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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프랑스 교회 개혁을 위한 물결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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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프랑스 교회 개혁을 위한 물결이 일어났다.

서유럽 최대의 국가로, 공식명은 프랑스 공화국(République Francaise)이며 수도는 파리(Paris)이다. 북동쪽으로는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접해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영국 해협,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비스케이(Biscay) 만, 남쪽으로는 스페인과 지중해, 동쪽으로는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와 이웃하고 있다.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을 포함한다. 면적은 547,030K㎡, 인구는 60,656,178명(2005)이다. 국교는 없지만 전체 인구의 88%가 가톨릭 신자이며, 이 외에 프로테스탄트(2%), 유대교(1%), 이슬람(5%), 기타 종교를(4%) 믿는 이들이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며, 공화제와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1801년까지는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였지만, 이후 인구 증가율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낮아져 1980년대까지 장기적인 인구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출생률이 감소하였다. 그러나 인구 회복을 위한 정부의 정책이 1990년대부터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기 시작해, 2050년에는 7,500만 명 정도로 독일을 제치고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I. 기원부터 카롤링거 왕조 시대
〔고대 프랑스〕 프랑스인의 기원은 기원전 5세기경부터 북유럽 지역에서 이주한 켈트족과 지중해를 건너 이주한 그리스인, 5세기 초 서유럽 지역을 본격적으로 침입한 게르만족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로마인들이 갈리아(Gallia)라고 부른 현재의 프랑스 지역은 인구가 많고 토지가 비옥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발달하였으나, 기원전 121년부터 로마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51년에 완전히 정복되었다. 갈리아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고 안정과 평화를 확보하여 점차 로마화되었지만, 서기 3세기부터 게르만족이 공격해 오자 내분이 발생하였다. 5세기 말에 살리아 프랑크족이 루아르 강 이북을 점령하였고 서고트족은 아키텐(Aquitaine)과 프로방스(Provence)를 차지하였으며 부르군트족은 론 강 계곡에 자리잡았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481482~511)는 486년에 로마 제국의 군대를 완전히 몰아내고 갈리아를 정복하였다.
〔메로빙거 왕조〕 메로빙거 왕조(476~750)를 개막한 클로비스 1세는 496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랭스의 주교인 레미지오(Remigius de Reims, 437?~533?)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프랑크족 전사들이 대규모로 개종하도록 유도하였다. 그 결과 각 지역 그리스도교 공동체 및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511년 클로비스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세 아들은 정복을 계속하여, 536년경에 이른바 프랑크 왕국령이 형성되었다. 이후 도시와 농촌 지역에 성당이 건축되면서 주교들은 갈리아와 로마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하였으며, 교구가 보유한 상당한 세습 토지 재산에 대해 이른바 불입권(不入權, immunnitet)을 획득하였다. 이로 인해 왕들 은 주교 선출에 통제권을 행사하려고 했으며, 급기야 왕이 직접 주교를 임명하게 되었다.
629년, 다고베르트 1세(629~639)는 클로비스가 사망한 후 네 개의 소왕국으로 분할되었던 그의 광활한 영토
를 완전히 통일시켜 프랑크 왕국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는 누아용-트르네)(Noyon-Tournai)의 주교인 엘리지오 (Eligius, 588~660)의 도움을 받아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였으며 파리 근처에 생 드니(Saint-Denis) 수도원도 건립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망 이후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으며,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궁재인 피핀 (687~714) 및 그의 서자인 카를 마르텔(715~741)이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였다. 741년에 카를 마르텔이 사망하고 747년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단독 통치자가 된 그의 아들 피핀 3세(741~768)는 교황 자카리아(741~752)의 인가를 받아 독일의 사도인 보니파시오(Bonifatius, 6757~754)에게, 754년에는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에게 도유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최초로 축성받은 왕이 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750~887)가 시작되었다. 피핀은 교황에게 복종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이탈리아를 원정하여 롬바르드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함으로써 최초로 교황령을 건설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768년에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왕이된 카를 대제(768~814)는 지속적으로 군사 원정을 하여 서유럽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였으며, 800년 12월 25일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795~816)로부터 '새로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이며 황제' 로 축성되었다. 이로써 그는 이미 자신을 '왕이요 사제' (Rex et Sacer-
dos)라고 부르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카를 대제는 여러 도시들에 새로운 교회와 수도원을 건립하였으며, 수많은 학자들을 불러들여 문예 부흥을 자극하였다. 왕궁에는 젊은 성직자와 귀족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세워졌으며, 각지의 수도원과 주교좌 성당에도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체계적인 교과과정을 갖춘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라틴어는 점차 순화되어 학자들과 성직자들의 언어가 되었으며, 수도원에서는 고대 문헌을 복사하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카를 대제는 이교도 개종을 위한 선교사 파견을 지원하였으며 십일조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러한 그의 지원에 따라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각종 사회 관습을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814년 카를 대제가 사망한 후 제국은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였다. 그 와중에 동(東)프랑크는 사라졌고, 샤를 3세(893/898~923) 때 일시적으로 다시 통합되었으나 유명무실해지면서 마침내 왕마저 폐위되었다. 이후 동프랑크는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을 되찾아 훗날의 독일을 탄생시켰으며,서(西)프랑크는 프랑스 왕국이 되었다.
Ⅱ. 중세 시기의 프랑스
10세기 중엽 서프랑크 왕국은 혼란을 극복하기 시작하였다. 989년 푸아투(Poitou)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를 계 기로, 교회는 클뤼니 수도회(Ordo Cluniacensis)를 중심으로 '하느님의 평화' (Paix de Dieu), 즉 '신의 휴전' (Treuga Dei) 운동을 전개하였다. 분쟁 지역에서 교회는 평화회의를 소집하였으며, 기사들에게 폭력 행위를 줄일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종교적 의식을 통해 기사를 임명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봉사 의무를 부과하였다. 1095년 클레르몽 교회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가 예루살렘 성지 수복을 위해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자 6만 명이 넘는 보병과 4,000~5,000명의 기사가 제1차 십자군에 가담하였는데, 그중 상당수가 프랑스인이었다.
〔카페 왕조〕 카페 왕조(987~1328)의 초기 왕들은 강력한 권력을 지니지 못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제후 보다도 미약한 존재였다. 군주제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왕실 직영지는 11세기부터 확대되기 시작하였으며, 11세기 중엽 이후에야 세습에 의한 군주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왕의 대관식은 교회 예식이 되어 랭스 주교좌 성당에서 행해졌으며, 과거에 비해 폭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 활동이 부흥하였다. 대제후들은 봉토를 기초로 영지를 확대하여 그 안에서 독립적인 고유의 권력을 행사하였고, 그 결과 봉건제가 확립되었다.
한편 1000년을 전후하여 나타난 요한 묵시록에 대한 해석, 1033년의 일식과 심각한 기근으로 프랑스인들은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비록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은 내면화되지 못한 현실적인 것이었으며, 더욱이 그들은 자연과 초자연의 경계를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하였다. 재산의 증여, 성지 순례 등이 속죄의 주요 수단으로 장려되었지만, 성인의 유해에 대한 공경이 질병을 치료하고 현세적 복을 빌기 위한 것이 되어 버리는 등 종종 미신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결부되어 나타나기도 하였다.
당시의 성직자들이 이러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농촌의 성직자들은 무식하고 가난하였으며, 도시에서는 성직 매매를 통해 성직자가 된 사람들이 부정 행위로 재산을 축적하여 마치 봉건 영주처럼 행세하였기 때문이다. 클뤼니 수도회는 설립 초기에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듯한 희망을 보여 주었으나, 수도원의 재산이 증가하자 점차 청빈의 계율과 멀어졌다. 마침내 11세기 말 프랑스 교회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개혁에 힘입어 교회 쇄신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이 개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수도회였는데, 특히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Bernardus de Clairvaux, 1090~1153)는 1115년 클레르보에 새로운 수도원을 건립하고 수도승들에게 고행, 청빈, 서원의 계율을, 일반 수사에게는 육체 노동의 계율을 부과함으로써 시토회(Cistercienses)의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시토회의 쇄신 운동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300여 개의 수도원들이 이 개혁 운동에 동참하였다. 또한 12세기 초에 성전 기사 수도회(Templarii)와 의료 기사 수도회(Hospitalii)가 설립되어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후에는 성지 보호를 위한 군사 활동까지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쇄신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도파(Valdesii)와 가타리파(Cathari), 알비파(AIbigenses) 등과 같은 이단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2세기 이후 인구가 증가하여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유입되자,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사회적 분화가 촉진되었다. 13세기에 들어 새로운 탁발 수도회인 도미니코회(Dominicani, 1217)와 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1219)가 파리에 등장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보다 내면화된 종교의 옹호자로 자처하던 이 수도회들은 급속하게 확산되어, 1270년경에는 이미 프랑스에 400여 개의 수도원이 생겼다. 고딕 양식의 주교좌 성당 공사도 활발하게 벌어져, 1132년 생 드니 수도원 부속 성당의 건립이 시작된 이후 파리의 노트르담 (Notre-Dame) 주교좌 성당을 비롯하여 샤르트르(Chartres), 아미앵(Amiens), 랭스, 부르주(Bourges) 등에 주교좌 성당들이 완공되었다.
