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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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Ordo Fratrum Minorum(O.F.M.) · [영]Order of Friars 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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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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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의 여러 형제 자매들에게 인준받은 수도 규칙을 주는 프란치스코 성인.
1209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i, 1181/1182?~1226)가 설립한 수도회. '작은 형제회' 라고도 불리며, 총본부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고 한국 관구의 본원은 서울 중구 정동 17번지에 있다. 〔설립과 변천〕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분방하고 야심 많은 청년기를 보내던 중 일련의 계시와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도와 보속의 회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모범에 감명을 받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하였고,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많아져 결국 공동 생활의 필요성이 대두하여 1209년 교황 인노천시오 3세(1998~1216)로부터 간단한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았다. 그리고 1223년에 회칙을 재작성하여 교황 호노리오 3세(1216~1227)로부터 대칙서로 인준받았다. 이것이 오늘날 프란치스코회 회원들 생활의 기초가 되고 있는 '인준받은 수도 규칙' (Regula Bullata)이다. 프란치스코는 철저히 복음적 삶에 투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가난과 겸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였다. 그렇기에 당시의 여러 수도회들과는 달리 수도 회의 명칭을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 (Ordo Fratrum Minorum : 한국에서는 '작은 형제회' 라고 칭함)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작음의 정신을 기초로 한 회원들 서로 간의 형제성을 중요시하였고, 공동체(communias)라는 말 대신 형제체(兄弟體, fraternitas)라는 말을 사용하여 형제들의 공동성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1211년에는 관상 수녀회로서 제2회인 '글라라회' (Ordo Sanctae Clarae)를, 1221년에는 평신도들을 위해 제3회인 '재속 프란치스코회'(Ordo Franciscanus Saecularis)를 세워 많은 형제 자매들이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철저히 겸 손의 길을 걸었으며, 1224년 라 베르나(La Verna) 산에서 깊은 관상과 기도 끝에 오상(五傷)까지 받은 그의 신심은 많은 이들을 복음적 생활로 이끌어 왔다.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사후부터 회칙 준수와 가난의 삶과 관련하여 내부의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14 세기와 15세기는 많은 수도회들이 두 가지 중요한 경향으로 특징지어졌는데, 특히 프란치스코회에서는 더욱더심하였다. 한쪽은 공동체주의(Conventualism)이고, 다른 한쪽은 회칙 준수주의(Observance)로 알려진 개혁 운동이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교황 레오 10세(1513~1521)의 칙서 <이테 보스>(Ite vos)로 1517년에 프란치스코회는 회칙 준수의 프란치스코회(Friars Minor of the Regular Observance)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Friars Minor Conventuals)로 갈라졌다. 그 후 새로운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카푸친 개혁 운동이며 회칙 준수의 작은 형제들과 꼰벤뚜알 작은 형제들에서부터 새롭게 분리된 개혁 운동 그룹이다. 여러 과정을 겪다가 1619년 1월 23일 카푸친 작은 형제회(Ordinis Fratrum Minorum Capuccinorum)는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의 교황 칙서 <알리아스 펠리치스 레코르다시오니스)(Alias felicis recordationis)로 자치 수도회의 지위를 얻게 되어 끈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서 분리되었다. 그 후 회칙 준수의 프란치스코회 계열에서도 많은 개혁파가 나타났는데, 이 모든 개혁파들은 1897년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 교황 레오 13세(1878~1903)의 회칙 <펠리치타테 궤담>(Felicitate Quadam)에 의해 공식적으로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 (Ordo Fratrum Minomum)이라는 이름하에 한 가족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치를 이룬 하나의 프란치스코회 가족이 바로 오늘날의 작은 형제회이다. 〔학문 연구 활동〕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여러 대학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이 이런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3세기 말에 이르러 프란치스코회는 세계에서 가장 박식한 수도회들 중의 하나가 되었고, 교수(lector)들을 위한 부서는 수도회에서 인정된 부서들 중 하나가 되었다. 