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 본당

龜浦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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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소속 본당. 부산시 북구 구포1동 417-2 소 재. 1958년 5월 29일 범일 본당으로부터 분리 설립되었 으며, 주보는 성녀 소화 데레사. 관할 구역은 구포1~3 동, 덕천1~3동, 모라1 · 2동, 대저1 · 2동, 경남 김해군 대동면. 〔교 세〕 1959년 1,161명, 1968년 758명, 1978년 1,376명, 1986년 3,743명, 1993년 5,212명. 〔역대 신부〕 초대 유봉운(俞鳳雲) 야고보(1958. 5~1960. 1), 2대 윤예원(尹禮源) 토마(1963. 1~1965. 12), 3대 이영 식(李永植) 히지노(1965. 12~1972. 2), 4대 이상호(李尙 護) 라이문도(1972. 2~1975.5), 5대 이옥군(李玉君) 타대 오(1975. 5~1976. 11), 6대 송기인(宋基寅) 베드로(1976. 11~1978.6), 7대 양덕배(楊德培) 요한(1978.6~1981.2), 8 대 김유재(金有宰) 그레고리오(1981. 2~1984. 7), 9대 박 오현(朴梧炫), 실베리오(1984. 7~1985. 9), 10대 김평겸 (金平謙) 타대오(1985. 9~1992. 2), 11대 이기정(李基正) 안드레아(1992. 2~1993. 2), 12대 안효성(安孝成) 시몬 (1993. 2~현재). 〔공소 시대〕 19세기에 몇 차례의 박해가 일어날 때마 다 서울, 경기, 충청 등 중부 지방에서 남쪽 지방으로 피 신해 온 신자들이 일부는 경주 · 울산 · 언양 · 기장 방면 으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밀양 · 양산 · 김해 · 진영 등지 의 산간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수로(水路) 교통의 중심 지였고 상업 도시였던 구포에도 많은 신자들이 정착하여 공소를 이루게 되었다. 구포 공소가 범일 본당에 소속되 어 있던 1932년의 신자수는 44명이었는데, 이때까지는 범일 본당 주임 줄리앙(Julien, 權裕良) 신부가 1년에 두 번씩 방문하여 공소 예절을 거행하였다. 그러다가 해방 후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 신자들이 구포 연동에 자리잡게 되자, 연동의 교우 김 안나의 집에서 공소 예절을 거 행하면서 교세 확장에 노력하던 중 윤신술, 이상만 등이 대구교구 서정길(徐正吉, 요한) 주교를 방문하여 건물 구입 자금을 요청하고, 심상태(베드로)의 협조로 현 구 포1동 453-1의 대지 200여 평을 매입하였다. 〔본당 설립 및 발전〕 1957년경 본당으로의 승격을 청 원하여 1958년 5월 29일 구포 본당이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공소 건물을 본당 건물로 사용하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부산교구청의 지원을 받아 구포동 417-2에 소 재한 농경지를 본당 부지로 매입하였다. 그러나 1960년 1월 초대 주임 유봉운 신부가 전임되면서 구포 본당은 약 3년 동안 김해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가 1963년 에야 본당으로 환원되었다. 이때 부임한 윤예원 신부는 무엇보다도 성당 건립 기반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교구장 최재선(崔再善, 요한) 주교에게 건의하고 각계의 지원을 받아 전 신자와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1965년 성당을 완공하였다. 1971년 5월 포항 예수 성심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였으며, 지역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방울 유치원' 을 설립하였다. 이와 함께 전교의 활성화를 위해 사상, 화명, 대동, 만덕 등에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1975년에는 사상 공소가, 1981년에는 만덕 공소가 본 당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3월 주일 학교 교실난 및 신심 단체 회합실 부족을 해소하고자 교육관 건립을 시 작하여 9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1990년 9월 화명 지역 에 새로운 성당을 건립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여 1992 년 2월 화명 본당을 분리하였다. 같은 해 6월 본당 내 교 육관에 '나눔의 집' 을 설치하여 인근의 행려자들에게 무 료로 식사를 제공해 오고 있다. (→ 부산교구) ※ 참고문헌  부산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教區三十年史》, 천주교 부산교구, 1990/ 《가톨릭 사전》 본당사 보 유편, 1990.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