11세기 말에 경제적 팽창이 시작되면서 카페 왕조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특히 성왕(聖王) 루도비코(Ludovicus, 1226~1270)의 대관식은 왕위의 세습과 국왕이 지닌 권력의 신성함을 공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열정적인 신앙심의 소유자로 고행, 겸손, 자비를 실천하던 그가 1297년에 시성되자 카페 왕조의 위신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 1190년 이후 프랑크 왕의 칭호는 프랑스왕으로 바뀌었고, 1205년 이후에는 '프랑스 왕국' 이라는 용어가 널리 통용되었다. 1328년에 이르면 프랑스 왕국 전체 면적 중 4분의 3이 왕의 권위에 직속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군사적으로 강력해진 왕들은 다시 십자군을 조직하였지만 그 이상은 변질되었으며, 제4차 십자군의 경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olis)을 약탈하기까지 하였다. 성왕 루도비코만이 본래의 정신에 따라 두 차례 십자군을 조직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급기야 이러한 장거리 원정은 왕권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데에 장애물이 되었다. 더욱이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의 우위 문제를 놓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와 필리프 4세(1285~1314)가 대립하여, 결국 필리프 4세가 로마로 군대를 파견하여 교황을 물러나게 하고 1305년 글레멘스 5세(1305~1314)를 추대하였다. 프랑스 출신의 이 신임 교황은 1309년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농(Avignon)으로 옮겼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필리프 4세와 성전 기사 수도회 사이에서 나타났다. 1291년 이후 더이상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게 된 성전 기사 수도회는 은행 거래를 통해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는데, 1307년에 필리프 4세는 성전 기사 수도회의 정화를 명목으로 회원들을 처형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교황 글레멘스 5세는 수도회의 폐쇄를 명령하였다.
〔14~15세기의 프랑스〕 14세기 초부터 시작된 자연적 재난과 페스트의 창궐로 프랑스 왕국의 인구 3분의 1이 감소하였으며, 1420~1460년경에 인구는 최저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처럼 인구가 격감하자 농노제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358년부터 자크리(Jacquerie)의 반란과 같은 반영주적인 저항이 나타나 봉건제는 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파국으로 프랑스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영혼이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기전 연옥에 머무르며 지옥을 피하기를 희망하였다. 영혼의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 미사 봉헌을 위해 전 재산을 유증하는 경우도 나타났으며, 대사(大赦, indulgentia) 부여증인 고해성사표를 사는 경우도 있었다. 1년에 한 번 이상 영성체를 하고 고해성사를 받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성직자들은 직위에 상관없이 이러한 상황에 방관적이었다. 더욱이 아비뇽의 교황청은 프랑스 왕에 의해 움직였으며, 교황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할 뿐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1378년부터는 서구 대이교(西歐大離敎, schisma magnum occidentale)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분열되면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아비뇽의 대립 교황과 로마 교황 사이의 경쟁이 첨예화되었다. 그때부터 부분적이었지만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움직임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군주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기 시작하였는데, 1337년부터 시작된 영국과의 백년 전쟁(百年戰爭, Hundred Years' War)에서 전투에 패배하자 발루아 왕조(1328~1589)의 위신은 한없이 추락하였다. 전쟁 초기 상황은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어, 1356년 프랑스의 장 2세(Jean le Bon, 1350~1364)는 푸아티에(Poitiers)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1360년 강화조약을 맺고 평화 기간 중 어느 정도 전열을 회복한 프랑스는 다시 영국과 충돌하였고 1396년에는 잠정적인 화해가 성립되었지만, 1404년부터 전투가 재개되었다. 1429년 3월 샤를 7세(1422~1461)를 만난 이후 '동정녀'(Pucelle)라 불리게 된 아르크의 요안나(Joanna Arcensis, Jeanne d'Arc, 1412~1431)가 군대에 합류하여 오를레앙(Orléans)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부르고뉴군의 포로가 되어 영국군에게 인도되었다. 그녀는 루앙(Rouen)에서 이단 심문을 받고 1431년 5월 30일 화형에 처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샤를 7세는 그녀의 재심을 지시하였으며, 그 결과 1456년 복권되었고 1920년에 시성되었다.
Ⅲ. 종교 개혁과 절대 왕정 시대
〔종교 개혁과 위그노 전쟁〕 백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프랑스 군주제가 강화되어, 왕들은 상비군을 유지하고 행정 조직을 강화하였다. 또한 15세기 중엽부터 경제적 상황이 차츰 개선될 경향이 나타났다. 신대륙의 발견을 전후하여 대항해의 시기가 시작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물결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1516년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맺은 볼로냐(Bologna) 정교 협약으로 프랑스의 국왕인 프랑수아 1세 (1515~1547)는 국교회 사상을 포기해야 하였지만, 120개의 주교직과 1,200개의 수도원장직이 국왕의 재량권 하에 놓여, 교회의 고위 성직자를 국왕이 자유롭게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성직자들은 낮은 수준의 신학 지식만을 갖추고, 임지에 머물지 않으면서 교회록을 받는 등 각종 비행을 일삼게 되었다. 1516년에 모(Meaux)의 주교로 임명된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1472?~1534)는 프랑수아 1세의 지원을 받아 최초로 교회 개혁을 위한 각종 정책을 실시하였다. 1519년 루터(M. Luther, 1483~1546)의 저서가 파리에 유포되면서 추종자들이 생겨나자 파리 고등법원은 루터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른바 '이단자들' 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비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대자보가 나붙은 1534년 10월 17일의 '벽보 사건' 이후에는 루터파를 억압하는 프랑수아 1세의 일련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루터파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1540년대에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칼뱅(J. Calvin, 1509~1564)의 개혁 사상으로 변형 · 강화된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고, 앙리 2세(1547~1559)의 칙령에도 불구하고전 프랑스 인구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정도가 칼뱅주의로 개종하였으며, 이들을 위그노(Huguenot)라 부르게 되었다.
16세기 모든 유럽 국가들이 그러하였듯 프랑스에서도 두 개의 종교가 상호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1559년에 칼뱅주의 세력은 절정에 달해 있었으며, 종교간 대립은 귀족 간의 세력 다툼, 귀족과 왕권의 대립, 왕위 계승 문제 등과 맞물려 복잡한 상황이었다. 위그노들이 공세적인 태도를 취해 국왕의 가족을 납치하려고 시도하자, 탄압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들에 대한 관용 정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와중에, 1562년 기즈 가문의 프랑수아(Francois de Guise, 1519~1563) 공작이 위그노들의 집회를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위그노 전쟁의 시작이었다. 가톨릭 신자들과 위그노파 사이의 내전은 여덟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1562~1563, 1567~1568, 1569~1570, 1573~1574, 1576, 1577, 1579~1580, 1585~1598), 1572년 8월 24일, 위그노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나바라의 앙리(Henri de Navarre, 1553~1610)와 발루아 왕조의 마르가리타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에 온 위그노들이 대거 살해당하였다.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 으로 알려진 이 일로 파리에서만 2,000~3,000명이 학살되었으며, 여파가 지방으로 파급되어 1~2만 명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85년부터는 내전이 국제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위그노파 진영은 독일과 영국의 지원을 받고, 가톨릭 진영은 교황과 스페인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내전 중에 즉위한 앙리 3세(1574~1589)가 위그노에게 관용 정책을 베풀려 하자, 기즈 가문의 앙리(Henri I de Guise, 1550~1588) 공작을 중심으로 1576년에 이에 저항하는 가톨릭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국왕은 기즈 공작을 암살하였고, 이에 격분한 도미니코회의 젊은 수사에 의해 그 또한 암살당하였다. 앙리 3세는 죽기 전 나바라의 앙리를 정통 계승자로 인정하였으며, 30년 가까이 내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부르봉 가문의 초대 왕이 된 앙리 4세(1589~1610)는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598년 4월 13일에 낭트 칙령(Edictum Namnetense)을 반포하였다. 이 칙령은 가톨릭 교회를 프랑스의 지배적 종교로 인정하였고, 위그노파에게 빼앗긴 교회의 재산 반환을 명시하였다. 반면 위그노파에게는 한정된 종교의 자유만이
주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가운데 가톨릭 신자들은 진정한 신앙을 통해서만 위그노파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그결과 많은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대응하여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정의하고 교회 쇄신을 위한 규율을 제정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정이 점차 적용되기 시작하여, 1567년에는 프랑스 최초의 신학교가 문을 열었으며, 이미 1564년부터 예수회는 프랑스 내에서 중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구체제하의 프랑스〕 8세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 국왕이 되었던 루이 13세(1610~1643)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1624년 리슐리외(A.J. du Plessis Richelieu, 1585~1642) 추기경이 등용되었다. 리슐리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특히 1627~1628년 위그노들이 점령하고 있던 라 로셀(La Rochelle)을 공격하여 항복을 얻어냈다. 그는 위그노들의 사법상의 지위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관용 정책을 펴는 한편 그들의 모든 정치적 · 군 사적 특권은 빼앗았다. 또한 대외적으로 약화된 프랑스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여 절대주의의 성장이 용이해졌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프랑스는 서서히 과거와 같은 부유함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이미 확산된 빈곤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성 빈천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o, 1581~1660)는 1633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활동 수녀회인 빈천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Compagnie des Filles de la Charité)를 설립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활동은 가톨릭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수도원들이 재조직되었고, 신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 기관이 세워졌다. 