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동 본당

九苞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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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안성 안법 보통학교 개교식(뒷 건물이 안성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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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안성 안법 보통학교 개교식(뒷 건물이 안성 성당이다).


경기도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현 수원교구 소속.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 구포리 80 소재. 1900년 10월 19일, 충청도의 공세리 본당(貢稅里本堂)으로부터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착한 의견의 모친. 관할 구역은 안 성읍 동쪽 지역과 보개면 · 서운면, 금광면 일부. 〔교 세〕 1902년 635명, 1922년 910명, 1937년 2,277명, 1964년 4,611명, 1974년 3,336명, 1984년 3,526명, 1993년 3,017명. 〔역대 신부〕 초대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안토니오(1900. 10~1932. 9), 2대 뤼카(F. Lucas, 陸加恩) 프란치스코(1932. 9~1934. 6), 3대 이순성(李順 成) 안드레아(1934. 9~1936), 4대 이복영(李福永) 요셉 (1936~1942. 6), 5대 이희연(李喜淵) 프란치스코(1942.6~1943. 12), 6대 조인환(曹仁煥) 베드로(1943. 12~1946.3), 7대 김제근(金濟根) 토마스(1946. 3~1949. 1), 8대 임 세빈(林世彬) 요셉(1949. 1~1951. 4), 9대 임응승(林應承) 요한(1951. 4~1953. 10), 10대 임세빈 요셉(1953. 10~1957. 6), 11대 박성춘(朴性春) 레오(1957. 6~1958. 7), 12대 정 욱진(丁旭鎮) 토마스 아퀴나스(1958. 7~1959. 11), 13대 정덕진(丁德鎮) 루가(1959. 11~1960. 9), 14대 정욱진 토 마스 아퀴나스(1960. 9~1961. 3), 15대 강주희(美周熙) 방 그라시오(1961. 3~1964. 2) , 16대 신원식(申元植) 루가 (1964. 2~1966. 1 ) , 17대 정원진(鄭元鎮) 루가(1966.1~1967. 1) , 18대 이종철(李鍾澈) 스데파노(1967. 1~1970.7), 19대 손태섭(孫泰燮) 마르코(1970. 7~1971. 8), 20대 김병열(金炳烈) 보니파시오(1971.2 8~1973. 1), 21대 이정 운(李淨雲) 베드로(1973. 1~1981. 6), 22대 백명기(白明 基) 마르코(1981.6~1986. 12), 23대 임충승(林忠承) 시몬 (1986. 12~1987. 9), 24대 서명석(徐明錫) 안드레아(1987. 9~1992. 2), 25대 정운택(鄭雲澤) 안드레아(1992. 2~1994. 1), 26대 윤용배(尹龍培) 라자로(1994. 1~현재). 〔공소 시대〕 안성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이미 박 해 시대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전후해서는 이웃의 죽산(竹山)과 안성군 소촌만면(所村萬面, 현 대덕 면)의 모산리와 명당리, 서리면(西里面, 현 안성읍)의 계 촌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들 공동체는 박해로 와 해되어 버렸고, 훗날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다른 지역에 서 이주해 온 신자들이 모여 새로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 다. 기록에서 이들 교우촌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83년으로, 당시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지역을 담당하 던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가 그 해 안성 지역을 방문 하고 '바울 공소' (현 안성군 미양면 馬山里의 岩洞)를 설립 하였다. 두세 신부는 이때 죽산과 직산(稷山) 등지에도 공소를 설립하였고, 다음해에는 '궁말 공소' (현 충남 천안 군 성환읍 安宮里)를, 1887년에는 '선바위 공소' (현 안성군 금광면 梧山里의 立岩)를 설립하였다. 이후 안성 지역은 수원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 있던 앙드레(André, 安學古) 신부, 충청도 간양골 본당(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 間良里)의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 가 차례로, 혹은 지역별로 사목을 맡게 되면서 공소가 확 대되었다. 