모든 수도원들은 회원들의 공부를 위한 집으로 봉헌되었는데, 특히 유럽의 대학가에 위치해 있던 수도원들이 그랬다. 1224년 영국에 도착한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1229년에 옥스퍼드(Oxford)에 그들의 학교를 가졌다. 또한 1219년 파리에 도착한 회원들은 1229년에 자신들의 고유한 학교를 독립적으로 갖게 되었다. 이 두 지역에서 그들은 대학의 일반 학자들과 접촉하였는데, 그들은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 회원들과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자신들의 출세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다. 실제로 탁발 수도회 회원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적당한 교수들과 학생들, 강의 그리고 평판을 가진 일종의 대학(universtas)을 갖고 있었다. 도미니코회 회원들과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할레의 알렉산더(Alexander Halesius, 1185?~1245)와 같은 몇몇 일반 학자들이 회원이 되자 대학에서 일정 영역을 획득하게 되었다. 1250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는 파리 대학에 학자들이 될 자격들을 갖춘 수도회원들에게 '교수 자격' (licentia docendi)을 주라고 지시하였다. 그로 인해 일반 학자들과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학자들 간의 논쟁이 있었지만,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 등의 탁발 수도회 학자들이 이 논쟁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할레의 알렉산더는 1236년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되면서 많은 학생들을 프란치스코회에 데려왔는데, 이 학생들 중에는 장(Jean de la Rochelle, ?~1245), 리고(Eudes Rigaud, 1215~1275), 멜리토나의 월리엄(William of Melitona) 그리고 보나벤투라가 끼어 있었다. 이 학생들이 후에 실질적으로 그를 계승한 교수들이 되었다. 파리의 프란치스코회 교수들은 교회와 수도회 내의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을하였다. 존 페컴(John Peckham,1220/1225?~1292)은 1279년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가 되었고, 보나벤투라와 마태오 다콰스파르타(Matteo d'Aquasparta), 아를로토 다 프라토(Arlotto da Prato)와 조반니 다 무로발레(Giovanni da Murrovalle)는 수도회의 총장(총봉사자)이, 그리고 피에르 장 올리외(Pierre Jean Olieu, Peter John Olivi, 1248?~1296)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옥스퍼드에서 프란치스코회 학파는 당시 영국 관구의 관구장이었던 알베르토 다 피사(Alberto da Pisa)의 개인적 관심과 1235년에 링컨(Lincoln)의 교구장이 된 그로스테스테(Robert Grosseteste, 1175?~1253)의 박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그로스테스테는 1229~1235년까지 프란치스코회 학파를 이끌었으며, 후에 수도회원들에게 자신의 많은 책을 남겼다. 옥스퍼드의 유명한 프란치스코회 교수들로는 마시(Adam Marsh), 요크(York)의 토머스(Thomas) , 미들타운(Middletown)의 리처드(Richard), 오컴(William of Ockham, 1285~1349), 베이컨(Roger Bacon, 1220?~1292) 등을 들 수 있다. 1225년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케임브리지(Cambridge)에 도착하여 1230년에 학교를 시작하였다. 파도바의 안토니오(Antonius Patavii, 1195~1231)는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수도회원들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파베르샴(Faversham)의 하이모(Haymo)와 파르마(Parma)의 요한도 이곳에서 교수로 있었는데, 이곳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은 신학부가 없던 이 대학에서 독립되어 있었다. 이 외의 다른 학자들은 1222년부터 파도바 대학에서 가르쳤다. 독일 쾰른(Köln)의 프란치스코회도 학생 수도원을 갖고 있었는데, 스코투스(Joannes Duns Scotus, 1265/1266~1308)는 얼마 동안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선교 활동〕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교회의 선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프란치스코회의 선교 역사는 수도회의 빛나는 업적들 중 하나이다. 프란치스코는 수도 규칙에 선교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첫 번째 설립자였으며 회원들은 선교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08년 미사 중에 예수의 제자 파견 복음을 듣고 이를 자신의 생활 근간으로 삼았다. 그로 인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나그네와 같이 세상을 두루 다니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 회원들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도미니코회와 더불어 프란치스코회는 선교에 있어서 각별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슬람 지역과 아메리카 대륙의 선교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13~14세기의 유럽은 극심한위험 속에 있었다. 