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클로, 콘스탄티노플의 Proclus Constantinopolitanus(396?~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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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설교가였던 프로클로 성인.

훌륭한 설교가였던 프로클로 성인.


성인. 그리스 교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434~446). 축일은 서방 지역에서는 10월 24일, 슬라브 정교회에서는 11월 20일. 그리스 교회사가인 소크라데스(Sokrates Scholasticus,380?~450?)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는 프로클로에 대해 자세히 전해 주고 있다. "프로클로는 유년 시절부터 열심한 학생이었고, 선생들과 자주 만남을 가졌으며, 수사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아티코(Atticus, 405/406?~425) 주교의 비서로 있으며 함께생활하였다. 그가 더욱 성장하였을 때 아티코 주교는 그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주었고, 시신니오(Sisinnius) 주교는 그를 시지쿠스(Cyzicus)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주교직에 올랐다. ··프로클로는 모든 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이었고, 이단자들에대해서는 교회의 관용을 강조하였다" (VII, 41 : 《PG》 67,829c~932a).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그의 생애를 구성해 보면 다 음과 같다. 39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프로클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요한 그리소스토모(Jo-hannes Chrisostomus, 344/354?~407)의 제자였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아티코로부터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은 프로클로는 425년 아티코의 후임으로 시신니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425~427)가 되었을 때, 시신니오로부터 시지쿠스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이 도시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이미 수도자인 달마시우스(Da-matius)를 주교로 선출하였기에, 프로클로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면서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소크라테스, 《교회사》 VII, 28, 801b). 427년 시신니오가 사망하자 선출자들이 필립푸스와프로클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와 참사위원들은 428년에 안티오키아의 사제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428~431)로 선출하였다. 출중한 설교가였던 프로클로는 네스토리우스 앞에서 성모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όκος)라 부르며 찬양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이에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하느님의 어머니' 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설교를 하였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의 그리스도론적 교리와'하느님의 어머니' 라는 마리아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며 교회에 혼란을 야기시켰다(소크라테스, <교회 사》 VII, 29, 801c~804a). 프로클로는 네스토리우스에 의해 비롯된 혼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개최된 제3차 보편공의회인 에페소 공의회(431. 7. 11)에 직접 참석하지는않았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 개념이허용되도록 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가 파문된 이후, 프로클로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선출될 뻔하였지만,한 주교가 다른 자리로 옮길 수 없다는 안티오키아 지역공의회(341)의 법령 18항에 따라 그는 시지쿠스의 주교로 남게 되었다(소크라테스, 《교회사》 VII, 35~36, 817~821). 그래서 431년 10월 25일에 수도자 막시미니아노(Maximinianus)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431~434)로선출되었다. 하지만 434년 4월 12일에 막시미니아노가세상을 떠나고, 또한 이 시기에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따르는 이들이 재건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기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주교들에게 프로클로를 선출할 것을명령하였으며, 프로클로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안티오키아 지역 공의회의 법령에 따른 장애는 이미 사망한 교황 철레스티노 1세(422~432)의 권위를 빌어 해결할 수 있었다(소크라테스, 《교회사》 VII, 40, 829ab) 프로클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권위를 가빠도기아에서 일리리쿰(Illyricum)까지 넓히려고 노력하였다.또한 438년 1월 27일에는 자신의 스승인 요한 그리소스토모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는데, 유해는 도시전체의 환호를 받으며 장엄한 행렬로 사도들의 교회에옮겨져 안장되었다. 435년에 네스토리우스 반대자들이네스토리우스의 스승들처럼 간주되었던 다르소의 디오도로(Diodorus Tarsens, ?~394?)와 몹수에스티아의 주교테오도로(Theodorus Mopsuestenus, 350?~428)의 작품들을비판하였을 때, 아르메니아의 주교들은 프로클로에게 총대주교로서의 입장을 물었다. 이에 대한 답변인 프로클로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보내는 책》(Tomus ad Armeni-OS, 435)은 테오도로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프로클로는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한 그리스 교부인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yrillus Alexandrinus, 380~444)의 의견에 동조하며,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단일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삼위 중에 한 분이시며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육화하셨다" 라고 하였다. 그로 인해 6세기 초에 스키티아(Scythia, 현 러시아 남부)의 수도자들을 통해 전파된 "삼위 중에 한 분께서 고통받으셨다"(Unus de Trinitate passus est)라는 서식이, 그의 것처럼알려지기도 하였다. 프로클로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에게 자신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보내는 책》에 서명할 것과 그 내용에 인용된 몹수에스티아의 주교 테오도로의저서들을 파문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주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미 테오도로는 교회와 화해를 이룬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뒤였고, 이 논쟁에 치릴로가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안티오키아 주교들의 반대로 프로클로와 치릴로 그리고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테오도로의 신학적인 내용들을 파문하려는 계 획을 437년경 포기하였다. 프로클로는 훌륭한 설교가였다. 현재 20여 편의 설교작품이 남아 있는데, 시리아어로 번역된 것도 있고(3편),그의 친저성(親著性)이 의심되는 작품들도 있다. 그의작품들은 대부분 그리스도론적 논쟁이 되는 교의적인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대개는 반(反)네스토리우스적인 작품들이다. 프로클로는 446년 7월 12일경에 숨을거두었다. (→ 네스토리우스주의 ; 삼장서 논쟁 ; 요한그리소스토모 ; 치릴로, 알렉산드리아의) ※ 참고문헌  《CPG》 Ⅲ, pp. 5800~5915/ 《PG》 65, pp. 680~850/ G.Fritz, (DTC) 13, pp. 662~670/ M. Richard, Proclus de Constantinople etle theopaschisme, 《RHE》 38, 1942, pp. 303~331/ F.J. Leroy, ,L'Homilétique de Proclus de Constantinople, ST 247, Città delVaticano, 1967/ M. Aubineau, Bilan d'une enquete sur les homélies deProclus de Constantinople, 《REG》 85, 1972, pp. 572~596/ J. Quasten,Initiation aux Pères de I'Eglise, tome Ⅲ, Paris, Cerf, 1962. 〔裵承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