그러다가 1895년 공세리 본당이 설립된 뒤에 는 그 초대 주임인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천 안 · 직산 · 진천 등과 함께 안성 지역의 공소들을 순방하 였으며, 1896년 경기도 미리내 본당이 설립된 뒤에는 이곳의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가 안성 북쪽 일부 지역을 맡아보았다. 또 1900년 1월에는 제8대 조선교구 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이 지역을 방문하였는 데, 당시 안성 일대의 신자수는 7~8개 공소에 모두 350명 가량이었다. 〔본당 설립과 정착〕 안성 지역의 신자들이 본당 설립 운동을 펴게 된 것은 뮈텔 주교가 이곳을 방문한 뒤였다. 당시 이 지역의 신앙 중심지는 바울 공소와 질구비 공소 (현 안성군 미양면 後坪里), 갈전리 공소(현 안성군 미양면 葛 田里) 등지였으며, 안성읍에는 한 가족만이 거주하고 있 었다. 그러나 장차 설립될 본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읍 내에 성당과 사제관이 건립되어야만 했고, 이에 신자들 은 드비즈 신부와 협의하여 구포리에 있던 현재의 성당 터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있던 기와집 21칸을 성당(8 칸)으로 개조한 다음, 1900년 9월 드비즈 신부의 집전 아래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본 여건이 갖 추어지게 되자 드비즈 신부는 즉시 뮈텔 주교에게 서한 을 보내 본당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 였고, 그 결과 1900년 10월 19일자로 안성 본당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大學 이때 뮈텔 주교가 안성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한 사람은 10월 9일 동생 인 공베르(1.Gombert,孔安世) 신부와 함 께 조선에 입국한 형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신부였다. 당시 그는 한국말을 배우기도 전에 본당에 부임했으므로 첫 해에는 드비즈 신부가 계속 공소 순방 을 해주었고, 이듬해 가을부터 비로소 공베르 신부 자신이 공소 순방에 나서 게 되었다. 초창기 안성 본당의 관할 구 역은 지금의 안성군, 평택군, 천안군, 진천군 등으로 공소수는 모두 19개소 였고, 신자수는 600여 명이었다. 공베 르 신부는 이후 1909년 1월, 사립 초등 학교인 안법 학교(安法學校, 현 안법고등 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자비로 운영하 기 시작하였으며, 일제 초기인 1912년 에 여자부를 함께 신설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교사 수녀 2명을 초 빙하였다. 이 수녀회에서는 이후 현재 까지 본당의 전교를 돕고 있다. 또 공베 르 신부는 1919년 3 · 1 운동 때에는 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쫓기던 사람 들을 성당 안으로 들여보내고, 사제관 앞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뒤 치외 법 권을 주장하며 왜경의 성당 진입을 막 아 피신한 사람들을 보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 답을 매입하여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고, 흉년이 들면 사람들 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 구제 활동도 벌였다. 한편 공베르 신부는 여러 해 동안 성당 신축 기금을 모 금해 왔는데, 1922년에 어느 정도 기금이 모아지게 되 자 신자들의 협력을 얻어 3월에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 다. 그리고 10월 4일 서울교구의 보좌 주교로 있던 드브 레(Devred, 俞世俊) 주교의 집전으로 성당 봉헌식을 거행 하였다. 이 성당(건평 80평, 경기도 기념물 82호)은 한식(내 부)과 바실리카 양식(외부)을 절충한 형태로, 초기 성당 사에서 나타나는 토착화의 양식을 잘 반영하였다. 당시 공베르 신부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의 설계를 토 대로 중국인 기술자의 힘을 빌려 이를 완공하였는데, 기 와와 돌 등은 안성군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유교 강당을 헌 자료를 이용하였고, 목재는 압록강변과 서산 지방의 것을 이용하였다. 그는 또 2년 뒤인 1924년 1월, 안법 학교 개교 15주년을 맞아 '안성 천주교 소년회' 를 창립 하였다. 