당시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와 팔레스티나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였는데, 이러한 위험에서 모면하기 위해 교회는 십자군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팔레스티나의 성지는 이미 공격을 받아 잃은 상태였으며 예루살렘의 라틴 제국은 1세기도 채 유지하지 못하였다(1099~1187). 1세기 후인 1291년에 팔레스티나와 아크레(Acre)에 있던 그리스도교 요새도 함락되었다. 하지만 무력으로정복하는 것은 정치적 · 종교적으로 더 이상 해결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들이 등장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방안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이교도들' (infidels)과 평화스런 방법으로 대화하고 공존하는 것이었다. 1219~1220년에 프란치스코는 평화의 사절이 되어 동방으로 갔다. 당시 그는 홀로 전쟁터에 들어가 술탄 말리크 알 카밀(Malikal-Kamil)을 만나 평화의 대화를 하였다. 팔레스티나 성지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머물기 시작한 것은 1217년부터였으며, 이때 엘리아(Elias di Cortona)를 관구 봉사자로 하는 시리아 관구가 설립되었다. 1229년까지 회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5처 인근에 작은 집을 갖고 있었다. 1272년에 술탄 비브라스(Bibras)는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에게 시온 산에 있는 최후 만찬 장소(Cenaculum)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1309년에는 회원들이 성묘(Holy Sepulcher)와 베들레헴에 정착하였고, 1335년에는 나폴리의 왕 로베르토(Roberto d'Angio, 1309~1343)와 그의 부인 산치아(Sancia di Maiorca)가 예수의 최후 만찬 장소를 매입하여 프란치스코회에 기증하였다. 교황 글레멘스 6세(1342~1352)는 회칙 <그라치아스 아지무스>(Gratias agimus, 1342)와 <누페르 카리시매>(Nuper charissimae, 1342)를 통해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을 성지의 공식적인 수호자로 선언하였다.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이 해를 성지 속관구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해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선교는 프란치스코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으며, 성지에서의 순교는 1391년 니콜라오(Nicolaus Tabelic)와 동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1552년 예수의 최후 만찬 장소에서 추방되었지만, 같은 세기 동안 성지의 다른 곳들에 정착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1219년 북부 아프리카에 진출하였다. 이 해에 에지디오(Aegidius) 수사가 튀니스(Tunis)로 갔고, 1219년에는 6명의 회원들이 스페인과 모로코를 향해 출발하였다. 이들의 지도자인 비탈리스(Vitalis)는 병 때문에 스페인에 남았고, 베라르도(Berardus)와 다른 4명은 포르투갈을 거쳐 모로코까지 갔다. 그들은 1220년 1월 16일 모로코의 마라케시(Marakec)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코임브라(Coimbra)로 옮겨졌는데, 당시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 회원이었던 리스본(Lisbon) 출신의 안토니오는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감동하여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다. 그가 바로 가장 대중적인 성인들 중 하나인 파도바의 안토니오이다. 몇 년후 칼라브리아(Calabia) 출신인 다니엘(Daniel)이 이끄는 6명의 회원들이 체투아(Cetua)에서 순교하였다. 이 당시에 새로운 위험이 아시아로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몽골 제국의 유럽 진출은 그리스도교 제국이던 유럽에는 대단한 위험이었다. 1206년 칭기즈 칸(Chinggis Khan, 1206~1227)은 중국과 인도 북서부, 아프가니스탄, 그루지야(Gruziya) 그리고 남부 러시아를 정복하였고, 1222년에는 헝가리와 폴란드 그리고 아드리아 해까지 점령하였다. 교황 인노천시오 4세(1243~1254)는 몽골인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외교 관계를 맺기로 결심하였다. 이를 위해 교황은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피안 델 카르피네의 요한(Giovani di Pian del Carpine, 1190?~1252)을 자신의 개인 대사로 선택하였다. 1245~1246년에 그는 당시 몽골 제국의 칸인 구유크 칸(Guyug Khan, 1246~1248)을 만나기 위해 비단길(silk road)을 지나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Kamalomm)으로 갔다. 구유크 칸은 1247년에 개인적인 편지를 써서 그를 교황에게 돌려보냈다. 피안 델 카르피네의 요한은 몽골 제국의 수도를 다녀온 여정에 관한 일지인 <몽골의 역사》(Historia Mongalorum quos nos tartaros appellamus)를 썼는데, 이후에 몽골 제국이 지배하는 중국으로 떠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도 이와 같은 일지를 작성하였다. 극동 지방을 방문한 또 다른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는 빌렘(Willem van Ruysbroeck, 1215?~1295?)인데, 그는 1253년에 콘스탄티노플과 크림 반도를 거쳐 극동 지방으로 떠났다. 