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페르, 아키텐의 Prosper Aquitamus(39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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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평신도 신학자. 시인. 연대기 학자. 축일은 6월25일. [생 애] 프로스페르의 생애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진바는 많지 않다. 5세기 말경 마르세유(Marseille)에서 활동한 신학자 젠나디오(Genadius)에 따르면, 프로스페르는 390년경 갈리아 아키텐(Aquitaine)의 리모주(Limo-ges)에서 태어났으며, 일생을 평신도로 살았다고 한다. 그는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결혼을 하였고, 신학 서적들을 깊이 읽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저술들은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정확성과 명확성을 지닌 지성의 소유자임을, 특히 어려운 문제들을 단순화시켜설명하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그의 문학적 소양과 성서적 신학적 논증들은 대단하다.하지만 그의 신학 사상을 분명하게 언급하기는 불가능할것 같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354~430)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프로스페르는 조금씩 자신의 사상과 표현들을 완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426년경 마르세유와 레랭(Lérins)의 수도자들 중에는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루피노(Rufinus)에게 426년 또는 427년경 보낸 편지에서 프로스페르는 강력하게 은총의 절대적 무상성(無償性)을주장하면서 열렬히 아우구스티노를, 특히 아우구스티노의 은총에 대한 가르침을 탁월하게 상술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노를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였으며 아프리카 출신의 힐라리오(HiIlarius 통해 아우구스티노를 알게 되었으나, 그에게 있어 위대한 스승인 아우구스티노를 공격하는 이들은 불경건한 이들로 비추어졌다. 마르세유와레랭의 수도자들이 계속해서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자, 428년 말 프로스페르는 아우구스티노에게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상황을 알리면서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대해 아우구스티노는 프로스페르에게 《성도들의 예정》(De praedestinatione sanctorum ad Prosperum, 428)과 《항구함의 은사》(De dono perseverantiae ad Prosperum, 428)를 보냈는데, 이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프로스페르는 루피노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를 시구(詩句) 형태로 만들어1,002개의 육각시(六脚詩)로 구성된 《배은망덕한 자들에 대한 노래》(De ingratis carmen)를 발표하였다. 아우구스티노가 보낸 답신이 마르세유에 있던 프로스페르에게도착하였을 때 아우구스티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기에, 그의 답신이 일으켰던 반향은 고스란히 프로스페르에게 넘겨졌다. 아우구스티노에게 반대하던 이들은 지체없이 아우구스티노의 작품에 대한 그들의 의문들을 프로스페르에게 쏟아 부었고, 대표적인 반대자인 레랭의 빈첸시오(Vincentius, + 450?)는 《이론》(異論, Obiectiones)을집필하여 아우구스티노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프로스 페르는 《성도들의 예정》에 대해 열렬하게 옹호하면서,대표적인 반대자들인 레랭의 빈천시오와 2명의 제노바신부들의 주장에 대해 《제노바 사람들의 발췌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를 옹호하는 응답》(Pro Augustino responsionesad excerpta Genuensium)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의 죽음으로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더 강하게나타냈고, 프로스페르의 주장은 프로방스(Provence) 지역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래서 그는 힐라리오와 함께당시 교황인 철레스티노 1세(422~432)의 지지 및 마르세유와 레랭에서 공언되던 주장들의 단죄를 얻기 위하여로마로 갔다. 교황 철레스티노 1세가 갈리아의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논쟁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피하고침묵과 평화를 요구함으로써, 프로스페르는 로마에 간목적의 절반만 성공하고 다시 갈리아로 돌아왔다. 교황 철레스티노 1세가 죽고 다음 교황인 식스토 3세(432~440)가 등극하자, 반(半)펠라지우스주의(Semi-Pela-gianismus)에 대한 이 논쟁은 더욱 격렬하게 진전되었다.