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 - 王國
[라]Regnum Francorum, Franci · [영]Frankish kingdom, Franks · [프]Francs · [독]Frankenre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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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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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새로운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프랑크족 전사.
5세기 후반 게르만족에 속한 프랑크족이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지역에 세운 왕국. 게르만족의 전통과 로마의 유산, 그리스도교가 융합되어 서양문명이 새롭게 형성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프랑크' (Franc)라는 용어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확실히 구별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랑크족이라는 용어는 라인(Rhine) 강을 넘어 로마 국경을 공격하였던 게르만족을 다룬 3세기 로마 저술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대담한' 혹은 '용감한'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용어는정치적 · 민족적인 통일체나 혹은 하나의 부족이나 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라인 강 하류 오른편에 거주하면서 각기 다른 명칭을 갖고 있던 다양한 소부족들의 동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동맹은 경우에 따라서소부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습격하기 위하여, 다른게르만 부족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하여, 혹은 다른 동맹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제휴하였을 뿐,강력한 조직력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족의 이주] 3세기에 들어서 게르만족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면서 갈리아 지역은 황폐해졌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 때 게르만족에 대항하기위해 서방과 동방을 나누어 통치하는 두 명의 황제가 탄생하자, 프랑크족은 갈리아 지방으로 손쉽게 이주할 수있었다. 다양한 목적으로 프랑크족을 이용하던 로마 제국은 포로가 된 부족민들을 라인 강 왼편의 폐허가 된 농장 지대에 정착시켜 경작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제국은이미 1세기부터 로마 군대에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운영하였는데, 그들이 병역을 마친 후에는 토지를 줌으로써제국의 협력자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일부 소부족들은지속적으로 로마 제국의 영토를 공격하였으며, 노획물을갖고 라인 강 오른편에 있는 본래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애매한 관계는 4~5세기에 걸쳐 계속 이어졌으며, 그 결과 많은 프랑크족이 로마 제국의 북동쪽 경계선을 따라 정착하였다. 이 시기의 고고학적 유물들은 프랑크족이 게르만적인 문화를 여전히 유지한 상태에서 갈로-로마(Gallo-Roman) 세계에서의 생활에 상당히 적응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프랑크족 출신의 인물이 로마 제국의 장군 혹은 집정관이 되는 경우도 나타났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프랑크족은 여전히모호한 존재,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5세기에 이르러 상황이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게르만족은 집단적으로 로마 제국의 서쪽에 정착하기 시작하였 으며, 독립적인 왕국을 형성하였다. 갈리아 지역은 게르만족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부르군트족(Burgundians)은 론(Rhone) 계곡을 점령하였으며, 서고트족은 루아르(Loire) 강 남쪽의 아키텐(Aquitaine)을 장악하였다. 갈리아 지역에 대한 로마 제국의 지배권은 후퇴하였고, 사실상 게르만족의 소족장들이 전 지역을 지배하였다. 로마제국이 다스렸던 마지막 지역인 루아르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영토는 프랑크족이 장악하였다. 하지만 다른 부족들과는 달리 하나의 정치적 연합체 성격을 갖지 않았던프랑크족에 속한 여러 소부족들은 라인 강 하류의 본래지역에서부터 서서히 남쪽과 서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기시작하였다. 이처럼 기존의 근거지를 계속 유지하면서진행된 팽창은 프랑크족이 자신들의 정체성은 유지한 채로 소부족들을 통합하고, 나아가 갈로-로마인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데 기여하였다. 프랑크족 부족들 중 리푸아리안 프랑크족(RipuarianFranks)은 라인 강 양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쾰른(Köln, Cologne)를 중심으로 정착지를 확보하였으며, 또다른 부족인 잘리어 프랑크족(Salian Franks)은 본래 바타비아(Batavia)에 있는 라인 강 어귀 남쪽에 정착하고 있다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갈로-로마인들이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던 강브레(Cambrai) , 투르네(Toumai)및 아라스(Arras) 등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거점을 확보하였다. 