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실리아누스 (340?~385)

Priscillia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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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Avila)의 주교. 스페인에서 이단인 신비주의적인 금욕주의 운동 프리실리아누스주의(Priscilianus)를 일으킨 장본인. 국가에 의해 최초로 화형된 이단자.
[생 애] 프리실리아누스는 340년경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 근처의 신분 높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법에 몰두하였던 그의 정신적 스승은, 스페인의 귀부인 아가페(Agape)와 연설가인 헬피디우스(Helpidius)였다. 이 두 사람은 "이집트 출신으로 멤피스에서 태어난" (술피치오, 《연대기》 II, 46, 3) 마르쿠스(Marcus)의 제자였다. 예로니모(Hieronymus, 347~419)는 마르쿠스를 2세기의 그노시스주의자 마르쿠스와 혼동하였고(서한 75, 3), 오소노바(Ossonoba)의 주교 이타치오(Ithacius)는 "마법 전문가와 마니교(Manichaeismus)의 제자" 로 여겼다(예로니모, <명인록> 15). 그러나 오늘날에는 마르쿠스를 오리제네스주의자이거나 메살리아파(Messaliani, Euchitae) 사상을 따르는 이집트 수도자 또는 그노시스주의자(Gnosticismus)로 보는 경향이 있다.
프리실리아누스는 교양이 있고 연설과 토론에 매우 능하였으며, 아마도 나이가 들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듯하다. 그는 깊은 종교적 열성을 지녔으며, 당시 동방의 수도원에서 영향을 받아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였다. 또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성서에 언급된 요구들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완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부모, 자식, 소유물, 명예를 단념하고 다른 어떤 것보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구절들을 실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선택받은 이들의 자의식에 바탕을 둔 세례 서약 때의 절대적 충성을 촉구하였고, 기도, 정욕의 억제, 내적 투쟁, 세상과 교회에서 벗어난 비밀 집회에서 성서와 외경 연구에 몰두하는 삶을 촉구하였다. 성서 연구는 그들에게 악마를 인식하게 하고 사탄의 세력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고 생각하였으며, 세상의 악을 철저히 멀리하려 애썼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세 단계를 거쳐 다시 새로워진다. 즉 세속적인 것을 멀리함, 악을 멀리함(동시에 신적인 것과 덕을 가까이함), 신적인 것과의 일치 등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플라톤주의에도 나오며, '정화의 길' , '조명의 길' , '신비적 일치' 에 관한 중세 신비주의자 또는 영성가들의 가르침에도 다시 나타난다. 이와 함께 그는 모든 사람이 육체와 어둠의 세상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프리실리아누스가 일으킨 급진적인 금욕 운동은 즉시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스페인 남 · 서부 전역과 갈리아 남부에서 많은 사람이 그를 추종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주교인 인스탄티우스(Instantius)와 살비아누스(Salvia- nus)를 이어 아스토르가(Astorga)의 심포시우스(Symphosius)와 코르도바의 주교 히지누스(Hyginus), 그리고 수 많은 부인들이 세상을 완전히 부정하는 그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렇지만 메리다(Merida)의 주교 히다치우스 (Hydacius)와 오소노바의 주교 이타치우스가 이 운동을 고발하였고, 380년 10월에 스페인 주교 10명과 남부 갈 리아 주교 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사라고사(Zaragoza) 교회 회의는 프리실리아누스와 관련된 단죄를 표명하거나 일부 주장들을 매우 신중하게 비난하였다. 하지만 사순 시기 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는 종파주의적 전례 행위, 이 운동에 성직자들과 여인들이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교의 직무 개혁, 동정녀들에게 머리 수건을 수여하는 것, 박사 또는 교사로 자처하는 평신도들의 월권 행위 등을 금지하였다.
그의 금욕적 이원론의 엄격함은 그노시스주의적 · 인간학적 이원론에 상응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혼처럼 신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육체는 악마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죄에 대한 형벌로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렇기에 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영혼은 육체의 감옥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프리실리아누스의 이원론이 고대 후기에 널리 유포된 인간학에 배경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악마, 별자리의 영향, 결혼과 출산 그리고 출생에 대한 비난 등은 이 이원론과 연결되어있다. 이 주장들은 프리실리아누스가 죽은 뒤 그를 추종한 사람들의 증언에 처음 나타난다. 프리실리아누스의 가르침이 지닌 이러한 특징들은 그노시스주의와 연관된 마니교의 영향으로 소급할 수 있다. 그러나 마니교는 국가를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여겨져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 때부터 박해를 받아 왔기에, 마니교도라는 인상을 준 프리실리아누스는 국가 권력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주교단 일부가 격렬한 반대하였으나,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프리실리아누스는 381년에 인스탄티우스 주교와 살비아누스 주교에 의해 아빌라의 주교로 선출되었고, 자신의 가르침을 아퀴타니아(Aquitania)에 유포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를 이단자로 고발하고, 특히 오소노바의 주교 이타치우스는 프리실리아누스가 별을 숭배하는 가짜 주교이며 악마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는 마니교도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프리실리아누스와 인스탄티우스, 살비아누스는 그라티아누스 황제(375~383)가 개정한 마니교도 칙령에 의해 추방되었다. 프리실리아누스와 2명의 주교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3명의 부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정통성을 인정받고 교회의 도움을 얻기 위해, 혹은 적어도 국가법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 로마로 갔다. 하지만 교황 다마소 1세(366~384)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행하였던 살비아누스가 로마에서 죽자 그들은 밀라노로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를 찾아갔지만, 그 역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암브로시오를 질투하는 이교도 공직자의 도움으로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허락을 받아 프리실리아누스는 주교좌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고싶어 하는 황제 막시무스(Magnus Maximus, 383~388)가 그를 반대하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383년에 그를 법정으로 소환하였다. 이로써 교회의 사건이 정치적 영역으로 옮겨졌다.