베륄(Pierre de Bérulle, 1575~1629)은 프랑스에 오라토리오회(Oratoriens)를 소개 · 설립하고, 성직자 양성과 젊은이를 위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642년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에는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라자로회(Lazaristae), 카푸친 작은 형제회(Capuchains), , 오라토리오회, 예수회 등을 중심으로 지방 선교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성체회(Confratemitas SSmi Sacramenti)와 같은 신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수많은 위그노들이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결실을 맺었다. 그렇지만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신학 논쟁이 발생하면서 가톨릭의 약진을 어둡게 하였다. 특히 이프르(Ypres)의 주교인 얀센(C.O. Jansen, 1585~1638)의 가르침에 고취된 얀센주의(Jansenismus)는 파리의 포르루아얄(Port-Royal des Champs) 수녀원을 중심으로 발전되었는데, 예수회의 비난을 받으며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19세기까지 프랑스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661~1715년에 걸친 루이 14세(1643~1715)의 친정(親政) 시기는 태양왕(太陽王) '루이 14세의 시대' 라 불릴 정도로 프랑스의 영광과 위대함을 열렬하게 추구한 시기였다.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을 비 롯한 대외 전쟁에 자주 개입하였고, 베르사유(Versailes)를 건설하여 귀족 세력을 무력화시키면서 재무장관 콜베 르(J.-B. Colbert, 1619~1683)를 비롯한 헌신적인 대신들의 협조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주기 변동은 침체된 상태였으며, 루이 14세의 화려한 업적은 백성들에게 유례없는 인간적 · 재정적 희생을 요구하였다. '하나의 국가, 하나의 왕, 하나의 종교 라는 구호처럼, 루이 14세는 국가의 통일을 위해서는 다양한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1685년 낭트 칙령을 철폐하였으며, 이로 인해 20만 명에 달하는 부유한 위그 노들이 망명함으로써 프랑스의 경제와 문화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그렇다고 루이 14세가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은 아니다. 갈리아주의(Gallicanismus)의 지지자인 그는 교황 인노천시오 11세(1676~ 1689)와 충돌하였고, 1673년에는 주교가 공석 중인 교구의 수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국왕의 특권이 적 용되는 교구를 59개로 확대시켰다. 그로 인해 1679년 파문의 위협을 받자 프랑스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회의는 1682년 3월, 교황의 무류성을 부정하고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우위설(Conciliaris- mus)을 강조하는 4개조의 선언을 승인하였다. 결국 교황은 신임 주교들의 서임을 거부하고 1687년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의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로 인해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으며 치세 말기에는 각종 위기 상황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루이 15세(1715~1774) 시대에 다시 번영이 찾아왔고 인구 증가는 물론 경제적으로 눈부신 회복 양상을 보였으며, 프랑스의 탁월한 문명이 만개하면서 유럽 국가들에게 군사적 · 외교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렇더라도 점차 쇠퇴하고 있던 군주제를 개혁하는 것은 어려웠으며 나아가 체제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가 되었다. 몽테스키외(C.L. de Secondat de Montesquieu, 1689~1755) , 볼테르(Voltaire, 1694~1778) 등을 중심으로 계몽 사상의 시기가 시작되었으며, 조심스럽고 신중하였지만 국가 개혁에의 열망이 드러나고 있었다.
IV. 프랑스 혁명부터 제3 공화정 시기
〔프랑스 대혁명〕 루이 16세(1774~1793)가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였을 때, 군주제의 권위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더욱이 18세기 프랑스는 풍요로운 중에도 전체 농민의 3분의 1이 극도의 빈곤 상태에 놓 여 있었다. 루이 16세는 1774년 튀르고(A-R.-J. Turgot, 1727~1781)를, 1776년에는 제네바 출신의 은행가인 네케르(J. Necker, 1732~1804)를 재무 장관으로 임명하여 경제적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미국 독립 전쟁(1775~1783)에 개입하기 위해 발행한 공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권층을 겨냥한 세제 개혁을 실시해야만 하였다. 파리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특권층은 그러한 개혁을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군주제는 경제적 파산과 정치적 마비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네케르에 이어 재무 장관이 된 칼론(C.-A. de Calonne, 1734~1802), 그의 뒤를 이은 툴루즈(Toulouse)의 대주교 로메니드브리엔(E.C. de Loménie de Brienne, 1727~1794)의 세제 개혁안 역시 특권층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와중에 빵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 가격이 폭등하여 소요와 약탈, 폭동이 이어졌으며, 국고는 완전히 고갈되어 국가의 지불이 정지되기에 이르렀다. 1788년 8월 루이 16세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삼부회(三部會, Etats-Généraux) 소집에 동의하였다. 이듬해 5월 5일 삼부회가 베르사유에서 개최되었지만, 대표들이 표결 방법을 놓고 대립하다가 결국 삼부회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이에 6월 17일, 제3 신분 대표들은 국민 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를 선포하고 이후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징수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루이 16세가 회의장을 폐쇄하자 제3 신분 대표들은 6월 21일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회합을 계속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하였고, 결국 루이 16세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7월 9일 국민 의회는 스스로를 '제헌 의회' 로 선포하고 왕국의 헌법을 기초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국민 주권을 신봉하는 제3 신분 대표들인 자신들만이 국민의 대표로서 주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법률 혁명이었다.
7월 11일에 루이 16세가 네케르를 해임하자, 이를 반혁명(反革命)의 시작으로 받아들인 파리 군중들은 무장을 갖추고 7월 14일에 국립 감옥이었던 바스티유를 함락시켰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일부 귀족들은 망명길에 올랐으며, 혁명의 움직임은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농촌의 대규모 봉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1789년 8월 4일 국민 의회는 봉건적 권리의 폐지를 선언하였으며, 8월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을 선포하였다. 구체제의 사망 증서이기도 한 이 인권 선언은 만인의 법적인 평등, 노동과 언론 및 양심의 자유, 소유권 등을 명시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입헌 군주국으로 전환되었으며 일정한 재산을 지닌 '능동적 시민들' 에 의한 제한 선거제가 실시되고 국가 행정도 재조직되었다. 의회는 재정적자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하여 1789년 11월 2일 성직자들의 재산을 국유화하였으며, 그 결과 성직자들의 생계는 국가가 책임지게 되었다. 특히 1790년 7월 12일 반포된 <성직자 공민 헌장>(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에 따라 고위 성직자는 국가 공무원이 되었으며 교황에게 서임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헌장 내용에 따라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를 해야만 하였으며, 이는 1791년 1월부터 의무 조항이 되었다. 그러나 주교 7명과 신부들의 54%만이 이에 응하였고, 프랑스 교회는 거부파(réfractaires)와 선서파(assermentés) 사제로 분열되었다. 교황 비오 6세(1775~1799)와 대부분의 프랑스 주교, 다수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혁명이 교회를 전복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1791년 6월 21일에 루이 16세가 국외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왕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공화정의 주장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1791년 10월 새롭게 구성된 입법 의회의 각 정치 파벌들은 정권을 차지하려고 하고, 루이 16세와 망명 귀족들은 혁명세력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 프로이센과 동맹 관계를 맺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패전의 위기를 맞이하자 각 지역에서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결성된 연맹군이 파리로 집결하였다. 입법 의회는 결국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여 루이 16세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기초할 국민 공회를 구성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이제 혁명은 급진화하여 민중 혁명의 단계에 들어섰다.
〔프랑스 제1 공화국〕 1792년 9월 소집된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는 산악파(montagnards) 의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치적 입장을 지녔던 지 롱드파(Girondins)의 입지는 점차 약화되었다. 11월 국민 공회는 국왕을 사형에 처할 것을 결의하여 1793년 1 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이 집행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의 군주들은 격분하였고, 특히 영국이 앞장서서 대불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그해 2월 국민 공회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를 하였으며, 동맹에 참여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비롯한 전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각 지역에서 왕당파의 봉기가 일어났다.
1793년 3월에 국민 공회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독재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결정, 혁명 재판소를 부활시키고 공안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독재적이고 중앙 집권적인 혁명 정부가 등장하여, 8월에는 18~25세의 모든 남자들에 대한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이어 9월에는 통제 경제를 실시하여 가격과 임금의 최고 가격제가 법령화되었다. 광적인 공포 정치가 전국을 뒤흔들어 전국적으로 4~5만 명이 희생되었으며,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 성직자를 처형하고 교회를 폐쇄하였다. 특히 로베스피에르(M.-F.-M.-I. de Robespierre, 1758~1794)는 이성과 덕성을 기리는 공화주의 종교의 확립을 시도하였다.
