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 大革命

[라]revolutio gallica · [영]French revolution · [프]Révolution franc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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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삼부회의 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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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삼부회의 회의 모습.

1789년 5월 삼부회(三部會, Etats-Generaux)의 소집을 시작으로 1799년 11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10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 프랑스의 정치적 · 사회적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며 동시에 영성적 · 종교적으로도 극적인 변화를 초래한 때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국가들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혁명 세력은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 구조를 파괴하고 근대 사회에 어울리는 원칙들을 공식화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를 외면하거나 혹은 부인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 및 성과에 대하여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으며, 그 내용에 상관없이 대혁명은 과거의 결산인 동시에 미래의 예시였다는 점에서, 또한 이후 수많은 사회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적 선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 역사의 차원을 넘어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다.
I. 원인과 발생
〔원 인〕 구체제의 위기 :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1789년 당시, 프랑스인의 85% 가 농촌 인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2% 미만이던 성직자와 귀족이 전체 토지의 약 3분의 1 정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농촌 사회는 여전히 영주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특히 봉건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영주적 부과조(賦課租)가 부과되어 농민은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더욱이 부역 요구, 주요 시설 독점권, 하급 재판권 등 영주의 명예와 관련된 각종 특권들로 인하여 농민들은 영주에게 확고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한 관계는 신분제 사회의 특성을 기초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 사회는 중세 이래 성직자, 귀족, 제3 신분 등 세 개의 신분으로 구분되었으며, 각 신분에 상응하는 권리와 의무가 규정되어 있었다. 그중 성직자와 귀족은 비생산적 활동에 종사하는 특권층으로,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는 귀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부계 혈통에 따라 상속되는 귀족은 극소수에 불과하였으며, 대부분은 국왕에게 봉사한 대가로 혹은 관직 매매에 의해 귀족의 지위를 취득하였다. 제3 신분은 특권 계층에 종속되어 정기적으로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는 자들이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신분이 아닌 재산의 보유 정도에 따라 서열화되어 있었다. 신분 간의 장벽은 18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였으며, 상호 경멸과 질투심은 더욱 강해졌다.
체제의 위기는 절대주의의 한계에서도 비롯되었다. 프랑스는 17세기 이래 절대주의 국가 체제의 표본이었다. 국왕은 관료제를 통해 전국적인 행정 단일화와 중앙 집권화를 시행하였으며, 특권층의 안정을 위한 질서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국왕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백성의 정신적 통일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절대주의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관료제의 문제, 지역에 따라 조세 부담이 불균등하고 징세 청부제가 잔존하였기에 왕국의 통합이라는 이상이 현실화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국왕의 권위가 하락할 때마다 각종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왕권은 중세적 혹은 봉건적 속성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특권 계급의 반동 : 18세기 중반 이후 특권 계급은 절대적 · 상대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귀족은 영주였기에 18세기 전반적인 물가 상승의 수혜자였지만, 보다 역동적인 부르주아지(bourgeoisie)와 비교하였을 때 상대적인 몰락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이른바 영주제를 강화하는 '특권 계급의 반동' 을 통해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였으며, 나아가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커져 혁명 직전에는 고위 행정직, 고위 성직자들이 모두 귀족 출신이었고, 국왕 참사회 구성원의 82%, 파리 고등법원 판사들과 군대의 장교들 중 90%가 귀족 출신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으로는 귀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지만 정치 권력에서는 배제한다는 절대 왕정의 전통적인 정책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특권 계급의 반동은 부르주아지와 농민층을 자극하였으며, 나아가 신분 간의 불신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증폭되었고 체제의 정당성마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대혁명 직전의 종교적 상황과 계몽 사상 : 18세기 초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교 유럽 국가들에서는 이른바 '계몽된' 혁신적 사상가들이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는 하느님과 관련된 문제를, 정치적 · 사회적 측면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문제를 검토하였다. 계몽 사상가들은 하느님의 계시와 교회 교도권의 권위를 거부하고 이성의 이름을 빌려 '자연 종교 , 혹은 아주 드물기는 했지만 철저한 무신론으로 대체하려 하였다. 그들은 성직자, 특히 교황이 오만할 정도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관용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부유하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가톨릭 교회에 사회적 결함이 있으며 사회 복지 문제를 전적으로 등한시하고 있고, 나아가 전제 정치와 결탁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중간 계급은 성직자, 특히 수도자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며, 교황은 물론 교황 지상주의(Ultramontanismus)의 옹호자들을 혐오하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대부분 귀족과 지식인들에게만 국한된 것
