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지크문트 Freud, Sigmund(1856~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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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프로필. 딸 마틸다와 함께 있는 말년의 프로이트(1938년,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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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프로필. 딸 마틸다와 함께 있는 말년의 프로이트(1938년, 런던) .


오스트리아의 의사. 신경학자. 심리학자로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사람. 그가 창시한 정신 분석(psychanalyysis)은 인간의 성격이해와 심리 치료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생 애]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 프라이베르크(Freiberg, 현 체크의 프르쉬보르)에서 태어났다.유대인으로 모직상이었던 아버지 야코프(Jakob Freud)는아말리에(Amalie Nathansohn)와 재혼하여 40세에 프로이트를 낳았다. 프로이트가 세 살 되던 1859년 유대인에대한 부정적 정서가 팽배하던 프라이베르크에서 라이프치히(Leipzig)로 이사하였고, 이듬해에 빈(Wien)으로 가서 정착하였는데, 프로이트는 여기서 일생의 대부분을보냈다. 초기 생애와 교육 : 프로이트는 어릴 때부터 법학을 전공하려고 하였다. 당시 빈의 유대인들이 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법, 의학, 사업뿐이었다. 그러나 1873년 빈대학교에 입학한 직후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심을 고취시킨 다윈(C. Darwin, 1809~1882)의 이론과 괴테(J.W. von Goethe, 1749~1832)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자연과학과 철학에 관심을 보여 이 과목들을 수강하느라 의사가 되는 데 필요한 기간보다 3년을 더 다닌 후 1881년에 의사가 되었다. 이때 그에게 영향을 준 교수는 현상학의 선구자로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브렌타노(F.Brentano, 1838~1917)였다. 또한 그가 대학을 다니면서영향을 받은 사람은 유명한 종교 비판가인 포이어바흐(L. Feuerbach, 1804~1872)였다. 프로이트는 이 세상에서갈망이 좌절된 인간이 신을 창조하게 되었고,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천국을 창안해 냈다고주장하였다. 후에 그는 자신의 사상에 포이어바흐가 준영향을 부정하였지만, 포이어바흐는 프로이트의 수많은저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준또 하나의 인물은 브뤼케(E.W. von Briicke, 1819~1892)로서, 프로이트는 그가 자기 인생에 그 어떤 사람보다 더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였다. 브뤼케는 19세기 초에 유행하던 로마 자연 철학에 대항하여 진화론적 생리학을주창하던 헬름홀츠(H. von Helmholtz, 1821~1894) 학파의대변자였다. 프로이트는 그의 밑에서 6년 동안 생리학실험실의 조수로 일하며 중추 신경 계통의 연구에 몰두하였고, 또한 후에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구축할 원리들을 배웠다. 그는 실험실 연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으나, 브뤼케의 권유로 1883년 실험실 근무를 그만두고임상 경험을 얻기 위해 빈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프로이트는 빈 병원에서 3년 동안 근무하면서 정신 의학, 피부 의학, 신경병 연구에 몰두하다 1885년 빈 대학교의 강사가 되어 병원을 떠났다. 그해 말에 그는 정부지원으로 프랑스의 신경 병리학자 샤르코(J.-M. Charcot,1825~1893) 밑에서 신경 병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갔다. 당시 샤르코는 파리의 살페트리에르 정신 병원에서 최면술을 통해 신경 장애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주로히스테리를 연구하던 그의 밑에서 일한 19주 동안의 경험은 프로이트 일생의 전환점이었다. 후에 프로이트는최면술의 효과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기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지만, 정신 장애의 원인이 정신에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정신 병리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론의 형성과 발달 : 1886년 프로이트는 빈에서 돌아온 지 몇 개월 뒤에 저명한 유대 가문 출신의 마르타베르네이즈(Martha Bernays)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그중 막내딸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895~1982)는 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뛰어난 정신 분석가로활약하였다. 프로이트는 파리에서 돌아온 후 브로이어(J.Breuer, 1842~1925)와 공동으로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를시작하였다. 브로이어는 히스테리를 치료할 때 샤르코의 최면술 대신 병리적 행동의 근저에 있는 억압된 감정을털어놓게 함으로써 히스테리 증상이 호전된다는 사실을발견하였다. 당시 그의 환자였던 '안나 O' 라고 알려진베르타 파펜하임(Bertha Pappenheim)은 부친이 사망한 뒤여러 가지 정신적 · 신체적 증상을 드러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그녀의 히스테리 증상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와 같은 브로이어의 경험은 정신 분석 역사가 시작되는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의 공동 연구의결실인 《히스테리 연구》(Studien iiber Hysterie, 1895)에서,히스테리 증세는 망각된 정신 외상과 연합된 방출되지 못한 정서 때문에 발생한다고 추론하였다. 그리고 과거의정신 외상적 경험을 의식에 떠오르게 하여 지적 · 정서적으로 통찰하게 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895~1900년에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의 토대가 될개념들을 발달시켰다.