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티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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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크스부르크 청문회에서 가예타노 추기경에게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는 루터(15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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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크스부르크 청문회에서 가예타노 추기경에게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는 루터(1518년)


16세기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에 대한 투쟁과 함께 '성서만' (sola scriptura) , '신앙만' (sola fides), , '은총만' (sola gratia)이라는 종교 개혁 기본 원리에 근거하여 형성된, 신앙 · 예배 · 관습의 체제를 갖춘 그리스도인 공동체. 한국에서는 '개신교' (改新敎)라고 하며, 흔히 '기독교 (基督敎)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칭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한자로 표기한 '기리사독(基利督)을 믿는 종교 라는 말의 준말로,프로테스탄티즘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와 동방 교회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어원과 형성〕 어원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1519~1556)는 1521년 보름스 제국 의회(1. 27~5. 25)에 소환된 루터(M. Luther, 1483~1546)가 교회로부터 단죄받은 주장의 취하를 거부하자 5월 26일에 이단자에 대한 국가의 행정 조치로 루터의 법적 보장을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어 그의 저서를 소각하고 판매를 금지하였으며, 동조자들에 대한 처벌 등의 내용을 담은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프랑스와의 전쟁(제2 차 이탈리아 전쟁, 1521~1526)으로 이탈리아로 출정하면서 국내 문제에 소원해지자 '보름스 칙령' 은 즉시 시행되지 않았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1524년에 종교 개혁을 도입한 헤센의 방백(方伯) 필리프(Pilipp der Grossmiitige, 1504~1567)와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1503~1554)를 중심으로 두 차례의 동맹(1524, 1525)이 맺어져 루터파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는 제1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1526. 6. 25~8. 29)에서 동생 페르디난트(Ferdinand) 대공을 통해서 공의회 소집을 위한 교황과의 협의를 약속하고 '보름스 칙령' 의 수행을 요구하면서, 세속 군주의 교회 개혁에 대한 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황제는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해지자 개혁을 요구하는 도시 대표들에게 양보하여 "보름스 칙령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공의회나 전국 총회가 열릴 때까지 선제후들, 제후들, 제국의 의원들과 각자가 하느님과 황제 앞에서 올바르다고 확신하고 희망하는 대로 스스로 행동하고 다스려야 함을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결정한다"라는 내용(제4항)이 담긴 잠정적 합의(Recessio)에 동의하였다. 황제가 종교 문제를 영방 제후들과 시의회에 일임함으로써 황제의 재치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던 루터파 제후들은 새로운 교회 조직(영방 교회)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루터는 작센에서 《독일 미사》(Deutsche Messe, 1561)와 《예배서》(1526), 《대교리 문답》(Grosser Kathechismus, 1529), 《소교리 문답》(Kleiner Kathechismus, 1529)을 간행하였고, 멜란히톤(P. Melanchthon, 1497~1560)은 루터가 쓴 서문이 실린 《순찰자들을 위한 지침서》(Unterricht der Visitatoren, 1528)를 간행 · 실시함으로써 새 교회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안스바흐(Ansbach)의 제1차 의회는 '잠정적 합의' 를 유리하게 해석하여 목회자들에게 설교의 내용을 하느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국한하도록 지시하였고, 제2차 의회(1528. 3. 1)는 새로운 교회 조직을 구성하였다. 헤센에서 개최된 홈베르크 교회 회의(1526. 10. 20)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독립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설립하는 《헤센 교회들의 개혁》(Reformation Ecclesiarum Hessiae)을 발의하였다. 그리고 브룬스비크에서 는 1528년에 새 교회 조직을 수용하고 《브룬스비크 교회법》을 간행하였다. 이처럼 1526년부터 1529년 사이에 독일 여러 곳에서 루터파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황제는 루터파 공동체의 조직화를 황제권과 교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1529. 2. 21~4. 25) 중 3월 15일에 발표된 연설문(제7항)을 통해 잠정적 합의의 제4항을 일부 제후들이 자의(恣意)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오해와 악용 그리고 혼란의 위험이 있기에 '잠정적 합의' 를 철회한다고 선언하였다. 4월 7일에 다수파 가톨릭 의원들은 '결의문' (Resolutio)을 통해서 제4항에 대한 오해로 잘못된 교리와 교파가 형성되었으므로(제5항), 지역의 종교 개혁은 다음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막아야 한다고(제6항) 주장하였다. 그러나 4월 19일에 소수파 개혁 성향의 의원들은 황제의 제의와 다수파의 결의에 항의하는 '결의문' 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4월 25일에 작센, 헤센,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뤼네부르크(Lüneburg), 안할트(Anhalt) 등 5명의 제후들과 콘스탄츠, 하일브론, 이스니, 켐프텐, 린다우, 멤밍겐, 뇌르틀링겐, 누렘버그, 로이틀링겐, 장크트갈렌, 스트라스부르크, 울름, 바이센부르크, 빈트스하임 등 14개 자유 도시의 대표들은 호소문(Instumentum Appelationis)을 통해서 "지난 의회의 잠정적 합의는 만장일치의 투표로 채택되었고 이러한 표결은 만장일치의 투표로 개정될 수 있다"라고 항의하였다. 또한 "우리는 확실하고 순수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의 계명과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 영혼의 구원과 영생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하느님 앞에 홀로 서서 스스로 설명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행동과 결정으로 변명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루터파 문서들에서 나타난 항의(protestatio)에 따라 '프로테스탄트' 라는 용어가 나왔다. 