〔성장과 분할〕 공베르 신부는 당시 안성 일대뿐만 아 니라 천안군 목천면 일부, 진천군 백곡면 일부, 평택과 그 인근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중 1914년 행정 구 역이 개편되면서 진위(振威) 군청이 자리잡게 된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인근의 통복(通伏) 공소가 장차 발전 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공베르 신부는 1926 년 12월 6일부터 수원군 태장면 병점(餠店, 본래 갓등이 본당 소속)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 활동을 하던 몰리마르 (Molimard, 牟) 신부와 협의하여 현 평택 성당 위치에 부 지를 매입하고, 1928년 초 몰리마르 신부를 이곳으로 이전토록 하였다. 이로써 '평택 본당' 은 안성 본당에서 분할된 최초의 자본당이 되었다. 그러다가 공베르 신부 는 1932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고, 미리 내 본당에 있던 뤼카(프란치스코) 신부가 제2대 주임으 로 부임하였다가 1934년 6월 28일에 사망함으로써 그 해 8월, 황해도 은율 본당에 있던 이순성(안드레아) 신 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이후 본당은 여러 신부가 거쳐 가면서 어느 본당 못지 않은 성장을 보게 되었다. 우선 이순성 신부는 본당에 부 임한 뒤 냉담자 회두, 외교인 입교 권면, 상가 방문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오늘날의 레지오 마리애나 연령회 와 비슷한 '예수 성심 전교회' 를 창설하였다. 또 제4대 이복영(요셉) 신부는 1936년 안법 학교 교사를 증축하 고 4년제에서 6년제 초등 학교로 발전시켰으며, 다음해 4월 16일 정규 보통 학교로 인가받았다. 제7대 김제근 (토마스) 신부는 1947년 9월 안법중학교를 인가받아 개 교하였고, 제8대 임세빈(요셉) 신부는 1950년 4월 교사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 공사는 6 · 25 동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임 신부가 제10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 여 1954년 10월 연건평 258평의 2층 벽돌 교사로 준공 하게 되었다. 임 신부는 다음해 고딕식 벽돌조로 종탑부 를 증축하고 독일에서 주문한 종을 설치하였다. 이 무렵 본당 소속인 갈전리 공소의 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제12대 정욱진(토마 스 아퀴나스) 신부 때부터 본격적인 준비 작업을 시작하 여 1959년 11월 '갈전리 본당' (葛田里本堂)으로 독립 함으로써 안성읍 남쪽의 미양면 대부분 지역이 신설 본 당으로 편입되었다. 이어 제15대 강주희(방그라시오) 신부 재임기인 1963년 3월에는 옛 안법보통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소화 유치원' (현 안법 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63년 10월 7일 수원교구 설정으로 본당이 서울대교 구에서 새 교구로 편입되었으며, 1966년 1월에는 안법 학교의 경영을 교구에서 맡게 되었다. 1970년 7월 20일, 안성 본당은 다시 한번 분할됨과 동시에 그 명칭이 '구포동 본당' 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분리 신설된 본당은 '대천동 본당 (大泉洞本堂)으로, 여 기서는 안성읍 서쪽과 군내의 서북쪽 지역을 관할하였 다. 이어 제21대 주임 이정운(베드로) 신부는 1975년 10월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다음해 '죽산 순교자 기념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 를 조직하여 이를 추진해 나갔는 데, 1981년 11월 5일에 죽산 공소가 준본당으로 승격 (1983년 7월 22일 본당으로 승격)됨으로써 본당은 모두 4 개의 자본당을 갖게 되었다. 이후 본당에서는 1985년 6 월 기존의 성당이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제24대 서명석(안드레아) 신부 재임 때인 1987년 11월 문화재 보수 사업에 의해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 다. 그리고 1992년 1월 27일 금광면의 '던지실 본당' 이 분리 신설됨으로써 본당의 관할 구역이 현재와 같이 축 소되었다. (→ 수원교구) ※ 참고문헌  《경향잡지》 504호(1922. 10), 988호(1947. . 2)/ 安城 天 主教會史 編纂委員會 편, 《天主教 安城敎會 發展史 資料》 1집(타자 본), 1979/ 《교회와 역사》 192호(1991. 5), 한국교회사연구소/ 천주교 수원교구, 《수원교구 30년사》, 1993.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