이런 과정 중 잘리어 프랑크족은 로마 제국의 마지막 갈리아 총독인 시아그리우스(Syagrius,430?~487)를 괴멸시켰다. 또한 훈족의 통치자인 아틸라(Attila, 434~453)가 갈리아 지역으로 침입하는 것과 서고트 왕국이 루아르 강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프랑크족은 갈리아의 주요 지역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로마 제국의 지위를 대체하고 있었다. [메로빙거 왕조] 정복 전쟁을 통하여 프랑크 왕국을 갈리아의 실질적 주인이 되게 하였던 잘리어 프랑크족의 왕클로비스 1세(481~511)에 의해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 476~750)가 시작되었다. 그의 주요한 업적들 중 하나는 많은 소부족들을 단일한 정치적 연합체 내로 끌어들여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령이 형성되는 토대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이는 잔인한 정복 전쟁을 통해이루어졌다. 특히 로마식의 직업 군인 대신 왕의 요청에의해 자유민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여 전리품을나눠 가졌던 방식은 정복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된 배경이 되었다. 클로비스 1세의 또 다른 업적은 다른게르만족의 왕들이 아리우스주의(Arianismus)로 개종하였던 것과는 달리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는 점이다. 프랑크족 전사들이 대규모로 개종하자 갈로-로마의주교들 및 서고트족의 박해를 받았던 아키텐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호의를 얻어낼 수 있었으며,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옹호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처럼 클로비스 1세의 개종은 게르만 왕국들 중 가장 강력한 프랑크 왕국에게 내적으로는 견고함을, 외적으로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클로비스 1세를 비롯한 왕들의 주요한 업적은 프랑크 족과 갈로-로마 세계의 융합을 위한 정책에서 드러난다.안정된 조세원을 확보하지 못했던 왕들은 스스로를 경작되지 않은 모든 토지의 소유자로 자처함으로써 광대한세습 토지를 보유하였다. 클로비스 1세가 확립한 군사군주제는 자유민들이 왕에게 충성을 다하여 봉사함으로써 보상을 받도록 하였으며, 이후 왕들은 로마 제국에 속하였던 토지의 획득에서 얻어진 재산, 군사적 승리를 통해 얻어진 노획물, 정치적 적대자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프랑크족과 갈로-로마 귀족들과 함께 분배함으로써그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또한 프랑크족 전사들은 충성의 대가로 받은 토지를 본래 그 지역에 정착하고 있던 갈로-로마인들이 경작하는 것이 가장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는 프랑크족과 갈로-로마인들이 결혼을 통하여 두 민족이 상호 융합하는 주요한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프랑크족과 갈로-로마인들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 데 기여하였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형성된 동질적인 엘리트 계층은점차 자신들을 프랑크족으로 의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일반 갈로-로마인들이 자신을 프랑크족의 구성원이라고간주하는 환경을 창조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메로빙거 왕조의 융합과 적응 과정은 서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 세계를 지배하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을 제공하였다. [카롤링거 왕조] 클로비스 1세 사후에 프랑크 왕국은네 개의 소왕국으로 분열하여 상호 대립하였다. 메로빙거 왕조 시기에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하나의 권력 아래통합되었던 시기는 72년에 불과하였는데, 이는 게르만족의 분할 상속 관습에 따라 왕국을 개인의 사유물로 생각하였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화폐가 부족하였던 왕은 귀족과 전사들에게 영지를 분배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왕실의 세습 재산은 급속하게 줄어들었고, 7~8세기 초에 이르면 일부 가문은 국왕보다 더 부유하게 되어국왕의 권력이 서서히 쇠퇴하였다. 결국 751년에 피핀 3세(751~768)는 교황 자카리아(741~752)의 지원을 받아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dynasty, 750~887)를 열었다. 이는 '유럽사의 획기적인 전환' 을 의미하였다. 당시까지 동로마 제국을 지향해 온교황권이 이제 프랑크 왕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으로 완전히 방향을 바꾼 것이다. 자신들에게 '프랑크 왕국의 왕'이라는 명칭을 붙였던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은 많은 부분에서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이 취했던 통치 방식들을유지하였다. 