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학파 - 學派

[영]Frankfurt School · [독]Frankfurter Sch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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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부터 프랑크푸르트의 사회 연구소(Institut fiirSozialforschung)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일 철학자들의 지적 활동 또는 그들 전체를 일컫는 용어 .이 학파의 제1 세대로는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1895~1973), 아도르노(T.W. Adomo, 1903~1969), 마르쿠제(H. Marcuse, 1898~1979), 노이만(F.L. Neumann, 1900~1954), 뢰벤탈(Leo Löwental, 1900~1993), 폴록(FriedrichPollock, 1894~1970)과 프롬(E. Fromm, 1900~1980), 벤야민(W. Benjamin, 1892~1940) 등을 들 수 있다. 제2 세대로는 하버마스(J. Habermas, 1929~ )를 기점으로 슈미트(Alfred Schmidt), 벨머(Albrecht Wellmer) 그리고 제3 세대로는 호네트(Axel Honneth)가 있다.[배 경]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모체인 '사회 연구소' 는아르헨티나의 곡물상인 바일(Hermann Weil)의 기부금으로 그의 아들 펠릭스(Felix Weil)에 의해 1922년에 설립되었다. 그린베르크(Karl Griinberg)가 초대 연구소장을맡았으며, 그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였고, 《그린베르크 문고》를 발간하였다. 1931년 호르크하이머가 이연구소의 소장을 맡았으며, 1932년부터 《사회 연구지》(Zeitschrift fur Sozialforschung)를 간행하였는데, 이 잡지는 비판적 학술 토론이 자리매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학제 간의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였고,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소련이 스탈린주의화되는 데 대한 학문적이고도 체계적인 비판을 본격적으로 활성화시켰다.[내 용]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학문 활동을 '비판 이론' (KritischeTheorie)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 용어는1937년에 호르크하이머가 발표한 <전통 이론과 비판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유래하였다.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전통 이론' 은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 이후서구에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온 닫힌 진술 체계로서의 가치 중립적인 이론을 의미하며, 실천적인 관심 영역을 은폐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다.반면 '비판 이론' 은 경제학, 심리학, 역사학 등의 다양한사회 과학 이론들 및 마르크스(K.H. Marx, 1818~1883)의이론을 연결하여 당시 사회의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모순들, 즉 구체적으로는 유럽의 파시즘, 소련의 스탈린주의미국의 상업주의 문화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비판함으로써 사회의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열린 시도이다.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적인 사회 이론을 신(新)마르크스주의(Neo-Marxism), 서구 마르크스주의, 비판적마르크스주의라고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이어받고 있었던 소련 공산당 중심의 마르크스주의와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특히 마르크스의 토대와 상부 구조의 관계를 물적 토대 중심으로 환원적인 해석을 내리지 않고, 상부 구조의 자율성을인정함으로써 인간 행위자와 주체적인 의식을 강조하는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헝가리의 철학자인 루카치(G. Lukács, 1885~1971)이다.그러나 마르크스와 루카치는 자본주의 안에서 상품화로 드러난 심각한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도,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모순이 결국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해 감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낙관하였다.반면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성원들은 나치의 박해 속에서 제노바를 거쳐 뉴욕으로 망명하면서 독일 나치즘의유대인 학살이 지니는 야만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고,이로 인해 인간의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진보적' 믿음이나 루카치의 역사적 '총체성' 에 근거하는 혁명적인변증법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없었다.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독일 나치즘의 부상과 집권이라는 역사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시민 사회의 위기라 할 수 있는 파시즘을 역사 속에서 우연히 나타난 것이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서 형성되어 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았다. 그들은 <계몽의 변증법》(Dialekricik der Auf-klärung, 1947)에서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를묻고, 역사를 주도하여 온 '계몽적인 사고 내지는 '이성' 의 발생사를 출발점에서부터 다시 추적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이 이성 내지는 합리성을 통해 최초로 자연에대항함으로써 '자아' 를 형성하고 보존시켜 온 것은 지배' 의 역사이고, 이러한 외적 자연과 사회적 자연을 지배해 온 역사는 필연적으로 인간 스스로의 내적 자연에대한 지배와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혀냈다.