1793년 말부터 모든 상황은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고, 이는 공안 위원회와 산악파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로베스피에르의 독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그는 결국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혁 명의 기운은 점차 약화되어 가고 혁명적이고 민중적인 흐름 대신 왕당파의 공격이 드세졌으며, 질서를 요구하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1795년 10월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고 총재 정부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 재정적 위기에 시달려야 하였으며, 도처에서 약탈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때에 영국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계 속되던 전쟁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가 이끄는 군대가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까지 마친 나폴레옹이 1799년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받았으며, 마침내 그해 11월 쿠데타를 통해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인 세 명의 통령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은 통령이 된 직후 반포된 새 헌법에 의해, 엄청난 권한을 지닌 제1 통령이 되었다. 이 체제는 외적으로는 민주적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재적인 성향이 뚜렷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혁명으로 혼란해진 프랑스에 질서와 평화의 재확립, 국민적 결집, 개혁을 통한 혁명 과업의 공고화 등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 더욱이 오스트리아 및 영국과의 전쟁도 종식시켜야만 하였다. 이를 위해 나폴레옹은 중앙 집권적 체제의 확립을 꾀하기 위해 재정 회복 정책을 마련하는 한편 사법 행정을 재조직하고, 1802년 8월 인민투표에 의해 종신 통령이 되었다. 또한 1804년 3월에는 민법전을 반포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교황 비오 7세(1800~1823)에 의해 황제로 축성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분열을 해소하고자 망명 귀족의 귀환을 장려하였으며 반혁명 세력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 였다. 특히 1801년 7월 체결된 교황청과의 정교 조약을 통해 가톨릭 교회가 '프랑스인 대다수의 종교 로 인정되 면서, 성직자 공민 헌장이 폐기되고 성직자들은 복권되었다. 또한 교회가 몰수당한 교회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본당 신부의 봉급을 나라에서 지급하기로 규정하였으며, 프랑스 내의 교구들을 조정하여 새롭게 설립하고 프랑스 정부가 주교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한편 유럽 영토 내에서 프랑스의 팽창을 시도한 나폴레옹은 1805년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그가 실각하던 1814년까지 군대에 징집된 프랑스 젊은이들이 15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처럼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프랑스 사회는 경제적 상황이 개선되는 등 점차 안정을 찾았다. 1807년 10월 나폴레옹이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대륙 봉쇄를 단행하자 영국도 이에 맞서 각종 물자가 프랑스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나폴레옹은 해안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포르투갈과 교황령에 침입하였고, 마침내 스페인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독립전쟁(1808~1814)이 일어났다. 초기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가 패배하자 이는 유럽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 군대의 사기가 점차 저하되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영국 및 스페인 반란군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하였다. 1810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2세(1804~1835)의 딸인 마리 루이즈(Marie-Louise, 1791~1847)와의 결혼을 통해 이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808년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감금된 교황 비오 7세는 1809년 교황령이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자, 그해 6월 10일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교서를 작성해 비밀리에 유포시켰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그르노블(Grenble)로 납치되었다. 또한 이혼당한 황비 조세핀(Joséphine Bonaparte, 1763~1814)의 문제로 프랑스의 여론은 점차 나폴레옹 체제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1812년 6월 러시아를 침공하여 별다른 전투 없이 불과 3개월 만에 모스크바를 장악하였으나 러시 아 군대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하여, 결국 38만명의 병사를 잃었다. 1813년에 러시아를 중심으로 프로 이센이 대불 동맹을 체결하자 오스트리아가 여기에 가담하였고, 결국 나폴레옹의 대제국은 붕괴되었으며 그는 1814년 4월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재정복 활동을 전개하였으나(백일 천 하), 워털루(Waterloo) 전투(1815. 6. 18)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군대에 대패하고 결국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되 고 말았다.
〔복고 왕정과 7월 왕정〕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프랑스는 대외적인 평화를 되찾았고, 1815년부터 부르봉 왕조의 군주제가 복고되었다. 하지만 변화하는 사회 경제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정치적 당파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루이 18세(1814~1824)는 혁명으로 야기된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 舊體制)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과격 왕당파 사이를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를 이은 샤를 10세(1824~1830)는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아 왕권신수설의 원칙을 설파하였다. 사실 출판법(1822)과 신성모독에 관한 법(1825) 이외의 여러 입법적 조치들은 교회가 사회 안에서 잃었던 위치를 회복하는 데 유리한 일종의 통치적 압력이었다. 이를 보다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해 나타난 것이 신심 깊은 공동체의 후원하에 움직인 비밀 공동체 '믿음의 기사단' (Knights of the faith)의 활동이었으나, 이러한 조치들은 볼테르의 사상에 물든 부르주아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로 인해 교육분야에서 예수회가 축출되고(1828), 1830년에는 반성직주의(aniclericalismus)가 폭발하는 등 복고 왕정 시기의 종교 정책은 거의 실패였다고 할 수 있으나, 25년 동안 격렬하게 시도해 왔던 사제들의 지위 보장이 확실해지고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온 점은 좋은 일면이기도 하다. 1830년 7월, 샤를 10세가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권을 제한하며 출판의 자유를 억압하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하자 '영광의 3일' (1830. 7. 27~29)이라고 불리는 혁명이 일어나,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필리프(Louis-Philipe, 1830~1848)가 새로운 왕이 되고 이른바 7월 왕정이 수립되었다. 이후 국가 경제의 위기가 초래되면서 왕정에 대한 도전 또한 거세어졌다. 하지만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질서는 회복되었으며, 체제는 공고화되고 보수적인 틀을 확립해갔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공장에서의 노동은 점차 사회 문제화되었다. 각종 사회 개혁안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태에서 노동 조직가들이 출현하고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였지만, 정부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사회적 불만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7월 왕정 시기에는 반종교적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였으나 또한 혁명 당시에 제기되었던 문제들로 인한 교회와 정부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하기 위한 노력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가톨릭 자유주의 운동의 선구자들로는 라므네(H.F.R. de Lamennais, 1782~1854), 라코르데르(H. Lacordaire, 1802~1861), 몽탈랑베르(C. Montalembert, 1810~1870)가 있었고, 기관지 신문 <미래>(L'Avenir)가 잠시 발행되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를 옹호하였으며 국가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로 얻게 되는 종교적 자유를 지지하였으나, 이런 계획에 교회 지도층이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이 시기 가톨릭 교회의 첫 번째 요구 사항은 교육의 자유였다. 복고 왕정 시기에 교회는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대학 교육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제로 그것은 1830년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7월 왕정 치하에서 교회는 가톨릭 중등 교육을 위한 자율권을 얻고자 하였지만 의회에서 이를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초등 교육을 교회 감독하에 두는 <기조법>(Guizot Law, 1833)의 제정과 통과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서민들의 불신앙이 사회 체제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라므네와 정부의 반성직주의적인 태도로 교황 지상주의(UItramontanismus)는 커다란 진전을 보였으며, 로마 전례에 의해 갈리아주의가 점진적으로 퇴조하였다. 또한 수도사제의 수가 늘어났다. 1830~1848년까지는 이러한 현상도 미미하였으나, 이후의 제2 제정 기간 동안 커다란 성장을 이루었다.
〔제2 공화정과 제2 제정〕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1848년에 들이닥친 경제 위기로 혁명적 상황이 초래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의 군중들이 반정부 집회를 개최하자 소(小)부르주아들로 구성된 국민 방위대 역시 이에 가담하였다. 군중은 시청에 모여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2월 24~25일에 공화정부를 선포함으로써 제2 공화국(1848~1852)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보통 선거제와 노동권을 선언하고 파리에 국민 작업장을 설립하여 실업자를 구제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4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온건 공화파와 왕당파가 승리를 거두고 사회주의자들이 실패하자, 의회는 비용이 많이 들고 소요의 온상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국민 작업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노동자들의 소요가 일어나, 6월 23일에 유혈 사태를 말리던 파리의 아프르(D.-A. Affre, 1793~1848) 대주교가 유탄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한 경제적 · 사회적 위기로 국가는 다시 두 진영으로 갈라졌는데, 교회는 우익 진영에 서게 되었다.