이었으며, 민중 계급에서의 종교적 관행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그 관행은 종종 절대적인 무지와 혼합되어, 확고한 신앙심보다는 순응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1789년 삼부회의 소집에 맞추어 제출된 진정서들은 국민 종교로서의 가톨릭에 대하여 광범위한 애정을 보여 주고 있지만 동시에 교계 제도에 대한 수많은 비판을 포함하고 있으며, 교회 개혁 및 이를 통한 국가 개혁에의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진정서에서는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특권, 특히 직접세 면세 특권과 토지 소유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면서 수도회, 특히 남자 수도회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수도회들이 지나치게 많으며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정결과 순명 서약은 인간 본질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진정서의 내용은 공의회 우위설(Conciliaismus)에 근거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권리를 요구하던 갈리아주의(Gallicanismus) 옹호자들의 주장과 안센주의(Janenesims)와도 일정 부분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편 계몽 사상가들의 지원을 받은 프로테스탄트들은 완전한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계몽 사상이 프랑스 대혁명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계 몽 사상은 단일하고 단선적인 사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사상적 흐름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몽 사상가들은 시민 사회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유, 자연적 평등, 계약, 소유권, 관용 등과 같은 주요한 사상들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인간 이성을 통해 전제주의와 미신적 악습을 타파하고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적 사고는 이른바 근대성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므로 계몽 사상과 부르주아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근대적 사고 방식은 이미 구체제 내에서는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계몽 사상에 심취한 혁명 부르주아지들에게 대혁명 초기에 가톨릭 교회를 파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는 증거는 없다. 그들은 심지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재조정하려는 계획, 특히 미국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국가와 교회의 분리는 상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성한 종교의 협조를 받아 특권이 남용되는 것을 막고 제도를 쇄신시키 며 나아가 새로운 제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대혁명의 폭발성은 결코 우연의 산물 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다양한 의식의 반영이었으며, 또한 대혁명 기간부터 뚜렷하게 진행되었던 비 (非) 혹은 반(反)그리스도교 운동은 종교적 관행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던 세속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의 폭발〕 구체제 말기의 정치적 위기는 경제적 어려움과 결합하여 혁명이 폭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경제적 위기의 징후는 1770년, 곡물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며 나타났다. 농업의 불황은 다른 산업 부문으로 파급되었으며, 1780년대부터는 흉작까지 겹쳐져 곧바로 기근이 닥치고 곡물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하였다. 물가가 인상되자 대중의 구매력이 약화되어 제조업 분야도 약화되었고, 결국 1789년 봄에 이르자 파리를 비롯한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빠진 상태였기에 이러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미국 독립 전쟁(1775~1783)에 참전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함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증폭시켜 재정적 균형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1788년의 <국고 회계 보고서>에 의하면 적자가 지출의 약 20%에 달하였고, 지출액의 절반이 공채 이자로 지급되었다.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당시 면세 특권을 누리고 있던 특권 계급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기에 이를 위해 재무 장관 칼론(C.-A. de Calonne, 1734~1802)이 1787년 2월 명사회(名士會, Assemblée des Notables)를 소집하였으나, 회의의 참석자들은 그가 내놓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칼론과 로메니드브리엔(E.C. de Loménie de Brienne, 1727~1794)의 세제 개혁안이 명사회와 고등법원에서 거부당하여 실패하자, 결국 루이 16세(1774~1792)는 삼부회 소집을 약속하였다. 삼부회의 소집 예고는 각 신분별로 다른 열망을 불러일으켰으며, 삼부회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 운동은 삼부회에 대한 제3 신분의 기대를 증폭시켰다. 1788년 9월 파리 고등법원은 새로운 삼부회가 "1614년의 절차에 준하여 소집되고 구성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삼부회를 둘러싼 신분 간 갈등과 충돌을 예고하였으며, 부르주아지는 삼부회의 제3 신분 대표의 수가 다른 두 신분 대표의 수와 같아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하여 국왕의 허락을 얻어냈다. 머릿수 표결이냐 아니면 신
분별 표결이냐 하는 표결 방식을 둘러싼 마찰은 특권 계급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첨예한 갈등으로 드러났다.
Ⅱ. 혁명의 진행
〔부르주아지 혁명(1789. 5~1792. 8)〕 입헌 군주제의 등장 :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가 참석한 가운데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삼부회가 개최되었다. 각 신분별로 제출한 진정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절대주의 체제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되었지만, 특권과 권리의 평등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 고 있었다. 특히 삼부회의 운영과 표결 방식을 둘러싼 특권 계급과 제3 신분 대표들의 치열한 갈등과 충돌이 전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3 신분 대표들은 귀족에게 반감을 가진 성직자 계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3 신분 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100분의 96'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6월 17일 '국민 의회' (Assemblée Nationale Constiuante)를 선포하고, 자신들의 동의 없이 어떠한 세금도 징수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6월 20 일에 국왕이 회의장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제3신분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되어 확고한 토대 위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국왕은 이 서약을 파기하고 별도의 회합을 개최하라고 명령하였지만 제3 신분이 이에 불복하고 파리와 베르사유 주민들도 그들에게 동조하자, 어쩔수 없이 국왕은 머릿수로 표결할 것을 명하였다.
7월 9일 국민 의회가 제헌 의회를 선포하고 헌법을 기초하는 작업에 착수하자, 국왕은 군대를 소집하는 한편 11일에 재무 장관인 네케르(J. Necker, 1732~1804)를 해임하였다. 삼부회의 공전으로 파리를 비롯한 도시민들은 물론 농촌 지역민들까지 분노하였으며 더욱이 국왕과 특권 계급이 결탁하여 제3 신분의 모임을 해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1789년 7월의 '대공포'(Grande Peur)가 초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리와 베르사유 주변에 군대가 배치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결국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7월 14일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이 함락되었다. 이 사건은 새로운 권력 체계를 형성하고 있던 부르주아지와 여러 차례의 봉기를 통해 정치 무대에 등장한 민중이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더욱이 민중의 압력은 지방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1789년 봄부터 시작된 농민 반란은 7월의 대공포와 함께 '비적 떼에 대한 공포' 가 결합되면서 거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농민들은 오랫동안 증오의 대상이었던 영주의 성을 공격하고 봉건 문서를 소각하였다.