가톨릭 교회 관점에서 볼 때 '프로테스탄트' 는 루터교뿐 아니라 스위스의 칼뱅주의자와 츠빙글리파, 프랑스의 위그노,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영국의 성공회와 급진적 재세례파 그리고 후에 등장한 다양한 교파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오늘날 이 용어는 가톨릭 관점에서 보는 '저항자'라는 부정적 의미와 함께 프로테스탄트 관점에서 보는 '표명자' 라는 적극적 의미로도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종교 개혁 시대의 프로테스탄트인들이 일차적으로 가톨릭 교회에 반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신앙을 분명하게 표명하고 성대하게 선언하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아울러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구체적으로 개신교인에게 프로테스탄트라는 단어를 적용하고, 종교 개혁 시대에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에서 중도노선을 견지하면서 가톨릭적 개혁 교회(Catholic Reformed Church)를 내세운 영국 성공회 신자들은 성공회인으로 지칭한다. 19세기 후반에 성공회 신자들은 자신들을 프로테스탄트 교회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앵글로-가톨릭 신자' (Anglo-Catholics)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형성 : 독일에서 제2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1529) 이후 황제가 가톨릭 교회와 루터파의 재일치를 위해 1530년 6월 25일에 소집한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멜란히톤이 第一 작성한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Confessio Augustana)이 낭독되었고 8월 3일에는 가톨릭측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반박' (Confutatio Confessionis Augustanae)이 제출되어 논의되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황제의 휴회가 선포되었다(1530. 11. 19) 이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고(1531. 2. 27) 슈말칼덴 전쟁(1546~1555)에서 황제가 루터파 제후들을 제압한 후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1555)에서 교파 속지권(敎派屬地權, Cujus religio, ejus religio)을 선언함으로써 독일 종교 개혁은 끝을 맺었다. 한편 덴마크는 1550년에 종교 개혁을 끝냈고 이어서 속국인 노르웨이와 아이슬랜드도 덴마크의 종교 정책을따랐다. 스웨덴은 1593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을 수용하였고 이어서 속국인 핀란드도 종교 개혁을완성하였다. 한편 스위스에서 취리히의 복음주의 종교개혁은 츠빙글리(U. Zwingli, 1484~1531)가 전사(戰死)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고 '취리히 합의' (1549)를 통해서 제네바의 칼뱅주의에 흡수되었으며, 칼뱅(J. Calvin, 1509~1564)은 1555년에 반대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종교 개혁을 완성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Hugenot)가 1559년 파리에서 전국 회의를 소집하여 <갈리아 신앙고백>(Confessio Gallicana)을 채택하고 '낭트 칙령' (Edictum Namnetense, 1598. 4.13)을 통해 신교의 자유를 획득하였으며, 칼뱅주의 종교 개혁은 네덜란드(1618)와 스코틀랜드(1561)에서도 완성되었다. 동부 유럽에서도 프로이센 공국(1525)와 폴란드(1561)는 루터 종교 개혁을 완성하였고 헝가리(1550)는 칼뱅 종교 개혁을 따랐다. 영국은 1571년에 '엘리자베스 정착' 이 이루어짐으로써 종교 개혁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완성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17세기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종교 개혁가들의 '정통 프로테스탄티즘 또는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 를 차단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고유한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종교 개혁 과정에서 작성된 신조들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가 내세우는 전승에 대응하고 재세례파와 같은 프로테스탄트의 급진 좌파들이 주창하는 내적 체험에 맞서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보장하는 신학을 정립하였다. 루터교는 공통 신경인 '사도 신경' , '니체아 신경' , '콘스탄티노플신경' 과 루터의 《대교리 문답》과 《소교리 문답》,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변론서》(Apologie, 1531), 《슈말칼덴 조항》(Schmalkaldische Artikel, 1537), 《협화 신조》(Konkordienformel, 1577)에 교리의 뿌리를 두고 있고, 영국 성공회는 《공도서》公禱書, Book of Common Prayer, 1559)와 <39개항 신조>(1571)를 신학의 기준으로 삼았다. 개혁 교회와 장로 교회는 국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칼뱅의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orum)의 가르침을 공동으로 고수하면서 <갈리아 신앙 고백>(1550), <벨기에 신앙 고백>(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1563), <두 번째 스위스 신조>(1566), <도르트 신조>(1691),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1648) 등의 신앙 고백 문헌을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감리교는 영국 성공회의 <39개항 신조>를 축소한 <25개항 종교 강령>을 갖고 있고, 침례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일부 수정하여 수용하였다. 