카라코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제국 내에 많은 수의 경교(景敎) 신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4대 칸인 문크 칸(Munkh Khan, 1251~1258)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자신을 파견하였던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에게 바치는 <여행기>((funerarium)를 기록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에도 정착하였다. 또 다른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Johannes de Monte Corvino, 1247~1328)이 교황 사절로 원나라 황제인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 1260~1294)에게 파견되었다. 그는 1291년에 페르시아 만에서 인도까지 간 후,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는 길을 택하였다. 칸발리크(Khanbaliq, 현 북경)에서 쿠빌라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새로운 황제인 테무르(Temür, 1295~1307)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은 이 도시에서 34년 동안 머물렀으며, 중국 가톨릭 교회의 설립자로 여겨지고 있다. 1307년에 그는 북경을 주교좌로 하는 극동 지역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포르데노네의 오도리코(Odorico of Pordenone, 1286?~1331)는 1322년 사해, 아르메니아, 페르시아를 거친 다음, 호르무즈(Hormuz)에서 바다로 원나라까지 갔다. 칸발리크에 도착하여 6년 동안 머무른 후, 그는 티베트와 파미르(Pamir) 고원을 거쳐 되돌아오는 길에 《여행기》를 썼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활동한 프란치스코회 회원들 중 마지막 선교사는 마리놀리(Giovanni dei Marignolli, 1290?~1357?)였다. 그는 1339년 교황 베네딕도 12세(1334~1342)의 사절로서 고대 북중국(Cathay) 왕국으로 파견되었다가 1347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아메리카 대륙 선교에서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의 활동은 대륙 발견 즉시 시작되었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란치스코회의 선교는 신대륙 정복자들과의 이해 관계와 얽혀 다소 부정적인 측면들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원주민들의 문화와 인권을 보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회원들은 원주민들의 언어로 책을 발행하고 원주민들이 연대기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등 그곳 원주민들 편에 서서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주민들의 전통 토착 종교에 대한 배려 없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교만을 중심으로 이런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설립 이후 현재까지 약 800년에 달하는 역사를 통해서 프란치스코회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을 배출하였다. 현재 프란치스코회는 전세계 100여 개국에 20,000여명의 회원들이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회나 프란치스코회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도회의 수나 회원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영 성〕 프란치스코회의 영성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복음적 ·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 : '육화의 영성' 이라고도 하는 이 영성은, 모든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따라 사는 것' 이다. 프란치스코는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 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 (2회칙 1, 1)으로 제시하며,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정주적(定住的)인 수도승의 양식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예수와 사도들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순회하며 설교하는 생활을 수도 생활의 기본으로 삼았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먼저 자신들이 회개하고 그러한 증거의 삶을 보이며 다른 사람들을 회개로 초대하는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회 학자들은 육화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하느님의 전적이고 자발적인 의지에 의 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은 이러한 육화의 영성에서 기인하였다. 사랑은 '내려가는' 속성을 지닌 것으로, 작은 자가 되는 것은 내려감의, 즉 육화의 영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또한 궁극적인 행복, 즉 영원한 생명을 향한 근본이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육화는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안에서 재현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체성사가 프란치스코회 영성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형제들에게 주는 권고 1번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삼위 일체 중심적 영성 :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면서도 사랑으로 완전한 삼위를 이룬다는 삼위 일체에 대한 믿음은 프란치스코 공동체의 모델이다. 