도시와 지방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귀족들은 서둘러 외국으로 망명하기 시작하였으며, 당황한 국민 회의 측은 성난 농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봉건제 폐기뿐이라고 생각하여 <8월 4일 밤의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질서를 설정하였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국민 의회는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I'homme et du citoyen)을 통하여 자유, 평등, 사유 재산의 불가침성, 압제에 저항할 권리 등을 천명하였다. 이 선언은 절대 왕정과 신분 사회의 악습을 혁파하고 부르주아의 이상을 토대로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종교의 재조직화를 위한 시도 : 국민 의회가 발표한 두 가지의 선언은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전복시키는 것이었 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경악하였다. 개인은 물론 사회적 집단들의 모든 특권을 폐지한 <8월 4일 밤의 선언> 으로 가톨릭 성직자들은 프랑스 내에서 더 이상 우월한지위를 향유하는 별개의 질서 혹은 계급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신자들에게 십일조를 부과하거나 소유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였고, 국왕이 부과하는 세금을 납부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즉 일반인들과 같은 수준의 시민이 되어 법률에 복종해야만 하였다. 더욱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성직자 대표들은 이러한 관용의 방식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의 완전한 시민적 평등을 수용하였지만, 교황 비오 6세(1775~1799)는 그 선언에 포함되어 있는 하느님의 섭리에 위배되는 원칙들과 진정한 종교의 파괴를 초래할 수 있는 내용들을 엄중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1789년 11월 2일에 시행된 교회 재산의 국유화 조치였다.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 어 국가가 파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대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당시 오툉(Autun)의 주교였던 탈레랑 페리 고르(C.-M. de Talleyrand-Périgord, 1754~1838)의 제안에 따라, 국민 의회가 교회 소유의 막대한 토지를 몰수 · 매각해 국가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법안을 발표한 것이다. 국민 의회는 공무원 신분으로 전락한 성직자들에게 봉급 지불을 보장하였으며, 당시 교회가 운영하던 병원, 학교 및 재단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하 였다. 교황이 분노하는 등 여러 반대에 직면하기도 하였지만 교회 재산이 큰 어려움 없이 몰수되자, 이제 혁명 부르주아지는 과거로의 복귀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 조치를 완강하게 비난하고 있던 교회의 반대 세력들을 결집시켰다.
다음 단계로 진행된 것은 수도원의 해산이었다. 1790년 봄 국민 의회는 공공 복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수도원의 개혁을 결정하였다. 물론 그 결정은 교황청과 아무런 논의 없이 이루어졌다. 수도 서약은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으며, 간호와 교육 사업을 행하지 않는 수도회는 억압을 받았고, 수도자들이 거의 없는 수도원은 합병되었다. 수사들과 수녀들은 수도원을 떠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얼마 가지 않아 남자 수도원들은 완전히 황폐해졌지만, 그래도 수녀회는 보다 오랫동안 그 압력에 저항하였다. 종교적 개혁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성직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던 수녀원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었으며, 1792년 8월에 이르자 결국 모든 수녀원이 폐쇄되었다.
이처럼 국민 의회가 성직자의 모든 특권을 폐지하였지만, 교회 자체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대다수의 성직자 대표들은 1790년에도 여전히 프랑스 교회가 혁명을 통해 혁신된 국가 내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790년 7월 12일에 <성직자 공민 헌장>(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이 제정되면서 대혁명과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 헌장에서 국민 의회는 행정적이고 사회적인 개혁의 일부분으로서 가톨릭 성직자들의 새로운 위상을 마련하였다. 즉 주교를 비롯한 모든 성직자들은 봉급을 받고 일하는 시민의 봉사자로 규정되었으며, 주교 임명을 교황에게 받을 필요도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대신 모든 성직자들은 시민으로서의 선서를 해야 하였으며, 이는 1791년 1월부터 의무 조항이 되었다. 헌장의 또 다른 결과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상호 적대적인 집단으로 양분시켰다는 데 있다. 130명의 주교 중 단 7명만이 선서를 한 반면 본당 주임 신부의 경우는 약 50%가 선서를 하여 '선서파' (assermentés)와 '거부파' (réfractaires)로 양분되었다. 이는 프랑스를 양극화된 두 개의 진영으로 구분지었으며, 혁명을 분열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1791년 3월 교황 비오 6세가 <성직자 공민 헌장>을 비난하자 선서파에 속했던 많은 성직자들이 선서를 취소하였으며, 가톨릭 신자들은 구체제로 복귀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에는 외국 군대의 도움을 요
청해야 한다는 귀족의 견해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애국파 인사들은 가톨릭 성직자들과 일반 신자들을 반혁명 분자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대혁명과 가톨릭 교회 사이의 조화로운 협조라는 꿈은 완전히 사라졌고 1790년 말에는 파리에서 폭력적인 반 교권주의 시위가 발생하여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주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망명길에 올랐으며, 이미 독일과 이탈리아로 망명한 왕당파들과 결합하여 가톨릭 교회와 루이 16세를 구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제후들의 동맹을 결성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유럽의 통치자들은 극히 위험한 이데올로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였다. 1791년 5월 프랑스가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자, 교황은 파리의 자코뱅주의자들이 왕권과 교회에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키도록 선전을 확대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프랑스는 물론 서양 국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혁명적 이념과 가톨릭 교회가 비극적인 대립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과 공화정 : 1791년 7월 루이 16세와 그의 가족이 외국으로 탈주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파리로 송환되자, 국 왕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가 증대되고 공화정을 세우자는 주장이 확산되었다. 1791년 9월 루이 16세는 새로운 헌법에 선서하였으며, 1791년 10월 1일 제한 선거제로 선출된 새로운 입법 의회가 개원하였다. 국왕의 탈주 기 도 사건과 '상 드 마르스 학살' (Fusillade du Champs-de-Mars)로 정치 세력이 새롭게 편성되어 의회 내에서는 우파인 푀양파(Feuillants)와 후에 지롱드파(Girondins)로 불린 좌파인 브리소파(Bissotins) 등이 형성되었으며, 의회 밖에서는 자코뱅 클럽(Club des Jacobins)의 인물들이 군중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상퀼로트' (sans-culote)라고 불리는 도시 민중의 의식화된 전위 부대가 정치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특권 계급 인사들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한편 평등주의와 공포 정치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그 가운데 전쟁 문제가 대두되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필니츠(Pillnitz) 선언' 을 발표하여 프랑스 대혁명을 분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프랑스 내에서도 주전론이 대두되었지만 정파에 따라 그 이유는 매우 상이하였다.