〔특 징〕 1529년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프로테스탄티즘은 두 가지 외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다양화 : 프로테스탄티즘은 종교 개혁 시대부터 항상 분열과 파생의 과정을 겪었고 프로테스탄티즘 생활을 특징짓는 공통된 교리의 총체적인 틀과 관행의 확고한 규범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성공회를 포함하여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와 같은 주류 프로테스탄티즘과 여기서 파생된 구세군, 하나님의 교회, 성결교, 오순절 교회, 하나님의 성회 등의 지류 프로테스탄티즘, 정통 프로테스탄티즘이 이단으로 규정한 여호와의 증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르몬교, 세계 평화 통일 가정 연합(통일교)을 포함하여 거의 25만 개의 교파들(denominations)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 프로테스탄티즘 교단은 영국 성공회(Anglican Communion, 1867), 세계 개혁교회 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1875), 침례교 세계 연맹(World Baptist Alliance, 1905) , 루터교 세계 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 1947), 세계 감리교 협의회(World Methodist Council, 1951) 등의 국제적인 단체를 창설하고 교단 사이의 상호 방문과 신학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 안에서 일어나는 공동체의 분열은 하나의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이는 결별의 이유가 아니라 개혁의 동기에서 발생하였다고 한다. 또한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역사적 과정 속에서 다양성과 단일성을 둘 다 인정하는 균형 감각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反)교황주의 : 프로테스탄티즘의 공통점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계 제도에 대한 배척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반교황주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1518년의 대사 논쟁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공의회 우위설을 제시하였고 1520년에 발표한 <독일 국가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고함>을 통해서 속권보다 우월한 영적 권력인 교황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교황의 성서 해석권과 공의회 소집권을 배척하였다. 이러한 교황권 배척에서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체성이 발견된다. 종교 개혁가들 특히 루터는 《슈말칼덴 조항》에서 교황을 성서(1요한 2, 18. 22 : 4, 3 ; 2요한 7)에서 세상 종말에 등장하여 교회를 해칠 사탄으로 예언되는 반그리스도(antichistus)로 묘사하여, 이후 일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도 교황을 반그리스도로 지칭하면서 적대감을 표시해 왔다. 종교 개혁가들은 교황이 하느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할 수 있는 역할을 남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1958~1963)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프로테스탄트 단체들에 친근감을 드러내는 교황들이 계속 선출되자,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적대감은 긍정적 관심과 애정의 표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오늘날도 종교 개혁 시대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단을 초월한 공동 유대는 교황권 인정 거부에 있다. 〔기본 공통 원리〕 성서만 : 종교 개혁가들은 교황권을 배척하는 대신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 교회와 다른 프로테스탄티즘 성서관의 첫째 특징인 '성서만' (sola Scriptura)은, 프로테스탄티즘 신앙과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규범이다. 이 점에서 성서과 함께 전승(傳承, traditio)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톨릭 교회와 구별된다. 둘째 특징은 루터가 1534년에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어로 씌여진 정경들만 번역 · 출간하고 그 외의부분은 성서와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용한 책들로 지칭하여 구약성서 끝부분에 분리 · 첨부한 이후,프로테스탄티즘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포함한 66권만을 정경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제2 경전을 외경으로 여기며 성령의 감도를 받은 정경보다 하급의 성서로 취급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셋째 특징은 개인의 성서 해석권이다. 루터는 성서 해석권을 교회만이 보유하는 것을 교회개혁으로 분쇄해야 할 장벽의 하나로 보았다. 따라서 성서를 이해하고 내용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성서 해석권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성서 해석권은 공동체적 해석으로 발전하여 종교 개혁 시대에는 급진적인 재세례파를 등장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18세기에 계몽주의가 널리 퍼지고 정치적 자유가 발전하자, 공동체와 상관없는 성서 해석의 자유는 프로테스탄트를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다. 가톨릭 관점에서 볼 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유리한 성서 해석으로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독자 노선을 선택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이러한 자유의 증가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교파가 분열되는 새로운 양극 현상을 초래하였다. 좌익 편에서는 계몽주의 사상과 개인의 판단에 무게를 두는 근대주의 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 지도적 사상가들과 운동가들은 신앙을 근대주의에 접목하는 것을 장려하고 합리주의와 과학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우익 편에서는 최근에 일기 시작한 과격 근본주의 운동, 온건 복음주의 운동, 오순절 운동이 활동하고 있다. 이 운동들은 대부분 성서 어느 부분에도 오류가 없으며 그들만이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앙만 : '성서만' 이라는 원리는 이신청의(以信稱義) 칭의이신(稱義以信), 신앙의인(信仰義認)이라는 의화(義化) 교리를 동반한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처음에는 죄인을 벌하는 하느님의 능동적 정의("하느님의 의로움이 복음 안에 나타납니다")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tia invincibilis)을 느끼는 죄인으로서 마음의 평화를 잃었다가 묵상을 거듭하면서 이른바 '탑실 체험' 을 통해 하느님의 수동적 정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라야 살리라")를 깨달았다. 여기서 루터는 "믿음으로"를 성서적 의미와 독일어 표현으로 적합하다고 여긴 '믿음만으로' 로 번역하여 '신앙만(sola Fides)에 의한 의화' 라는 교리를 정립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의화 신앙은 역사적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고, 하느님 약속에 대한 신뢰이며 신앙인의 그리스도와의 일치였다. 이는 종교 개혁의 발전에 근본적 공헌을 하였다. 