즉 정복 전쟁을 통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확장시켰으며, 획득한 전리품과 영토를 귀족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그들의 충성과 프랑크족의 일원이라는 인식을유지하게 하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은 빈번한 군사원정을 통해 귀족을 감시하는 보다 효율적인 정치적 역학 관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종교 개혁 운동과 활발한 선교 활동을 지원하여 가톨릭 교회를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자신을 그리스도교 세계의 세속적 수장으로 생각한 카를 대제(768~814)는 교회를 후원하고,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설립과 색슨족(Saxon)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의 파견을 지원하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은 문화적 르네상스를 이루는 데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로마의 문화적 유산과교부 시대의 종교적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9세기 전반에 프랑크 왕국은 지중해 세계의주요 권력들 사이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그정치적 영향력은 서유럽에 대한 고대 로마 제국의 영향력과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프랑크 왕국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 및 바그다드(Baghdd)와 코르도바(Cordoba)의 이슬람 칼리프(Caliph)와 대등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서양에서 교회의 수호자, 교황과 교황령의 보호자가 되었으며,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이 프랑크 왕국의 궁정과 수도원에 집결하여 이른바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카롤링거 왕조는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특징들을 제거하기 시작함으로써 몰락의 요인을 스스로제공하였다.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피핀 3세는 교황의 도유를통해 교회로부터 축성을 받은 최초의 프랑크족 왕이 되었는데, 이는 혈연 관계에 기초한 왕의 권위를 교황 및교회에 근거한 권위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교회의 허가 에 왕의 정통성의 근거를 두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왕의 개념 역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통치 자' 로 수정되어, 왕의 지도력은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는것뿐만 아니라 종교적 생활을 개혁하는 것도 포함하게되었다. 카를 대제는 교황으로부터 '프랑크족과 롬바르드족의 왕' 이라는 명칭 외에 '새로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이며 황제' 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는 전쟁 수행을왕의 주요한 기능으로 여기는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사고에서 사제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왕의 개념을재규정하였다. '로마 교회의 수호' 가 프랑크 왕국의 가장 고귀한 임무가 된 것이다. 또한 카를 대제는 모든 자유민들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함으로써 왕과 신하들 사이의 전통적 관계는 종속적 관계로 변화되었다. '봉신' 은'주군' 에게 군사적 봉사와 조언을 서약하였으며, 그 대가로 주군은 그를 보호하고 그에게 '은대지' 를 수여하였다. 이 토지는 훗날 '봉토' 로 불리게 되었으며, 봉건적질서의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카롤링거 왕조는 로마의 특징을 따르는 종교체제를 만들었으며, 이는 메로빙거 왕조하에서 형성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한 카롤링거 왕조의 문화적 르네상스는 프랑크족의 전통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지적 · 문학적 · 예술적 환경을 만들어냈다. 결국 카롤링거 왕조는 의식적으로 프랑크족의 전통과 결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독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서 중요한역할을 하였던 게르만적인 요소들을 일정 부분 희석시키 고 말았다. 9세기 후반 프랑크 왕국은 지속적으로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며, 카롤링거 군주제는 유명무실해졌다. 카를대제의 사망 이후 프랑크 왕국은 지방 분권적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세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프랑크의 왕' 이라는 공식 칭호는 12세기 말까지 존재하였지만축소된 영지의 주인에 불과하였다. 점차 프랑스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서 '프랑크 왕국' 이라는 용어는 단지프랑코니아(Franconia)로 알려진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양의 사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 프랑스라는 명칭 역시 본래의 프랑크족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없다. (→ 레미지오, 랭스의 ; 자카리아 ; 카를 대제 ; 클로비스 1세 ; 피핀 3세 ; 프랑스) ※ 참고문헌 Daniel Rivière, 최갑수 역, 《프랑스의 역사》, 까치,1995/ Jean Carpentier et al., 주명철 역, 《프랑스인의 역사》, 소나무,1991/ August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R.E. Sullivan, 《NCE》 5, pp. 915~917. [琪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