1792년 4월 20일 선전 포고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는 개전 초기부터 패배하였다. 입법 의회는 거부파 성직자들의 유형, 루이 16세의 친위대 해산, 파리에 지방 출신의 연맹군을 창설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으나 국왕은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이에 파리 민중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며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이 확산되었다. 7월에 프로이센 군대가 동부 전선에 집결하자, 의회는 11일에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고 선언함으로써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대규모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젊은이들이 대거 연맹군에 참여하여 파리에 집결하였으며, 특히 마르세유 출신의 연맹군들은 후에 프랑스 국가(國歌)가 된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aise)를 부르면서 행진하였다. 이 시기에 혁명적 부르주아지와 민중 운동이 결합하였다. 지롱드파는 대부분 보수로 회귀한 반면 자코뱅 클럽의 인물들이 정치적으로 전면에 부상하였다. 8월 10일 의회는 루이 16세의 권한을 정지시켰고, 보통 선거로 새로운 의회인 국민 공회를 구성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사건은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공화국의 탄생을 예고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지만, 그 결과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잔인한 공격을 동반하는 제1차 공포 정치로 나타났다.
〔민중 혁명(1792. 9~1794. 7)〕 지롱드파의 몰락과 산악파의 승리 : 1792년 9월 실시된 보통 선거를 통해 국민 공회가 소집되었다. 지롱드파 의원들과, 파리 출신의 자코뱅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산악파(山嶽派, Montagnards) 의원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두 정치적 파벌의 대립으로 인한 긴장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전자는 민중의 정치적 진출을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한 반면, 후자는 특권 계급과 외국의 위협에서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중 계급과의 결합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1792년 12월부터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두 파벌의 견해는 극렬하게 나뉘었다. 산악파는 루이 16세를 처형함으로써 혁명을 공고히 할 것을 주장한 반면, 지롱드파는 국왕의 유죄는 인정하지만 관용 정책을 추진하여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의회의 의결에 따라 국왕은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국왕의 처형에 격분한 유럽은 영국을 중심으로 제1차 대불동맹을 결성하였고, 교황청을 비롯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였다. 프랑스 군대는 연이어 패배하였으며, 급기야 사령관이 도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국내에서는 국민 공회의 징집령에 반대하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방데 반란' (Guerres de Vendée)이 일어나, 가톨릭 세력과 귀족층을 끌어들이면서 주변 도시로 확산되었다. 산악파는 공공의 안녕을 내세워 혁명 재판소를 부활시켰으며, 각 코뮌(Commune)마다 감시 위원회와 공안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에 불안을 느낀 지롱드파는 권력의 재장악을 시도하였으나 민중들의 분노만 촉발시켰을 뿐이었다. 1793년 6월 2일 봉기한 파리 민중은 국민 공회의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었던 지롱드파의 지도자들에 대한 고발을 요구하였다. 이로써 산악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산악파의 독재와 혁명 정부의 수립 : 1793년 7월 재조직된 공안 위원회의 핵심적 인물은 로베스피에르(M-F.F- M.-I. de Robespierre, 1758~1794)였다. 그는 점차 악화되어 가는 국내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상퀼로트' 와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지만, 동시에 군중의 역동성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6월 24일 국민 공회는 상당히 민주적인 새 헌법을 통과시켰으나, 그 시행은 상황적인 요인으로 연기되었다. 8월, 의회는 18~25세의
모든 남자들에 대해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1793년 9월 5일, 국민 공회는 공포 정치를 의사 일정에 포함시켰으며, 생필품의 최고 가격제 실시를 결정하였다. 광기와 공포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더 이상 시민의 권리는 준수되지 않았고, 입법권과 행정권이 뒤섞였다. 보안 위원회를 정점으로 이루어지는 공포 정치가 조직화 · 합법화되면서 가공할 위력을 드러냈다. 1793년 12월 전국에서 체포된 혐의자는 30~80만 명에 달하였으며, 이들은 약식 재판만 받고 바로 처형당하였다. 그중에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1755~1793)도 있었다. 1794년 6월 이후 재판 절차는 더욱 간소화되어 이른바 '대공포 정치' 가 나타났다. 변호인 입회와 증인 심문이 폐지되었고, 판결은 사형 아니면 무죄 방면이었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4~5만 명이 공포 정치의 희생자가 되었다.
비그리스도교화 : 비그리스도교화는 혁명 초기부터 의회가 행한 가톨릭,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공격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성직자들에 대한 유형 및 사형 집행, 성당 폐쇄, 종교적 기념물과 상징물의 파괴, 예배 및 종교 교육의 금지, 국가의 모든 제도들의 세속화, 과거의 종교 전통에 대한 비난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가톨릭 교회는 혁명적이고 시민적인 종교로 대체되었다. 비그리스도교화 운동은 1792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진행된 공포 정치와 1793년 9월부터 1794년 8월에 걸쳐 시행된 대공포 정치 기간의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1792년 4월, 선전 포고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자 선서파 성직자들과 거부파 성직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 프랑스 내부는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여전히 일반 신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거부파 성직자들은 법에 대한 불복종의 전형적 모델이자 혁명 반대 세력과 동질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혁명 정부는 그들을 체포하고 추방하였다. 특히 대불 동맹군이 프랑스 국경을 위협하던 시기에 파리 민중들은 9월 2~6일에 걸쳐 1,000여 명의 수감자들을 외국 군대와 내통하였다는 죄목을 들어 즉결 재판으로 처형하였는데, 그 희생자의 대부분은 거부파 성직자들이었다. 의회는 모든 종교 예식을 금지하였고, 성직자 복장 착용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국가 방어라는 미명하에 교회 내의 모든 귀금속을 약탈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자코뱅주의자들과 민중, 반종교적인 지롱드파 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진행되었다. 하지만 특히 농촌 지역의 민중 감정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비그리스도교적 결정을 시행하고 확산시키는 데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였다.