아울러 루터는 "신앙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다" 라는 명제로 의로움과 죄의 공존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신앙인 안에 죄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의로움을 통해서 점차 자신을 변화시키고 앞으로 죄를 몰아낼 것이라고 가르쳤다. 루터의 제자인 멜란히톤은 이러한 가르침을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신앙 안의 의화에 대한 가르침에서 '법정적 의화론' 으로 내세웠다. 그는 의화를 지칭하는 '의인 선언' 一칭의(稱義), 의인(義認), 인의(認義) -과 의화 과정인 '성화' (聖化) 또는 '재생' (再生)을 구분하였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의화와 성화는 둘 다 같은 동일한 것으로 다만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그러나 멜란히톤에 따르면, 하느님이 천상 법정에서(foro divino) 죄인이 의인이 되었다는 판결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후에 대부분의 종교 개혁자들이 수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가톨릭 교회는 아우구스티노 이후 언제나 의화 선언과 의화 과정을 하나의 동시적 결과로 이해하였다. 더 나아가 프로테스탄즘과 가톨릭 교회의 죄인의 의화 방법에 대한 차이점은 의화의 개념에 대한 차이점을 수반하였다. 여기서 칼뱅은 신앙을 그리스도와 신앙인의 '신비적 일치' 로 보고 이는 두 가지 결과, 즉 이중적 은총을 갖고 온다고 하였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의인으로 선언되는 의화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과정인 재생은 둘 다 '신앙인의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결과' 라고 주장하였다. 은총만 : '신앙만' 에는 '은총만' (sola Gratia)의 원리가 동반한다. 루터는 하느님이 원죄로 인한 죄인인 인간의의화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베푸시기 때문에 인간은 받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의화에 있어서 하느님은 능동적이고 인간은 수동적이다. 여기서 좀 더 명백한 의화 즉 '신앙을 통해 받은 은총에 의한 의화론' 이 나온다. '죄인의 의화는 하느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는 신앙을 통해서 받는다.' 그래서 하느님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시고 신앙도 인간의 행위보다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이 스스로 의화에 필요한 전제 조건을 성취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하느님의 의화는 인간이 의화에 필요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이 전제 조건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만' 은 인간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에 의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만이 인간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에 칼뱅은 루터의 의화 교리를 존중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의화보다는 예정설에 연관시켰다. 하느님의 은총은 죄인을 의롭게 하셨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공로와 선행에 상관없이 인간을 무조건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종교 개혁가들도 선행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선행은 신앙의 열매로 현세 생활 속에서 인간의 정화와 사회에 대한 임무로 필요하지만, 인간의 의화와 구원에는 관계가 없다. '은총만' 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펠라지오적 구원관에 따른 은총과 공로에 관한 교리와 실천에 대한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가톨릭 사상에 따르면 의화는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하느님이 인간을 죄인의 상태에서 의인의 상태로 건너가도록 변화시키는 행위이며, 의화는 성사 은총으로 얻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인간의 공로와 선행으로 보완되어야 이루어진다. 〔주요 공통 교리와 전례〕 보편적 사제직 :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라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보편적 사제직은 루터의 반교황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지닌 교황 중심의 교계적 사제직(성직 사제직)을 배척하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엄격한 구분을 교회 개혁 수행에서 분쇄해야 할 장벽으로 보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보편적 사제직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에서 설교를 하거나 서로 죄 고백을 들을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지녔음을 뜻하는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죄 고백을 듣는 것이 성직자에게만 독점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사제직은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그리스도가 되는 의미를 지닌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간(가톨릭 경우, 사제)의 중재 없이 하느님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고, 사제는 일반 신자들과 영적인 차이점들은 갖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세례를 통해서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고, 여기에는 상하 관계가 없이 오직 직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교역자는 가톨릭 성직자처럼 평신도와 구별되는 성사적 인호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목자로서 양 떼인 신자들에게 봉사하는 직무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은 성서에 대한 전문 지식을 지니고 안수를 받은 교역자가 공동 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성례(성사)를 집행함으로써 평신도의 보편적 사제직 참여는 제한되었다. 1982년에 세계 교회 협의회(WCC) 산하 '신앙 직제위원회' 가 50년 동안 여러 교단들과 논의하여 작성한 <리마 문서>(Lima Document, 1982)는 교회의 직무 부분에서 보편적 사제직과 특수(성직) 사제직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다. 