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를 발표한뒤, 정신 장애의 근원을 이루는 정신 과정을 드러내기 위해 환자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토로하게 하는 자유 연상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임상 관찰을 통해 억압과 저항의 정신 기제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억압은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위협적인 사건이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장치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환자의 말 실수, 꿈, 자유 연상을 통해 이러한 무의식적 작용을 추적하였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1899)인데, 이 책은 프로이트가 1897년부터 3년 동안자신의 꿈을 분석하여 성격 발달과 정신 병리에 대해 얻은 통찰을 담은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정신 분석학의 기법과 이론의 밑바탕이 되는 근본적인 개념들을 제시하였다.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적인 원망(wish) , 욕구, 공포가 위장되어 표현되는 것으로서 무의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꿈의 분석을 통해 유아기적 성욕과 동성의 부모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이성의 부모에게 성적 애착을 느낀다는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Oedipus complex)를 발견하였다. 1902년에 프로이트는 빈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의학계에서는 여전히 그의 이론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일상 생활의 정신 병리》(Zur Psychopathologiedes Alltagslebens, 1904)나 《성(性) 이론에 대한 세 가지기고》(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1905)를 비롯한 그 이후의 여러 저서들은 이러한 적대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특히 프로이트는 '리비도' (libido)라는 용어를 처음에는 성적 충동을, 그리고 후기 저술에서는 인간의 모든건설적 행동과 관련된 본능적인 생리적 · 심리적 힘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냈다. 그는 정신 의학적인 증상들이 리비도를 억압하거나 불충분하게 표출하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였다. 1906년경 오스트리아의 정신 의학자인 슈테켈(W. Stekel, 1868~1940)과 아들러(A. Adler, 1870~1937),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랑크(O. Rank, 1884~1939) ,스위스의 정신 의학자 융(C. Jung, 1875~1961), 미국의 정신 의학자 브릴(A. Brill) 등 많은 정신 의학자와 심리학자들이 프로이트 주위에 몰려들었다. 이러한 정신 분석운동이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1910년에는 '국제 정신분석학회' 라는 세계적인 조직이 결성되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초 기 지지자들과의 의견 불일치로 어려움을 겪었다. 프로이트로 하여금 정신 분석의 역사가 시작될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브로이어는 신경증의 성적 기원을 강조한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어 일찍이 결별하였다. 그리고 1910년대 정신 분석 운동의 초석을 이루었던 융,아들러, 슈테켈 등도 프로이트와 이론적 · 임상적 측면에서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이견 때문에 각각 독립적으로치료 학파를 형성해 나갔다. 프로이트는 초기 정신 분석학파 내에서의 분열을 겪으면서 수많은 저서와 강연을통해 자신의 관점을 다듬으며 정신 분석학의 개념을 발달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한 이후, 그는 임상적 관찰과 치료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문학,신화, 종교에 대한 해설에도 적용시켜 나갔다. 그리고1923년 턱에 암이 걸린 후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으며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후 16년 동안 문화적 · 철학적 문제에 대한 저술들을 발표하였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였을 때 유대인이었던 프로이트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영국으로 피신하였고, 다음해인 1939년7월 23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의식의 존재와 세력을 밝혀냄으로써 인간 성격의 이해에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고, 심리 치료 분야에 정신 분석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프로이트 학파는 더욱 규모가 커졌고,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심한 비판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종교관) 프로이트는 먼저 종교를 강박 신경증에 비유하였다. 왜냐하면 신경증적 의식과 종교적의식이 유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두 의식은다 같이 하나하나 세부적인 절차와 규정에 따라 빠뜨림없이 수행되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면 불안과 죄의식이수반된다는 것이다. 물론 신경증적 의식과 종교적 의식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신경증적 의식은 아무 의미 없이 반복되는 반면, 종교적 의식은 하나하나 깊은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신자들이 자신들의의식을 통해 수행하는 행동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신경증 환자와 같이 의례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임상 관찰을 통해 신경증 환자의 반복적인 의식은 성적 충동의 억압에서 비롯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신경증적 불안을 가진 환자의 의식은 발생할지도모르는 모든 예기되는 불행에 대한 보호의 수단으로 행해진다고 보았다. 