기를 기원하네" 라고 말하였다. 교황의 이 말은 이후 그대로 이루어졌다.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 젝스(Gex) 지방에 종교 문제가 발생하여 파리로 간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 국왕인 앙리 4세(1589~1610), 왕의 개인 경당 신부인 베륄(P. de Bérulle, 1575~1629), 왕의 비서 데예(Antoinne Deshayes)와 친분을 쌓았다. 앙리 4세는 프란치스코에게 사순 시기 동안 궁에서의 설교를 요청하였고, 그를 프랑스에 머물게 하고 싶어하였다. 또한 그의 설교와 저술을 격려하면서 세상에 살아가는 영혼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신뢰할 것인지, 어떻게 참된 신앙심을 가질 수 있을지를 가르치라고 용기를 주었다. 주교로서의 활동 : 1602년 그라니에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세례를 받은 토렌스의 생 모리스(Sain-Maurice) 성당에서 12월 8일 제네바 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그가 교구장이 된 후 처음 시도한 일은 젊은이와 노인을 포함한 신자들에게 교리를 제도적으로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 교구의 사제단을 이끌 세심한 규칙을 만들었고 교구 내의 본당들을, 험한 산 속에 흩어져 있는 본당들까지 꼼꼼히 방문하였으며 수도 공동체들을 개혁하였다. 그의 선함과 인내, 온유함은 널리 알려졌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특히 사랑하였으며, 그의 음식은 보잘것 없었고 옷은 소박하였다. 사치품을 멀리하였으며, 곤궁한 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나누어 주기 위해 극도로 절제하며 생활하였다. 또한 쉬지 않고 고백을 듣고 충고를 하고, 설교를 하였다. 그는 엄청난 양의 서한(대부분 영적 지도를 하는)을 남겼으며, 시간을 할애하여 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그의 열정은 자신의 교구 밖으로까지 뻗어 나갔다. 그는 사순 시기와 대림 시기에 강연을 하였는데, 1604년 부르고뉴(Bourggne)의 수도인 디종(Dijon)에서 한 강연은 지금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그는 네 명의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남작 미망인인 샹탈(J.-F. de Chantal, 1572~1641)을 처음으로 만났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에 감화된 샹탈이 영성 지도를 부탁하였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적인 우정으로 자라났다. 상탈 부인은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특히 아이들이 문제였다. 이 문제를 두고 오래 의논한 끝에 두 사람은 성소를 느끼지만 기존 수도회의 육체적 엄격함을 견딜 힘이 없는 젊은 여성들이나 미망인들을 위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1607년에 설립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1618. 11, 1619. 9),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군중들을 위해 그는 매일 강론대에 섰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이처럼 거룩하고, 사도적인 강론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라고 입을 모았다. 1618년 파리에서 그는 당시에 꽤 저명한 교회 인사들과 만났으며, 빈천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o, 1581~1660)와도 만났다. 프란치스코의 벗들은 그에게 프랑스에 머물라고 간곡히 청하였지만, 그는 1619년 안시로 돌아갔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은퇴를 계획하며 동생을 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두 번의 피할 수 없는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교황의 명에 의해 피에몬테(Piemonte)의 수도원 선거에 참관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국왕인 루이 13세(1610~1643)의 명에 의해 사보이 공국의 대표로 아비농(Avi- gnon)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1622년에 그는 사보이 왕실을 안내하여 프랑스를 방문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리용(Lyon)에 있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 정원사의 집에 있는 작은 방에서 머물렀다. 12월 27일 성인은 뇌일혈을 일으켰고, 병자성사와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를 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 라고 기도하였다고 하며, 다음날인 12월 28일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수많은 군중이 그의 빈소를 찾았고, 유해를 리용에 모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1623년 1월 우여곡절 끝에 유해는 안시로 옮겨졌고, 그의 심장은 리용에 남았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의 심장은 성 마리아 방문 수녀회 수녀들에 의해 리용에서 베네치아(Venezia)로 옮겨졌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에 의해 1662년 1월 8일 시복되었고, 1665년 11월 19일 시성되었다. 그리고 1877년 11월 16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그는 1854년에 귀머거리의 수호 성인이 되었고, 1923년에는 작가와 언론인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저서와 영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영성적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 영성이 여러 세기 동안 제약되어 온 수도 생활의 구조에서 벗어나게 한 공로는 인정받을 만하다. 그의 저서에 대한 비평 연구판은 27권이 있는데, 이 중 12권에는 그의 서간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판의 나머지 권에는 《성 십자가의 깃발을 지킴》(Defense de d'Estendart de la Croix de nostre Sauveur Jesus-Christ, 1597), 《신심 생활 입문》(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 1609), 《신애론》(Traité de I'amour de Dieu, 1616), 《영적 대담》(Les Vrays Entretiens spirituels, 1629) 및 그의 논쟁집과 네 권의 설교집이 포함되어 있다. 프란치스코 자신이 편집한 《신심 생활 입문》의 마지막 판은 1619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정확히 평신도들을 위해 쓰여졌으며, 그는 평신도 영성에 관한 글을 쓴 최초의 영성 작가이다. 