용어 해설에 있어서 교역(minister)은 하느님 백성에게 요구되는 봉사를 뜻하고, 안수를 통해 성직에 임명된 교역자(ordained minister)는 교회가 공동체를 건설하고 공동체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성령이 베푸는 은사를 받고 봉사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사제(priest)는 성직에 임명된 특정한 교역자를 뜻하고 있다. "성직에 서품된 교역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교회 사제직에 모두 관련된다. 그러나 그들은 타당하게 사제라고 불릴 만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중재 기도를 통하여, 공동체에 대한 사목적 지도를 통하여 신자들의 예언적(보편적) 사제직을 세우고 견고하게 함으로써 특정한 사제직 봉사를 수행하고 있다"(17항). 이러한 교역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공동체 대표들보다 우위에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하느님의 대변자들로서 화해의 복음을 선포한다(11항). 성례(성사) 교리 :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에서 칠성사를 거부하고 세례, 참회(고해), 성찬(성체)은성사적 표징을 내포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 세 가지 성사들은 그리스도가 설정한 것으로 신약성서가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가톨릭 교회의 은총 부여수단인 성사에 관한 교리를 배척하고, 성사를 신앙을 일으키는 하느님 계시의 외적 표현이며 인간 의화의 수단이라고 새로이 정의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은 성서에 명백하게 인증된 성사로 세례와 성찬을 제시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은총이 부여되는 수단은 성서, 설교, 사목 상담, 성사와 같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하느님 말씀뿐이며, 성사는 가시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인간이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 16, 16)라는 말씀에 대한 신앙을 지닐 때에 세례는 의인의 성취로 완결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은 속죄(고해)를 배척하거나 세례에 포함시켰고 세례의 회상이나 재확인으로 보았다. 아울러 종교 개혁가들은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몇가지 합의점을 지니고 있다. 즉 그것은 미사를 대신한 '주님 만찬' , '성(만)찬' , '예배' 등의 용어 채택과 미사의 제사성과 성변화의 거부, 그리고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 허용이다. 하지만 <리마 문서>는 가톨릭 신학을 반영한 세례 교리를 제시하였다. 세례는 하나의 표징으로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거행되는 외적 전례 행위를 요구한다. 세례는 그리스도가 파스카 신비에서 이룩한 새 삶의 표징이며(3항) 이러한 삶을 향유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믿음이다(5항). 세례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써 세례가 의미하고 효력을 내는 선물은 죄를 씻어내고 극복하며 용서하고 회심하게 하고 의화시킴으로써(4항)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6항) 성령에 의해 윤리적으로 성화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마침내 구원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상속을 받게 된다(7항). 그리고 유아 세례와 성인 세례의 쟁점에 있어서는, 세례 예정자는 혼자의 노력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배워야 하지만 유아는 자라난 후에 자신의 세례를 개인적 신앙으로 확증해야 한다면서 유아 세례도 인정하였다(11항). 아울러 세례는 반복될 수 없는 행위로 개종자에 대한 재(조건)세례를 삼가하고(13항) 교회들의 세례 상호 승인을 제시하였다. <리마 문서>는 성찬례(Eucharistia)를 '주님 만찬' , '빵 나눔' , '거룩한 친교 , '예배', '미사' 로 표현하면서 용어의 다양화를 인정하고 있다(1항). 그리고 그리스도의 최후 만찬에 근거하여 말씀과 성사를 내포한 전례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거행한 최후 만찬은 상징적 언어와 행위를 사용하는 하나의 전례적 식사인 동시에 성사적 식사로 가시적 표징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느님 사랑 즉 그리스도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베푼 사랑을 그리스도인에게 전수하는 것이다(1항).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이며 그리스도 현존의 성사로서(13항) 빵과 포도주의 전례적 식사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생명의 빵으로 내어준 그리스도가 직접 현존하는 표징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고(10항)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결과를 갖고 온다. 또한 성찬은 하느님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을 베푸는 성사이다(14항).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안에서의 통교를 통해서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된다. 아울러 성찬은 교회 예배의 중심 행사로서 성찬례를 자주, 적어도 주일마다 거행하는것이 바람직하다(30~31항). 말씀의 선포 : 교회 교역자의 주요 직능은 말씀의 봉독이다. 봉독을 통해서 신자들은 성령에 순응하여 이끄심에 귀를 기울여 하느님 말씀을 깨닫게 된다. 복음 선포는 교역자가 전통적으로 말씀을 통해서, 즉 설교를 듣는 신자들의 마음에 맞는 성서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그리고 교역자가 신자들에게 신앙 활동과 성사(성례)의 집전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루터와 칼뱅을 포함한 대부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교계적 교회를 반대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 성사가 올바르게 집전되는 곳을 교회로 정의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이 세운 조직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대한 충실성과 하느님 말씀의 제시 방법에 의해 인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와 스웨덴의 루터교는 전통적 주교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칼뱅의 교회 구조를 따라 지역과 전국 차원의 교회 회의(synod)를 구성하고 있다. <리마 문서>는 전통적인 교회 구조인 주교(감독), 신부(장로), 부제(집사)의 직무를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교회 일치를 실현하는 도구로 평가하고 있다(22항). 이러한 삼품 성직 제도는 넓은 의미에서 교회의 전승 범위에 속하여 감독의 역사적 계승은 사도 전승의 자아 표현의 유일한 방법이며, 이는 사도 신앙과 친교를 상징하고 보증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다(36항). 