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카라촐로 Francicus Caracciolo(156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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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카라출로 성인.

프란치스코 카라출로 성인.


성인. 신부. 아도르노 사제회(Adomo Fathers)라고도 불리는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 (Ordo Clericorum Regula-rium Minorum, C.R.M., Caracciolini)의 공동 설립자. 축일은 6월 4일. [생 애]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아브루치(Abruzzi)의 빌라 산타 마리아(Villa Santa Maria)에서 1563년 10월 13일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카라촐로 가문의 포스퀴치오(Pos-quizio) 집안 출신이다. 그는 아스카뇨(Ascanio)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i, 1181/1182?~1226)가 보인 청빈을 본받는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로 이름을 바꾸었다. 어려서부터온유하고 정직한 성품을 지녔던 그는 22세에 나병이 완치된 후 스스로 교회를 위한 삶을 살기로 서약하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1585년 나폴리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87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는 사형수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는 '정의의 백의(白衣)사제단' (Bianchi della Giustizia)에 가입하였다. 이 무렵 제노바의 대사로 스페인에 파견되었던 아도르노(GiovanniAgostino Adorno) 신부와, 프란치스코의 친척이며 나폴리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수도원 원장인 파브리초 카라촐로(Fabrizio Caracciolo)가 새로운 사제회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아스카뇨 카라촐로신부에게 동참을 권유하기 위해 보낸 편지가 1588년에프란치스코에게 잘못 배달되었다. 이 편지를 받은 프란치스코는 이 계획이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느껴, 아도르노 신부를 도와 새 수행 성직자 수도회의 규칙을 작성하였다. 이 규칙은 1588년 7월 1일 교황 식스토5세(1585~1590)의 승인을 받았으며, 1591년 2월 18일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4세(1590~1591)로부터, 1592년6월 1일에는 교황 글레멘스 8세(1592~1605)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 수행 성직자 수도회는 관상과 활동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세 가지 서약과 함께 네 번째의 특별 서약을 하였는데, 그것은 회 안에서나 밖에서 고위직에 취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체 조배는 교대로 계속 이어지며, 금욕을 계속 실천하도록 규정하였다. 1591년 아도르노 신부가 죽자, 프란치스코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교황 식스토 5세가 하사한 나폴리의 첫 번째 수도원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공동체에서 1593년 3월 9일 그는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598년까지이 직책을 수행하는데, 이 기간 동안 펠리페 2세(1556~1598)와 펠리페 3세(1598~1621)의 보호 아래 스페인에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세 차례 스페인을 방문하였다. 그결과 1599년 1월 20일 마드리드(Madrid)에 성령 공동체가 세워졌고, 1601년 9월 9일에는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성모 영보 공동체가, 그리고 1601년에는 알칼라(Alcala)에 성 요셉 공동체가 문을 열어 과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후 수련장, 지역 장상, 이탈리아 지역 총대리 등 수도회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로마에서 성 레오나르도(St. Leonardo) 성당을 얻었는 데, 이 성당은 1598년 9월 18일 나보나 광장의 성 아네스(St. Agnes in the Piazza Navona) 성당과 교환되었다. 그는 1606년 6월 11일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의 칙령으로 루치나(Lucina)에 성 로렌초(St. Lorenzo) 성당의설립을 보장받았지만, 1906년 11월 9일 교황 비오 10세(1903~1914)의 칙령으로 무효화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일곱단계》(Le Sette stazioni sopra la Passione de N.S. Gesu Chris-to, 1710)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였으며, 외가 쪽의 친척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Aquinas, 1224/1225~1274)처럼 매우 정결한 삶을 살았다.교황 바오로 5세는 그에게 중요한 주교직을 맡기고 싶어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거절하였다. 한편 아뇨네(Agnone)의 오라토리오 공동체를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의 신학원으로 바꾸어 사용하라는 제의를 받고 아뇨네로 가던프란치스코는 로레토(Loretto)에 들러 자신의 마지막을준비하듯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 그리고 아뇨네에서 병이들어 1608년 성체 성혈 대축일 전날인 6월 4일에 세상을떠났다. 그에 대한 대중적인 공경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의 유해는 나폴리로 비밀리에 옮겨졌다. [공 경] 프란치스코 카라촐라는 1769년 6월 4일 교황글레멘스 14세(1769~1774)에 의해 시복되었고, 1807년5월 24일 교황 비오 7세(1800~1823)에 의해 시성되었다. 1838년에 그는 나폴리의 수호 성인이 되었으며,1925년에는 아브루치에 있는 성체회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나폴리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몬테베르지넬라(Monte-berginella) 성당으로 옮겨졌다. 이 성당은 1823년에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에게 주어진 성당이다. ※ 참고문헌  A. Butler, The Lives of the Saints, H. Thurston · D.Attwater eds., vol. 2, New York, 1956, Pp. 470~4721 M.P. Trauth,《NCE》 3, p. 95/ R. Chalumeau, 《Cath》 IV, pp. 1536~1537. 大學院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