국민 공회하에서 비그리스도교화 운동은 1793년 여름에 새롭게 시작되어 1794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국민 공회는 대내외적인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성직자의 결혼을 강제로 추진하였으며, 이를 거부하는 성직자는 혁명 재판소에 회부하였다. 1793년 10월 21일 법령은 의심스럽다고 판단되는 성직자들은 물론 거부파 성직자들과 연계된 모든 사람들을 발견 즉시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였다. 리옹(Rion)에서만 135명의 성직자가 사형을 당하였으며, 다른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발생하였다. 공포 정치 기간 동안 공화주의와 자연적인 덕성을 기리는 의식이 생기면서, '자유와 이성의 여신' 을 기리는 민중적 축제가 조직되어, 1793년 11월 파리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Notre-Dame de Paris)에서 그 의식이 행해졌다. 성당들은 대중 모임을 위한 장소 혹은 상점으로 바뀌었으며, 종교 예식 거행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들도 마찬가지였고, 프리메이슨 단원들의 집회도 금지되었다. 공화주의의 이념을 제외한 다른 어떤 이념도 선전하거나 교육시키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가톨릭의 전통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성당 건물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탑과 십자가 등이 훼손되었다. 성인의 이름을 지닌 도시의 명칭은 세속적으로 수정되었으며, 어린이들의 이름 역시 세속화되었다. 1793년 10월 국민 공회는 그레고리오력 대신 혁명력을 채택하였다.
비그리스도교화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조치들은 혁명의 진행 상태에 따라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소수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제로 부르주아지와 '상퀼로트' 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것이었을 뿐, 하층 계급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 조치들은 대부분 18세기의 철학적 사고들 중 일부를 형성하던 합리주의와 혼합되어 교회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는 대혁명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비그리스도교화 정책의 모든 책임을 자코뱅파 인사들 혹은 무신론자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특히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5월에, 모든 시민들은 의무적으로 최고 존재 및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법령으로 규정하였지만, 실제로는 루소(J.-J. Rousseau, 1712~1778)의 이신론(理神論)에 심취해 있었으며 교회에 호감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관용적인 정책을 펴지도 않았다. 그저 지나친 비그리스도교화가 혁명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성과 덕성을 기리는 공화주의적 종교의 확립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비그리스도교화 정책은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가톨릭 신자들과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적 박해를 공포 정치로 대표되는 집단적 광포함의 절정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1794년 여름부터 프랑스 군대가 승리를 거두면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도 대혁명의 반종교적 운동의 영향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망명 중이던 프랑스 성직자들은 대혁명이 보여 준 반종교적 경향의 사악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프랑스 내에서 비그리스도교화가 확산되어 가기는 하였지만 모든 종교 생활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적극적인 반대 활동을 전개하여 비그리스도화를 막았으며, 지역에 따라 특히 브르타뉴(Bretagne) 지역은 혁명 전과 비교하였을 때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을 정도였다. 더욱이 모든 성직자들이 외국으로 망명한 것도 아니었다. 공포 정치 기간 중 25명의 주교들은 망명을 거부하고 파리 인근에 은신하였으며, 일부 주교들은 은밀하게 자신의 교구를 관리하였다. 성직자들은 물론 많은 수녀들이 학교 교사로 행세하면서 행정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중심으로 주민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심지어 선서파 성직자들 중에서도 루아르에세르(Loir-et-Cher)의 주교인 그레고아르(H.B. Grégoire, 1750~1831)와 같이 국민 공회 내에서 종교 예식의 권리를 주
장하는 인물도 있었다. 점차 정치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교회의 개방과 종교 교육의 재개를 주장하는 경우도 나 타났다.
테르미도르 반동 : 1793년 말부터 국내의 반란은 종식되었고, 국경에서는 군기를 회복한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1794년 6월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벨기에를 다시 차지하자, 공안 위원회와 산악파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민중적 차원의 비그리스도교화 운동은 물론 식량 위기에 따른 민중의 불만에서 비롯되는 과격성에 놀란 로베스피에르는 '상퀼로트 를 제어하여 민중 운동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이를 정책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퀼로트' 는 혁명 정부에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1794년 6월부터 공포 정치가 다시 강화되었다. 이제 공안 위원회의 자코뱅 독재에 도전하는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덕성의 공화국' 이념이 구현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1794년 6월 8일의 '최고 존재와 자연의 축제' 는 문화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듯하였다. 하지만 외국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목도한 여론은 공포 정치에 지쳐, 다시 자유를 열망하였다. 의회 내에서 로베스 피에르의 독재에 대한 고발이 제기되었으며, 공안 위원회 내부에서조차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국 1794년 7월 27일(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월 9일)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체포되었고, 다음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부르주아 공화국(1794. 7~1799. 11)〕 테르미도르파의 국민 공회 : 공포 정치가 끝난 '테르미도르 반동' (Thermidorian reaction)은 반혁명이 아니라, 그저 로베스피에르와 소수 공포 정치의 주역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테르미도르파로 불리게 된 반동의 주역들 또한 혁명을 지키겠다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대신 그들은 공안 위원회와 보안 위원회를 무력화시켰으며 코뮌을 폐지하고 자코뱅 클럽과 수많은 민중 협회를 폐쇄하였다. 그리고 수감되어 있던 반혁명 혐의자들을 석방하였다. 귀공자 청년대' 와 '태양단' 등 젊은이들로 구성된 새로운 우파가 조직되어 자코뱅파 인사, 선서파 성직자, 국유 재산 취득자들을 추적하였다. 이러한 소위 '백색 공포' 의 과격화는 테르미도르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1794년 12월 국민 공회는 최고 가격제를 폐지하였다. 