《계몽의 변증법》은 매우 난해한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초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입장을 매우 잘 보여 주는결정적인 저서이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와의 연관성에서볼 때, 이 책은 마르크스가 사회적 지배의 한 표현으로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비판하였지만 생산력의 증대에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시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지배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생산력의 확대 재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 지배, 즉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사고를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마르크스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의 주체로프롤레타리아트를 주시하는 데 대해, 역사의 진보는 더이상 낙관적이지 않으며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들이 혁명에 의해 인류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주체가 될 수없다고 진단하였다.호르크하이머 : 1940년대에 미국으로 망명한 대부분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구성원들은 통합적인 학제 간의연구를 시도하기보다는 각자의 전문적 관심 분야로 방향을 돌렸다. 호르크하이머는 1930년대에 지녔던 낙관론에서 탈피하여 철학의 기능을 다시 설정하고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면서 예술과 대중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그는 예술의 비판적 · 인식적 기능을 중요시하였고, 예술이 종교에서 떨어져 나온 인간성을 보유하고있다고 보았다. 또한 시민 사회의 몰락과 함께 가정이 점차 해체되고 대중 매체들이 사회화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면서 개인의 특수성이 상실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객관적 이성은 주관적이고 도구적인 이성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개인의 내적인 삶은 사라졌고, 이러한 이성의 몰락과 개체성의 몰락은 동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호르크하이머가 이렇듯 주관적 이성을 비판한다고 해서 객관적 이성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토마스주의처럼 객관적 이성이 낭만주의로 될 경우사고가 경직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주관적 이성과 객관적 이성을 상호 비판하는 데 철학의 과제가 놓여 있다고 보고, 이러한 이성 비판과 함께당시의 실증주의나 실용주의가 사회적인 목적이나 방향성을 지니지 않은 채 각각의 개별적인 영역에만 매몰되어 있는 경향들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호르크하이머의 후기 철학은 주로 '관리되는 세계' (ver-waltete Welt)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되며, 모든 생명체와의연대성을 강조하면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의 철학에 근접하였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정의할 수 없지만 무엇이 거짓인지를 말하는 데 비판 이론의과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철학으로서의 비판 이론은 역사적인 관련성을 반영하며, 역사적 사건의 부정적인 것을 드러냄으로써 신학과 구분된다고 하였다. 또한그는 지금까지 도덕과 연관되는 모든 것이 신학에로 귀결된 데 반해 도덕적인 행위는 인간 그리고 자연과의 연대성에 비추어서 정당화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의(dogma)가 아니면서 "인간을결속시켜 주는 정신적인 계기로서 어떤 초월적인 것, 무제한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함으로써 신학의 중요성을 표명하였다.아도르노 :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계몽의변증법》에서 서구적 사고 전반, 즉 사고의 시작점부터근세까지 사상사 전반의 역사를 도구적 이성의 발달사로보고 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 서문에서 명시한 바 있는 '계몽의 계몽 , 즉 계몽에 대한 긍정적 개념을 위한 작업을 전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k, 1966)에서 보다 더집중적으로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르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였던 계몽의 구원은 결국 철학의 근본이 되는 사고 그 자체를 문제삼고 전통적인 철학의 개념들을내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그 개념들이 지닌 틀을 넘어서는 데 있다. 따라서 《부정의 변증법》에서는 철학적 사고 자체의 자기 비판을 통해, 소위 '동일성 사고 에 대한인식론적인 비판이 시도되었다.또한 아도르노는 예술과 문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가지고 있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는 '문화 산업' (Kul-turindustrie)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면서, 자본주의경제와 밀착되어 대량으로 생산된 동질화된 대중 문화를혹독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겨진 《미학 이론》(Asthetische Theorie, 1970)에서는 《부정의 변증법》에서 추구하였던 '비동일적인것' 의 흔적으로서 '미적인 것' 을 보다 적극적인 이론으로 구성해 내고 있다.마르쿠제 : 마르쿠제는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도구적이성에 대한 역사 철학적 비판과 아도르노의 동일성 사고에 대한 비판적 문제 의식을 공유하면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일차원적 인간》(Der eindi-mensionale Mensch, 1964)에서 그는 해방에 대한 무한정의 요구를 지닌 '참인 욕구' 와 개인을 억압하는 '거짓인욕구' 를 구별하면서, 사회적 변혁을 저지하는 거짓인 욕구가 영속화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마르쿠제는 인간 해방의 이념을 담고 있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충동 · 욕구 구조에 대한 프로이트(S. Freud,1856~1939)의 심리 분석을 종합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프로이트와는 달리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에서는인간의 성충동이 더 이상 반사회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섹슈얼리티의 자기 승화' (Selb-stsublimierung der Sexualitat)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또한 사회적 조건들이 변화하면 노동이 놀이로 바필 수 있는 충동의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라고 보았다.이 외에도 그는 예술과 기술을 결합시키고자 하였는데,예술로서의 기술은 더 이상 도구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인간 해방만이 아니라 '자연의 해방 까지도가져올 수 있다고 하였다.