그는 자기 직업에 종사하며 가족과 함께 세속에 머물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영적 교훈을 주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경건한 생활, 즉 참된 신심은 어떤 비상한 은총이나 은혜에 있는 것이 아니며, 참된 신심은 어떤 특수한 영성 수련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완덕과 동일한 참된 신심은, 그리스도가 선언한 애덕에 관한 이중 계명(마태 22, 34-40)의 실천이었다. 그는 참된 신심에서 나오는 언행을 언급하지만, 경건한 생활은 내적 생활이라고 강조하였다. 더구나 상이한 소명이나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상이한 신앙 생활을 하기에, 모든 이가 완벽한 신앙 생활을 추구해야 하지만 각자 자신의 역량과 신분에서 오는 의무에 따라야 하며, 이를 위해 영성 지도가 필요하다고 프란치스코는 강조하였다. 그는 영성 지도자는 애덕이 있고 박학하며 신중한 사람이라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영성 지도자가 성령의 작용을 방해하거나 영혼의 자유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똑같은 길을 따라 완덕으로 나아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2부에서는 묵상 기도의 실천이 중심이 되는 영성 훈련의 일정표를 제안하였고, 3부에서는 덕의 실천을 고찰하고 특히 평신도에게 필요한 덕을 언급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모든 덕 중에서 애덕 다음으로 탁월한 덕은 온유함이라고 하였다. 이 책의 마지막 두 부분에서는 유혹, 슬픔, 위안 및 메마름을 다루고 영혼이 참된 신심 가운데에서 진보를 판가름할 수 있는 일련의 자기 성찰과 고찰로 끝맺고 있다. 반면 《신애론》은 선정된 집단을 위해 쓰여졌다. 이 책의 내용은 얀센주의자들, 정적주의자들 및 페늘롱(F. deSalignac de la Mothe Fénelon, 1651~1715)이 자신들의 오류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한 탓에 높이 평가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영혼이 타락한 상태에서 그리스도교 완덕 및 성덕을 구성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진보를 추적하려는 것이다. 이 책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 그 사랑의 다양한 성격과 본질에 대한 설명, 그 사랑에 실제로 응답하는 방법들에 대한 설명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사랑의 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신학적 설명을 하고, 사랑의 신적 기원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신비적 기도와 이것에 동반될 수 있는 탈혼적 체험에 관해 언급하면서 기만의 우려와 신비 현상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애덕의 신학을 요약하였다. 이 외에도 샤블레 주민들이 그의 설교를 들을 용기를 내지 못하자 그가 작성하여 그들에게 배포한 리플릿인 《논박》(Les Controverses, 1672)이 있는데, 이는 가톨릭 신앙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성 십자가의 깃발을 지킴》은 참된 십자가와 십자가에서의 죽음, 십자가의 상징, 십자가 공경에 대한 설명을 한다. 《영적 대담》은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 수녀들에게 하였던 영적 설교들을 수녀들이 모은 것이다. 그의 《강론》(Sermons)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주교가 되기 전에 하였던 것들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직접 작성한 내용들이고, 다른 하나는 주교가 된 이후에 전체적인 개요만을 그가 작성한 것들이다. 그리고 전해지는 그의 서한들은 대부분 영적 지도를 위한 것들이다. 그 외에도 많은 양의 논문이나 단문들이 있다. 〔평 가〕 예수회원에게서 교육을 받은 프란치스코는 영성 실천에 있어서 명백히 이냐시오적이었으나 신학적으로는 토마스주의자의 실재론(實在論)과 낙천주의를 함께 지닌 아우구스티노적 사상가였다. 그런 그가 영성 신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공헌의 하나는 애덕의 유대 아래 모든 그리스도교적 윤리성과 거룩함(聖性)을 통일시킨 것이 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와 중세의 다른 신학자들이 가르쳤던 것이지만, 프란치스코의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교 완덕이 특별한 훈련이나 실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또 다른 그의 기여는 직업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애덕의 완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임을 강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에 근본이 되는 두 가지 실천, 즉 묵상 기도와 신분에 적합한 덕의 닦음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는 르네상스와 근대를 이어 주며, 17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영성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현대 영성의 아버지' 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직접 세운 수도회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이지만, 19세기에는 그를 수호 성인으로 하여 재속 사제회, 평신도회, 몇몇 수도회들이 설립되었다. 그중에는 안시에 세워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선교회(Missionaries of St. Francis de Sales), ,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보스코(G. Bosco, 1815~1888) 신부가 토리노(Torino)에 설립한 살레시오회(Society of St. Francis de Sales), 브리송(Brisson) 신부가 트루아(Troyes)에 설립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오블라티회(The Oblates of St. Francis de Sales) 등이 있다. (⇦ 살레시오 ; → 빈천시오 아 바오로 ; 살레시오회 ; 상탈, 잔 프랑수아즈 드 ; 신학사) ※ 참고문헌 J. Power, 5, 2003, pp. 866~869/ P. Serouer, 《DSp》 5, pp. 1057~1097/J. Aumann, O.P., Christian Spirituality in the Catholic Tradition, Sheed & Ward Ltd., 1985(이홍근 · 이영희 역,《가톨릭 전통과 그리스도교 영성》, 분도출판사, 1998)/ B. Secret, 《cath》 IV, pp. 1539~1546. 〔宋炯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