현대 산업이 탄생하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조합들이 붕괴되자, 이로 인해 발생된 사회적 문제들이 1848년의 혁명에서 냉혹한 현실로 드러났다. 특히 사회주의(socialism)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중산층은 교회에 더욱 가깝게 다가서게 되었다. 이는 교회의 중등 교육에 대한 자유와, 대학 자문위원회에 대표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한 <팔루법>(Falloux Law, 1850)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이 법은 동시대 프랑스의 종교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합리주의 철학에 물든 중산층 사람들을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그리스도교화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팔루법은 7월 왕정 시기 동안 둘로 나뉘기 시작한 신자들 사이에 경쟁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즉 이 법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비타협적 혹은 권위주의적인 가톨릭 신자들과, 이 법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경향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경쟁 의식이 가열된 것이다. 이 두 부류는 다른 커다란 문제에서도 대립하였다. 비타협적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혁명과 혁명으로 인하여 생겨난 사회 형태를 비난하면서 이것들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뵈이요(L. Veuillot, 1813~1883)와 페(L. Pe) 주교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반면 몽탈랑베르(C. Montalembert, 1810~1870), 브로글리(A. de Broglie, 1821~1901)와 뒤팡루(F-A.-P. Dupanloup, 1802~1878) 주교가 주도하는 자유주의적인 그룹은 체제를 부
정하기보다는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와 사회 간의 논쟁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분쟁 으로 인해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프랑스 의회는 보통선거제로 선출되는 단원제 의회와 대통령제를 골격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1848년 12월의 선거에서 승리한 루이 나폴레옹(Charles Louis-Napoléon Bonaparte, 1808~1873)은 여러 정파를 아우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모호함, 노련한 선전술로 인기가 꾸준히 상승하면서 대통령 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에 착수하였으나, 의회가 거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자 1851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임기 10년의 대통령이 되었고 다음해에는 제정의 재건을 천명, 12월에 나폴레옹 3세(1852~1871)로 즉위함으로써 제2 제정을 열었다. 1852년부터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 정책의 기조 위에 마련된 경제적 번영과 질서, 군사적 승리와 임금의 상승, 일상 생활의 수준 향상에 힘입어 광범위한 사회 계층이 보나파르트주의에 가담하였지만, 1859년 이후 황제의 대외 정책이 거듭 실패하자 체제에 대한 비판이 초래되었다. 이에 황제는 1860년부터 권위주의적 정책에서 후퇴해 자유주의 이념을 실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한편 이 시기의 프랑스 교회는 나폴레옹 3세가 전제 군주로 즉위하여 실시한 거의 모든 정책들을 지지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열망과 새로운 체제의 정부가 교회에 대해 거리낌없이 표명하는 공식적인 존경에 대한 감사가 어느 정도 깔려 있었다. 반면 이에 대해 적대적인 가톨릭 그룹은 부르봉 왕조의 장자 가문의 열렬한 지지자인 정통 왕조파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후의 상황은 뒤팡루 주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황 비오 9세(1846~1878)의 회칙 <관타쿠라>(Quanta Cura)와 <오류표>(Sylabus)가 함께 발표되던 1864년에 더욱 악화되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의 결과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에 대한 교의가 장엄하게 정의되면서 갈리아주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 당시 프로이센은 국왕 빌헬름 1세(1861~1888)와 재상 비스마르크(O.EL. von Bismarck, 1815~1898)의 지도 아래 독일 통일의 과업에 착수하여, 1866년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북부 독일 연방을 결성하였다. 그로 인해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적 긴장이 고조되자, 나폴레옹 3세는 독일과의 전쟁을 통해 프랑스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급기야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양국의 갈등은 극대화되면서 결국 프랑스는 1870년 7월
19일, 프로이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는 9월 1일 스당(Sedan)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황제와 10만 명의 병사들이 포로가 되고 항복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에 알려지자 9월 3~4일 군중은 시위를 일으켰으며, 파리 시청에서 공화파 의원들은 제3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제3 공화정〕 국가 방위를 위해 구성된 임시 정부는 독일과의 전투를 수행해야 하였지만, 결국 항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871년 1월 28일 프랑스는 막대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할 때까지 독일의 점령을 받아들이고 알자스(Alsace) 및 로렌(Loraine)의 일부를 독일에 양도한다는 내용의 공식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3월 18일 행정 수반인 티에르(A. Thiers, 1797~1877)의 명령으로 국민 방위대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하여 정부는 베르사유로 피신하였으며, 파리에서는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어 파리 코뮌(Paris Commune)이 구성되었다. 5월 21일 아침부터 시작된 '피의 일주일' 동안 정부군과 코뮌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으며, 코뮌군은 적어도 2만 명이 전사하였고 4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봉기 기간 동안 교회에 극도로 적의를 품었던 세력들은 파리의 대주교인 다르부아(G. Darboy, 1813~1871)를 살해하였으며, 신자도 64명 사살되었다. 8월 31일에 공화국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얻은 티에르는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책을 통해 안정과 회복을 꾀하였지만 왕정 복고를 주장하는 왕당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873년 티에르가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의원들은 마크 마옹(M.-E-P.-M. de Mac-Mahon, 1808~1893) 원수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는데,그는 이른바 '도덕 질서' 정책을 내세우면서 가톨릭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에 몽마르트르 언덕에 예수 성심 대성당(Sacré Coeur de Montmartre)의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많은 정치가들이 그곳을 순례하였다. 또한 교회는 고등 교육에 대한 자유를 얻어 가톨릭 재단이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1879~1889년에 가톨릭 옹호자들과 반교회주의자들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801년 이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온 가톨릭 교회는 복고 왕정이나 제2 제정과 같은 보수적인 체제를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에 교회와 공화파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으며, 특히 페리(J. Ferry, 1832~1893)는 교육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시도하였다. 실증주의 정신을 가진 공화파들은 가톨리시즘(Catholicismus) 반계몽주의자들의 전철을 따라 곧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고 경시하였으며, 수도회와 가톨릭 교육을 파괴하고 1801년에 체결된 정교 조약을 파기하기 위하여 공격하였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수도회는 해체되었고(1880), 초등 교육은 의무 교육이 되었으며 공립 학교에서는 세속적인 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되었다(1881, 1882). 이러한 가운데 대불황(1882~1896)이 맹위를 떨쳤으며, 독일에 대한 복수를 내세우는 민족주의자들의 동맹이 성공을 거두었고, 반유대주의(Antisemitismus)가 나타나 프랑스의 대내적인 안정을 위협하였다.
이런 과격한 조치들이 차츰 진정되는 동안(1889~1898)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교회와 현대 세계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교황은 화해와 결속(Ralliement) 정책을 추구하면서 프랑스에서의 <교회와 국가에 대한 회칙>(Au Milieu des sollicitudes, 1892. 2. 16)을 발표하였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가 공화국 각 부서들과의 견해차로 신앙을 위험에 몰아넣지 않도록 권유하면서, 공화파의 정책을 수용하도록 충고하였다. 그 러나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군주제 정치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제3 공화정 자체에 대한 투쟁과 교회에 대한 악의적이고 적대적인 법안에 대한 투쟁을 구분하여 행동하라는 교황의 충고 또한 거부하였다. 화해와 결속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반유대주의의 흐름은 1894년 독일에 대한 간첩 혐의로 체포된 드레퓌스(A. Dreyfus, 1859~1935) 사건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되어 상호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한편에는 급진파, 사회주의자들 및 처음으로 지식인이라 불린 사람들이 결합하여 드레퓌스파를 형성하였으며, 다른 한편에는 가톨릭 인사들, 민족주의자들이 가담하였다. 전자는 국가의 이성에 짓밟힌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려 하였으며 후자는 독일에 대항하는 군대의 명예를 지키려 하였지만, 결국 드레퓌스 재판 자료가 위조되었음이 드러나자 체제의 위기가 뚜렷해졌다. 1899년의 군법 회의는 여전히 드레퓌스의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그 후 드레퓌스는 대통령의 사면을 받고 복권되어 1906년 군대에 복귀하였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군부와 교회는 다 같이 큰 타격을 받았고, 특히 더 과격해진 평신도주의(Laicism)와 반성직 주의 운동에 빌미를 제공하였다. 발데크 루소(R. Waldeck-Rousseau, 1846~1904)에 의해 시작된 이 과격한 물결은더욱 광범위한 규모로 일어나 수도회를 해체하고 내쫓는 사태를 야기하였으며(1901), 결사에 관한 1901년 7월 2일의 법은 종교 단체에는 특히 제한적으로 사전 허가를 요구하였다. 프랑스의 총리였던(1902~1905) 콩브(E. Combes, 1835~1921)는 군대를 동원하여 허가받지 못한 종교단체를 추방하였고, 3,000개의 종교계 학교를 폐쇄하였다. 그리고 수도회가 가르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법안(1904)과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키는 법안(1904)을 상정하는 데에 큰 활약을 하였으며, 교회와 정부의 분리 법안에 따라 정교 조약을 폐기하는 법안에도 적극적이었다(1905). 결국 1905년 12월 9일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법은, 1801년 정교 조약 이래 가톨릭 교회가 누려왔던 모든 특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는 어떤 종교도 국교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고, 성직자에 대한 국가의 봉급 지불을 비롯한 모든 지원이 중단되었다. 교회는 교황 비오 10세(1903~1914)의 결정에 따라 이 법안의 수용을 거부하였기에, 매년 받을 수 있었던 3,500만 프랑의 예산과 교회 재산을 모두 잃게 되
었다.
프랑스 교회의 지적인 활동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성직자들은 가톨 릭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교회 재건을 위한 일들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호교론은 이 시대 이후까지 지속되었으며, 실증주의 사상과 신학적 자유주의 그리고 프리메이슨단(Freemasonry)의 영향을 받은 젊은 지성인들은 신앙에서 멀어졌다. 그리하여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지적 르네상스에 진입하게 되었다. 교회가 지적 활동에 주력하게 되자 이번에는 근대주의(modernismus)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는 적어도 가톨릭 교회가 지적이고 도덕적인 그 시대의 요구들과 조화를 이루는 문제로 압축된다. 프랑스의 근대주의는 르와지(A.F. Loisy, 1857~1940)로 대표되는 것처럼 성서적이었고, 블롱델(M. Blondel, 1861~1949), 르루아(E. Le Roy), 라베르토니에르(L. Laberthonnière, 1860~1932)로 대표되는 것처럼 철학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들은 교황으로부터 단죄를 받았는데, 이는 프랑스 교회 내부는 물론 교회 밖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교황의 단죄를 받은 후 반(反)근대주의적인 경향으로 생겨난 인테그럴리즘(Inegralism : 종교적 확신에 기초하여 정치적 · 사회적 활동을 한다는 신념)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까지 프랑스 가톨릭의 지적인 활동을 방해하였다.
V. 양차 세계대전과 부흥을 위한 노력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20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에서는 정치 ·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둘러싼 경쟁으로 인해 외교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Sarajevo)에서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가 암살되자, 독일은 8월 3일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고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영국이 참전하게 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14년 11월 이후 전쟁은 장기화되었으나, 1918년 미국이 참전하면서 군사적 균형이 연합국 측으로 크게 기울어졌고, 그해 11월 11일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승리를 자축하였지만 현실은 비참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인 132만 5,000명이 사망하였고, 280만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활동력이 약화된 프랑스는 이민자의 천국이 되었으며, 물질적인 피해 역시 엄청나 통화 가치의 잦은 변동과 인플레이션으로 재정 상태는 극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연합국에 진 빚의 상환과 독일에 부과한 무거운 재정적 배상을 연계시키려 하였으나, 영국과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의 엄격한 적용을 지지하는 강경파와 민주공화국이 된 독일과의 타협을 지지하는 조정파로 여론이 양분되어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공황이 유럽 국가들에 파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인 문제와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종교에 관한 문제는 프랑스 정치의 뒤편에서 잊혀져갔다. 1919년 알자스 로렌 지방이 프랑스에 반환된 후에도 1801년의 정교 조약은 이 지방에서 강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수도회에 관한 법령은 아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교황청과의 관계가 복원되면서 교황은 프랑스에서 국가와 종교의 분리법이 발효된 이후, 프랑스 교회가 잃어버린 법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회담을 갖도록 허락하였다. 1924년 선거 이후에 마지막으로 반성직주의의 군사적 소요가 일어났으나, 이 소요는 전국 가톨릭 연맹의 빠르고 단호한 대처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적인 지지가 부족하여 실패하였다.