이처럼 자유 경제로 복귀하자 이듬해 봄에 바로 식량 위기가 초래되었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져 극심한 고통 속에 놓인 빈민들은 신흥 부유층의 사치에 자극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력을 상실한 민중 운동과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산악파의 지도부가 결합하여, 1795년 4월과 5월의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상퀼로트' 는 '빵과 1793년의 헌법! 을 요구하면서 국민 공회에 침입하였다. 이는 혁명사상 최초로 '상퀼로트' 만의 힘으로 조직된 봉기였으며,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가장 민중적인 특성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도자가 없는 군중은 부르주아 진영 앞에서 쉽게 패배하였으며 이는 민중 운동이 결정적으로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파로부터의 위협도 재개되었다. 유화정책 덕분에 1795년 초 망명 귀족들이 프랑스로 귀환하였으며 왕당파의 움직임도 재개되어, 6월에는 루이 16세의 아우인 프로방스 백작(Comte de Provence)이 루이 18세(1795~1824)라는 칭호를 얻었다. 왕당파의 의회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테르미도르파가 새로운 의회 의원 중 3분의 2를 국민 공회 의원으로 충원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통과시키자 왕당파는 1795년 10월 5일 폭동을 일으켰으나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진압되었다. 부유한 명사층의 제한된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테르미도르파는 좌파와 우파의 위협을 동시에 받으며 부르주아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대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결국 군대는 총재 정부에게 태생적인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총재 정부 : 테르미도르파가 기초한 새로운 헌법에 의해 탄생한 총재 정부(1795. 10~1799. 11)는 좌파와 우파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리는 약체였다. 총재 정부는 소유권을 옹호하고 명사층에 의지하면서 자유주의적 노선에 서 부르주아 혁명을 공고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실제로 '혁명력 3년의 헌법' 은 평형의 유지를 기본 이념으로 설정한 것으로, 권리 선언과 더불어 의무 선언을 첨가하고 재산 제한 선거제를 규정하였다. 또한 양원제 의회와 5인의 총재에 의한 집단 지도 체제를 규정하고, 삼권 분립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러나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으며, 국유 재산을 이용하여 투기꾼들이 축재를 거듭하자 총재 정부 체제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반대 움직임은 좌파로부터 시작되었다. 1796년 5월 과거 산악파 인사들, 팡테옹 클럽(Club des Panthéon)의 공화주의자들, 바뵈프주의자들이 결합하여 '평등주의자의 음모' 를 조직한 것이다. 이들은 무장 봉기로 정부를 전복하고 혁명적 소수의 독재를 통해 공산주의 체제를 실현한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비록 내부 첩자의 밀고로 실패하였지만 공산주의 이념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부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자코뱅파를 탄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왕당파의 위협만 강화되었을 뿐이었다. 1797년의 봄 선거에서 왕당파 인사들은 대거 의회에 진출하였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총재 정부가 군대에 도움을 요청하자 당시 이탈리아에 있던 나폴레옹은 부사령관인 오주로(P.F.-C. Augereau, 1757~1816)를 파견하여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왕당파 의원들을 축출시켰다.
새롭게 구성된 제2차 총재 정부 시대는 이른바 집권 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시기였다. 선거 결과는 쿠데타에 의해 번복되었으며, 파벌 간 갈등은 증대되었다. 그러한 정치적 충돌의 중재자로 등장한 것이 바로 군대였다. 군인들은 점차 자신의 힘을 의식하면서 권력을 갈망하게 되었고, 총재들에 대한 경멸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 테르미도르파의 국민 공회는 점차 교회와 국가의 분리 정책으로 선회하였는데, 이는 교리에 의한 확신 때문이 아니라 상황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국가의 재정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정부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직자에 대한 봉급 지불을 중단하였다. 그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 공회는 모든 종교의 자유로운 예배와 공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예방 조치들을 약속하였으며, 이러한 원칙은 총재 정부의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는 국가가 종교적인 문제들과는 상호 양립하지 않으며, 모든 시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관용 정책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으며 경쟁적인 분쟁 관계에 있던 다양한 종교 신자들이 존재하는 프랑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총재 정부 기간 동안 종교에 대한 철저한 불개입 정책은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 시도로 전환되었지만,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감시와 억압이 새롭게 강화되는 모순적 태도를 보여 어떠한 종교에도 안정을 보장하지 못하였다. 결국 지속적인 전쟁, 재정적 파탄, 무정부 상태 지속 등의 요인으로 인하여 결코 대중적이지 못했던 정부의 평판은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1795년 10월부터 1797년 9월까지, 정부는 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취하였다. 가톨릭 성직자들이 다시 등장하고 공적인 예배가 재개되었으며, 선서파 성직자들도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직자들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소수의 성직자들은 정부에 대한 복종을 신중하게 주장하였지만, 망명에서 돌아온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정부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각종 법령과 대표자들을 비난하였다. 1796년 여름 성직자들을 공화국 법령에 복종시키기 위한 교황과의 협상이 실패하자, 총재 정부는 종교 정책을 강화하여 가톨릭 교회를 비난하기 시작하였으며, 혁명력 사용을 강요하고 세속적인 교육을 시행하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어느 총재는 스스로를 자신이 만든 종교의 예언자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797년 봄 선거를 통해 가톨릭 교회는 예전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왕당파와 연합하였다. 총재 정부는 이를 일종의 쿠데타로 간주하여 모든 종교적 유화 정책에 대해 회의를 품고는 결국 종교에 대한 새로운 박해를 시작하여 1799년 11월까지 지속하였다. 총재 정부는 성직자에게 왕당파와 결별하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요구하였으며, 성직자의 국외 추방을 위한 법령을 부활시켜 2천 명의 성직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들을 기아나(Guianas)로 추방하는 과정에서 많은 성직자들이 사망하였다. 이처럼 총재 정부는 교회와 성직자들을 약화시키는 각종 정책을 통해 일반인들이 그 존재를 망각하기를 기대하였다.
