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의료 봉사 수녀회 - 醫療奉仕修女會
[독]Krankenschwestern vom Regulierter Dritten Orden deshl. Franziskus · [영]Hospital Sisters of the Third Order Regular of St. Francis(O.H.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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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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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의 노인 복지 시설 '프란치스코 집' 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의료 봉사 수녀회원들.
고통받고 외로운 이들을 도우며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간호하기 위해 독일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크리스토프 베른스마이어(Christoph Bemsmeyer, 1777~1858) 신부가 1844년 7월 2일 독일 민스터(Muinst)에 설립한 수녀회. 현재 총본부는 민스터에 있으며 한국 분원은 전남장성군 진원면 선적리 170-1에 있다. [수녀회의 설립과 발전] 성 프란치스코 의료 봉사 수녀회의 창립자인 베른스마이어 신부는 1777년 독일 베스트팔렌(Westfalen) 동부의 베루에서 태어나 1801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180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가 서품을 받았을 당시 뮌스터 지방은 문화 투쟁과 산업혁명, 전란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수도회는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 1세(1804~18141815)의 압박 속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노동자 계급과 수공업자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져 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질병에 걸려도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박해가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뮌스터에서 동쪽으로 약 11km 떨어진 텔게히테(Telgete)라는 작은 도시의본당 신부였던 베른스마이어 신부는, 텔게히테의 피에타성당을 순례하는 순례단과 그 주변의 상황에 관심을 두며 매주 열리는 '길의 행렬' 에 참여하였다. 1811년 가을에 뮌스터를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신부들이 소속된수도원을 강제로 폐쇄시키자, 베른스마이어 신부는 성프란치스코의 정신에 따라 살며 그의 이상을 최대한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텔게히테에 반목조 건물을 지었다.그곳에서 피에타 성당을 방문하는 순례자들과 거기 모인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는데, 순례자들 가운데는 장애인 · 병든 이 · 빈곤한 이들이 많았다. 그는 근교의 마을을 돌아보면서 환자를 방문하거나 외로운 처지에놓인 노인들을 위문하며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고통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고 힘이 되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베른스마이어 신부는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의삶에 대한 열의에 불탔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도우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함께 일할 동료를 구하였는데, 1844년 7월 신앙심이 깊고 사랑의 열정을 가진 처녀 5명이 이에 응답함으로써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병자들을 돌보기 위한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 의료 봉사 수녀회의 시작이다. 베른스마이어 신부는 이후 고아원 건설을 위해 사재(私財)를 모아 토지를 구입하고 공사를 시작했지만 정부의 인가를 얻지 못하여, 휴레에 성 록스 병원을 개설 · 운영하였다. 이 일을 시작으로 그는 몇몇 본당들과 연계하여 곳곳에 진료소를 세워 간호 활동의 범위를 넓혀갔다.마침내 1847년, 프란치스코회 관구장이 프란치스코 수도 3회 회칙에 따른 규칙을 승인하였으며, 이어 1851년에는 뮌스터의 주교가 클레멘스 수녀회의 요세피네 에르 크만 수녀에게 수녀회의 지도를 위탁하여 그녀가 초대총장이 되었다. 수녀회는 1853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840~186)에게 법적 인가와 법인으로서의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이후 뮌스터로 본부를 옮기고성 프란치스코 병원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베른스마이어 신부는 1858년 6월 2일 텔게히테에서 사망하였다. 수녀회는 1848년에 장티푸스가 만연하던 슐레지엔북부 지역의 환자 간호를 위해 수녀 4명을 파견한 것을시작으로, 1875년에는 독일 내의 정치적 탄압을 피하는동시에 미국의 바루테스 주교의 요청에 응하여 21명의수녀들을 미국으로 보내 사도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3년 후 일리노이(Ilinois) 주의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 성 요한 병원을 세우고 이후 13개의 병원을 순차적으로 개설하여 의료 봉사를 중심으로 가난한 이들을섬기는 봉헌의 삶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수녀회는 1901년 교황 레오 13세(1878~1903)로부터교회법상의 최종적인 승인을 받았으며 이듬해 제3대 총장이던 게루비네 데링 수녀가 수녀회를 율수(聿修) 프란치스코 3회에 통합시켰다. 이어 1905년 수녀회의 미국관구에서는 5명의 수녀를 중국에 파견하여 아시아에 첫선교의 씨를 뿌렸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압박으로1948년 중국에서의 선교를 포기한 수녀들은, 원폭 피해로 처참한 상태에 놓여 있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진료소를 개설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1949), 이듬해에는 히메지(姬路) 시에 성 마리아 병원을 개원하여 지역의료 발전에 전념하였다. 수녀회는 1973년 인도에 진출하여 피도라에 무료 진료소를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는 주로 교육 사업에 헌신하고 있으며, 2004년 현재9개국에서 2,000여 명의 수녀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영성과 설립자인 베른스마이어 신부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영 성] 설립자 베른스마이어 신부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에 힘입어 병자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대가 없는 봉사의 손길을 뻗침으로써 그리스도의 치유의 은사에 참여하고자 하였다."가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 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너희가 거저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 집에 들어갈 때는 '평화를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마태 10, 7-8. 12)라는 말씀처럼 수녀회는 설립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현 시대의 요구에 마음을 열고겸손 · 소박 · 기쁨 그리고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주님의부르심에 응답하려 노력한다. 또한 이들은 그리스도의부활에서 자신들의 삶의 근원을 찾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실현하고자 한다. [한국 진출 및 사도직 활동] 수녀회의 공식적인 한국진출은 1994년에 이루어졌지만 교류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1986년 당시 독일 관구에는 2명의 한국인 자매수녀가 있었기 때문에 총장 수녀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있고, 1989년 한국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에일본 관구의 수녀 10명이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교류가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후 프란치스코회 관구장이종한(李宗漢, 요한) 신부의 권유로 1990년 일본 관구소속의 수녀 2명이 한국에 들어와 한국어 공부를 하며한국 진출의 때와 장소를 모색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92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2년 후일본 관구장 와타나베(渡邊) 수녀가 한국을 방문하자 한국 프란치스코회 관구장 유수일(劉修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광주에 건설 계획 중인 노인 요양원에서간호 분야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와타나베 수녀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 진출의 발판이마련되어 아그네스 수녀와 쥬리아 수녀가 파견되었다.이후 차례로 들어온 일본 관구 소속 수녀들은 현재1998년 6월 전남 장성에 개원한 노인 복지 시설 '프란치스코 집' 에서 생활 지원 및 의료 서비스를 지원하고있으며 재가 노인을 위한 가정 봉사원 파견 센터에서 봉사하고 있다. 2001년 10월에는 전국 프란치스칸 가족협의회에 가입하여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공유하고 있으며, 2002년 11월에는 서울에 '양성의 집' 을 마련하였다. 한편, 요양원 3층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서 지내던 수녀들은 2003년 4월 요양원 뒤편에 수녀원을 신축 · 이전하였다. 2006년 현재 종신 서원자 4, 유기 서원자 1명등 총 5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 참고문헌 베르나 프레제 · 마리아 알비나다 베다스, 《성 프란치스코 병원 수녀회의 역사》, 성 프란치스코 병원 수녀회, 1998.[성 프란치스코 의료 봉사 수녀회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