이 무렵에 아우구스티노의 반대자들이었던 가시아노(J.Cassianus, 360?~432/435)는 《회의》(會議, Conferentia)를,레랭의 빈천시오는 《층고자들》(Commonitorium)을 출판하였다. 이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을 가하면서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프로스페르의 최고의 노력이 담긴 저술들이 432 ~434년에 집필되었다. 가시아노의 주장을 반대하여 집필한 《은총과 자유 의사》(De gratiaet libero arbitrio contro Collatorem)에서는 예정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은총은 절대적으로 무상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비록 회개한 이들의 자유가 온전하게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회개는 하느님의 업적이며회개한 이들의 공로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정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 《무고자들인 갈리아 사람들의 이의를 제기하는 장(章)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를옹호하는 응답》(Pro Augustino responsiones ad capitulaobjectionum Gallorum calumniantium)에서는 일종의 진창에 빠지는 결과에 처하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표현들을 부드럽게 하여 선택된이들은 그들의 선업에 대한 고려와는 상관없이 무상으로예정되어 있는 반면, 사악한 이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예시의 결과로써만 단죄로 예정되어 있다고 선포하였다.그리고 《빈첸시오를 따르는 이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장(章)에 대해 아우구스티노를 옹호하는 응답》(Pro Augus-tino responsiones ad capitula objectionum Vincentianarum)에서는 사악한 이들에 대한 질책은 그들의 죄에 대한 예시다음에 오며, 하느님은 모든 이들이 구원되기를 원한다고 주장하였다. 435년경 가시아노의 죽음으로 갈리아에서의 이 소용돌이는 잠잠해지기 시작하였고, 이 시기 이후 프로스페르는 로마에 정착하였다. 우선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시편 상해》(Enarrationes in Psalmos, 392~416)를 참고로 하여《시편 해설》(Expositio super psalmos)을, 그리고 교황 철레스티노 1세의 편지에 첨가시킨 내용을 담은 《장》(章,capitula, 435~442)을 출간하였다. 로마에서 정신과 마음 의 평정을 회복한 그는, 자신이 맡은 교황청 비서직의 중요한 직무들 때문에 은총 문제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면서도 450년경에 아우구스티노의 열정적인가르침을 부드럽게 해석한 《모든 민족의 소명론》(Devocatione omnium gentium)을 집필하였다. 이 시기 이후프로스페르는 은총과 예정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해결책을 찾는 데 더이상 전념하지 않는다. 그의 말년의저작들은 단지 일종의 편집물들로서, 격언집인 《성 아우구스티노의 작품에 때어 낸 금언집》(Liber sententiarum exoperibus sancti Augustini delibatarum)과 이 명시선(名詩選)을 이행시(二行詩) 형태로 만든 《성 아우구스티노의 금언에서의 경구들》(Epigrammata ex sententiis sancti Augus-tini)이 있다. 또한 그가 오래전부터 편집해 왔던 인류의역사에 대한 연대기인 《연대순의 약사》(Epitoma Chro-nicorum)를 만들었는데, 이 책은 378년까지 정리한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의 《연대기》와 세상 창조부터 서기 400년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술피치오(S. Sulpicius, 360?~420/425?)의 《연대기》 및 오로시오(Orosius)의 《연대기》를 종합한 것이며, 프로스페르자신의 《연대기》에는 455년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불분명하나, 그의《연대기》가 455년까지 언급하고 있으므로 그 이후, 아마도 이탈리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여겨진다. [영향과 의의] 프로스페르의 영향력은 반펠라지우스주의를 단죄한 529년의 오랑주(Orange) 교회 회의에서발휘되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지지자였던 그는 '중세 아우구스티노주의(Augustinianismus)의 첫 대표자 로 평가되고 있다. 교황 레오 1세(440~461)가 <플라비아노에게보낸 교의 서한>(Epistola dogmatica ad Flavianum)을 작성할 때도 프로스페르의 글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아우구스티노, 히포의 ; 은총) ※ 참고문헌  G. Bardy, (DTC) 13.1, pp. 846~850/ F.X. Murphy,《NCE》 1 1, pp. 771~7721 H.R. Drobner, 하성수 역, 《교부학》, 신학 텍스트 총서 2.2, 분도출판사, 2001. 〔金炳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