총재 정부 시기에 타국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가톨릭 교회의 몰락이 예견되는 듯하였다. 나 폴레옹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으며, 교황청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군중을 선불리 자극하여 지금까지의 정복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교황 비오 6세와 톨렌티노(Tolentino) 조약' (1797. 2)을 체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그 조약으로 엄정한 중립을 강요받게 되어, 이탈리아인들은 물론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의 눈에도 나폴레옹이 교황청을 구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난 후 프랑스 군대와 이탈리아 제후들 사이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여, 총재 정부의 태도는 점차 변해갔다. 베르티에(L.-A. Berthier, 1753~1815)의 군대가 교황청을 공격하여 1798년 2월 로마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교황은 81세의 고령과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프랑스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8월 29일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교황청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무혈의 쿠데타 : 대불동맹은 1795년에 와해되었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하였다. 1796년 봄 총재 정부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한 대공세를 시작하여, 남부 독일을 거쳐 빈(Wien)에 이르는 독일 전선을 돌파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부 이탈리아에서 견제 공격의 임무를 맡은 나폴레옹의 군대는 괄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1797년 봄에는 빈으로 이르는 길을 확보하였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 (1797. 10. 17)을 맺어 많은 영토를 넘겨 받았으며, 나폴레옹은 그 지역에 두 개의 새로운 자매 공화국을 세웠다. 이는 혁명적 외교 원리를 포기하고 구체제의 외교적 관행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자매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전통적인 자연 국경 이론을 스스로 부정하고 인민의 해방이라는 혁명의 원리를 거역하는 정복의 논리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제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었다.
1798년 5월 영국을 제압한다는 나폴레옹 자신의 명분과 개인적 야심에다 대중적 인기까지 지닌 장군을 외국으로 격리시킬 필요성을 절감한 총재 정부의 이해가 결합되어서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떠나게 되었고, 연이은 승전으로 이집트가 프랑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영국의 넬슨(H. Nelson, 1758~1805) 제독이 프랑스 함대의 주력을 궤멸시켜,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갇힌 형편이 되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는 대불 동맹군에게 점차 밀리고 있었고, 자코뱅파의 압력으로 국내의 상황도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총재 중 한 사람이었던 시에예스(E.-J. Sieyès, 1748~1836)는 자코뱅파의 압력을 저지하고 헌법의 개정을 통 해 새로운 체제를 결성하려고 또 다른 쿠데타를 구상하였다. 1799년 8월 이집트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와서 파리 주둔군의 사령관이란 지위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나폴레옹이 바로 그 쿠데타의 중심에 있었다. 11월 9일부터 시작된 '무혈의 쿠데타' 는 혁명의 종식과 '나폴레옹의 프랑스 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10년간의 혁명을 통해 분열과 혼란에 지친 프랑스는 별다른 저항없이 나폴레옹을 받아들여, 권위주의적 체제를 통한 안정의 시기가 도래하였으며, 유산 계급의 사회적 우위를 확립하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Ⅲ. 역사적 의의
〔자유와 평등의 혁명〕 바스티유의 함락은 자유의 시작을 상징한다. '인권 선언' 은 신체의 자유를 선포하였으며, 또한 의견의 자유를 언급함으로써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나아가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토대로 하는 자유로운 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었다. 더욱이 인권 선언이 제시한 모든 원칙들은 이후 제정되는 헌법에 반영되어 정치적 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인민 주권의 원칙은 종래의 국가 개념이 변모하고 그 권한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국가는 더 이상 군주의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주권자인 인민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혁명은 또한 평등의 혁명이었다. 자유와 평등은 상보적인 것으로서 자유가 없는 평등은 단순한 구호에 불과한 것이며 평등이 없는 자유는 또 다른 특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와 평등이 완벽하게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소유권을 인정하는 경제적 자유는 부르주아지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권 선언의 평등은 실질적인 차원에서의 인간 평등이 아닌 시민적 권리의 평등을 의미하였다. 그 결과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평등은 물론 정치적 평등조차도 올바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특히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경제는 국가의 통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1795년의 헌법에 의해 제한선거가 실시되어 민중은 정치적 권력을 박탈당하였다. 시민들은 재산 정도에 따라 '능동적 시민' 과 '수동적 시민' 으로 구분되어, 능동적 시민만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향유할 수 있었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을 설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우애는 안전과 경제적 소유권을 보존하기 위한 부르주아지 사이의 우애였을 뿐, 그 우애를 공유하지 못하는 다른 시민들에게는 사실상의 불평등이었다.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킨 사회 혁명〕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상퀼로트' 를 비롯한 민중 계급의 지원을 토대로, 토지에 기반하고 있던 봉건적 특권 계급을 몰락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봉건적 부과조와 십일조가 폐지되었고, 교회와 귀족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는 매각되었다. 이처럼 특권 계급을 견제하는 입법과 정책은 혁명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단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농민만이 그 정책들로 인해 이득을 얻었을 뿐이며, 더욱이 모든 특권 계급이 소유하였던 토지가 전면적으로 재분배된 것도 아니었다. 대략 전 토지의 15% 정도만이 소유권이 바뀌었고, 그것도 망명 귀족의 재산만이 국유 재산으로 환수된 것이다. 많은 귀족들은 혁명의 와중에도 여전히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토지의 재분배가 무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유 재산의 매각은 재정적 적자를 해소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고려에서 출발한 것으로, 전국 토지의 6~10%에 달하였던 교회 소유의 토지가 우선적 매각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는 단지 기존 토지 소유자, 즉 자영 농민이나 대지주 또는 대차지농(大借地農) 등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농민에 대한 특권 계급의 지배를 근본적으로 폐지하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으나, 토지 재분배와 관련한 혁명은 보수적이고 온건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전통적 특권 계급과 부르주아지는 10년간의 혁명이 끝난 후 다시 결합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양 집단은 토지 소유에 대한 공동의 애착을 갖게 되었다.
