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세자르 오귀스트 장 기욤 위베르 Franck, César Auguste Jean Guillaume Hubert(1822~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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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프랑크.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중요한 프랑스 작곡가. [생 애] 프랑크는 1822년 12월 10일 벨기에 리에주(Liege)에서 발롱(Wallon) 지방 사람인 아버지와 독일 혈통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동생조제프(Joseph)와 함께 리에주의 왕립 음악원을 다녔으며, 1832년에는 성악 부문에서, 1834년에는 피아노 부문에서 1등상을 받았다. 아들들의 특출한 재능을 확인한 아버지는 프랑크를 피아노, 조제프를 바이올린 천재로 키우려고 결심하고 1835년에 온 가족이 파리로 이주하였다.나이가 어려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할 수 없었던 프랑크는이미 리스트(F. Liszt, 1811~1886), 베를리오즈(H. Berlioz,1803~1869), 구노(C. Gounod, 1818~1893)를 가르친 라이카(A. Reicha, 1770~1836)로부터 대위법, 푸가, 작곡을 배 웠다. 스승의 죽음으로 1년 만에 공부를 중단하였지만,프랑크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교회 선법, 5분박, 민요, 푸가 등 모든 음악적 수단을 동원하여 '표현의 극대화' 를위해 노력하였다. 1837년 프랑스로 귀화한 그는, 그해에 자신의 재능을 인정한 파리 음악원장 케루비니(L.Cherubini, 1760~1842)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고 작곡과피아노 그리고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음악원에서 공부하는 기간 중에 프랑크는 피아노 대상에 이어 대위법, 푸가, 작곡 부분에서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다음의 세시기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제1기(1841~1857)는 습작의 단계를 벗어난 첫 창작시기이다. 프랑크의 뛰어난 제자이자 《프랑크 전기》의저자인 댕디(V. d'Indy, 1851~1931)의 언급처럼, 이 시기는 <피아노 트리오 f#단조〉(op. 1, No. 1, 1841)와 그의 첫오라토리오 <루트>(Ruth, 1846)로 대표된다. 트리오는 기교적 현란함 때문에 현재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후에 완성된 프랑크의 '순환 형식' 을 선보인다. 작은 규모의 <루트〉도, 비우호적인 초연 평론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과형식 특히 동양적인 색채가 이후 <레베카>(1881)의 탄생을 예고한다. 1844년에 프랑크는 연주가의 삶을 접고,처음 로레트의 노트르담(Notre-Dame de Lorette) 성당 그리고 생장생프랑수아(St. Jean-St. Frangois) 성당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다. 1848년 펠리시테(Felicite Desousseaux)와 결혼하나, 프랑스 혁명 와중이었기에 레슨을 받는 학생들이 없어 어렵게 생활하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매일 많은 시간을 독서와 작곡에 몰입할 수 있었다. 제2기(1858~187)는 대기만성을 향한 본격적인 실험기간이다. 1858년 그는 생트클로틸드(Sainte Clothilde)성당의 성가대 지휘자로, 그리고 1859년에는 그곳의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하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였다. 1870년에 교향시 <행복 선언>(Les Béati-tudes, 1879, 위고 대본)을 작곡하기 시작하였고, 1871년에는 프랑스의 젊은 음악가 양성을 위해 생상스(C. Saint-Saens, 1835~1921)와 함께 국립 음악 협회를 설립하였다.같은 해에 '교향시' 라고 불리는 오라토리오 <구원>(Re-demption)을 완성하고 1873년에 초연, 1875년 수정 후재연하였다. 1872년 2월 뒤부아(T. Dubois, 1837~1924)의 추천으로, 은퇴한 스승의 뒤를 이어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오르간 전공을 넘어새로운 프랑스 음악 세대의 음악 교사로 댕디, 뒤파르크(M.E.H. Duparc, 1848~1933), 쇼송(E. Chausson, 1855~1899) 등 많은 빼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프랑스의 음악은 프랑크가 기대하였던 이들이아니라 천재 반항아 드뷔시(C. Debussy, 1862~1918)에 의해 발전하였다. 마지막 제3기(1876~1890)는 프랑크의 절정기이다.189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랑크는 쉼없이 대표적인작품들을 쏟아냈다. 즉 교향시 5곡, 오페라 2곡, 오라토리오 1곡, 그리고 오르간곡, 피아노곡, 피아노 협주곡,현악 4중주(1889), 교향곡 등의 기악곡 등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그는 1890년 5월 교통 사고를 당하였고 가 을에는 늑막염에 걸려 11월 8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 몽루즈(Montrouge) 공동 묘지에묻혔다가 후에 몽파르나스(Montparnasee)로 이장되었다.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인 로댕(A. Rodin, 1840~1917)이그의 흉상을 조각하였다. [작 품] 프랑크는 독일의 브루크너(J.A. Bruckner, 1824~1896) , 브람스(J. Brahms, 1833~1897)와 함께 후기 낭만주의의 마지막 대가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는 왕정 복고(1814)에서 혁명(1830, 1848)으로, 그리고 민주주의로이어진 정치적 혼란과 산업화에 따른 빈곤의 증가, 대중사회에서의 익명화 등 사회적 격변기였으며, 음악적으로는 개인적 · 감정적 주관주의가 주도하였다. 