[변 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제2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단연 하버마스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는 있지만, 제1 세대의 학풍이 그에게서 연속되기보다는 오히려단절되기 시작한다는 평가들이 있었다. 하버마스와 이전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의 첫 번째 차이점은 연구의 형식과 방법론에 있다. 하버마스는 정치학,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언어학 등의 다양한 이론들과 보다 체계적으로 논쟁을 벌임과 동시에 그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사회 진화 이론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이전 세대가 지니는 비체계적인 철학적 반성과는 달리, 경험적연구의 성과들과 선험적인 이론을 종합하여 보다 기초가될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하였다.두 번째로 하버마스는 인간이 노동 활동과 언어 사용을통하여 스스로를 구성해 간다는 것을 공감하면서도, 합목적적인 행위로서의 노동과 상호 주관성의 매개에 의한 의사 소통적인 행위로서의 언어를 구별하였다. 따라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논의되었던 주체의 발생사, 즉 외적인자연 지배와 내적인 자연 억압의 필연적인 연관성 속에서도구적 이성을 발전시켜 온 주체에 대한 역사 철학과는달리, 개인들끼리 의사 소통할 수 있는 상호 주관성의 능력에 입각한 의사 소통적 행위론을 전개하였다.세 번째 차이점은 기술과 학문에 대한 평가에 있다. 이전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실증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학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외적 자연과 인간자신의 자연을 지배하는 인식의 한 형태로서 기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기술과 학문을 단순히 도구적인 행위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것들이실천적인 문제 의식을 도외시하고 탈정치적으로 되는 한에서 도구화되며 이데올로기화된다고 보았다.하버마스가 의사 소통적인 합리성과 행위의 새로운 차원을 이론화함으로써 노동과 언어를 통한 인간의 자아구성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하더라도, 과연 '비동일성' , '에로스' 등으로 표현되었던 욕구, 충동 등이 지니는 유물론적인 계기와 '미적인 것' 이 합리적 설명에의해 오히려 희생될 수 있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여지가 남아 있다.[영향 및 의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칸트(I. Kant,1724~1804), 헤겔(G.W.F. Hegel, 1770~1831)의 관념론과마르크스의 유물론을 각각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당시의 학문에서 통용되던 맹목적인 실증주의나 실용주의적태도를 비판하였고 경험적 연구들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역사학 등의 개별 과학과 철학 그리고 문화 발전의 문제점들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이론과 실천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논의를 철학 내재적으로뿐만 아니라 학제 간 연구들을 통하여 활성화시켰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가로지르고 넘어서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시도하였다. 또한 철학사적으로 볼 때,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이성' , '주체성' 에 대한 반성 및 인간과 '자연' 의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전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자연 지배를 주도해 온 도구적 이성 비판과 근대의 주객 도식에 나타나는 주체 중심의 동일성 사고 비판등에서 드러나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초기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유럽의 파시즘과 미국의 대중 문화산업 속에서 전체주의에 매몰될 수 없는 개인, 즉 보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수자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면서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개인을 동질화시키고 일차원적으로 만드는 구조들을 비판하였다. 그들의 파시즘과대중 문화에 대한 비판은 보다 근본적으로 권위에 대한사회 심리학적인 비판을 동반하였으며, 이러한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부장적인 이성과 그 지배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있는 시도들을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재고찰하게 하였다. 동시에 모든 권위적 지배와 닫힌 체계에 대한 비판의 토대가 되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교육 문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기존의 학교 체제와는다른 비권위적이고 대안적인 학교와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마지막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종교나 신학보다는예술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들이 지닌'구원' 과 '해방' 에 대한 문제 의식은 매우 종교적이라고평가해야 한다. 호르크하이머의 후기 철학은 '초월적인것' 을 염두에 두었으며, 아도르노와 마르쿠제는 예술이해방적인 잠재력을 가졌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하였다고할 수 있다. (→ 마르크스주의 ; 철학 ; 포스트모더니즘)※ 참고문헌  헬트, 백승균 역, 《비판 이론 서설》, 계명대학교 출판부, 1988/ M. Jay, Dialektische Phantasie, Frankfurt a. M., Fischer,1976/ R. Wiggershaus, Die Frankfurter Schule : Geschichte,Theoretische Entwicklung, Politische Bedeutung, DeutscherTaschenbuch Verlag, Miinchen, 1989/ T.W. Adomo · M. Horkheimer,Dialektik der Aujklirung. Philosophische Fragmente, GesammelteSchriften, Bd. 3, Frankfurt a. M., Suhrkamp, 1984/ U. Griinder,Kritische Theorie : Horkheimer, Adomo, Marcuse, Habermas, Stuttgart,Metzler, 1985/ W. van Reihen, Philosophie als Kritik, Königstein,Athenaum Verlag, 1986. [盧成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