프랑스 안에서 일어난 변화들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되는 것에 힘입어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와 비오 11세(1922~1939)는 프랑스 성직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황 레오 13세가 추진하였던 국가와 교회의 화해와 결 속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그동안 국가와 교회의 분리 법안에 대해 가톨릭 교회는 전적으로 적의를 보여왔으나, 이 법으로 인해 교회가 빈곤해지기는 하였지만 자유와 독립을 얻었고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의 권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분리 법안을 항구히 지속되어야 할 법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한편 모라스(C. Maurras, 1868~1952)가 이끄는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caise)는 정부에 반대하여 가톨릭 보수주의자들, 인테그럴리스트들, 국수주의자들 그리고 군주제 옹호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비오 11세는 1926년, 일간지 <악시옹 프랑세즈>의 구독 금지와 활동 참여 금지를 발표하였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교황의 지시에 불복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젊은이들에게 미치던 그들의 영향력도 점차 감소되었다.
이러한 화해와 결속을 위한 노력이 프랑스 교회를 135년 동안이나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였던 문제들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었지만 이후 프랑스 국가와 교회는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갖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고, 1926년 이후 변화된 정치 풍토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정부는 성직자들과 적절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가톨릭 신자들과 왕당파들 사이의 결탁도 끝났다. 왕당파는 더 이상 의회를 대표하지 않게 되었고 가톨릭 신자들도 더 이상 하나의 단체로 묶이지 않게 되었으며, 신자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프랑스는 1931년부터 경제 공황의 충격에 휩쓸렸으며 그로 인한 위기가 확산되면서 국제 관계 역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933년 1월 독일의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A. Hitler, 1889~1945)는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던 것을 전면 중단하였다. 당시 유럽의 정치 질서는 새로운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1935년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B. Mussolini, 1883~1945)의 파시즘 체제가 형성되었고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군사적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마침내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틀 뒤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으며 그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1939~ 1945)이 벌어졌다. 1940년 6월 10일 독일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프랑스 정부는 투르(Tours)로, 다시 보르도 (Bordeaux)로 철수하였다. 국가 원수직을 맡은 페탱(P. Pétain, 1856~1951)에 의해 내각이 조직되고 6월 2일 독일과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페탱 정부는 파리가 아닌 비시(Vichy)를 새로운 수도로 결정하였으며, 7월 10 일 의회는 제3 공화정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비시 체제는 곧 민족주의적 개인 독재로 바뀌었다. 1940년 히틀러를 만난 후 페탱은 영국과 결별하고 나치 독일과의 협력 정책을 개시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이후 비시정부는 유대인들에 대한 각종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약 8만 명의 프랑스계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독일로 이송되는 것을 방조하였다. 또한 프랑스 기업들은 각종 군수 물자를 제작하였으며, 프랑스 의용대가 창설되어 지원자들이 독일군의 군복을 입고 러시아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로 인해 여론은 점차 비시 체제에 거리를 두게 되었으며, 동시에 프랑스 내부에서의 저항 운동은 물론 런던에서는 드골(C. De Gaulle, 1890~1970) 장군을 중심으로 구성된 '자유 프랑스 가 항독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비시 체제는 교회에 대해 호의적이면서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수도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법률을 폐기하고 사립학교에 대하여 재정 지원을 하기로 결의하자 교회는 한때 비시정부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물론 후에는 정부가 주도하는 청소년 운동 단체의 결성과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하여 다른 나라들처럼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고, 그해 8월 파리가 해방되었다.
전쟁 이후에는 좌익 진영의 정당들이 정권을 잡았으나반성직주의적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자들이 레지스탕스 운동에 광범위하게 참여하였고, 비록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가톨릭 신자인 정부 요인이 적었더라 도 군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신자들로서 이들은 임시 정부(1944~1947) 시절부터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들로 남 아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공직은 교육부 장관 자리뿐이었다. 제4 공화국(1947~1958) 과 제5 공화국(1959~ 第一 ) 모두 가톨릭 학교들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허용하였다. 인민민주당(PDP)을 계승한 인민공화운동당(MRP)은 우익 진영의 정당들이 겪은 일시적인 약세 때문에 해방 후에 다수당으로 선거에서 최 다 득표를 얻어 승리하였다. 이 당의 좌익은 정치적 · 사회적 · 지적 수준에서 본다면 공산주의에 근접한,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가톨릭 신자들의 소수 모임으로 구성되었다.
〔영성의 부흥〕 20세기 중엽에는 프랑스 국민들 중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상당히 늘어나면서 더 이상 온 국민이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 제3 공화정 동안 두 번의 반성직주의적인 소요로 사람들은 신앙에서 더욱 멀어졌는데, 특히 몇몇 지역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신앙에서 멀어지게 된 또 다른 요소는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을 접해 보지 않았거나, 접해 보았다하더라도 극히 접촉이 적었던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19세기의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거의 모든 면에서 도덕적 측면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의 여러 단체들과 운동에 열성적이었고, 그 단체들과 운동이 주도하는 행사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 단체들은 신자들에게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성인들에 의하여 그 가치가 드러난 여러 가지 덕들을 실천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리고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나, 성모 성월에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행사에 적극 참여하게 하였고 정성을 다하여 묵주 기도를 바치도록 격려하였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신학적 부흥으로 수많은 지식층이 신앙으로 복귀하였고 성서 연구에서 많은 진척이 이루어졌으며, 하느님께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열성에서 촉발된 전례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통을 준수하려는 의지와 개인주의, 규율과 순명, 경건한 신앙 생활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의 정서가 어우러진 프랑스의 가톨릭 신앙은 신학적 성과를 수용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그리하여 가톨릭 신앙은 개인적이면서도 보다 사회적인 성격을 지닌 신앙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조명된 덕들과 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열의에 고취된 신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개인의 구원은 물론 세상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이를 위해 항구한 기도 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가톨릭 신앙의 시대적 요구에 대한 적응이 성공한 것은 사도직의 역할 덕분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성지 가운데 하나가 된 루르드(Lourdes)를 비 롯하여 라살레트(La Salette) 등 여러 성지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현대에 들어 시복 · 시성된 순교자들과 증거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랑스인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사형당한 사람들로서, 20세기에 들어서 시복되었다. 이 시기의 또다른 특징은 사도직 활동에 적극적인 수도회의 수적 증가였다. 이런 수도회의 대다수는 프랑스에서 설립되었고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갔다.
〔가톨릭의 부흥과 선교〕 지성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의 문예 부흥은 19세기 부르주아적 가톨릭 사상의 특징인 인간 중심이 사라지면서 객관적인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 가톨릭 문학의 화려한 부활을 알려 주는 여러 징후들이 1914년 이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베르나노스(G. Bernanos, 1888~1948), 클로델(P. Claudel, 1868~1955), 모리아크(F. Mauriac, 1885~1970) 등은 가톨릭 문학의 유명 작가 중에서도 뛰어난 작가들로 각광을 받았다. 이런 문학 부흥은 '가톨릭 작가 주간' (Semaine des Ecrivains Catholiques)에 의해 수준 높게 유지되었다. 그리고 가톨릭 계통의 출판사들은 종교 사상과 활동의 모든 분야에 관계된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발간하였으며, 가톨릭 언론에서 다수의 정기 간행물과 신문들이 발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선교 단체들의 사도직 활동이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쟁 후 사도직 임무는 다양한 선교 운동 단체들로 확산되었으며, 일정한 지역과 특정 사회 계층을 자신들의 선교 활동 대상이자 선교 지역으로 여겼다. 프랑스 교회는 벨기에의 '가톨릭 노동 청년회' (Young Christian Worker Movement)를 따라 1926년에 '프랑스 가톨릭 노동청년회' (Jeunesse Ouvrière Chrétienne Francaise)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가 추구하는 목표는 특정한 그룹에 속한 평신도들이 자기들과 같은 그룹이나 같은 환경에서 살고있는 다른 평신도들 사이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1886년 설립된 '프랑스 청년 가톨릭 연합' 은 가톨릭이 바라보는 선교에 대한 시각에서 발전하여 1927~1931년에는 여러 분야로 특성화된 운동들의 연합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각 운동들은 각각 다른 사회적 환경의 젊은이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런 특화된 운동 중에 '가톨릭 청년 농민회' , '가톨릭 청년 학생회' , 중산층 청년들로 구성된 '독립 가톨릭 청년회' 등이
1926년 이후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여 젊은 부인들과 성인들을 위한 운동들도 후에 조직되었다.