384년에 프리실리아누스는 보르도(Bordeaux) 교회 회의(384~385)에서 단죄받고 황제에게 항소하였으나, 트리어(Trier)에서 열린 황실 법정에서 고문에 못 이겨 마법에 몰두하였으며 여인들과 야간 집회를 가졌고, 벌거벗은 채 기도하는 풍습 등에 대해서 거짓 자백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트리어에 있던 투르의 마르티노(Martinus Tourenus, 316?~397)는 재판을 교회 법원으로 되돌리고 사형을 막고자 애썼지만, 프리실리아누스와 그의 추종자 6명 그리고 여인 1명이 386년 트리어에서 처형되었다. 이 처형은 다분히 황제 막시무스의 정치적 산물인 동시에 이타치우스를 비롯한 이들의 박해의 산물, 주교들이 이단자 소송을 세속 권력의 힘을 통해 해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영향과 평가] 프리실리아누스의 처형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거의 일치하였다. 마르티노, 암브로시오, 교황 시 리치오(384~399)는 이러한 조처에 격렬히 항의하였고, 사형 선고의 배후에 있는 주교들과 일치하기를 거부하였 다. 막시무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프리실리아누스의 죽음에 관련된 이들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388년 그가 황제직에서 물러난 뒤 사람들은 프리실리아누스 박해에 앞장선 주교들에게 책임을 물어, 이타치우스 는 곧바로 면직되었고 히다치우스는 자발적으로 주교직에서 물러났다. 389년에 이교인 송가 작가 드레파니우스 (L.P. Drepanius)는, 프리실리아누스가 매우 경건하고 열렬히 하느님을 공경하였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죄를 뒤 집어씌워 박해했다고 전하였다.
프리실리아누스의 주장에 담긴 급진적 과격성은 처음부터 동조와 거부가 뒤따랐다. 이타치우스의 호교론으로 그는 수백 년 동안 비방받았다. 392년, 즉 트리어에서 처형된 지 7년 뒤에, 예로니모는 프리실리아누스를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 393)에 수록, 121장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오늘날까지 프리실리아누스는 이레네 오가 기술한 바실리데스와 마르쿠스의 그노시스주의의 이단이라고 일부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스페인 출신의 동료들로부터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한 예로니모는 서간 133에서는 프리실리아누스가 그노시스주의자이고 마니교의 추종자였다고 비난하였다. 402년에 술피치오(S. Sulpicius, 360?~420/425?)는 《연대기》(Chronica, II, 46 이하)에서 프리실리아누스의 이단적 견해를 비난하면서, 아울러 프리실리아누스의 주장을 옳다고 여긴 주교들의 타락에 대한 비난으로 글을 끝맺었다. 414년 스페인 사람인 오로시우스(Orosius)로부터 정보를 얻은 아우구스티노(Augustius Hipponensis, 354~430)는 영혼의 기원에 관한 프리실리아누스의 주장을 비난하였다. 428년 또는 429년에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인들이 프리실리아누스주의파에 가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388년 찬탈자 막시무스 황제의 몰락과 함께 프리실리아누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 하여, 스페인의 북서 지방에서 200년 동안 존속하였다. 400년과 447년의 톨레도 교회 회의는 프리실리아누스 의 주장 중 일부를 단죄하였으나,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395~423)는 407~408년에 이것을 무효화하였다. 그러나 561년 제1차 브라가(Braga) 교회 회의는 유죄 판결을 재확인하면서 프리실리아누스주의의 17개 주 장을 단죄하였고, 이후 조직화된 프리실리아누스주의자들은 사라졌다. 일부 문서는 '그노시스주의자와 프리실 리아누스파들' 또는 '마니와 프리실리아누스' 를 논박한다. 따라서 프리실리아누스주의의 특징은 일종의 이단적 혼합주의로 집중되었다.
1885년, 프리실리아누스가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는 11개의 논문이 발견됨으로써 그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프리실리아누스의 그노시스주의와 마니교 경향, 이원론, 창조 · 우주 · 악마 · 성서와 외경에 관 한 문제, 여러 형태의 금욕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서로 다르다. 한편에서는 프리실리아누스의 정당함을 인정하 고 개혁의 선구자로 옹호하면서 그가 부당하게 이단 혐의를 받고 단죄되었다고 평가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유
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가 처음부터 이단적 사상을 지녔다고 결론을 내린다. (⇦ 프리실 리아누스주의 ; → 마르티노, 투르의 ; 스페인 ; 이단 ; 톨레도 교회 회의)
※ 참고문헌  H.C. Brennecke, 《LThK》 8, 1999, pp. 599~601/ E. Dassmann, Kirchengschichte Ⅱ-I, Stuttgart · Berlin . Köln, 1996/ J. Fontaine, (TRE) 27, 1997, pp. 449~4541 A. Franzen, Priscillianismus, 《LThK》8 1963, pp. 769~771/J. Martin, (LThK) 8, 1963, pp. 768~769/ J.N. Hillgarth, 《NCE》 11, 2003, pp. 719~722. [河聖秀]