또한 문학적교양을 중시하는 시대 사조는 음악에 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새롭게 수용하여 그 범주를 크게 확대하였다. 이러한 '음악 외적인 것' , 특히 '시적인 것' 의 추구는 음악적 표현 가능성을 크게 넓혔다. 프랑크는 진지한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새로움에 대한 수용성도 강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작품들이 시대의 진보적인 낭만적 음악 언어와 바흐(J.S. Bach, 1685~1750), 베토벤(L.van Beethoven, 1770~1827)을 잇는 전통적 음악 언어의 역사적 요구들을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전통 위에서 진보를 추구하는 그의 작곡 태도는 기악 음악과 교회 음악을 포함한 성악 음악 등 그의작품 전체에 고루 나타난다. 프랑크는 당시의 프랑스 작곡가들처럼 일차적으로는기악 음악 작곡에 헌신하였다. <오르간 판타지 코랄>(1890)을 포함한 다수의 오르간 음악, 피아노 협주곡<교향적 변주곡>(1885)과 <전주곡, 코랄 그리고 푸가>(1885) 등의 피아노 음악, <피아노 3중주>(1834)와 <현악 4중주>(1889), , <바이올린 소나타 A> 등의 실내악, 그리고 <교향곡 G>(1841 이전)와 <교향곡 D단조>(188)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핵심 기악 분야는 <에올리드>(1876), <저주받은 사냥꾼>(1882, 밖르거 대본), <진>(Lesjinns, 1884, 위고 대본, 피아노 독주 포함), <프시케>(Psyche, 1888, 혼성 합창 포함) 등으로 대변되는 4곡의 교향시였다. 이것들은 베를리오즈의 프로그램 심포니, 리스트의13개 교향시와 함께 표제 음악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또한 2곡의 오페라 〈울다〉(Hulda, 1885)와 <기셀라>(Ghisella, 1890)를 남겼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 가톨릭 교회 음악은 팔레스트리나(G.P. da Palestrina, 1525~1594)의 무반주 폴리포니(Polyphony) 합창을 이상적인 교회 음악으로 규정한 독일 체칠리아 운동의 요구와 시대의 감성주의 사이에서매우 혼란스러웠다. 프랑크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크고 작은 교회 음악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주요 교회음악은 오라토리오인데, 이것은 19세기의 음악 문화를주도하던 교양적 시민층이 악기(특히 피아노)와 악보의대량 생산에 힘입어 많은 합창단들을 만들며 오라토리오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크는멘델스존(F. Mendelssohn, 1809~1847)의 <바오로>(1836)<엘리야>(1846) 리스트의 <엘리자베스의 전설>(1862)<그리스도>(1867) 등과 함께 자신의 <루트>(1872 출판)<바벨탑>(소규모, 1865), <구원>(남성 독창자+여성 합창+혼성 합창+낭송자+오케스트라), <레베카> 그리고 <행복 선언)(독창자들+합창+오케스트라) 등 5곡의 오라토리오를발표하였다. 편성은 (별도로 표기하지 않은 곡들처럼) '독창자들+합창+오케스트라' 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역사주의적 · 신비적 표현들로 베를리오즈, 구노, 생상스의것들과 함께 프랑스적 오라토리오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미사곡은 <3성부 미사곡>(STB+오르간/하프/첼로/콘트라베이스, op. 12, 1860)과 <베이스 솔로를 위한 장엄 미사곡>(오르간, 1858)을 썼다. 이밖에 <궤 에스트 이스타〉(Quae est ista, 독창자+ + 오르간/콘트라베이스,1871)를 포함한 3곡의 봉헌송, <구원의 성체>(O Salutaris,혼성 합창+오르간, 1835), <아베 마리아>(3성부+오르간),<지존하신 성체 앞에>(Tantum ergo)를 묶은 모테트, <천사의 양식>(Panis angelicus, 미사곡 op. 12에 추가, 1872),<오소서, 성령님>(Veni Creator, TB+오르간, 1872) 그리고 <시편 150편>(합창+오케스트라오르간) 등 적어도 26곡이 있다. 주로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발췌한 라틴어 가사에 의한 그의 교회 음악 작품들은 크게 위축된 19세기후반 프랑스 교회 음악의 명맥을 그나마 유지시켰다. 중요한 것은 프랑크의 음악 정신이 오르간과 폴리포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22세(1844)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였고, 50세(1872)에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가 되어 오르간이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창작하는 데도 결정적인 영향력을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폴리포니적 사고는-예를들면 <전주곡, 코랄 그리고 푸가>의 선적인 성부 진행 -반음계적 유사 폴리포니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창작후기에 접어들면서 프랑크는 바그너(R. Wagner, 1813~1883)의 반음계적 화성 논리를 넘어 인상주의적인 새로운 경지를 실험하였는데, 이 새로운 방법은 드뷔시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낱개로 출판되며, 작품 전집은 아직 없다. (→ 가톨릭 음악 ; 케루비니, 루이지)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2, 음악춘추사, 2000,pp. 406f, 427, 431, 463, 4671 J. Trevitt, 《NGDMM》 6, pp. 778~7851 W.Mohr, 4, Pp. 637~653/ W. Gurlitt ed., Riemann Musik Lexikon,Personenteil 1, Schott's Soehne, 1959, PP. 540~541. 〔趙善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