〔국가의 세속화와 정교 분리〕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의 종교적 위기와 관련된 문제는 오늘날까지 교회사가들 의 주요한 관심 대상이다. 1796년 메스트르(J. de Maistre, 1753~1821)는 대혁명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악마적인 철학 사이의 죽음의 투쟁으로, 또한 가톨릭 교회를 소생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뜻에 의해 묵인된 시련으로 설명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예수회 신부인 바뤼엘(A. de Barruel, 1741~1820)은 대혁명을 계몽 사상가들, 프리메이 슨 단원들 및 광신자들이 교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꾸민 음모라고 규정하였다. 1865년에 키네(E. Quinet, 1803~ 1875)는 대혁명을 본질적으로 종교적 충돌이라고 정의하였고 그 목적은 전제 정치의 토대였던 낡은 신앙을 극복 하여 학문적 탐구와 자유의 승리를 이룩하는 데 있었다고 하였다.
20세기의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철학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대혁 명을 규정하였다. 역사가인 올라르(F-A. Aulard, 1849~1928)와 마티에(A. Mathiez, 1874~1932)는 대혁명이 교회에 대항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고, 대혁명 기간 동안 교회에 적대적인 정책들이 결정된 이유를 재정적 위기와 국가의 안전이라는 당시 상황과 필요성에서 찾았다. 즉 대혁명 지도자들은 교회의 강력한 지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국가적 차원의 혁신을 위한 정책을 실행할 수 없었는데, 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여 결국 새로운 '혁명적 종교 를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는 것이다.
최근 교회사가들은 19세기 초에 유럽을 비롯한 전 서양 세계를 뒤흔들었던 모든 이념적 개혁 운동의 배후에 대혁명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혁명 기간 동안 전통적인 종교와 새로운 정신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극단적인 상황까지 진행되었던 것과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역사가 다른 지역의 가톨릭 교회 및 다른 교파에까지 영향을 미쳐 일어난 대변동의 역사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와 종교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이 급변하고 있었다는 점도 강조한다.
〔국민적 통합을 이룬 혁명〕 프랑스는 대혁명을 통하여 통합을 향한 결정적인 일보를 내디뎠다. 혁명력, 과세의 평등, 도량형제 등과 같은 새로운 제도는 행정적 · 경제적으로 통합된 국가의 틀을 형성하였으며, 특권 계급과 대불동맹에 대한 혁명적 투쟁을 통하여 국민 의식이 고양되었다. 또한 제헌 의회에 의한 제도의 합리화, 혁명 정부에 의한 중앙 집권제로의 복귀, 총재 정부의 행정 개혁 등으로 말미암아 지방의 자율성과 분권주의가 파괴되고 국가의 통합에 적합한 제도적 장치가 설정되었다. 동시에 혁명은 국민과 국가가 불가분의 통일체라는 의식을 형성시켰다.
새로운 경제적 유대 관계로 국민적 통합이 강화되었으며, 국민군은 국민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통합의 강력한 수단임을 입증하였다. 제헌 의회가 모든 종류의 방언을 보호하려 했던 반면 국민 공회는 프랑스어를 하나의 국어로 만들려고 노력하여, 프랑스어 또한 동일한 발전 과정을 경험하였다. 국민 의식의 형성을 촉진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시민 교육이었다. 여러 혁명 의회가 교육에 관심을 가진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교육의 목표는 시민 정신의 함양이었으며, 대국민 제전은 그러한 목적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반동과 함께 대제전은 점점 정치 사회적인 내용을 상실하여, 이제까지 주역이었던 민중은 점차 단역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구경꾼으로 전락하였다.
1789년 인권 선언에 나타난 권리의 평등과 인민 주권의 원리는 이론적으로 국민적 통합의 강력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가 새로운 사회 조직의 원칙이 되면서 제헌 의회의 부르주아지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에 봉착하게 되었다. 더욱이 테르미도르파는 사회 민주주의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정치적 평등의 흔적조차도 제거하려고 시도하여, 1795년의 헌법은 재산 제한선거제로 복귀하였다. 결국 평등은 단지 형식적인 것에, 그리고 국민적 통합은 기본적으로 국민을 구성하는 사회적 내포의 통합이기보다는 단순히 제도적 틀에 의한 통합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 갈리아주의 ; 공의회 우위설 ; 메스트르, 조제프 마리 콩트 드 ; 백과 전서파 ; 비오 6세 ; 성직자 공민 헌장 ; 얀센주의 ; 인권 선언 ; 탈레랑 페리고르, 샤를 모리스 드 ; 프랑스)
※ 참고문헌  Albert Soboul, 최갑수 역, 《프랑스 대혁명사》, 전 2권, 두레, 1984/ A. de Tocqueville, 이용재 역,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 일월서각, 1989/ Georges Lefevre, 민석홍 역, 《프랑스 혁명》, 을유문화사, 1984/ Albert Matiez, 김종철 역, 《프랑스 혁명사》, 전 2권, 창작과 비평사, 1982/ Albert Soboul, 이세희 역, 《상필로뜨》, 일월서각, 1990/ Michel Vovelle, 최갑수 · 주섭일 · 정성진 공역, 《왕정의 몰락과 프랑스 혁명, 1787~1792》, 일월서각, 1987/ Frangois Furet · Denis Richet, 김응종 역, 《프랑스 혁명사》, 일월서각, 1987/ Frangois Furet, 정경희 역, 《프랑스 혁명의 해부》, 법 문사, 1987/ Daniel Mornet, 곽광수 · 강충권 · 이봉지 공역,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 (1715~1787)》, 일월서각, 1995/ 민석홍 편, 《프랑스 혁명사론》, 까치, 1993. [邊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