이 세 위격이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전능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이 드러나듯이, 개인이 고유하게 지닌 유일무이한 소중성 역시 수도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할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이 드러난다. 사도적 · 선교적 영성 : 프란치스코는 성직자 중심의 수도 생활 양식과 수도자 중심의 생활 양식을 벗어나 귀족, 평민 모두에게 수도 생활을 개방하였다. 이후 그는 여자들을 위한 공동체인 글라라 수녀회를 설립하였고, 평신도들의 프란치스코적인 생활을 위해 제3회인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여 평신도들의 수도 생활을 도왔다. 이리하여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을 실현에 옮긴 셈이다. 프란치스코회의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생활이다. 프란치스코는 시초부터 자신의 성소가 올바른 것인지를 교회가 가려 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초기 회원들이 선택한 생활 양식을 교황으로부터 인준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도들을 주축으로 삼아 세운 것이기에 교회를 통해서 확인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삶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회원들이 교회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최대한의 존경과 사랑을 드리라고 명하였으며, 입회의 조건에서도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성사 에 대한 시험을 전제로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수도 규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형제들은 거룩한 교회의 발 아래 항상 매여 순종함으로써, 가톨릭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가 굳게 서약한 가난과 겸손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도록 합시다" (2회칙 12, 4).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는 어떤 사업이나 거창한 활동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삶으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요 회개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사실 프란치스코회는 어떤 사업이나 고유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도 근본적으로 복음을 삶으로써 그 삶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생활 혹은 삶' 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하며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 삶을 통해 스스로 복음화되고 또 복음화시키는 것이 프란치스코회의 일차적인 과제이다.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부름을 받은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선교에앞장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란치스코회의 선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사적으로 의의를 갖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무슬림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홀로 동방으로 건너가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전한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프란치스코회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교황청이 인정하고 있으며, 무슬림들도 프란치스코회 회원들만을 가톨릭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지의 선교를 활성화하고 있다.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 : 프란치스코회 영성은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 복음적 삶을영위하는 것이다. '작음' 의 정신은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어,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가난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언제나 하느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간다. '형제애' 의 정신은 사랑과 순명을 전제로 한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 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 으로서,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된다. 바로 이 우주적인 형제,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코회 형제애의 본질이다. 〔한국 진출과 발전〕 프란치스코회는 1928년 일본에 진출해 있던 캐나다 성 요셉 관구의 회원들이 한국 사제단의 피정 지도를 위해 입국하면서 한국 교회와의 접촉을 시작하였다. 