종교의 형성도 본능적 충동의 억압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따라서 종교를 일종의보편적인 강박 신경증의 일환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프로이트는 종교를 사회 과정(문명)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여러 저서들을 통해 정신 분석적 이론에 근거하여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였다. <토템과 터부》(Totemund Tabu, 1913)에서는 토템 숭배를 종교의 원형으로 생각하였고, 종교란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죄의식을 경감시키려는 일종의 강박 신경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따르면 죄의식은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아들의 무의식적 인 욕망에서 발생하며, 인간이 유목 집단을 형성하여 생활할 때 강력하고 질투심이 많은 남자가 여자들을 독차지하기 위해 아들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을 죽이거나 추방하여 두목이 되었으며, 추방된 아들들은 성장한 뒤 합세하여 아버지를 살해하였으나, 아버지를 죽인 죄의식때문에 아버지의 대치물인 토템 동물을 신으로 숭배하여토템 동물의 살해를 금지하고 동족의 여자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토템 숭배란 원시부족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발생한 살부(殺父) 행위에 대한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이와 같이 프로이트는 모든 종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최초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그리스도교의 신 또한 최초의 아버지가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고, 성찬 예식 안에도 토템 식사의 양식이 존속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본래 《인간 모세, 역사적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던《모세와 일신교》(Der Mann Moses und die monotheistischeReligion, 1938)에서도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와 같은주장을 폈다. 그의 추정에 의하면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추종하던 귀족 계급 출신이었는데, 왕이 사망하자소수 민족 중의 하나이던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삼았고,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아텐 종교를 가르치고 할례를 전파하였다. 백성들은 모세의 지극히 영성화된 종교에 견디지 못하고 폭군적인 영도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를 살해하였으나, 모세가 살해된 이후 레위 민족에 의해 모세에 대한 기억과 가르침이 전승되었다. 그러다 유대 민족은 야훼를 신봉하는 새로운 종교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새 종교의 중재자는 미디언의 사제 이드로의 사위로서 모세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때 절충이 이루어졌는데, 할례 의식을 존속시키는대신 야훼를 유대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자로 만들고, 이집트의 모세는 미디언의 모세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야훼가 옛날부터 유대 민족의 신이었다는 사실을드러내기 위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전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야훼라는 유일신을 신봉하게 된 유대교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토템 숭배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환상의 미래》(Die Zukunft einer Illusion,1927)에서 개인 종교성의 원천을 과거 유아기의 무력감에서 찾았다. 유아는 무력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첫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의 배려와 보다 강력한 아버지의 보호를 통해 무력감에서 느끼는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감은 아동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도 자연, 운명, 죽음 앞에서 여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유아기 시절의 불안을 느끼고 강력한 아버지의 보호를 갈망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무력한 상태에서 보호받고자 하는 동경과 갈망이 신, 영혼 불멸, 사후의 보상과 같은 종교적 관념을 낳았다고 주장하였다. 프로이트의 종교에 대한 해설은 다른 정신 분석학자들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토템 숭배나 모세 이야 기는 문화 인류학자들과 성서학자들로부터 고대 사건을허구적으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신의 존재 입증은 심리학의 영역에 속하지않는다. 또한 정신 분석 이론을 종교 현상에 적용할 때무엇보다 해설자의 종교에 대한 기본 태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처음부터 종교에 객관적인 타당성이 없다고 추정한다면, 종교적 경험과 사상과 의식은 인간적인 욕구와 욕망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리기 쉽다. 그러나초월적인 존재를 신뢰하면, 정신 분석은 신앙을 정화시키고 심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을'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회의적인 유대인' 이라고 자처할 만큼 처음부터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시작하였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해설에 편견이 따르지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신 분석가인 피스터(0. Pfister)나 질보그(D.F. Zilboorg)의 주장과 같이, 종교 의식과 신경증 환자가 반복적인 행동을 한다고 해서 종교를 강박신경증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프로이트 종교 분석의근본적인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피스터와 같은 정신 분석가들은 종교의 가르침이나 진리는 안중에없고, 오로지 자신만의 안위와 사회적 지위 및 위로를 추구하는 기복적 또는 외재적 종교 성향을 띤 사람들의 신앙 행위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주장이 지극히 정당한비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 리비도 ; → 비관주의 ; 정신 분석 ; 포이어바흐,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 참고문헌  David M. Wulff, Psychology ofreligion, New York,John & Sons, 1997/ Ernest Jones, The life and work ofSigmmd Freud,vol. 3 : The last phase, New York, Basic Books, 1957/ James W. Jones,Contemporary psychoanalysis and religion, Yale Univ. Press, 1991/Sigmund Freud, Totem and Taboo, Standard Edition, vol. 13, 1953, pp.1~161/ -, The future ofan illusion, Standard Edition, vol. 21, 1961,Pp. 1~56/ 一,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 Standard Edition, vol.21, 1961, PP. 57~145. 〔諸錫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