가톨릭 부흥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특성은 성직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국내 선교 운동이었다. 1941년 행정 지역에 따른 교구 분할로 사제가 부족해지자 선교 지역이 된 지역들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상황들을 개선하기 위해 선교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신앙에서 멀어진 노동 계층에 교회의 존재를 알리려고 노력하는 특별한 사제들이 있었다. 1941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들 노동 사제' (Worker Priests)들은 노동자들과 똑같은 노동조건에서 그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투신하거나 사제직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세속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사제들도 간혹 있었다. 그래서 1954년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에 의하여 이 활동이 중지되었으나,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가 1965년에 몇 가지 조항을 수정 · 보완한 후 이 활동을 부활시켰다.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 교회는 국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교 활동에서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하였다. 1830년대 성소의 증가, 1860년 이후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확장이 이 활동의 원동력으로, 선교사들이 군인들보다 앞서서 해외 선교지에 도착하였다. 근동에서 맺은 불평등한 조약과, 중국과 체결한 텐진 조약(1858)으로 획득한 특권을 이용하여 다양한 지역에서 쉽게 활동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의 해외 선교회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성소자 수의 변화〕 정교 분리법이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많은 농촌 부모들이 아들에게 사제가 되도록 권유하던 사회적 · 경제적 이점이 사라졌다. 사제 모집을 하는 기간도 이전의 절반도 안 되고, 수도회에 관련된 법령과 1905년부터 대부분의 사제들이 물질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거의 모든 사제 지망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농촌 지역에서의 사제지원자가 특히 큰 폭으로 감소하였고, 도시 노동자 지역에서 사제 지망자는 여전히 거의 없는 상태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러한 위기감은 최고로 증폭하여, 1929년에 교구 사제의 수는 46,500명으로 감소하였고, 1965년에는 더 줄어 40,000명이 되었다. 반대로 같은 기간 동안 수도자들은 상당히 증가하여, 1965년 통계에 의하면 20,000명의 수사들 중 프랑스 내에만 7,000명의 사제가 있었다. 교육 수사들이 5,000명 정도, 해외 선교지에 있는 수사들이 1,500명 정도였고, 국내에는 117,000명 정도의 수녀가 있었으며 수천 명의 프랑스 출신 수녀들이 선교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VI.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프랑스 교회 내의 긴장과 갈등
프랑스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커다란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독특하고 뚜렷한 국가적 경험에 정당성을 제공하여 주었다. 반면 이 공의회는 자기정체성에 대해 의심하는 시대, 구성원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시대를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20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이러한 긴장과 갈등으로 교회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프랑스 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학자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공의회 개막 수십 년 전부터,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현실에 맞는 언어로 교회의 가르침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뤼박(H. de Lubac, 1896~1991), 콩가르(Y.M.J.J. Congar, 1904~1995), 다니엘루(J. Daniélou, 1905~1974)를 비롯한 그들의 동료 및 제자들이 쓴 책과 논문들은 프랑스 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영향력 있는 주교들에게도 새로운 힘을 주었다. 이들 신학자들은 수십 년 동안 의심을 받았지만, 공의회 문헌의 개정과 초안을 위해 공의회가 선정한 전문 위원회에 발탁되었다. 그들은 전례, 계시, 교회론, 교회 일치, 그리고 선교를 다루는 문헌에 뚜렷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었다.
프랑스의 주교들 가운데 약 20%가 공의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들은 <사목 헌장>(Gaudium et spes)과 <교회 헌장>(Lumen Gentium)을 다룰 때 이에 관련된210개 사항에 대한 중재안을 내놓았으며, 평신도 사도직에 관련된 문제를 안건으로 다루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성령 수도회의 총장인 르페브르(M. Lefebvre, 1905~1991) 대주교는 전례, 교회 일치, 신앙의 자유 그리고 비그리스도교에 관련된 문헌에서 대다수의 주교들과 정면으로 대치하였다. 그는 또한 주교단성에 관한 교회의 지침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공의회에 따른 프랑스의 변화〕 프랑스 주교 회의 : 1964년에 프랑스 주교 회의가 설립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프랑스에 미친 즉각적인 결과였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1919년에 이와 비슷하게 프랑스의 추기경들과 대주교들로 구성된 협의체(ACA)를 조직하여 때에 따라 모임을 가졌는데, 1951 1960년에는 4회에 걸쳐 전체 모임을 개최하였다. 1945년에 이 협의체는 사무 총장직을 신설하여 협의체가 다루고 결정해야 할 사안들을 준비하고 조정하는 역활을 맡겼고, 1961년에는 사무국을 신설하여 주로 각 교구의 활동 단체들과 주장들을 조정하여 '함께하는 사목' 을 목표로 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1961년에는 문화적 성격뿐만 아니라 언어적 특성을 고려하여 프랑스 전역을 9개로 나누었다.
1966년 교황청으로부터 인준받은 프랑스 주교 회의정관은 1975년에 개정되었는데, 이는 모든 주교들이 보다 민주적인 방법으로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상설 위원회는 주교 회의 의장과 부의장 그리고 9명의 선출 임원과 파리 대교구장으로 구성되고, 매월 모임을 가진다. 그리고 총괄 사무처와 4개의 부속 사무처들(정보 및 홍보 담당 사무처, 사목 담당 사무처, 평신도 사도직 담당 사무처, 행정 · 재정 · 법률 담당 사무처)이 있으며, 산하에 15개의 주교 위원회와 6개의 주교 회의 전국위원회가 있다. 그리고 6명으로 이루어진 교의 신학위원회가 신학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전례의 개혁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이 프랑스에 몰고 온 변화 중에서 가장 큰 영항을 미친 것은 전례였다. 이러한 전례 쇄신에 크게 기여한 전문가들은 대부분 프랑스 출신이거나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들로, 마르티몽(A.-G. Martimont), 보이어(L. Bouyer), 다니엘루, 쥐넬(P. Jounel) 등이다. 이들이 제안하였던 개혁들은 1940~1950년대에 걸쳐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에서 시도되었던 실험과 쇄신에 기초를 두었으나, 미처 준비가 덜 되었거나 무분별하게 추진되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성화상 파괴나 교회에 불순명하는 모습으로 보여졌기에, 신자들을 당혹스럽게 하였고 일부 신자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비쳐졌다. 전통적인 신앙심은 경멸당 하였고 신자들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켜 왔던 관습들,예를 들면 창미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 시도된 전례 예식에는 공의회의 규범과는 상관이 없는 부분들이 포함되었다. 특히 전례에서 전통적인 로마 전례를 완전히 삭제한 것은 전통파와 진보파 사이의 오래된 불화와 균열을 더욱 악화시켰다.
〔교회의 위기와 분열〕 위기의 시작 : 위기는 가톨릭 액션의 갈등을 통해서 명백해졌다. 평신도 사도직은 자신이 속한 사회 또는 계층의 특성에 따라 발전하여 왔으며, 성직자들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평신도 사도직 활동은 선교보다 사회적 · 정치적 변동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논란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성직자의 지도를 받는다는 방침이 폐지되었다(1975). 여러 운동들의 지도자들과 교계 제도와의 긴장 상태가 계속되자, 가톨릭 엘리트(elite)들이 모이는 단체로 수십 년 동안 명성을 날리던 가톨릭 청년 단체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이 흔들린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가 닥쳐와, 상당수의 사제나 수도자들이 자신의 성소를 포기하였고 신학교 지원자 수는 프랑스 대혁명 이래 가장 적었다. 대학에서 시작된 1968년 5월의 소요 사태는 정치적 불안과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체계적인 의구심으로 나타나면서 사회가 지닌 불확실성을 드러냈다. 게다가 이러한 도전에 맞서 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과정에서 드러난 교회의 분열상은 가톨릭 공동체의 약점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교의적인 측면에서도,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7. 25)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프랑스 주교들의 민감한 사목적 해석들이 겹치면서 긴장은 점점 더 커져갔다.
1960년대 후반 프랑스 교회는 정치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좌익과 우익이 충돌하는 분열된 상황에서, 좌익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종종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깊이 개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우익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질서의 회복과 전통으로의 복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프랑스 교회의 지도자들은 점점 더 커져가는 긴장감을 완화시켜야 하는 과제와, 교회의 동질성과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아야 하였다. 대다수의 주교들은 개인적 입장 표명이나 주교 회의에서 발표된 공식 문서를 통해 이러한 분열이 점진적인 진보를 위해 거쳐야 할 진통이라고 여겼다.
교회와 사회 및 정치 : 프랑스 혁명 이후 교회는, 교회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균형잡힌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하며 이를 통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 교회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부분 중 하나는 대내외적 정책(특히 그 시기에 가장 중요하였던, 식민지에 자치권을 허용하는 문제)에서, 사회 정의와 가난한 이들의 처우 개선에 관한 것이었다. 군비 축소와 관련된 문제점들도 제기되었는데, 특히 1972년 주교 회의 에서 발표된 문서 <정치, 교회와 신앙>(Poltique, Eglise et Foi)은 프랑스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이 문서에서 프랑스 주교들은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복음적 · 도덕적인 기준 및 그 리스도인의 메시지는 다양한 정치적 선택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1981년 5월 10일의 선거에서 프 랑스 가톨릭 교회는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그 선거에서 실질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20% 가 사회당의 당수인 미테랑(F-M.-M. Mitterrand, 1916~1996)에게 투표하였다.