따라서 감독이 있는 교회는 감독 제도를 계승하지 못한 교회들도 사도적 신앙과 예배 그리고 선교에 있어서의 연속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다른 교회들도 감독 제도를 갖춘 교회의 감독 계승을 교회의 사도 전승 보유와 일치의 표징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37항)고 하였다. 전례(예배) : 종교 개혁 시대인들은 교의적 개혁보다는 실천적 개혁에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종교 개혁가들은'성서만' 과 의인론의 원칙에 따라 말씀 선포 중심의 전례 개혁을 도입하였다. 이 개혁은 루터의 보편적 사제직 교리에 대한 이해로 완성되었다. 보편적 사제직 교리는 누구든지 공동 예배를 집전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교역자는 특별한 직무를 위임받은 평신도였다. 따라서 이러한 직무 개념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례가 단순화되었다. 단순화된 예식서들로 루터의 《독일 미사》(1526)와 《예배서》(1526), 츠빙글리의 《주님 만찬 예식》(1525), 칼뱅의 《제네바 전례서》(1542), 영국 성공회의《공도서》(1549, 1552), 녹스(John Knox, 1513?~1572)의 《공동 예배서》(1556)가 간행되었다. 아울러 가톨릭 교회는 전례 용어로 라틴어 사용을 지속하였지만, 프로테스탄트 전례서는 모국어로 간행 · 사용되었다. 특히 미사전례 개혁이 뚜렷해져 말씀 전례가 성찬 전례보다 중요시되었고 봉헌 예절 폐지와 함께 성찬 전례는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 말씀으로 축소되었으며, 모든 참석자에게 양형 영성체가 시행되었다. 주님 만찬 예배는 모국어 찬송가가 도입되어 대중화되었다. 대부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주일 예배는 설교, 찬송가, 성찬 예절로 형태를 갖추었다. <리마 문서>는 성찬 부분에서 용어나 순서가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받는 '성찬례' 를예배의 본보기로 제시하였다(27항) 양식은 성찬의 제정과 의미에 나타난 교리에 근거하여 중요한 요소들을 선정, 순서에 따라 나열하였다. 시작 전례에서 찬미의 노래, 참회의 행위, 용서의 선언이 있고, 말씀 전례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성서 봉독과 설교), 신앙 고백(사도 신경), 교회와 세계를 위한 전구(중재 기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성찬 전례에는 빵과 포도주의 준비, 창조 · 구속 · 성화의 신비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성부)께 대한 감사, 신약성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 말씀, 교회를 존재하게 해 준 그리스도의 구속 · 수난 · 죽음 · 부활 · 승천 · 성령 강림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기억, 공동체와 빵과 포도주 위에 성령이 임하기를 바라는 기원(축성 기도), 하느님께 대한 신자들의 자기 봉헌, 성인 통공에 대한 언급, 주님의 재림과 왕국 실현을 위한 기도, 공동체의 아멘 응답, 주님의 기도, 화해와 평화의 표시, 빵 나눔, 그리스도와 교회 구성원 각자와의 친교 안에서 먹고 마심, 마지막 찬양 노래, 축복(축도)과 파견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가톨릭 교회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태도〕 용어의 변화 :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인 재일치 문제에 대해 유의하고 있음이 교회 문헌들에 나타난다. 이 문헌들은 교회 재일치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특별한 상황에 대한 문제에서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 시대에 검사성성(현 신앙교리성)이 발표한 교령 <모든 영국주교들에게 보내는 편지>(Epistola ad omnes Angliaeepiscopos, 1864. 9. 16)는 1857년 9월 8일에 설립된 '그리스도교 세계 일치 촉진 협회'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the Unity of Christendom, A.P.U.C.)에 가톨릭 교회인의 가입을 단죄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인(영국 성공회인)들을 이단자들(haeretici)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묘사는 검사성성 공보(1865. 11. 8) <퓨지파라는 영국 성공회인들에게>(Ad quosdam Puseitas Anglicos)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나, 종교 개혁 시대 이후 프로테스탄트인들을 이단자로 표현하던 단어 사용은 이 문헌들이 마지막이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 시대부터 이단자라는 용어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대신 '갈라진 이들'(Separati)이 나타났다. 다만 옛 교회법(1325조 2항)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하는 어떤 것을 완강히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신자들을 '이단자들' 로 규정하였고, 새 교회법(751조)은 사람 대신에행위를 이단(haeresis)이라고 지칭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은 여러 항목에서 프로테스탄 교회인들을 '갈라진 형제들' (fratres sejuncti) 또는 '우리에게서 갈라진 형제들'(fratres a nobis sejuncti)로 묘사하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는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 1995. 5. 25)에서 '갈라진 형제들' 이란 표현 대신 다른 그리스도인들' , '세례받은 다른 이들' , '다른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더 나아서 '우리 형제 자매들' ,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 라는 친근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친교의 대화 : 용어의 변화 외에 친교로서의 교회론 등장과 함께 프로테스탄티즘은 '교회' (ecclesiae) 와 교회적 단체' (communitates ecclesiales)로 지칭되었다(일치 19항). 이 교회들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 (<하나되게 하소서> 11항) 또는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한 교회' (<교회 일치 운동의 원칙과 규범의 적용에 관한 지침서> 5항)로 일컬어지고 있다. 친교의 교회로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 안에 가톨릭 교회와 공유하는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을 <교회 헌장>(Lumen Gentium)은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15항). 즉 신앙과 생활 규범으로서의 성서에 대한 존중, 진실한 종교적 열정,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세례성사의 인호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결합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서로 다른 정도로 존재함으로써 그 공동체들과 가톨릭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친교의 객관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하나되게 하소서> 11항).