캐나다 관구의 르블랑(Ambroise Leblanc)수사가 1936년 11월 일본 지부장으로 임명되면서 캐나다 성 요셉 관구가 프란치스코회의 한국 진출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한국 진출 책임자로 드기르(Jean-Joseph Deguire, 都 요한) 수사가 임명되었다. 이듬해 4월 16일 드기르 수사는 당시 서울 대목구장이었던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를 만나 프란치스코회의 한국 진출에 대해 논의하였고, 그 결과 라리보 주교는 4월 22일 서울 대목구 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대전에 사제들을 위한 피정의 집을 설립해 줄 것을 수도회에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캐나다 관구 소속의 드기르와 벨로즈(Justn-M. Bellerose, 裵)가 1937년 9월 15일 입국하여 현 대전 용두동 인근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8년 12월 대전 목동에 한국 최초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인 '천사들의 성 마리아 수도원' 을 개원하여 축복식을 갖고, 이듬해 대흥동에 부지를 매입하여 4월부터 대흥유치원을 개원하였다. 하지만 1940년 일본에 반영(反英) 운동이 확산되고 캐나다가 영연방(英聯邦)에 속해 있었기에 유치원도 공격의 대상이 되자, 당시 일본에 있던 성 마리아 방문 수녀회에 유치원의 운영을 넘겼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으로 1941년 12월 일본과 캐나다 사이에 전쟁이 선포되자, 수사들은 전쟁 포로로 수도원의 도서실에 감금되었다가 1942년 7월 1일 공주에 가택연금됨으로써 수도원 활동이 중단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되자, 수사들은 풀려난 후 대전으 로 돌아가 수도 생활의 터전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코미에르(Pierre Cormier, 고) 수사가 1946년 1월 사망하고 데로시에(Adjutor Desrosiers, 노), 벨로즈 수사도 1947년과 1949년에 차례로 캐나다로 돌아감으로써 한국에서의 프란치스코회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캐나다 관구장 블레(Hervé Blais)가 1949년 10~12월 한국과 일본을 방문한 후 두 가지 사항을 결정하였다. 하나는 대전을 일본 지부로부터 독립시켜 캐나다 관구 관리에 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새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50년 3명의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6월 23일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이틀 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이들은 다시 귀환하였다. 캐나다 관구에서는 한국의 정세가 너무 불투명하고 어려움이 많아 선교지로서 희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 회원들의 철수를 신중히 고려하였다. 결국 1954년 캐나다 성 요셉 관구 회의는 한국 선교를 포기하고 일본과 페루의 선교지에 치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수도회 총본부의 세핀스키(Augusin Sepinski) 총장이 한국 선교를 계속하도록 요청하여 1955년 벨로즈 수사가 세 번째로한국에 재입국하여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과 대전 수도원의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같은 해 12월 이탈리아 선교단이 거제도에 진출하였는데, 이 선교단의 책임자는 이탈리아 제노바 관구 소속의 주포니(Constanzo Giupponi) 형제였다. 1957년 대구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부산 대목구가 신설되었고, 최재선(崔在善, 요한) 주교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최 주교는 거제도에 있던 수도회를 진주로 옮길 것을 제안하였고, 주포니 수사는 1957년 6월 진주로 사목지를 옮겼다. 제노바 관구의 회원들이 계획하고 추진하였던 많은 활동들 중 가장 두드러진 사업은 나환우 마을 사목이었다. 진주에서 회원들은 시내 근교의 나환우 집단 수용 시설인 구생원에 관심을 갖게 되어 물질적으로 도우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주포니 수사는 1959년 산청군 산청읍 내리 91번지 토지를 매입하고, 구생원의 장로교 고신파와의 갈등 속에 있던 18명의 나환자를 입주시켜 성심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61년 8월 '성심 인애병원' 의 완공과 함께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의 개설 인가를 받아 여러 시설들을 확충시켜 나갔다. 1961년 10월 13일에는 당시 일본과 한국의 총장 대리였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van Leeuwen)의 소집으로 프란치스코회 한국 지부의 첫 참사 회의가 진주 칠암동 수도원에서 개최되었다. 아폴리나리스 수사는 1963년 11월 한국만을 위한 총장 대리로 임명되어 그해 12월 부산으로 입국한 후 서울 정동의 임시 수도원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에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63년 6월 정동 17번지의 대지 723평을 매입하여 이듬해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재단 법인을 설립하였으며, 1965년 9월 현 수도회 본부인 정동 수도원을 완공,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69년 10월 4일에는 프란치스코회 한국 지부가 한국 순교 복자 준관구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관구장에 총장 대리였던 아폴리나리스 신부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1971년 7월 28일 서울 성북동에 최초의 양성(養成) 공동체인 평화의 모후 신학원을 설립하였고, 1974년 6월 6월에는 진주에 성 프란치스코 양로원을 준공하였다. 