대통령 재임기(1981~1995)에 미테랑은 <드브레법>(Loi Debré)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 법은 드골 대통령의 집권 중에 시작된 것으로, 국가는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의 승인을 제한하고 학생들에게 제 한된 범위 내에서 보조하는 조건으로 이 학교들에 대해 온건한 범위 안에서 통제 ·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미테랑 정부가 상정한 법의 내용은 가톨릭 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국가가 가톨릭 교육을 완전히 접수 하겠다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에, 140만 명이 거리에 나서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여 국회에서는 이 법이 통과 되지 않았다. 또한 국회에서 피임에 관한 법(Loi Neuwirth, 1967)과 낙태의 합법화(Loi Weil, 1974)에 대한 문 제를 다룰 때, 주교들의 공식 입장은 온건하였다. 즉 정치적으로 이해가 충돌하는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려하는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교회의 분리 : 프랑스 가톨릭 교회 안에서 커져가던 분열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도로 일어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항명(抗命) 사건으로 1976년에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세네갈 다카르(Dakar)의 대주교였던 르페브르는 그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 가운데 몇몇 사항에 대하여, 특히 프랑스에서 실행된 몇 가지 사항에 대하여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립된 전통적인 전례 양식을 지키려고 하였으며, 사제직에 대하여도 고전적인 견해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다. 1976년 7월에 그는 스위스 에콘(Econe)에 있는 성 비오 10세회(Fraternité Sacerdotale Saint Pie X)에서 이런 원칙들을 따라 교육받은 첫 번째 사제들에게 사제 서품을 주었다. 르페브르 사건의 저변에는 정치적인 요소가 깔려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온 변화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였던 많은 신자들의 좌절감이, 그리고 천주교 신자로서 보다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갖고자 하는 소망이 표출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후 1988년, 르페브르 대주교가 4명의 신부들을 주교로 축성하자 교회는 그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로마에서 이루어진 협의 과정에서 교회는 다수의 르페브르 추종자들을 교회의 품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서 있었던 또 다른 불일치는 교리 교육에 관한 문제였다. 1960년대 초반 프랑스 전역에서 교리 교사는 22만 명이었는데 그중 84%가 여성 평신도들이었다. 1937년 이후 모든 교구에서 사용하던 질문과 대답 형식의 교리 문답은, 시대 상황과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진보적인 방법들로 대체되었는데,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할 내용들이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1964년 주교 회의에서 발행 · 배포한 《교리 교육지침서》(ADirectory ofPastoral Catechetics)는 사목적 입장에서 모든 가능한 상황이 고려된 풍부한 지도서였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고 개정판이 만들어졌으며 1991년 어른들을 위한 포괄적인 교리 문답서로 결실을 맺었다. 실제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경향을 반영하듯 교리 교사의 수도 줄어들어 1998년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활동하는 교리 교사는 55,000명뿐이었다.
쇄신과 부흥 : 프랑스 교회 내에 나타난 개혁에 대한 열망은 '성심으로 되돌아가자' 는 소망이 신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나타낸 반증이었고, 이는 신앙의 초월적인 요소와 개인 기도에 대한 관심이 신자들 사이에 다시 일어난 것을 드러내는 표지였다.
교황청은 프랑스 교회의 중요한 곳에 개혁 성향의 성직자를 임명함으로써 개혁이 더욱 확산되도록 측면 지원을 하였다. 1981년에 파리 대교구장으로 루스티제(J-M. Lustiger, 1926~ ) 오를레앙 주교가 임명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조처였다. 그는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부가 된 인물로, 성직자들이 일반적으로 취한 자세나 입장에 가세하지 않고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리용(Lyon)의 대주교로 임명된 데쿠트라(A. Decoutray)는 개방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사목자로 신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 두 명의 추기경은 당대의 문제들을 엄격하면서도 명쾌하게 신자들에게 이야기하였으며 대중적인 논쟁을 중재하거나 언론 매체를 이용하는 것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지성적인 능력과 영적 식별력으로 능력이 있는 주교들을 선임하는 데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가톨릭 교회가 새로운 활로를 찾아 가도록 많은 지원을 하였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가 쇄신되고 있다는 또 다른 징후는 카리스마적인 공동체들의 성장이다. 이 공동체들은 강한 공동체 의식과 기도를 통한 일치, 사회 안에서의 활동에 기초를 두었으며(Lion de Juda〔1973〕, Cheminneuf〔1973〕, Emmanuel〔1976〕, Older L'Arche 〔1964〕, Foyers de charite〔1936〕 등), 1982년에 프랑스 주교들로부터 공식인준을 받은 후부터 많은 교구에서 더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단체들은 본당이나 성지에 대한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현재의 프랑스 교회〕 1960~1990년대 초까지는 주일 미사에 참석하여 영성체를 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의 신앙 생활의 전부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나마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인원은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1966년에 주일 미사나 축일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비율은 25% 정도로 추산되었으나, 1990년에는 12%로 떨어진다. 행사가 있을 때에만 성당에 가는 신자의 숫자도 장례식, 결혼식, 세례식(1998년에 421,295건)의 횟수가 감소함에 따라 줄어들었다. 많은 가톨릭의 축제와 행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몰고 온 변화들로 위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사회의 세속화된 물결은 이러한 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유럽 사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그리스도인의 공통 가치를 후퇴시키는 데에 일조하였다. 자신들이 가톨릭 신자라고 장담하는 프랑스인들 중 다수가 신경의 중요한 요점들, 예를 들면 삼위 일체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
프랑스 교회에서 대중 매체가 갖는 중요성은 출판사의 수와 그 다양성에서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26개의 도서를 출판하고 일간지 <십자가>(La Croix)를 발행하는 '가톨릭 출판 전국 센터' (Centre National de Press Catholique)와 29개 도서를 출판한 '지방 가톨릭 출판사 전국 연합' (Association National de la Press Catholique de Province)이 대표적이다. 또한 프랑스 주교 회의와의 직접적인 협력 속에서 교구가 펼치는 활동 중 문화 예술 분야에서 대화를 촉진하고 가톨릭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1988년에 설립된 '그리스도인 미디아스' (Chrétiens-Midias)는 파리(Radio-Notre-Dame, 1981)와 리용(Radio Fourvières)에서 지역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다. 국영 텔레비전의 일요 프로그램 <주님의 날>(Le jour du Seigneur)에서는 정기적으로 미사를 생방송하고 있다.
전체 프랑스 국민의 약 84%가 가톨릭 신자이지만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1990년의 경우 총 472,130명이 세례를 받았지만 이후 그 숫자는 점차 감소하여, 2002년 세례자는 385,460명에 불과하였다. 이는 7세 미만 유아가 세례를 받는 숫자가 1990년 458,626명에서 2002년 365,107명으로 감소하고 있는 현상에서 기인한 것이며, 반면 7세 이후에 세례를 받는 경우는 1990년 13,504명에서 2002년 20,353명으로 다소 증가하고 있다. 혼종혼은 12%에 달한다.
2004년 현재 프랑스 내에는 대교구 23, 교구 71, 성직 자치단 1, 동방 대목구 2, 군종교구 1 등 총 98개의 교구가 있다. 교구 신부가 있는 본당은 7,070, 수사 신부가 담당한 본당은 627, 다른 신부가 관리하는 본당은 10,045, 부제가 담당한 본당은 56, 수사가 담당한 본당 4, 수녀가 담당한 본당 264, 평신도가 담당한 본당 523, 공석 중인 본당 498개소로 총 19,087개이다. 추기경 4, 대주교 31, 주교는 138명이며, 신부는 23,532(교구 소속 17,935, 수도회 소속 5,597)명이다. 또한 9,524명의 수사와 46,007명의 수녀가 있으며, 그중 2,798명의 수녀가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8,719개에 이르며, 200만 명 이상의 학생을 교육하고 있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연간 헌금 액수는 약 4억 달러이다. (→ 가타리파 ; 가톨릭 노동 운동 ; 가톨릭 문학, 프랑스의 ; 갈리아주의 ; 공의회 우위설 ; 근대주의 : 낭트 칙령 ; 뒤팡루 ; 떼제 공동체 ; 라므네 ; 레미지오 ; 롬바르드족 ; 루도비코 ; 르와지 ; 리슐리외 ; 마자랭 ; 몽마르트르 ; 바스크인 ; 반성직주의 ; 반유대주의 ; 발도파 ; 베륄 ; 베르나르도 ; 보니파시오 8세 ; 보쉬에 ; 블롱델 ; 비오 6세 ; 비오 7세 ; 빈천시오 아 바오로 ; 서구 대이교 ; 성전 기사 수도회 ; 성직자 공민 헌장 ; 시토회 ; 신의 휴전 ; 아비뇽 교황들 ; 악시옹 프랑세즈 ; 알비파 ; 얀센주의 ; 엘리지오 ; 오라토리오회 ; 요안나, 아르크의 ; 요한 기사 수도회 ; 위그노파 ; 인권 선언 ; 자카리아 ; 전례 운동 ; 카를 대제 ; 클로비스 1세 ; 평신도주의 ; 프랑스 대혁명 ; 프랑크 왕국 ; 피핀)

※ 참고문헌  Daniel Rivière, Histoire de la France, Hachette, 1995(최갑수 역,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August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 Herder, 2000(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J. 카르팡티에 외, 주명철 역, 《프랑스인의 역사》, 소나무, 1991/ J.M. Gres-Gayer, 《NCE》 5, 2003, pp. 841~863/ M. 보벨, 최갑수 외 역, 《왕정의 몰락과 프랑스혁명》, 일월서각, 1987.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