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성품성사의 결여로 성찬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성체성사)를 보존하지 못하고 있어"(일치 22항) 완전한 친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교 세계의 교회 일치운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분적 친교(불완전한 친교)를 완전한 친교로 자라나게 하는"(<하나되게 하소서> 4항)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세례성사는 "세례를 통하여 새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묶어 주는 일치의 성사적 끈이 된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는 오로지 시작이며 출발일 뿐이다. 세례는····선의 친교를 나누는 완전한 참여로 지향하고 있다" (일치 22항). 따라서 세례성사는 친교의 시작이며 성체성사는 친교의 완성이다. 오늘날 프로테스탄티즘은 사도 신경,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칼체돈 신경, 아타나시오 신경과 같은 신경들을 사용하며 차이점을 지니고 있지만, 성서에 근거한 교리로 성서론,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창조론, 인간론, 죄론, 구원론, 성화론, 교회론, 종말론과 같은 교의와 윤리 체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은 가톨릭 교회와 교리와 영성 생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점을 지니고 있어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교회, 성서, 교회(서품) 직무에 대한 교리적 · 역사적 차이점들을 가깝게는 극복하고 멀게는 일치하기 위해서 주류 프로테스탄티즘의 국제적 단체들 그리고 지류 프로테스탄티즘인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 오순절 교회, 메논 교회, 복음주의 교회와 대화를 진행해 오고 있으며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하나되게 하소서> 69항). 주목할 만한 성과는 1999년 10월 31일에 '루터교-로마 가톨릭 합동위원회' 에서 작성한 <의화론에 관한 합동선언>의 발표이다. 이 선언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 공통 원리인 '신앙만' 과 '은총만' 에 관련된 의화 교리에 대해 의견 일치의 접근을 보았다. 합동 선언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모두 의화가 삼위 일체 하느님의 역사(役事)라고 확신한다. 하느님 아버지(성부)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 아드님(성자)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의화의 토대와 전제는 그리스도의 육화와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그래서 육화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의로움(righteousness)이 되심을 뜻하며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이 의로움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함께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의 어떠한 공로(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오로지 은총에 의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져 성령을 받는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한편 우리가 선행을 하도록 부르시고 갖추게 하신다"(15항). 그러나 루터교에서 강조하는 교리와 실천의 기준(criterion)으로서의 의화' 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인 인간' 그리고 가톨릭 교회가 강조하는 '인간의 공로(선행)와 하느님의 은총과의 협력'과 같은 문제들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남아 있다. 〔교회 일치 운동〕 세계 선교 협의회 :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에서 개최된 세계 선교 협의회(World Missionary Confrerence)는 교회의 공식적 모임이 아니라 선교 단체들의 집회였다. 이는 감리교 신자인 모트(John Ralph Mott, 1865~1955)와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가 조직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선교 단체의 대표 1,200여 명이 회원으로 참가하였다. 이 집회는 복음 전파, 선교사의 양성, 선교 정책의 수립, 교회 일치에 대한 촉진과 공동 협력을 토의하였다. 현대교회 일치 운동의 효시인 에든버러 집회에서 프로테스탄트의교회 일치 운동이 세 방면, 즉 선교 방면으로는 국제 선교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활동 방면으로는 생활 실천 운동(Life and Work Movement) 그리고 교리 방면으로는 신앙 직제 운동(Faith and Order Movement)이 전개되어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의 창설이란 결실을 가져 왔다. 국제 선교 협의회 : 이 협의회는 1921년 10월에 미국에서 창설되었으며 본부는 제네바에 있다. 선교 대상은 독일, 유대교, 이슬람 세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이며, 그 임무는 선교 문제 연구와 조사 촉진, 견해 일치, 국제 및 민족 문제에 있어서 정의 구현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단합, 사회적 복음 선교였다. 사회 및 경제 문제, 선교 연구위원회 구성,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접촉, 사회성을 지닌 복음 설교, 교회 사이의 문제점, 계시 문제, 교회의 경제 문제, 선교 지방의 자립 문제, 선교와 교회에 대한 연구를 토의하였다. 국제 선교 협의회는 1961년 세계 교회 협의회에 가입하였다. 생활 실천 운동 : '실천적 그리스도교 (Practical Christianity)라고 불리던 생활 실천 운동은 신학 문제보다는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증거하는 데에 관심을 두었다. 창설자인 스웨덴의 루터교 감독 죄더블롬(Nathan Söderblom, 1866~1931)은 읍살라 국제 회의(1917)를 소집하여 그리스도인 일치에 관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와 교파의 차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役事) 안에서 내적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 이 회의는 신조가 다르다 하여도 신앙인의 일치는 존재한다고 보았다. 두 차례의 총회(1925, 1937)를 소집하여 교리에는 차이가 있어도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참석자들은 교회 단체의 대표가 아니며 협상 모임이기보다는 각 교회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생활 실천 운동의 첫 목표가 교회 일치를 위한 운동은 아니었으나 교회 일치에 공헌하였다. 