1984년 9월에는 서울 정동에 제2 신학원을 설립하고 유기 서약자들이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였으며, 1987년 7월 13~16일 관구 설립 5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돗자리 총회' 를 산청 성심원 교육관에서 개최하였다. 같은 해 12월 10일 한국 진출 50주년을 맞아 로마 총본부로부터 정식 관구(한국 순교 성인 관구)로 인가 받았고, 초대 관구 봉사자(총장)로 이종한(李宗漢, 요한) 형제가 선임되었다. 〔성장과 사도직 활동〕 프란치스코회의 '작음' 과 '형제애' 의 영성은 가난과 겸손을 실천하고 사랑과 순명을 형제들에게 베푸는 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형제들은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일치를 이루면서 복음과 형제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수도회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은 사회 복지 활동으로, 이것은 나환우들을 위한 시설인 경남 산청 성심원에서부터 시작된다. 현재 성심원은 병원과 성당 외에 보육소, 초등학교, 신협 등의 부대 시설을 갖추고 하나의 부락을 형성하여 자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공동체로 운영되고 있다. 이와 함께 프란치스코회는 1988년 8월부터 청량리 빈민 식당인 '프란치스코의 집' 을 운영하였는데, 1992년 9월부터는 제기동으로 이전 · 운영되고 있다. 또 행려자들을 위한 빈민 식당인 '베들레헴의 집' 을 1990년 7월부터 서울대교구의 요청을 받아 용산구 신계동에서 운영하고 있다. 노인 복지에도 힘을 기울여 온 수도회는 그동안 양로원으로 운영되던 진주의 프란치스코 양로원을 폐쇄하고, 1992년 4월 '소년 마을' 자리인 진주 하대동에 노인 요양원 프란치스코의 집' 을 신축하였다. 특히 1998년 6월부터 운영하고 있는 전남 장성의 노인 종합 복지 시설 '프란치스코의 집' 은 요양 시설과 재가 시설을 지역 사회에 개방하여 지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2002년 10월부터는 춘천교구로부터 위탁을 받아 성인 정신 지체 장애 시설인 '강릉 애지람' 을 운영하고 있다. 이 외에도 수도회는 선교 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1991년부터 시작된 순회 선교 공동체이다. 순회 선교 공동체는 사목의 손길이 다가서기 어려운 농어촌 지역에 몇 년씩 머물며 그 지역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사목 활동을 하는 것인데, 1993년 광주대교구로부터 진출 허가를 받아 1996년 10월 17일 전남 보길도에 처음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997년 8월 31일에는 춘천교구 주문진 본당을 교구로 이양하고 사목적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강릉 지역에 파출 사목 공동체(성 파스칼 수도원)를 설립하였다. 또한 본당 사목을 위해 인천 석남동, 수원 세류동, 대전 목동, 진주 칠암동, 부산 봉래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교육 사도직 분야로는 프란치스코 교육 회관에서 '직장인 피정' , '제3회 피정'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피정, 세미나 등을 열어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다. 관구로 설정된 이후에는 프란치스코 가족들의 연대를 위해 '프란치스칸 가족 수도회 장상 협의회' 의 구성에 힘썼고, 대외적으로는 '남자 수도회 장상 연합회' 에서 일하면서 수도회의 위상을 높였다. 1997년 1월 14~18일 개최된 관구 회의에서는 수도회의 공식 명칭을 '프란치스코회' 에서 '작은 형제회' 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고, 해외 선교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7월 21~25일에는 작은 형제회 한국 진출 60주년을 맞아 산청 성심원 교육관에서 '돗자리 총회' 를 개최하였다. 1999년 1월에는 정동 수도원에 있었던 유기 서약소를 성북동으로 이전하였고, 성북동의 청원소를 1월 11일 평창동의 '안토니오 수도원' 으로 이전함으로써 청원소, 수련소, 유기 서약소가 각각 독립된 수도원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2000년 1월에는 관구 회의를 통해 총본부와 협력하여 선교할 주선교지로 러시아 동부를 선정하였다. 현재 러시아에 3, 중국에 1, 카자흐스탄에 1명의 선교사가 파견되어 있으며, 일본 오사카 지역에 교포 사목을 위해 1명의 수사가 파견되어 있다. 2003년 12월 31일 현재 프란치스코회에는 종신 서약자 117, 유기 서약자 22, 수련자 11명 등 총 139명이 있다. (⇦ 작은 형제회 ; → 경교 ;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 베르나르디노, 시에나의 ; 보나벤투라 ; 비엔 공의회 ; 선교회 ; 수도 규칙서 ; 스코투스, 요한네스 둔스 ; 식스토 5세 ; 안토니오, 파도바의 ; 알렉산더, 할레의 ; 오컴, 월리엄의 ; 요한, 몬테 코르비노의 ; 중국 ; 토마스 아퀴나스 ; 카푸친 작은 형제회 ;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 프란치스코회 학파) ※ 참고문헌 작은 형제회 한국 순교 성인 관구, 《한국의 작은 형제들》, 가톨릭출판사, 2000/ 호세 메리노, 김현태 역, 《프란치스칸 휴머니즘과 현대 사상》,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2/ -, 김현태 역, 《프란치스칸 사상에 비추어 본 인간을 위한 미래 건설》, 분도출판사, 1990/ 안셀모 롬, 권숙애 역, 《교회 안에서의 프란치스칸 카리스마》, 대건출판사, 1989/ 작은 형제회 한국 관구 수련소, 《작은 형제회의 역사(제1부 : 1517년까지의 역사)》. [扈明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