신앙 직제 운동 : 1910년에 영국 성공회의 주교 브렌트(Charles Henry Brent, 1862~1929)가 미국 오하이오 신시내티 영국 성공회 성직자 총회에서 신앙과 직제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하여 신앙 직제 운동을 위한 합동 위원회가 구성되어,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신앙 직제 운동은 신앙 교리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사변적 그리스도교 (Theoretical Christianity)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두 차례 총회(1927, 1937)를 개최하여 일치에 대한 소명, 은총, 하느님 말씀, 교회의 본질과 직 무, 성사와 같은 신학 문제들을 토의하였고, 교파들의 견해가 제시된 후 차이점과 공통점을 비교 · 연구하는 비교방법론이 채택되었다. 신앙 직제 운동은 교파 사이의 차이점과 일치점에 대해 솔직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세계 교회 협의회 : 교회의 보조를 받는 생활 실천 운동과 신앙 직제 운동을 별도로 운영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이론과 실천은 상호 협조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기에 세계 교회 협의회가 창설되었다. 1937년 7월 5개의 프로테스탄트 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비공식 '35인 위원회' 에서 신앙 직제 운동과 생활 실천 운동의 대표들은 세계적인 교회 협의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두 운동이 하나의 교회 단체에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서로 이해 관계를 도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설립될 조직은 가입 교회에 대한 구속력이 없고, 각 교회의 동의 없이는 어떤 활동도 요구하지 않으며, 두 운동의 고유한 활동을 지속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공동 연구와 공동 협력이 용이하게 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 안에서 교회 일치 운동이 촉진될 수 있었다. 생활 실천 운동과 신앙 직제 운동은 '35인 위원회' 의 결정을 승인하고 양측 7명의 대표로 구성된 '14인 위원회' 의 자문위원회가 헌장을 작성하였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제1차 총회가 소집된 것을 시작으로, 세계 교회 협의회는 7년마다 여러 교파의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총회를 소집하며, 중앙 위원회가 운영을 하고 집행 위원회가 중앙 위원회의 결정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이 국제적 교회 조직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구세주로 믿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리며 서로 하나가 되어 공동으로 사명을 완수하는 친목 단체이며, 교회 일치를 도모하고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여 토론하고 서로 이해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협력 단체이다. 세계 교회 협의회의 조직은 총회, 중앙 위원회, 실행 위원회와 함께 사무국 밑에 제1 사업부(신앙과 복음 증거), 제2 사업부(정의와 봉사), 제3 사업부(교육과 혁신)가 구성되었고, 그 밖에 관리부, 홍보부, 도서관, 교회 일치 연구소(연수원)가 있다. 그리고 최고 의결 기관인 총회는 다음과 . 같이 8차례 소집되었다. 즉, 제1차 암스테르담(1948), 제2차 에버스톤(1954), 제3차 뉴델리(1961), 제4차 웁살라(1968), 제5차 나이로비(1975), 제6차 밴쿠버(1984), 제7차 캔버러(1991), 제8차 하라레(1998) 등이다. (→ 개신교 ; → 감리교 ; 교회 일치 운동 ; 구세군 ; 그리스도교 ; 근본주의 ; 루터 ; 루터교 ; <리마 문서> ; 모르몬교 ; 성결교 ; 세계 교회 협의회 ; 세계평화 통일 가정 연합 ; 아우크스부르크 강화 조약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 여호와의 증인 ; 영국 성공회 ; 오순절 교회 ; 위그노파 ; 의인관 ; 장로교 ; 재세례파 ; 종교 개혁 ; 츠빙글리 ; 침례교 ; 카를 5세 ; 칼뱅 ; <하나되게 하소서>) ※ 참고문헌  B.J. Kidd ed., Documents of Illustrative of the Continental Reformation, rep. Oxford, At the Clarendon Press, 1967/ Jaroslav Pelikan ed., The Christian Tradiiton. A History of the Devleopment of Doctrine 4 : Reformation of Church and Dogma,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Bernard M.G. Reardon, Religious Thought in the Reformation, London . New York, Longman Group Limited, 1981/ Emile G. Leonard, A History of Protestantism 1 : The Reformation, trans. by Joyce M.H. Reid from Histoire generale du protestantisme, London, Thomas Nelson and Sons Ltd, 1965/ Emile G. Leonard, A History of Protestantism 2 : The Establishment, trans. by R.M. Bethell from Histoire generale du protestantisme, London, Thomas Nelson and Sons Ltd, 1967/ John Dillenberger . Claude Welch, Protestant Christianity. Interpretedthrough its Development, New York, Chrles Scribner's Sons, 1954/ Louis Bouyer, The Spirit and Forms of Protestantism. London, Harvill Press, 1956/ Rober McAfee Brown, The Spirit of Protestant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1/ George Forell, The Protestant Faith,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60/ Martin E. Marty, Protestantism, New York, Holt, Rinchart, and Winston, 1972/ Ruth Rouse . Stephen Charles Neil eds., A History of the EcumenicalMovement. 1517~1948, vol. 1, 3rd ed., 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6/ Peter Meinhold, Protestantism : Church Constitutuions, (SM) 3, pp. 120~122/ Wenzel Lohff, Protestantism : Confession of Faith, 3, pp. 122~125/ Jeffrey Gros, The New Dictionay of Theology, pp. 811~815/ Martin E. Marty, Encyclopedia of Catholicism, pp. 1059~1062/ 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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